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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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 카페에서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해서, 그냥 앉은 채로 마지막까지 읽어버렸다. 후반부의 서사가 다소 과도한 건 맞지만, 2020년대에 이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도 풍요로운 사치가 아닐까 싶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 고다 아야의 <나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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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정치 - 증오의 정치에 관하여
아쉴 음벰베 지음, 김은주 외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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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정치에 대한 푸코의 1975년 강의(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여러모로 계시적이다. 생명정치에서 죽음정치로.. 하지만 그는 너머의 세계로 가버렸고, 그의 유지는 또 다른 대작들로 이어졌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과 음벰베의 바로 이 책. 파농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는 소름 끼치는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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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음모 채석장 시리즈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임재철 옮김, 이리에 데츠로 해설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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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의 채석장 시리즈는 생각날 때마다 한 권, 두 권 모아두고 있는 시리즈이긴 한데..

이 시리즈에 하스미의 책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문장이 갖는 매력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비평가답게.. 어떤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가히 동물적인 천재성을 느끼게 하는 문체.. 기본적으로 만연체인데.. 이런 생동감을 주는 문체를 갖는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하스미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는 독법보다는.. 가끔씩 생각날 때 한 페이지를 펼쳐보는 독법이 더 인상적이라는 생각도..


물론..

1. 18-9세기 프랑스 정치사/혁명사를 잘 알고 있다면 이해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2.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에 대한 한 편의 오마주적 성격의 텍스트이기도 한 만큼.. 이 책을 이미 읽었다면 훨씬 떠오르는 생각들도 많을 것이다..

3.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흥미로운 비평인 <역사와 반복>을 미리 읽어두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반복>은 실제로 이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니까.. 

4. 무엇보다 이미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인 <범용함>에 대한 하스미의 가장 주요한 저작인(박사학위논문은 어쨌거나 한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는 속설을 그냥 믿어버린다면),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도 이미 번역출간되었다. 

5. ...

6. ...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풋노트들이 가능하겠지만..

그 풋노트들을 쓰는 것이 하스미가 이 글을 출간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생각들은 아니었을 것이고..

<깊이에의 강요>는 역시 아카데미에 한발을 걸친 먹물들의 아비투스니까..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그냥.. 가끔씩 생각날 때 한 페이지를 펼쳐보는 것이 하스미의 격을 훨씬 높이는 독법이 될 것 같다..


"고아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자기 아버지의 입회에서 분리된 에크리튀르"라는 그 "본질적인 표류상태"에서 문자를 정의할 때, 그는 마치 '사생아' 드 모르니의 존재를 기술하는 듯하다. 시뮬라르크가 실제 그러했듯이, 1851년이라는 연호는 '사생아'가 그 '표류성'으로 인해 승리하는 시대의 도래를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요컨대 <슈플뢰리 씨, 오늘 밤 집에 있습니다>가 1851년 쿠데타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쿠데타 쪽이 그 줄거리를 충실히 모방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태의 역전이야말로, 여기서의 '반복'의 실태인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것이어야 할 권력 탈취를 비심각화함으로써 실현되는 정치성의 냉소적이고 낙천적인 승리에 다름 아니며, 먼저 '비극'으로서 연기된 것이 나중에 '소극'으로 재연된다는 헤겔적인 역사관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사태의 도래를 마르크스는 놓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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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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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제국의 위안부> 소동을 떠올리게 되었다. 소송은 과연 옳았을까. 저자라면 고개를 저었을 듯. 여론에 휘둘리다 결국 법에 무책임하게 맡겨버렸다는 점에서 학문적 장의 불구성과 반지성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 학술적 가치가 낮은 책을 ‘순교자‘로 만든 안타까운.. 사유의 회복이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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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 평전 - 정통을 걸어간 이단
미조구치 유조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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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더위가 꺾이지 않는 한여름 오후. 미조구치의 유조의 <이탁오 평전>을 읽다. 분명 예전에 읽은기억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로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논고를 쓰다가, 메이지 조슈 번의 반역의 정신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책이었다. 제목은 <이탁오 평전>이지만, 실제로 이 책의 전반부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분명 과거에 책을 읽었다는 뜻인데, 왜 이렇게 새로운 것일까-. 막부 말기, 쇼인은 자신이 신뢰했던 제자들이 충의(忠義)’가 아닌 공적을 쌓는 데만 급급한 것에 실망, 연이어 절교를 선언하면서, 고독 속에서 이탁오의 글들을 읽어나가며,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지인들에게 200년 전 이탁오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부합한다고 쓰며, 그의 글을 읽어볼 것을 권했던 쇼인이 남긴 글들을 다시 읽으며, 쇼인에 의탁하여 이탁오의 사상의 핵심에 근접해 들어가고자 하는 저자의 방법론은 그 성공 여부를 떠나 분명 독특한 것이다. 미조구치 정도의 대가니까 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하면 너무 쉽게 정리해버리는 것일 테고, 사실, 그래서 결코 친절한 설명방식은 아니고, 또 그 집필 의도를 달성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아쉬운 대목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유학의 전통을 가진, 하지만 그 계승의 방식은 상이한 동아시아의 두 사회-중국과 일본-의 이단적 사상가들이 걸어간 궤적을 비교한다는 문제의식만큼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정통을 걸어간 이단/정도를 걷는 이단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집약한 부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게 된 계기는, (맺음말에 잠깐 쓰고 있는 것처럼) 하기()의 쇼인 신사를 방문했을 때의 위화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동아시아 기억-전쟁을 재점화시킨 계기이기도 했던 메이지일본의 근대산업혁명유산(‘사도광산은 그 연장선상의 전투이지만)의 자산군 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것이 하기의 손카손주쿠(松下村塾), 즉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인 다카스기 신사쿠, 가쓰라 고고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등을 키워낸 요시다 쇼인의 서당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제철소, 조선소, 탄광과는 결이 조금 많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손카손주쿠를 포함한 하기 전체는, 얼마 전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베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해서, 한 번 방문해보면 정말 이곳저곳 돈을 쳐바른 흔적들이 역력하다. 물론 미조구치 선생님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전에 하기를 방문하셨겠지만, 국가주의자들의 비호를 받는 위풍당당한 쇼인신사를 보며, 어떤 위화감을 느끼신 듯하다. 그래서 거기서 조금 더 안쪽의 인기척이 전혀 없는 숲으로 들어가서 찾은 쇼인의 묘지가 자아내는 청초함에 놀라워하며 문득 쇼인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고 쓰고 있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쇼인에게서 발견해내고 있는 광기우둔함’, 혹은 어떤 회심(回心)’이 속류 국수주의나 국가주의로 회수될 수 없는 쇼인의 정신의 진수(esprit)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쇼인이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 ()’이라는 글자는 <논어>에서 말하는 광견(狂狷)’이다. ‘은 자신을 지키고 고수하는 것이 견고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 은 주위를 거부하고, 주위 사람들과 다투더라도 자신의 길을 고집스레 돌진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 여기는 것을 자신은 어디까지나 정상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앞서서 행한다는 뜻도 있다.

()’는 사리에 어긋나다는 뜻이며, 도에 어긋나고 도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세상이 신봉하는 어떤 규칙이나 습관을 파괴하는 것도 라고 한다. ‘()’는 지혜가 무디고, 우둔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도 라고 한다. ‘()’은 우직(愚直)하다, 고지식하다는 뜻으로 사고의 폭이 몹시 좁고 정직하여 기가 움직일 여유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광패(狂悖)’ ‘우당(愚戇)’ 등의 표현을 써서 자신을 조롱하는 글에서 쇼인은 몰래 이탁오로부터 자신과 같은 부분을 찾아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가 서하책을 추진할 때는 거기에 몰두하여 전체 국면의 승패를 걸었다. 그때 그는 그러한 책략의 성패를 전체 국면의 성패로 간주했다. 그래서 거기서 죽음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결국 쇼인이 죽음이라는 글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이룸으로써 시점 자체도 바뀐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어둠 가운데서 한 점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었던 협소한 시야가 와이드스크린처럼 넓어졌다. 쇼인은 거기서 유구한 미래를 관망했는지도 모른다. 고립된 가운데 사건 하나하나에 희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강인한 신념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서 느긋하게 관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신념의 확대가 이 시기의 그에게서 느껴진다.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의 대전환이 죽음이라는 글자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탁오의 글에 나타난 ()’ ‘()’ ‘()’ ‘()’과 같은 한자의 의미를 풀이해가며, 이탁오의 어리석음과 직관적으로 일체화해가는 쇼인의 감정을 정리해나가는 대목, 그리고 비정상적일 만큼 정직하고 성실하게 추구하며, 또 주위로부터 이단시되고 소외되면서도 그 고독을 감내하면서까지, 거짓을 끊고 순수하게 참다운, 즉 비타협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쇼인의 태도에서 막부 말기 정통을 걸어간 이단의 모습을 찾아내는 대목은 과연 탁월하다. 물론 마지막 회심에 대한 기술은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만, 그건 요시다 쇼인을 악마화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내 몸 속에 깃든 어떤 '생리적 거부감정도로 정리해두자.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논고도 어찌 보면 정한론의 주창자(동아시아 침략의 화신)나 보수 우익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혹은 쇠퇴해가는 지역경제 부흥을 주도하는(지역소멸이 가속화되는 일본 사회에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관광대사의 이미지에 가려진 반역의 정신이 갖는 의미를 재사유해보자는 취지의 글이긴 한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글읽기와 글쓰기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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