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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뒤에 오는 것들 - 상실과 트라우마 그리고 슬픔의 심리학
조지 보나노 지음, 박경선 옮김 / 초록물고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어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시 이 책이 화제가 되었다..
이 책 어때?
글쎄요.. 제가 보기엔 좀 가벼운데요.. 뭔가 집중하려 하다가 다시 개인적인 이야기들로 빠져버리는 느낌..
나는 심리학이 왠지 싫어..
왜요?
왠지 심리학은 우리 시대의 <사제>들이 하는 것 같아서 (맘에 안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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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마지막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쨌거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심리 상담사들로부터 <도움>을 얻고 있다면, 그 나름대로 심리학의 역할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시시한 결론을 내리며 화제는 딴 곳으로 옮겨갔지만.. 솔직히 심리학에 대해서는 거부감은 나 역시 가지고 있다.. 그건 아마 우리 시대의 정신의학에 대한 푸코의 비판kritik에 대한 공감이기도 하고, 또 왠지 지극히 미국적 느낌이 나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한 비틀린 거부감이기도 하다..
보나노의 책 역시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이미 명확한 타겟을 가지고 있다.. 기존 프로이트 학파의 애도 이론, 그리고 퀴블러 로스의 상실에 대한 단계 이론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 서서 그가 자신이 모은 경험적 사례들을 통해서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연적 회복력>이다.. 즉, 인간은 본래 해법을 스스로 지니고 태어났으며, 언제까지고 계속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경험은 왔다가 간다, 즉 진동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은 필요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주기가 길어지고 점차 균형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주장이 갖는 보편성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사회의 장례문화로까지 연구 영역을 확장시켜간다.. 저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중국 사회에는 상실을 개인 수준이 아닌 가족/친족/지인과 같은 공동체의 수준에서 극복하게 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죽은 자에 대한 정교한 의례ritual가 있다는 것이다.. "의례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인류학자 제임스 왓슨의 논의에 그는 깊은 공감을 표한다..
물론 <grief>라는 감정이 지극히 서구중심적인 것이라는 점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중국과의 비교문화적 연구는 그에게 매우 <유익>한 경험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가 중국 사회의 망자 의례를 서술하는 대목은 지극히 유형론적고 인상주의적인 것에 머무르고 있어, 중국 사회의 망자 의례가 갖는 실천적 측면 자체가 사상되어 있다.. 이는 그가 주로 중국 사회의 상례가 아닌 제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소중한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나는 것이 어느 사회에 사는 누구에게건 슬프지 않겠는가.. 그 파토스를 표출하는 방식 자체가 문화적으로 다를 수는 있겠지만, 슬픔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이고 또 매우 강력한 힘power을 가진 것이다.. 자칫하면, 그는 예전 로살도가 비판한 것처럼, 중국 사회에는 <울기 의례>weeping rite가 있다는 매우 유형화되고 건조한 해석에 빠질 우려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회복력에 대한 보나노의 확신은 비탄에 빠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부여잡고 싶은 믿음이다.. 보나노는 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말을 잠시 인용한다.. 죽은 아이의 기억은 희미해져가지만 절대 꺼지지 않는 빛과 같다는 것.. 그 불이 사그라든 뒤에 남은, 반짝이는 작은 불씨와도 같아, 늘 그 작은 불씨를 지니고 다니다가 죽은 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 아주 부드럽게 입김을 불어주면 다시 환하게 타오르는 빛과 같다는 것이다..
너무도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우리 부모들의 까맣게 타들어간 마음이 이렇게 회복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러한 회복은 이 사회가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주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침몰 80여일이 지난 후 우리 사회, 그리고 정치권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눈을 감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