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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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재독서의 영예. ˝어떤 책들은 무슨 이유로 그런 영예를 얻게 됩니까?˝ 이사야 벌린은 말한다. ˝독자를 매혹하는 능력이지요. 계속 찾게 되는 책들은 그 지적 사고 혹은 아름다움 때문에 경외하게 됩니다. 재독서의 본질상 언제나 모순을 경험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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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세크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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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째 읽은 발자크의 작품. 점점 인간희극이라는 퍼즐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고리오 영감>의 후일담으로서도, 또 곱세크라는 구두쇠와 철학자, 왜소함과 위대함이라는 양극단적인 성격을 함께 가진 인물을 창조해냈다는 의미에서도 흥미로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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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담 미친 아담 3부작 3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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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1, 2편 만큼의 긴장도를 유지하지는 못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전작들에서 이미 대재앙으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들은 보여준 셈이고, 이제 남은 것은 극소수의 인류, 크레이커들, 그리고 돼지구리, 늑개, 너구컹크와 같은 변종생물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 그렇듯이 비전을 그리는 작업은 자칫하면 진부해지기 쉽다..

 

또 하나의 질문.. 왜 작가는 삼부작의 마지막 권의 주인공을 젭, 즉 '미친 아담'으로 설정한 것일까.. 왜 그의 탄생과 성장과정의 기나긴 이야기를 했어야 했을까.. 살아남은 인간공동체가 젭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모습은, -심지어 2권에서 그토록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토비마저도 젭에 대한 사랑, 질투 때문에 흔들리는- 왠지 역시 가부장적 질서의 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절실하게 희망을 떠올리지만, 막상 그 단어를 입에 담는 순간 진부해져버리는 경험은 아마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글쓰기'라는 것을 매개로 한 토비와 어린 크레이커 소년과의 교감.. 그리고 공동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와 크레이커, 그리고 돼지구리라는 이종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합의, 그리고 생각지 못한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엮어내는 작가의 상상력에는 여전히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미친아담 삼부작 정주행을 마쳤지만.. 여전히 코로나 19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우울하고 나른한 봄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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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의 해 미친 아담 3부작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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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의 마지막날..

2월 초만 하더라도 조기 종식될 것처럼 보였던 신종 코로나(코로나 19)가 한 교단(?)의 수상쩍은 전도에 의해 대구/경북을 진원지로 하여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지 10여일이 흘렀다.. 이미 코로나 확진자수는 현 시점에서(2020.02.29. 오전 10시 37분) 2,931명, 사망자 수도 16명에 이르렀고, 아마 오늘을 넘기면 숫자는 3천명을 훌쩍 넘길 것 같다.. 문제는 이제 몇몇 확진자들의 동선만으로 전염을 막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에 도달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는 점이다.. 미국의 한 신용평가사가 예측한 것처럼, (그들이 신봉하는 수학적 계산에 따른다면, 그리고 그건 불행히도 대부분 다 들어맞지만) 신종 코로나 확진자 수는 아마 2만을 넘을 것이고, 이제 사태는 중국, 한국, 일본, 이탈리아 등 몇 개의 국가만이 아닌 전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는 점이다.. 징조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19의 '판데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번 사태가 과연 자연발생적인 것인지, 아니면 (잠깐 유행했던 괴담처럼) 중국 우한의 한 연구소의 실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밝혀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니, 원인 규명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어떤 집단의 의도적인 생화학 테러는 아닌 것 같으니까.. 코로나 19의 낮은 치사율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제 얼마든지 이런 바이러스균을 퍼뜨리는 것에 의해 한 국가가, 아니 전세계가 파국의 상황에 치달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악마적인 유혹에서 인류사회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우리의 과학기술은 놀랍게도, 아니 안타깝게도 이미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충분한 성취를 이루어내지 않았는가.. <인류멸종계획>, <인간종말마라톤>은 가시적인 것이 되었다..

 

2월 28일 하루 꼬박 <홍수의 해>를 읽었다..

전작 <오릭스와 크레이그>를 읽은지 2개월 만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책 한 권을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집중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됐지만.. 어제는 날도 음산하고 비도 내렸고.. 또 몸상태도 안 좋아서.. 일찌감치 다른 작업들을 포기하고 점심을 먹고 바로 책을 꺼내들었다..

 

<오릭스와 크레이그>의 무대가 최첨단 바이오기술을 관리하는 기업체 단지의 세계였다면, <홍수의 해>의 무대는 전작에서 얼핏얼핏 보였던 단지 바깥의 평민촌 세계다. 이미 전작이 구축한 세계를 서로 다른 두 명의 여성의 시점에서 재서사화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전작의 세계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텍스트이다.. 더구나 소설의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저자는 전작의 주인공들인 글렌과 지미의 동선을 토비, 렌의 동선과 연결시키면서 독자들의 흥미를 배가시키는 친절도 베풀어준다..  

하지만 전작의 지미, 즉 스노우맨의 무기력함에 비한다면, 홍수 이후 살아남은 주인공 여성들이 끊임없이 현 상황을 개척해내고, 또 이를 통해 성장해나간다는 점에서, 마치 예전에 보았던 <델마와 루이스>를 연상시키는 페미니즘적 로드 무비같다는 느낌도 들었고.. 또 파국의 시대에서 <여성성>의 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저자의 입장도 강하게 드러난다.. 하긴, 두 작품에서 '젭', 즉 '미친 아담'이라는 다소 수상한 인물을 제외하면 호감을 주는 남성형은 찾아보기 어렵기도 하고.. 실제로 파국적 상황에서 남성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람보나 슈퍼맨을 소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굳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이 쪽이 훨씬 개연성이 높은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어쨌거나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저자는 치명적 바이러스의 전염(홍수)으로 인한 인간사회의 파국, 인간의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너구컹크, 돼지구리, 사자양, 늑개와 같은 새로운 치명적인 종들의 출현,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유포자이자 인류종말계획의 입안자이기도 한 한 미친 과학자가 만들어낸 새로운 인류, 즉 섹스경쟁이나 탐욕이 없고 동물성 단백질 없이 광합성을 통해 살아갈 수 있는 종족인 한 무리의 크레이커들-이들을 인류라는 종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속에,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간들을 집어넣고,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우리 인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물음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종종 언급되듯, SF소설이 아니라 사변소설이라고 주장하듯이, 저자는 판데믹 시대에 '이야기꾼'이라는, 이제 그 기능을 상실해버린 듯이 보였던 고전적인 직업군에 속하는 이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혹은 해야 하는가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 그렇다면 3부작의 마지막 권인 <미친 아담>에서 그녀는 2권에서 멈춰버린 그 종말론적 세상에 다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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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분단 - 아시아를 방법으로 박현채를 다시 읽다
연광석 지음 / 나름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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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80년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회고적으로 재현되는 신화적 시공간과, 바로 그 때의 주역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풍경 사이의 기묘한 대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하다는 것이야말로, 실로 반지성주의의 극치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사상사적 전통이라는 것이 부재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른 어떤 공간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철저히 유린당한 대학, 혹은 아카데미라는 공간에서 이러한 물음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전향성명서 하나 없이 이루어진 '집단 전향'에 대한 논의의 장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는 터부시되어 온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90년대 세대인 이 저자가 박현채라는 유령을 소환하여 던지는 물음은 꽤 묵직한 것이다..

 

물론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 많은 무리수가 있고, 또 비약들도 많이 발견되지만..

또 결론부는 역시 많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저 80년대를 신화로 남기고 싶어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 속에서..

당신들이 뜨거웠다고 이야기하는 그 언어는 무엇이었고..

그 언어는 과연 그 시대를 이해하는 유의미한 언어였는지..

그리고 그 언어는 이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되었는지..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는 저자의 문제제기는 투박하지만, 진정한 울림이 있다..

지지와 격려의 납함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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