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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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나중에 쓰기로 하고.. 일단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몇 개를 적어둔다..

일급의 역사가의 문장이다..


미소라는 거대한 자기장은 한반도 주민을 책받침 위의 쇳가루처럼 힘의 서열에 따라 재배치했다. 보이지 않는 달의 인력이 밀물과 썰물의 조수간만 차이를 만들어내듯 한반도에서 두 힘의 파급력은 결정적이었다. 한반도가 양극단의 원심력에 의해 둘로 쪼개졌고, 두 힘의 마찰 면에 위치하고 있던 현앨리스는 산산조각 나버렸다. 현앨리스의 비극적 최후는 그리운 해방 한국과 조우하면서 필연적으로 파국이 예정되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일본 제국의 신민, 미국의 시민, 남한의 국민, 북한의 공민 중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질적이고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 어디에도 동화되지 않고, 어디에도 귀속될 수 없는 그녀의 정체성과 부동하는 경계적 삶은 결국 그녀에게 스파이의 굴레를 씌웠다. 일본의 입장에서 그녀는 위험한 좌익 혁명분자여였고, 미군정의 눈에는 좌익과 소통하는 악마적 존재로 비쳤으며, 북한에서는 미 제국주의의 고용간첩으로 낙인찍혔다. 한국 근현대사의 경로는 그녀의 한 몸에 다중적이고 역설적인 정체성을 강요했다. 현앨리스를 투과한 근현대의 빛은 공존 불가능한 극단적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제야 현앨리스와 그 가족의 운명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열전의 상흔이 묻히고, 세계적 냉전의 시대가 저물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일본, 나아가 체코에 도달해 그 삶의 편린을 모은 후에야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삶에서 망실된 비극적 모자이크 조각들이 더 수습된다면 우리는 좀더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목소리가 앞으로 어떤 울림을 가지고,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는 알 수 없다. 한국 현대사는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한 여성의 치열했던 삶을 스파이의 우극(愚劇)으로 마멸시켰지만, 미래 한국은 묘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그 삶이 전하는 역사적 울림에 좀더 진지하고 관대한 성찰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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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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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정지돈 작가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를 읽고 관심을 가진 책인데.. 한동안 미뤄두다 연말이 되어서야 읽었다. 물론 현앨리스라는 인물의 인생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이긴 하지만.. 자료들을 발굴하고 퍼즐을 조합하는 역사가의 힘과 노고가 느껴지는 역작이다.. 올해의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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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 이승우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7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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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 카페에서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해서, 그냥 앉은 채로 마지막까지 읽어버렸다. 후반부의 서사가 다소 과도한 건 맞지만, 2020년대에 이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것도 풍요로운 사치가 아닐까 싶다. "모든 나무들은 좌절된 사랑의 화신이다." 고다 아야의 <나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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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정치 - 증오의 정치에 관하여
아쉴 음벰베 지음, 김은주 외 옮김, 김은주 해제 / 동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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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정치에 대한 푸코의 1975년 강의(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여러모로 계시적이다. 생명정치에서 죽음정치로.. 하지만 그는 너머의 세계로 가버렸고, 그의 유지는 또 다른 대작들로 이어졌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과 음벰베의 바로 이 책. 파농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는 소름 끼치는 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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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음모 채석장 시리즈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임재철 옮김, 이리에 데츠로 해설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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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의 채석장 시리즈는 생각날 때마다 한 권, 두 권 모아두고 있는 시리즈이긴 한데..

이 시리즈에 하스미의 책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문장이 갖는 매력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비평가답게.. 어떤 순간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 가히 동물적인 천재성을 느끼게 하는 문체.. 기본적으로 만연체인데.. 이런 생동감을 주는 문체를 갖는다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하스미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는 독법보다는.. 가끔씩 생각날 때 한 페이지를 펼쳐보는 독법이 더 인상적이라는 생각도..


물론..

1. 18-9세기 프랑스 정치사/혁명사를 잘 알고 있다면 이해하기 훨씬 쉬울 것이다..

2.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에 대한 한 편의 오마주적 성격의 텍스트이기도 한 만큼.. 이 책을 이미 읽었다면 훨씬 떠오르는 생각들도 많을 것이다..

3.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흥미로운 비평인 <역사와 반복>을 미리 읽어두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반복>은 실제로 이 텍스트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니까.. 

4. 무엇보다 이미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인 <범용함>에 대한 하스미의 가장 주요한 저작인(박사학위논문은 어쨌거나 한 저자에게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는 속설을 그냥 믿어버린다면), <범용한 예술가의 초상>도 이미 번역출간되었다. 

5. ...

6. ...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풋노트들이 가능하겠지만..

그 풋노트들을 쓰는 것이 하스미가 이 글을 출간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생각들은 아니었을 것이고..

<깊이에의 강요>는 역시 아카데미에 한발을 걸친 먹물들의 아비투스니까..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그냥.. 가끔씩 생각날 때 한 페이지를 펼쳐보는 것이 하스미의 격을 훨씬 높이는 독법이 될 것 같다..


"고아로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자기 아버지의 입회에서 분리된 에크리튀르"라는 그 "본질적인 표류상태"에서 문자를 정의할 때, 그는 마치 '사생아' 드 모르니의 존재를 기술하는 듯하다. 시뮬라르크가 실제 그러했듯이, 1851년이라는 연호는 '사생아'가 그 '표류성'으로 인해 승리하는 시대의 도래를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요컨대 <슈플뢰리 씨, 오늘 밤 집에 있습니다>가 1851년 쿠데타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쿠데타 쪽이 그 줄거리를 충실히 모방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태의 역전이야말로, 여기서의 '반복'의 실태인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인 것이어야 할 권력 탈취를 비심각화함으로써 실현되는 정치성의 냉소적이고 낙천적인 승리에 다름 아니며, 먼저 '비극'으로서 연기된 것이 나중에 '소극'으로 재연된다는 헤겔적인 역사관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사태의 도래를 마르크스는 놓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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