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군 - 최초로 공개된 지리산 빨치산 수기, 개정판
이태 지음 / 두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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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서모임 텍스트인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나서.. 내친 김에 이태의 <남부군>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소장하고 있는 <남부군> 역시 2권이다.. 오른쪽은 재편집증보개정판 3쇄(2106년), 그리고 왼쪽의 낡은 책은 1988년 7월 20일 2판.. 어린 시절 광주 시내(충장로)의 한 극장에서, 단지 최진실 주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화를 보고.. 뭔가 허전해서 당시만 해도 광주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던 삼복서점에 가서 구입한 책(그러고보니 예전에는 책을 사면 이렇게 포장을 해주곤 했었는데)..1988년 7월 11일에 초판 발행인데, 9일만에 2판이 발행되었다. 지금의 출판시장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속도다.. 어떤 독특한 시대적 상황, 금기에 대한 갈증이 만들어낸 회오리였을 것이다.. 

물론 어린 마음에 그래도 책을 사긴 했는데.. 이후 <하권>을 사지 않은 걸 보면, 읽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책에는 최진실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래도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가족여행으로 갔던 지리산 자락이.. 그리고 구례 출신인 옆집 친구의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가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정말 옛날옛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국전쟁의 기원 2>에서 48년 4월의 제주, 그리고 같은 해 10월의 여순봉기의 사건사적 의미를 정리하면서 커밍스는 <남한 좌익의 묘비명>이라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당대의 한국에서 그 사건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만, 이미 수많은 봉기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효율성을 정비해나간 남한의 폭력적 국가기구, 그리고 압도적인 물량 지원으로 이들을 후원하는 미군에 의해 철저히 진압되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49년의 <유격대 투쟁>도 예외는 아니다. 대중적 기반은 있었지만,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3년에 걸친 좌익활동은 실패했다.. 


여순반란은 1주 남짓 지속된 격렬한 폭풍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 규모와 중요성에서 여순반란은 1946년 가을 봉기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일으킨 즉흥적이고 대단히 멍정한 반란으로, 전라남도의 강력한 좌익 기반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을 뿐이다. 실제로 투옥된 한 남로당원은 그 반란은 "성급했다"고 당국에 말했다. 이 말은 당이 대비하지 못했고 따라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남로당 활동가들은 반란에 가담했다. 그것은 그 봉기가 "인민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고 인민은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당은 다음 기회에는 인민을 지도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에는 진실이 담겨 있으며 증거와 합치한다. 이것은 남한 좌익의 묘비명이었다. 대중적 기반은 있었지만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활동가들은 반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것을 혁명이라 불렀다. 여수의 역사적 중요성은 3년에 걸친 좌익 활동이 실패의 막을 내렸다는 그 반란적 특징에 있다. 


냉철하면서도 따스한 커밍스의 분석의 정확성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역사가가 아닌 나는 딴지를 걸고 싶었다.. 그래서 책의 여백에 조그만 글씨로 이렇게 썼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이미 사건이 끝나버린 이후의 시점일 수밖에 없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보기엔 엉뚱한, 그리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봉기에 참여했던 당대 인민들의 <마음>을, 그리고 그 봉기가 성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봉기에 가담했던 당대 활동가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커밍스 역시 이 지점을 명확히 짚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정작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물론 커밍스에게 이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시체들로 뒤덮인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제일 테니까.."


물론 여백에 쓴 이 문장은 그 과제를 스스로 떠맡지 않는 한 하나의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나는 빠져나간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묵직한 울림은, 수십년에 걸쳐 그 험난한 길을 다른 방식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작가의 태도에 대한 공감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루쉰이라면 "쩡짜"라고 했을 그 단호함.. 


하지만 내친 김에 읽고자 시도한 작가의 첫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은 역시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비하면 조금 버겁다.. 부모님의 빨치산 시절의 삶에 대한 소설적 형상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픽션의 언어로 그려진 이들의 모습은 실제 현실의 땅바닥에서 조금 떠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 괴리는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작가의 필력의 한계일 수도 있고.. 아니, 문학적 상상력이 빈약한 나의 탓으로 온전히 돌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직 역사적으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시대를 픽션의 언어로 쓰는 것의 <곤란함>의 한 반영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남부군>을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대장 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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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폐허 우리시대 질문총서 15
리사 요네야마 지음, 김려실 옮김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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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소리소문 없이, 그리고 뒤늦게 번역 출간된 것이 아닐까.. 10여년 전 유행했던 포스트전후의 기억정치, 태평양횡단적 문화비평의 한 전범을 보여주는 텍스트. 물론 유행이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의식이 소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감사의 글>도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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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네지릭
기 드보르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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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는 사람에게..

직독직해는 금물이지만..

스펙터클의 시대는 어떤 사유의 번개가 떨어지는 자리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을까..



아침에 마시는 술이 있다. 아침은 꽤 오랫동안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대부분 바로 러시아산 보드카가 당겼다. 식사 중에 마시는 술이 있는가 하면 점심과 저녁 식사 사이 오후에 마시는 술이 있다. 밤에는 와인과 증류주가 있고, 그 다음에 마시는 맥주가 또 매력적이다. 그 때 마시는 맥주는 갈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밤 끝자락에, 날이 다시 밝아올 즈음에 마시는 술도 있다. 이렇게 술을 마셔대느라 정작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그게 딱 적당했다. 글쓰기란 흔치 않은 행위로 남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는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오랜 음주로 인해 마침내 불면증에서부터 통풍, 현기증까지 이런저런 병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아픈 곳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알코올중독자의 손떨림처럼 아름다운"이라고 로트레아몽은 말했다. 감동적이지만 힘겨운 아침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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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에세이
폴 벤느 지음, 김현경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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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

우리는 어떤 힘이 피동적인 물체를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식으로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므로 우리는 이해가능성과 우연성을 혼합하는 절충적 해결책을 택한다. 작은 자갈 하나가 이 움직이는 물체를 멈춰 세우거나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수정된) 어떤 원인 대신에, 모서리의 수가 정해지지 않은(사건의 회고적인 불빛 아래서만 모서리를 셀 수 있는) 다면체와 탄력성을 가정해보자. 발생한 사건은 그 자체로 능동적이다. 그것은 원인들 사이에 자유롭게 남겨진 공간을 기체처럼 점유하며, 또한 원인들을 (내버려두기보다는) 점유한다. 역사의 에너지는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별 이유 없이 소비된다. 예견의 가능성은 각각의 다면체의 상황적인 구성에 달려 있으며, 언제나 제한적이다. 모서리의 수가 무한하고 (또는 불확정적이고) 어느 모서리도 다른 것보다 결정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이 모서리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연성과 이해가능성의 이원적 대립-전자를 인정하면서 후자를 수정하는-은 사라진다. 또는 다른 의미에서의 우연성-클레오파트라의 코로 대표되는 우연성보다 더 풍요로운-이 그것을 대체한다. 이는 역사의 일차적 원동력(생산관계, 정치, 권력의지)에 대한 부정이자, 원동력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다. 아니면 장애물(다면체의 모서리들)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작은 원인들이 이해 가능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다면체는 도식이 아니므로, 이해 가능성은 사라진다. 혁명을 설명하는, 혹은 문학이나 요리의 영역에서 사회적 선호를 설명하는 초역사적인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예측불가능한 발명과 얼마간 비슷하다. 사건 자체를 분명하게 서술하는 것이 작은 원인들을 나열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우며, 아무튼 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든 게 역사이고, 혁명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다면체들이 존재한다면, 과연 인간과학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과학은 그리스 신화에 관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93) 


2. 상징적 장의 발칸화

단순히 신화만이 아닌, 우리 시대의 가짜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 하지만 신화와 가짜뉴스를 동렬에 놓을 수 있을까.. 가짜뉴스는 신화가 간직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가.. 가짜뉴스의 범람과 이를 믿어버리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이런 고급한 틀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사상들의 정치는 흔히 무의식적이고 내재적이다. 예를 들어 공격이나 방어를 위해 어떤 외래의도그마와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 도그마를 조금쯤은 믿게 된다. 왜냐하마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말에 부합하도록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게 된다. 켄타우로스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 기대었을 때 갈레노스는 냉소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만큼, 관대하고 고상한 장광설의 늪에 빠졌을 것이고 자신이 그 전에 켄타우로스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을 것이다. 흔들리는 믿음의 존재양식, 지적인 혼돈의 시대를 특징짓는 이 양립불가능한 진실들을 동시에 믿는 능력은 이런 순간에 태어난다. 상징적 장의 발칸화Balkanization가 개인의 마음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 혼돈 상태는 분파들 간의 동맹정책에 반영된다. 


3. 무엇을 알 수 있는 지 아는 것. 지식의 사회적 분배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책에 독학자들이 언제나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것은 자기들과 같은 독학자가 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이 책을 이해했으므로 자기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속자"란, 비밀스러운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이 해냈던 것처럼 자기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숨겨진 지식이 있다면 부모님도 그것에 도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들이 안다는 것을 아는 일, 혹은 역으로, 더 이상 알아야 할 게 없다는 것을, 자신이 소유한 작은 지식의 영역을 넘어선 곳에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들만이 탐색할 수 있는 위험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은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들이 있다고 믿는다면, 연구와 창작은 마비되고 만다. 우리는 혼자서는 감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4. 여러 진실들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적 성찰은 하나의 비판으로서 지식의 자만심을 꺾으며, 진정한 정치나 진정한 학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은 채 여러 개의 진실에 대해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비판은 모순적인가? 진실이 없다는 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리스인들에게 물려받은 거짓말쟁이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식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거짓말쟁이인 게 아니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특수하게 거짓말쟁이가 된다. "나는 항상 공상을 늘어놓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하면서 공상을 늘어놓는게 아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면 말이다. "나의 공상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만물의 본질에 새겨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지금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것이 곧 진실이라면, 보편적인 문화는 허위일 것이고, 또 그렇다면 어째서 허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여 진실을 아는 배타적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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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체크포인트 찰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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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읽기..

동일한 소재를 다루지만.. 감독과 연구자의 시선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구나 워낙 훌륭한 감독이니까.. 

여전히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 끌린다.. 그리고 종종 이야기한다.. 그건 어떤 궁지/아포리아에서 다시 결의를 다지는.. 마음을 다잡는 순간 나오는 말이기에.. 그건 어떤 시대정신이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은.. 하지만 지금은 희미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이 시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고레에다 역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은 '그러나'라는 말을 자기 안에서 읽어간다. 그리고 그 말을 '하지만...'이라는 변명의 말로 바꾸며 살아간다. 야마노우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쉰세 살의 자신을 열다섯 살의 자신으로 심판한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돌려줘"라는 야마노우치의 외침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가. '하지만'이라는 시대를 향한 것이었을까. 

현실주의의 시대 속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야마노우치 안에서 사라지고, 

시대에서 또 하나

'그러나'라는 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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