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미나의 병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27
하비에르 세르카스 지음, 김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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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리엘 도르프만의 망명일기>라는 다큐를 보다가, 한때 빠져 있었던 칠레의 근현대사와 그 때 읽었던/보았던 리스트들이 다시 떠올랐다..  

 

<칠레의 밤>, <죽음과 소녀>, <칠레전투>, 그리고 또 뭐였더라..

<살라미나의 병사들>을 읽었던 것도 바로 그 시절이었다.. 그건 아무래도 비슷한 근현대사의 폭력적 경험, 그리고 왜곡된 <이행기>를 겪어야 했던 두 나라, 그리고 거기서 우리의 비슷한 근현대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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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살라미나의 병사들>(김창민 역, 열린 책들)은 <망각협정> 이후 현대 스페인에서 지난 전쟁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의 어려움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작중 화자인 <하비에르>(작가의 실명이기도 하다)는, 두 편의 소설집을 냈지만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없음을 인정하고 소설 쓰기를 그만 둔 신문기자로 나온다.. 그는 내전 종료 60주년 기념 일환으로 공화파 시인이자 전사로서 내전에서 죽음을 당한 <안토니오 마차도>의 기사를 준비하다가 <산체스 마사스>라는 한 인물의 기이한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산체스 마사스>, 그는 스페인 최초의 파시스트당인 팔랑헤의 우두머리 호세 안토니오의 친구이자, 팔랑헤당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 동시에 "꽤 괜찮은 작가"였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서가에 꽂혀 있던 <스페인내전>(앤터니 비버)의 뒤에 실린 인명색인을 찾아보았다.. <호세 안토니오>, <안토니오 마차도> 항목에는 여러 페이지 수가 적혀 있다..  말 그대로 <역사의 주역>들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산체스 마사스>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는 허구의 인물은 아니다.. 그는 스페인 최초의 파시스트당인 팔랑헤당 건설의 초기 주역이자 뛰어난 이론가이며, 동시에 제법 훌륭한 작가였다고 한다.. 그는 스페인 내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39년 공화파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다른 포로들과 함께 총살의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날아오는 총알들은 그를 스쳐 지나갔고, 그는 혼란한 틈을 타 숲 속으로 숨었다.. 도망간 자들을 찾기 위해 수색대가 숲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중 한 수색대원이 그를 발견했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주위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거기 누구 있어?>절대절명의 순간.. 산체스 마사스는 체념했다.. 그 때 그 병사는 그를 계속 응시하면서 허공을 향해 힘차게 소리친다.. <아니, 여긴 아무도 없어.>  마법에 걸린 듯한 순간이 지나고.. 그는 무사히 숲을 빠져나온다.. 탈출의 여정은 험난했다..하지만 그는 공화국의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는 시골마을에서 한 농가의 도움으로 근처의 숲에 은신하게 되고, 거기서 만난 세 명의 공화국 군대 탈주병(일명  <숲 속의 친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프랑코 군대가 마을을 접수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난의 운명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다음 스토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초기 파시즘 운동을 주도한 팔랑헤당의 이상주의는 전쟁의 와중에서 점차 현실주의에 의해 꺾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꿈꿨던 파시스트 혁명의 이상은, 또 다른 현실주의 독재자인 프랑코에 의해 갈취되고 만다.. 떼르미도르의 전야에 생쥐스뜨가 절규했던 것처럼 <혁명은 얼어붙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래된 팔랑헤 당원은 두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했다.. 하나는 자신들의 정치적 프로젝트와 새로운 정권의 프로젝트 사이에 현재 뚜렷이 존재하는 균열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모순과 공존하면서 권력의 잔칫상에서 남은 최소한의 부스러기까지 열심히 주워 모으는 것..

물론 그 두 극단 사이에는 많은 중간적 태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산체스 마사스는 결코 <혁명은 동결되었다>고 외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프랑코 체제에 착 달라붙어 과거와 단절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현실정치에 어느 정도 몸을 담으면서도 또 문학적 활동도 포기하지 않는 그런 애매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한 삶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그의 표현대로 <후회도 하지 않고, 잊지도 않는> 그런 삶, 아니면 변절.. 작가는 누군가의 입을 빌려, 산체스 마사스의 전후를 <전쟁에서 이기고 문학사에서는 패배했다>고 정리한다.. 다시 말하면 산체스 마사스는 <잊힘으로써 야만적인 대학살에 대한 자신의 야만적 책임을 졌지만, 전쟁에 이기자 작가로서의 자신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소설가(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문기자>)는 아직 생존해 있던 <숲속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산체스 마사스라는 한 개인의 일생의 전환기였을, 그 운명의 며칠간을 복원해낸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총살 당시 도주중이던 그를 봤으면서도 <아니 여기 없어>라고 말하며 자리를 떴던 그 병사는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다..

신문기자가 그 병사를(정확히 말하면 그 병사로 추정되는/혹은 자기 스스로 그 병사일 거라고 미루어 짐작해버린 그 병사를) 찾아내기까지의 과정은 생략한다.. 그것은 아주 <우연>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그는 살아 있었다.. 카탈루니아의 선반공 출신인 그는 공화국의 병사로 참전, 공화국의 몰락 이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1944년까지 외인부대의 일원으로 파시즘과 맞서 싸우며,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리 수복 전투에도 참전한다.. 8년에 걸친 전쟁에서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살아남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결국 제대해서 현재는 프랑스 정부의 연금을 받으며 프랑스의 한 복지시설에서 홀로 살고 있다.. 소설가는 그 병사를 만나기 위해 그 복지시설로 찾아간다..

당신은 산체스 마사스를 알고 있습니까..
당시 당신은 총살현장에 있었지요..
당신은 왜 그 때 산체스 마사스를 살려줬나요..

신문기자는 왜 그 병사를 찾아내려고 했을까.. 내전 종료 6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영웅>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병사를 찾고자 하는 기자를 설득하는 한 동료 소설가(그는 저 유명한 <칠레의 밤>을 썼던 그 라틴 아메리카 작가인 <볼라뇨>이다)의 말처럼, 그 결말은 차라리 <픽션>으로 처리하는 것이 나았을 지도 모른다.. <현실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니까, 현실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현실을 먼저 배신하는 겁니다. 실제의 그 병사는 당신을 실망시킬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꾸며내는 게 낫지요. 꾸며 낸 사람이 실제 사라모다 더 사실적이고말고요>. 혹은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어이 없이 웃으며 말하는 그 병사의 말처럼, 그런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웅들은 죽거나 살해될 때 영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들은 전쟁에서 태어나 전쟁에서 죽지요. 살아 있는 영웅은 없소이다, 젊은 양반. 모두 다 죽었어요, 죽었어, 죽었다고..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산체스 마사스를 살려준 그 병사임을 부인한다.. 하지만 이제 그 사실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소설가 역시 역사적 진실은 확인하기 어렵다는 <라쇼몽>식의 진부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파시즘>에 맞서 자신의 조국인 스페인에서, 그리고 그 이후에는 프랑스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병사들의 전후가 아니었을까.. 그 젊은 병사들은 대다수가 전장에서 사라져갔다.. 살아남은 병사들의 일부는 <영웅>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머지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그리고 조국 스페인으로부터 버림받고, 프랑스의 어느 한 복지시설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내는 한 스페인 병사는 소설가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내가 1936년에 전선을 향해 나설 때 다른 청년들도 함께 갔었소. .. 아주 젊었지요. 거의 애들이었어요, 나처럼 말이죠. ... 그들과 함께 전쟁을 했어요. 두 개의 전쟁을 함께요. 스페인 내전과 다른 전쟁을 말입니다. 비록 두 전쟁이 다 똑같은 것이었지만. 그러네 그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모두 죽었지요. ... 정말 어린 친구들이었는데... 전부 죽었습니다. 죽었어요. 죽었어. 모두 다. 어느 누구 하나 이 세상의 좋은 것을 맛보지도 못했어요. 어느 누구도 자기만의 여자를 가져보지 못했어요.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서너 살쯤 되던 어느 일요일 아침, 햇살이 가득한 침실에 자기 아내와 누워 있는 침대로 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황홀함을 그 누구도 맛보지 못했단 말입니다....
나는 가끔 그 친구들 꿈을 꿉니다. 그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지요. 모두들 그 때 모습 그대로 농담을 하면서 내게 인사를 건네요. 그때처럼 여전히 젊지요. 그들에겐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내게 왜 자기들하고 같이 있지 않느냐고 물어요. 마치 내가 그들을 배신한 듯이요. 내가 정말 있을 곳은 거기였으니까요. 아니면 내가 그들 중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듯 말이죠..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아세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고요. 그들이 왜 죽었는지, 왜 아내와 아이와 햇살 가득한 방을 가지지 못했는지, 그 이유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리고 내 친구들이 싸워준 그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더더욱 기억을 하지 않습니다. ..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해하시겠지요. 그렇지요? 아! 하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두를 기억합니다.

예전 어떤 글(내 젊은 시절의 많은 부분을 '앗아갔던')을 쓰면서 <그들 병사의 죽음을 국가가 회수하는 방식의 문제성>에 대해 계속 비판했던 나로서는 가슴이 턱 막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죽은 자들과 마주해야 하는 것일까.. 야스쿠니를 비판하는 대다수의 <진보적> 논자들의 기본적 관심은 그들 병사들의 죽음을 기념하고 현창하는 <국가장치>에 대한 비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위해 그들 역시 병사들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시스트 이데올로그로서 산체스 마사스의 전후의 삶과 한 공화파 무명용사의 전후의 삶을 이추적하고 복원하면서, 소설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일까.. 물론 그것은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를 읽어내는 독자의 몫일 것이다.. 내 글도 여기까지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만큼은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다..인터뷰가 끝나고 스페인행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작별인사를 건네는 소설가와 무명용사(마리예스)의 마지막 장면은, 이 소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그리고 과거를 기억하는 하나의 방식을 그려낸 보기 드문 결말이다.. 

<자, 조만간 또 오시길 바랍니다> 미라예스씨가 말했다..
<또 오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신호등 불빛을 쳐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누군가와 포옹해 본 지가 아주 오래됐소>
나는 미라예스씨의 지팡이가 보도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우람한 팔이 나를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고, 나의 팔은 겨우 그의 몸을 감쌀 수 있었다. 내가 아주 작고 연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약 냄새, 여러 해 동안 갇혀 있는 사람의 냄새, 삶은 채소 냄새, 무엇보다도 노인의 냄새가 났다. 난 그것이 영웅들의 불행한 냄새라는 것을 알았다.

 cf. 소설의 역자는 <미라예스가 끝까지 자신이 산체스 마사스를 살려준 병사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아 독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고 썼다. 하지만 이 소설가는 그가 바로 99% 그임을 알려주는 확실한 <장치> 하나를 숨겨놓았다.. 그걸 찾아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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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edu1004 2022-12-23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의 마지막 부분을(미라예스가 ‘그‘임을 알려주는 장치에 대한) 읽고 방금 덮은 살라미나의 병사들을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뭔지 모르겠다가 최근에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제가 찾은 미라예스가 ‘그‘임을 알려주는 장치는 이렇습니다.
볼라뇨는 미라예스가 그 캠핑장에서 미라예스가 여자친구와 맞춰서 추던 노래의 제목이 ‘스페인을 향한 탄식‘이라고 한 적이 없는데, 하비에르는 미라예스에게 그 일화를 말하면서 바로 그 노래가 ‘스페인을 향한 탄식‘이라고 하더군요. 이것 말고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너무 오래된 글이라 확인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찾으신 장치는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부분은 사실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크게 상관은 없는 것 같지만요.
더불어 쓰시는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생쥐스뜨 2022-12-2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오랜만에 이 책을 다시 펼쳐보았네요..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때는 그렇게 확신했었는데(그래서 99%라고 썼었는데), 지금은 그 수치를 좀 줄여야 할 것 같아요. 네, 제가 읽은 것과 정확히 맞습니다. <스페인을 향한 탄식>.. 7년 전에 이 책을 읽을 때는 그 노래야말로 확실한 <장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흔들리네요ㅎㅎ. 어쨌든 <마들렌>과 같은 글을 보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daedu1004 2022-12-23 15:31   좋아요 0 | URL
답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의 기쁨이었습니다. 사회 분위기도 많이 좋지 않은데 날도 많이 춥네요. 부디 연말연시 잘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