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 평전 - 정통을 걸어간 이단
미조구치 유조 지음, 임태홍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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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더위가 꺾이지 않는 한여름 오후. 미조구치의 유조의 <이탁오 평전>을 읽다. 분명 예전에 읽은기억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새로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사이고 다카모리에 대한 논고를 쓰다가, 메이지 조슈 번의 반역의 정신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책이었다. 제목은 <이탁오 평전>이지만, 실제로 이 책의 전반부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분명 과거에 책을 읽었다는 뜻인데, 왜 이렇게 새로운 것일까-. 막부 말기, 쇼인은 자신이 신뢰했던 제자들이 충의(忠義)’가 아닌 공적을 쌓는 데만 급급한 것에 실망, 연이어 절교를 선언하면서, 고독 속에서 이탁오의 글들을 읽어나가며,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이 점에 착안하여 지인들에게 200년 전 이탁오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부합한다고 쓰며, 그의 글을 읽어볼 것을 권했던 쇼인이 남긴 글들을 다시 읽으며, 쇼인에 의탁하여 이탁오의 사상의 핵심에 근접해 들어가고자 하는 저자의 방법론은 그 성공 여부를 떠나 분명 독특한 것이다. 미조구치 정도의 대가니까 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하면 너무 쉽게 정리해버리는 것일 테고, 사실, 그래서 결코 친절한 설명방식은 아니고, 또 그 집필 의도를 달성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아쉬운 대목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유학의 전통을 가진, 하지만 그 계승의 방식은 상이한 동아시아의 두 사회-중국과 일본-의 이단적 사상가들이 걸어간 궤적을 비교한다는 문제의식만큼은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정통을 걸어간 이단/정도를 걷는 이단은 바로 그 문제의식을 집약한 부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게 된 계기는, (맺음말에 잠깐 쓰고 있는 것처럼) 하기()의 쇼인 신사를 방문했을 때의 위화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몇 년 전 동아시아 기억-전쟁을 재점화시킨 계기이기도 했던 메이지일본의 근대산업혁명유산(‘사도광산은 그 연장선상의 전투이지만)의 자산군 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것이 하기의 손카손주쿠(松下村塾), 즉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인 다카스기 신사쿠, 가쓰라 고고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등을 키워낸 요시다 쇼인의 서당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제철소, 조선소, 탄광과는 결이 조금 많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손카손주쿠를 포함한 하기 전체는, 얼마 전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 아베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해서, 한 번 방문해보면 정말 이곳저곳 돈을 쳐바른 흔적들이 역력하다. 물론 미조구치 선생님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 전에 하기를 방문하셨겠지만, 국가주의자들의 비호를 받는 위풍당당한 쇼인신사를 보며, 어떤 위화감을 느끼신 듯하다. 그래서 거기서 조금 더 안쪽의 인기척이 전혀 없는 숲으로 들어가서 찾은 쇼인의 묘지가 자아내는 청초함에 놀라워하며 문득 쇼인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고 쓰고 있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쇼인에게서 발견해내고 있는 광기우둔함’, 혹은 어떤 회심(回心)’이 속류 국수주의나 국가주의로 회수될 수 없는 쇼인의 정신의 진수(esprit)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쇼인이 자신의 상태를 표현한 ()’이라는 글자는 <논어>에서 말하는 광견(狂狷)’이다. ‘은 자신을 지키고 고수하는 것이 견고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면 은 주위를 거부하고, 주위 사람들과 다투더라도 자신의 길을 고집스레 돌진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 여기는 것을 자신은 어디까지나 정상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앞서서 행한다는 뜻도 있다.

()’는 사리에 어긋나다는 뜻이며, 도에 어긋나고 도에 위배된다는 뜻이다. 세상이 신봉하는 어떤 규칙이나 습관을 파괴하는 것도 라고 한다. ‘()’는 지혜가 무디고, 우둔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가 잘 작동하지 않는 것도 라고 한다. ‘()’은 우직(愚直)하다, 고지식하다는 뜻으로 사고의 폭이 몹시 좁고 정직하여 기가 움직일 여유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광패(狂悖)’ ‘우당(愚戇)’ 등의 표현을 써서 자신을 조롱하는 글에서 쇼인은 몰래 이탁오로부터 자신과 같은 부분을 찾아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그가 서하책을 추진할 때는 거기에 몰두하여 전체 국면의 승패를 걸었다. 그때 그는 그러한 책략의 성패를 전체 국면의 성패로 간주했다. 그래서 거기서 죽음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결국 쇼인이 죽음이라는 글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이룸으로써 시점 자체도 바뀐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어둠 가운데서 한 점의 죽음을 응시하고 있었던 협소한 시야가 와이드스크린처럼 넓어졌다. 쇼인은 거기서 유구한 미래를 관망했는지도 모른다. 고립된 가운데 사건 하나하나에 희비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강인한 신념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과의 연대 속에서 느긋하게 관망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신념의 확대가 이 시기의 그에게서 느껴진다. 회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의 대전환이 죽음이라는 글자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탁오의 글에 나타난 ()’ ‘()’ ‘()’ ‘()’과 같은 한자의 의미를 풀이해가며, 이탁오의 어리석음과 직관적으로 일체화해가는 쇼인의 감정을 정리해나가는 대목, 그리고 비정상적일 만큼 정직하고 성실하게 추구하며, 또 주위로부터 이단시되고 소외되면서도 그 고독을 감내하면서까지, 거짓을 끊고 순수하게 참다운, 즉 비타협적인 진실을 추구하는 쇼인의 태도에서 막부 말기 정통을 걸어간 이단의 모습을 찾아내는 대목은 과연 탁월하다. 물론 마지막 회심에 대한 기술은 조금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지만, 그건 요시다 쇼인을 악마화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내 몸 속에 깃든 어떤 '생리적 거부감정도로 정리해두자.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 논고도 어찌 보면 정한론의 주창자(동아시아 침략의 화신)나 보수 우익의 영원한 아이콘으로, 혹은 쇠퇴해가는 지역경제 부흥을 주도하는(지역소멸이 가속화되는 일본 사회에서 그다지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관광대사의 이미지에 가려진 반역의 정신이 갖는 의미를 재사유해보자는 취지의 글이긴 한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글읽기와 글쓰기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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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계엄령 사이에서 - 김명인 회성록回省錄
김명인 지음 / 돌베개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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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86세대'들의 현란한 정치적 변신들과 내로남불의 행태들 때문에 80년대의 투쟁 자체가 도매급으로 평가 절하되는(물론 지금까지의 신화화에 대한 반동이라는 측면에서는 건강한 것일 수도 있지만).. 또 공정과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으면서도 공화주의보다는 독재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상한 나라'(갑자기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이 떠오르는 것은..)에서 이런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우선 반가웠다. 

투병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지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치열한 성찰의 기록-회성록-을 써준 저자에게도 감사를..


물론 <70년대 말 서울대 언더 출신>으로서의 저자의 삶이 70-80년대를 거쳐간 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삶을 대변해줄 수는 없고.. 아마 그래서 저자 역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계속 성찰하는 것이겠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엘리티즘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대 법대 출신 판검사들의 전횡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스스로 가시밭길을 선택해 꿋꿋하게 살아온 그들의 삶마저 엘리티시즘으로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예전.. 한국 사회에서 현대 지성사/사상사가 부재한 이유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급격한 집단적 전향(그것이 자발적인 것이든.. 공권력/폭력의 강제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자본주의의 승리와 스펙터클한 소비 사회의 도래로 인한 현실 추수적인 것이든)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개석상(공론장)에서 던졌던 이 질문에 불쾌감을 느낀 많은 80년대 세대들의 공분을 사면서 서둘러 논의를 수습해야 했던 아찔한 기억이 떠오른다.. 자격의 문제였을 지도.. 슈피겔만의 지적처럼, 그들의 '치열했던' 20대 시절을 나는 경험한 적이 없고.. 나의 20대는 레고 파크(?)의 놀이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비판의 여지가 없는 그들의 80년대 경험이 <승리의 신화>로 채색되면서, 그 이후 일어났던 아찔한 변신과 전향들에 스스로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합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인간은 사상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에서 누구나 전향할 수는 있다.. 또 전향은 결코 변절과 같은 것이 아니다.. 다만 변절과 다른 전향의 특징은.. 전향자 스스로가 자신의 전향의 궤적을 성찰적으로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DR/NDR, 민중적 민족문학을 둘러싼 논쟁들.. 지금 세대들에게 이 담론들은 어쩌면 신화적 주술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지금 읽어보면 그 무모한 논리구조에 가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그 역시 어느 진영에서든 합리적 이성이 작동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빈곤한 우리의 지성사/사상사가 만들어지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은 어쩌면 우리 사회 내부에서 나온 거의 유일한 이 사상사적 논의들-흔히 사구체 논쟁으로 요약되는-에 다시 정당한 자리를 만들어주면서 그 의미를 검토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화로 만들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한 때의 '치기'로 폐기처분해버리지도 않으면서.. 그 논의를 역사적인 시공간 속에 자리매김하면서 공과 과를 검증해내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80년대는 정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세대들 간의 야만적인 몸싸움으로 전락하고 말 테니까.. 그리고 자신들이 꿈꿨던 이상과 지금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현실의 괴리에 스스로 책임을 지기 위해서도 이러한 작업은 절실히 필요하다..     


사실 신화와 폐기처분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의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끔찍한 <반지성주의>가 아니겠는가.. <문송>은 언어/사유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일 것이고.. 그래서 유일하게 -이다/아니다 정도를 판별해주는 언어인 법의 언어가 모든 사회를 지배하는 현실.. 고함과 괴성이 거리를 지배하고, 때로는 극악무도한 폭력이 지배했다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80년대에도 없었던, 법원을 테러하는 상황.. 마치 현재의 사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법/소송인 것처럼 모든 패널을 변호사들로 채우고 있는 미디어들.. 모국어로 이루어지는 사유를 믿지 못하고, 그래서 내용 검증을 스스로 포기한 채 영어라는 권위에 모든 것을 의존해버리는 반지성주의의 극치인 학계(아카데미).. 물론 그러한 현실을 초래한 가장 일차적 책임이 자신의 소명인 언어와 사유를 방기해 버린 채, 프로젝트와 각종 용역에 매달리고 있는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있음은 분명할 터이고..


400여 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오랜만에 정말 집중해서 읽었던 책이다.. 끊임없는 성찰들 속에서도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꼰대스러움은 시대의 소음과 맞서고자 하는 한 노 비평가의 고군분투의 발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과연 그의 글을 이후의 세대들은 어떻게 읽을까.. 그리고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았다고는 하나, 여전히 70년대 후반 남성 엘리트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이 책은 어떤 <젠더 트러블>을 일으키게 될까.. 세대, 그리고 젠더 등의 이슈도 함께 고려하면서 여러 층의 연구자들과 함께 조촐한 북토크를 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직접 만나게 된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만.. 1991년에 대한 단상만은 기록해두기로 한다.. 내게도 익숙하지 않은.. 이제는 머나먼 과거가 되어버린 해.. 하지만 광주라는 도시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나로선, 자욱한 최루탄 연기를 피해 금남로 지하상가로 내려가는 계단 옆 벽면에 붙여 있던 무수한 죽음의 사진들을 잊을 수 없다.. 과연 그 이미지가 91년의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의 것인지 정확히 기억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물론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라는 논설을 무려 조선일보(1)에 실었던 김지하와 자신의 입장은 다르다고 선을 긋지만(그런데.. 왜 그의 글을 2페이지에 걸쳐 인용했을까..), 그 역시 당시의 연이은 죽음의 행렬에는 일정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이전에도 민주화 투쟁의 '전선'에서 수많은 자발적, 비자발적 희생자들이 있었지만 이전까지의 희생은 숭고한 비장함, 또는 비장한 숭고함의 아우라를 남겼고 그것은 투쟁의 열기를 북돋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1991년 봄 두 달 동안의 죽음의 행렬에는 그런 아우라보다는 어떤 허무주의적 감각이 짙게 착색되어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과 유족에게는 모욕이 될 것을 감수하더라도, 나는 그행렬을 승리를 향한 투쟁 행렬이 아니라 퇴조하는 운동과 함께 생명을 바치는 일종의 순장 행렬로 느꼈다. 아니, 더 이상 희망 없는 세상에 대한 이별 의식이라 해도 좋았다. 퇴조기의 절망감이 만든 타나토스! 그때 나는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 그룹과 일본의 적군파를 떠올렸다. 같은 퇴조기에 독일인들은 적을 죽였고, 일본인들은 서로를 죽였으며, 한국인들은 자기를 죽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과연.. 91년, 거리에 있었던 이들은 이 문장을 어떤 느낌으로 읽게 될까.. 최근 91년 투쟁에 대한 당사자들의 이야기들이 새로이 출간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평가되지 못한 91년에 대한 논의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하지만 그 죽음의 행렬에 깃든 비이성적인 충동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도. 그 죽음들에서 어떤 계급성을 감지하는 저자의 이 '씁쓸한' 감각(근거 없는 억측?)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독자인 나로서도 암담하다..


그때 하나뿐인 목숨을 내던진 분들의 행동 하나하나의 존엄성을 폄훼해서가 아니다. 퇴조기의 죽음으로 제대로 기림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그분들의 결단과 행동이 지니는 절대적 의미가 희석될 수는 없다. 게다가 그 죽음의 행렬에 어쩐지, 서울대, 연고대 등 이른바 당시 학생운동권의 '메이저 캠퍼스' 학생들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지금까지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마치 지진이 날 것을 미리 알아채고 도망취는 쥐들처럼 운동권의 중심부에 있던 자들이 일찌감치 변혁운동의 퇴조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발을 빼고 있는 동안 변혁운동의 가치를 머리가 아니라 몸에 새긴 이름 없는 투사들이 온몸으로 이 퇴조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설사 이것이 근거 없는 억측이라 해도.


2025년 7월의 어느 여름 밤..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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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 어떻게 살 것인가 Philos 시리즈 35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김상운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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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얼마 전 6월 하순은 <마법의 시간>이라고 쓴 것 같은데..

어느덧 계절은 7월로 접어들고 있다.. 


어제 <자기만의 방>에서 철수.. 본가로 내려왔다..

명불허전이라고 했던가.. 역시 대프리카라는 명성에 부끄럽지 않게.. 저녁 8시가 넘었음에도 역에서 내리자마자 후끈한 바람이 훅 들어온다.. 

여름을 나기 위해 본가로 내려온 것이긴 한데.. 문제는 이 집에는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 집의 구조가 한국의 국민 평형이라는 3LDK니까.. 원래라면 세 명이 방 하나씩을 가질 수 있어야 하지만.. 한국의 평범한 가족의 라이프 스타일을 따르다보면.. <자기만의 방>은 2명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미 이전 점유자들이 <자기만의 방>을 하나씩 꿰차고 있는 상황에서 신입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거실의 한 귀퉁이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뿐이다.. 예전에 어떤 소설에서 베란다에서 살아야 했던 한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한강이었나 싶다..).. 요새 아파트는 확장형이라 베란다도 없다.. 물론 대프리카에서 한 여름 베란다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고쿠분 고이치로라는 저자의 진가는 이미 올 봄 <중동태의 세계>를 읽으면서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나서 들뢰즈에 대한 짧은 책 한 권, 그리고 최근에 재번역되었다는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바로 구입했는데.. 여름방학이 되니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한가하지 않지만 지루함을 느끼는> 유형인가.. 누구나 <한가하지만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베블런의 유한계급의 삶을 꿈꾸겠지만..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유한계급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부자들이 제일 바쁜 게 사실이니까.. 

어쨌거나 하루 종일 앉아서 이런저런 번잡한 업무들을 처리하다 보면 오후 4-5시 즈음부터 지루함이 밀려오는데(더구나 한 여름은 낮이 길다.. 7시 반까지 해가 쨍하니까..) 그 지루함의 정체에 대한 주석 달기를 하기 위해 이 책을 꺼내 들었다는.. 


무엇보다 책의 첫 부분에 파스칼을 인용한 대목이 매력적이었다..

인간의 불행은 모두 인간이 방에 가만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방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굳이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팡세>의 한 대목을 저자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번역한 구절인데(원문을 확인해보지 못했다..).. 순간 빠져들었다..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곧 방에 혼자 있으면 할 일이 없어서 안절부절 못한다는 것, 게다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 즉 지루해한다는 것. 이것이,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가끔씩 책도 읽히지 않고, 모든게 지겨워 방안에서 서성이며 빙빙 도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계속 꺼내 보면서.. 어딘지 신선한.. 정곡을 꿰뚫는 문장이라는 느낌에.. 지인들에게 공유하면서.. 그래 공유하려는 몸짓 자체가 지루함의 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방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지.. 방학이라는 핑계를 대고.. 전공 서적은 좀 제쳐두고..그동안 사 놓고 읽지 못한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고.. 본가로 내려왔던 것인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본가에는 <자기만의 방>이 없다는 것..

파스칼은 그래도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었겠지? 사실 마담 댈러웨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자기만의 방>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라.. 사실, 100여 페이지의 책을 읽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제목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거실 한 구석에 자기만의 책상을 놓아두고.. 평화로운 주말 오후를 즐기고 있다..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을 읽으면서.. 특히 4장의 소외론과 5장의 철학이 흥미롭다.. 가벼움과 조야함에 빠지지 않으면서 하이데거의 논의를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해줄 수 있다니.. (이 역시 예전 사사키 아타루의 글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이기도 하지만, 서구의 정전들을 비교적 믿음직한 번역으로 읽을 수 있는 지식장에서 가능한 글쓰기라고.. 변명을 해보지만, 그것만은 아니겠지.. 지식장의 식민지적 기원을 운운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이미 잘 정리된 논의를 다시금 요약하는 것은 커다란 의미는 없겠지만.. 복습을 위해 지루함의 세 형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를 다시 써보면..

(1)무엇인가에 의해 지루해진다는 것. 

(2)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면서 지루해한다는 것..

(3)아무튼 그냥 지루하다는 것..

특히 지루함의 궁극적 형태인 세 번째 형식, "아무튼 지루함"에 맞선 하이데거의 응답은 (역시 하이데거다운) "결단"이다.. 하지만 저자는 결단을 내리는 인간 역시 스스로가 결정한 것의 노예가 될 뿐이라며 지루함의 첫 번째 형식과 세 번째 형식이 유사하다고 지적하며, 인간다운 삶이란 결국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루함의 두 번째 형식.. 즉 지루함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삶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자는 다소 '황당한' 결론을 제시한다.. '황당하다'고 했지만, 사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니까.. 가끔 동물되기(스피노자-들뢰즈로 이어지는 계보겠지만)도 해보고, 소비사회가 주는 유혹(기분전환과 지루함의 악순환)에 빠지면서도.. 또 가끔 낭비하고, 사치도 부려보면서 사물을 향유하고 즐기고, 또 생각하면서 함께 한가함의 왕국을 만들어보자는 그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의 당부처럼.. 이러한 결론은 이 책을 통독하는 '과정'에서야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통독해 달라니, 저자야말로 보통 배짱은 아니지만.. 지루함과 정주혁명을 연결시키는 2장의 계보학, 베블런에서 보드리야르에 이르는 소비사회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노동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3장의 경제학, 루소와 맑스를 다시 읽으면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제시하는(본래성 없는 소외.. 동일성 없는 차이를 연상시키는) 4장 소외론도 슬슬 읽어나가기에(통독하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한여름의 주말 오후를 지루하지 않게 해준.. 저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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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좌반구 - 새로운 비판이론의 지도 그리기 컨템포러리 총서
라즈미그 쾨셰양 지음, 이은정 옮김, 배세진 해제 / 현실문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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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서구 비판이론의 복잡다단한 계보를 재구성하면서, 비판이론과 사회운동 사이의 '도래할' 마주침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제시한다는.. 써놓고 보면 왠지 진부해져버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책.

 

하지만 여전히 비판이론과 사회적 투쟁 사이의 관계를 명료하게 제시하는데는(해제에서도 지적하는 것처럼)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이론의 교과서처럼 보이는 책..

 

다만, 시중에 유행하는 미국식 '포스트' 개론 교과서와는 조금 다른, -그 이유는 프랑스 학계에 속해 있는 저자 자신의 위치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상당히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책..

 

그렇다면 한국에서 비판이론이란 무엇이었는가/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해제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책.. -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비판이론과 사회운동 사이의 단절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냄으로써, 이론의 진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하는.. 책..

 

 

비판이론이 처음부터 구체적인 현장/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문제의식, 그리고 그 분석을 통한 어떤 실천적 전망을 제시하기 위한 기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한국의 비판이론이 미디어연구나 영문학을 통해 정립되었다는 것은 역시 태초부터 절름발이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진태원이나 이상길 식의 제언은 학계의 비판이론 학습자들에게는 하나의 조언이 될 수 있지만, 어떤 실천적 전망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이렇게 쓰고 해제의 후반부를 읽으니, 배세진 선생님도 그렇게 쓰신 것 같다. 공감. 정교한 이론 내적 탐구를 위한 내적인 전제가 필요하다는 지적에도 공감.. 워낙 이론이 빈곤한 사회에서 살다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 

그렇게 본다면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했던 90년대 이후 사회사나 인류학의 현장연구들이 실증주의에 빠져버린 것도 안타까울 따름이고.. 최근의 페미니즘이 보여준 하나의 성취는 눈부신 것이지만, 역시 그에 대한 엄청난 반동.. 그리고 페미니즘 내부에서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드라마틱한 분화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 우리의 비판이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은 이러한 여러 갈래의 실천들-아직은 결코 만나지 못하고 있는-의 소통과 접합, 그리고 자신들의 장에서의 전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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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 하는 일본 - 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
요나하 준 지음, 최종길 옮김 / 페이퍼로드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몰입하며 읽은 책..

 

최근 몇년 사이에 "과연 지금의 일본이 내가 전에 알던 일본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이라면, 이 책에 꽤 많은 흥미를 느낄 듯 싶다. 당연시되어왔던 통념들(예를 들어 왜 일본만이 근대화를 성취했는가")을 과감하게 뒤집으면서, 기존 문제틀을 전환시켜내는 것이 이 책의 미덕..

즉, 메이지유신의 신화로 시작하는 일본 근대의 통설을 깨고, 메이지유신은 중국화와 재에도화의 투쟁의 분기점이었고, 결국 쇼와 일본은 <재에도화: 아름다운 애도로>의 길을 갔다는 것, 그리고 전후 일본의 부흥은 너무 오래 지속된 에도시대의 결과물이며, 혼란과 방황의 헤이세이 일본이야말로 그러한 '긴 에도시대의 종언'의 산물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지금의 일본사회는 다시 중국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거기에 한중일 삼국의 동아시아사회에 대한 최근의 논의성과들을 그야말로 과감하게 주파하면서, 현재 일본사회가 처한 여러 위기들을 진단하고, 그 곤경을 극복해나가는 사상사적 응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현실적인 대안들까지 제시하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이 가진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를 찾기가 꽤 어려웠다고 후기에서 밝히고 있지만, 정말 이 책의 진가를 읽어줄 편집자는 많지 않았을 것 같고.. 그래도 결국 출간되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보면 일본이라는 사회가 가진 저력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왜 결과적으로 현실정치는 아쉽게도 저자가 탄식하는 것처럼 재에도화, 아니 나아가 '북한화'로 귀결되어버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의 급격한 정치적 변화, 나아가 코로나 19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해서 불거져나오는 한국사회의 여러 정치적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꽤 많은 '떡밥'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일독을 권한다..

 

예를 들어 진보와 보수/우익(?)라는 이데올로기적 차이는 있지만, 경기지사 이재명씨와 오사카 하시모토 지사의 정치방식의 형태상의 동형성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사회에서 최근 나타나는 지나친 평등주의 -다른 사람의 별 것 아닌 특권이 없어지고 자신 정도로 끌어내리는 것 자체로 쾌재를 부르는 민중의 증가-와 그에 영합하는 정치세력들의 난립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등등..

두 사회가 처해 있는 공통의 위기들을 떠올리면서, 이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 싶다..

 

 

물론 세세한 지점들에 이르면, 굉장히 논쟁적인 부분도 많고, 궤변에 가까운 억지논리도 때로 보이지만..

그래도 30대 초반의 연구자가 이런 거침없고 유쾌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도 한국사회와는 다른 일본 사회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낄낄대며 읽었지만.. 조만간 함께 읽어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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