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들은 신화를 믿었는가? - 구성적 상상력에 대한 에세이
폴 벤느 지음, 김현경 옮김 / 필로소픽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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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건을 이해하는 방법

우리는 어떤 힘이 피동적인 물체를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식으로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므로 우리는 이해가능성과 우연성을 혼합하는 절충적 해결책을 택한다. 작은 자갈 하나가 이 움직이는 물체를 멈춰 세우거나 궤도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연에 의해 수정된) 어떤 원인 대신에, 모서리의 수가 정해지지 않은(사건의 회고적인 불빛 아래서만 모서리를 셀 수 있는) 다면체와 탄력성을 가정해보자. 발생한 사건은 그 자체로 능동적이다. 그것은 원인들 사이에 자유롭게 남겨진 공간을 기체처럼 점유하며, 또한 원인들을 (내버려두기보다는) 점유한다. 역사의 에너지는 특별한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별 이유 없이 소비된다. 예견의 가능성은 각각의 다면체의 상황적인 구성에 달려 있으며, 언제나 제한적이다. 모서리의 수가 무한하고 (또는 불확정적이고) 어느 모서리도 다른 것보다 결정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이 모서리들을 모두 고려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연성과 이해가능성의 이원적 대립-전자를 인정하면서 후자를 수정하는-은 사라진다. 또는 다른 의미에서의 우연성-클레오파트라의 코로 대표되는 우연성보다 더 풍요로운-이 그것을 대체한다. 이는 역사의 일차적 원동력(생산관계, 정치, 권력의지)에 대한 부정이자, 원동력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다. 아니면 장애물(다면체의 모서리들)의 복수성에 대한 인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작은 원인들이 이해 가능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다면체는 도식이 아니므로, 이해 가능성은 사라진다. 혁명을 설명하는, 혹은 문학이나 요리의 영역에서 사회적 선호를 설명하는 초역사적인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예측불가능한 발명과 얼마간 비슷하다. 사건 자체를 분명하게 서술하는 것이 작은 원인들을 나열하는 것보다 더 흥미로우며, 아무튼 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든 게 역사이고, 혁명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다면체들이 존재한다면, 과연 인간과학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인간과학은 그리스 신화에 관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어떤 것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93) 


2. 상징적 장의 발칸화

단순히 신화만이 아닌, 우리 시대의 가짜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틀.. 하지만 신화와 가짜뉴스를 동렬에 놓을 수 있을까.. 가짜뉴스는 신화가 간직한 진실을 가지고 있는가.. 가짜뉴스의 범람과 이를 믿어버리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이런 고급한 틀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사상들의 정치는 흔히 무의식적이고 내재적이다. 예를 들어 공격이나 방어를 위해 어떤 외래의도그마와 연합전선을 구축한다면, 어느 순간부터 그 도그마를 조금쯤은 믿게 된다. 왜냐하마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말에 부합하도록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진짜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게 된다. 켄타우로스에 대한 대중의 믿음에 기대었을 때 갈레노스는 냉소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던 만큼, 관대하고 고상한 장광설의 늪에 빠졌을 것이고 자신이 그 전에 켄타우로스에 대해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을 것이다. 흔들리는 믿음의 존재양식, 지적인 혼돈의 시대를 특징짓는 이 양립불가능한 진실들을 동시에 믿는 능력은 이런 순간에 태어난다. 상징적 장의 발칸화Balkanization가 개인의 마음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 혼돈 상태는 분파들 간의 동맹정책에 반영된다. 


3. 무엇을 알 수 있는 지 아는 것. 지식의 사회적 분배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책에 독학자들이 언제나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것은 자기들과 같은 독학자가 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이 책을 이해했으므로 자기들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속자"란, 비밀스러운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부모님이 해냈던 것처럼 자기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숨겨진 지식이 있다면 부모님도 그것에 도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들이 안다는 것을 아는 일, 혹은 역으로, 더 이상 알아야 할 게 없다는 것을, 자신이 소유한 작은 지식의 영역을 넘어선 곳에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들만이 탐색할 수 있는 위험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은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들이 있다고 믿는다면, 연구와 창작은 마비되고 만다. 우리는 혼자서는 감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4. 여러 진실들이 존재한다는 믿음.

역사적 성찰은 하나의 비판으로서 지식의 자만심을 꺾으며, 진정한 정치나 진정한 학문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은 채 여러 개의 진실에 대해 진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 비판은 모순적인가? 진실이 없다는 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리스인들에게 물려받은 거짓말쟁이 놀이를 하고 있는게 아니다. -거짓말쟁이가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으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식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거짓말쟁이인 게 아니라,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특수하게 거짓말쟁이가 된다. "나는 항상 공상을 늘어놓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말을 하면서 공상을 늘어놓는게 아니다. 그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면 말이다. "나의 공상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만물의 본질에 새겨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지금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것이 곧 진실이라면, 보편적인 문화는 허위일 것이고, 또 그렇다면 어째서 허위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여 진실을 아는 배타적 특권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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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송태욱 옮김 / 체크포인트 찰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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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읽기..

동일한 소재를 다루지만.. 감독과 연구자의 시선은 다른 쪽을 향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구나 워낙 훌륭한 감독이니까.. 

여전히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에 끌린다.. 그리고 종종 이야기한다.. 그건 어떤 궁지/아포리아에서 다시 결의를 다지는.. 마음을 다잡는 순간 나오는 말이기에.. 그건 어떤 시대정신이 만들어낸 말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은.. 하지만 지금은 희미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이 시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고레에다 역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람은 '그러나'라는 말을 자기 안에서 읽어간다. 그리고 그 말을 '하지만...'이라는 변명의 말로 바꾸며 살아간다. 야마노우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라고 말할 수 없게 된 쉰세 살의 자신을 열다섯 살의 자신으로 심판한 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돌려줘"라는 야마노우치의 외침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을가. '하지만'이라는 시대를 향한 것이었을까. 

현실주의의 시대 속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야마노우치 안에서 사라지고, 

시대에서 또 하나

'그러나'라는 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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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정토 - 나의 미나마타병
이시무레 미치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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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절판되었던 이 책이 다시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무엇보다 기뻐하며, 도서관에 책을 주문하고 다시 읽었다.. 

초판 번역에서 발견되었던 몇몇 사소한 번역상의 오류가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원제인 <고해정토: 나의 미나마타병>라는 제목 그대로 재출간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재출간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1부 <고해정토>의 재출간을 계기로, 절판이 되어버린 2부 <신들의 마을>(녹색평론사)이 하루빨리 재출간될 수 있기를.. 그리고 고해정토 삼부작의 마지막 권인 <하늘 물고기>도 번역 출간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예전에 썼던 서평을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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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들 중에서는 가끔씩 소리 소문 없이 세상에 나와 잊혀져버리는 책들이 있다이시무레 미치코石牟礼道子의 <苦海淨土わが水俣病>(<슬픈 미나마타>김경인 옮김달팽이, 2007)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내가 이 책의 소재를 알게 된 계기는 <歴史学研究> 569(1987) 특집 <과거를 향하는 마음>에 실린 타키자와 히데키滝沢秀樹의 글 <民衆史方法関連して>에서였다민중사의 시각에서 일본사회의 원()과 한국사회의 한()이라는 감정을 비교하면서민중들의 원한을 억압해온 일본사회의 문제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풀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고찰했던 이 글은 전후 일본 사회의 감정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s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내게 매우 흥미롭고 신선한 시각을 준 텍스트로 기억된다이시무레 미치코의 세계는 이 글의 말미에 잠깐 소개되고 있었다메이지 이래로 일본 사회의 분노나 원한은 끊임없이 억압되어 왔지만결코 그것은 소멸되지 않고 전후에도 계속 터져 나온다이시무레 미치코의 일련의 작품들은 바로 그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60년대 일본 사회의 고도자본주의화에 경종을 울린 대표적인 공해병, <미나마타병>을 테마로미나마타 지역의 공동체에 장기간 거주하면서(이시무레 자신이 그 인근 지역 출신이기도 하다조사 취재한 기록문학작품으로그녀가 써내려간 미나마타 연작의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

이시무레가 그려내는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증상은 처참함 그 자체다깨끗한 바다에서 바다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던 그토록 건강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손이 저리기 시작하더니걸음을 잘 못 걷고(무도병 증세), 경기를 일으키다가 속속 죽어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수은에 중독된 어패류를 먹지 않은 신생아들마저 선천성 미나마타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처음에 그들은 종종 젓가락을 떨어뜨리거나 문지방이나 미닫이에 걸려 넘어지거나 해서 버릇없는」 아이들로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버릇없는> 행동조차 아예 볼 수 없게 되었다이때부터 그 아이들은 시각청각 등 감각이 모두 없어지고깊고도 조용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당시만 해도 태반 속의 아기의 경우 어머니의 체내에 있는 오염물질의 중독으로부터 보호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학적 상식이었기 때문에신생아들의 경우는 미나마타병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그들의 증상이 미나마타병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그 아이들 중 누군가가 죽어야 했고그 죽은 아이의 시체가 해부되어야 했다하나의 증상이 질병으로 공적으로 인식되기까지의 <잔인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이는 보상금을 둘러싼 인정투쟁의 가장 비극적인 양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가능한 보상금을 주지 않으려는 회사 측의 의도 때문에말 그대로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던 아이들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누군가 빨리 한 명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그래서 그 아이가 해부대 위에 올라가 그들의 뇌와 장기가 미나마타병에 의해 침식되었음을 '과학적'으로 검증해야만했기 때문이다미나마타병 자체가 당시로서는 전혀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었기 때문에그 증상과 원인을 '학문적으로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그 인정투쟁을 위한 '증거'가 확보되기까지의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주민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죽어나가고, 그 기간에도 공장은 계속해서 폐수를 방류했다는 사실에까지 이르면啞然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보상금이라는 것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미나마타병(정확히는 증상발병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공장 측은 아직 병의 원인이 밝혀지기 전인 1959년 서둘러 환자모임과 '위로금계약을 체결하는데계약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회사 측의 성실한 의무수행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책임을 미연에 회피하려는 책략임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의 생명 연간 3만 엔

어른의 생명 연간 10만 엔

사망자의 생명 30만 엔

장례비 2만 엔

물가가 오르자 1964년 4월에 생명의 가격이 조금 올라서

아이의 생명 연간 5만 엔

그 아이가 20세가 되면 8만 엔

25세가 되면 10만 엔

중증의 어른이 되면 11만 5천 엔

(환자호조회)은 장래에 미나마타병이 갑(공장)의 공장 배수에서 기인한 것이 밝혀져도 새로운 보상요구는 일절 하지 않기로 한다.

 

이시무레는 아이 생명 연간 3만 엔어른 생명 연간 10만 엔이라는 바로 이것이 일본국 1950년대의 인권사상이 등에 붙이고 다니던 가격표라고 말한다또 하나의미심장한 구절은 아직 미나마타병이 공장의 폐수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지 않았던 그 시절회사는 장래에 미나마타병이 공장의 배수에서 기인한 것이 밝혀져도 새로운 보상요구는 일절 하지 않기로 한다는 조항이다말 그대로 이 조항을 붙임으로써병 때문에 생계를 꾸릴 수 없어 당장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어부들에게 말도 안 되는 액수의 위로금’(배상도 아니고심지어 보상도 아닌 위로금이다. 1965년 한일 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의 명칭이 떠오르지 않는가배상도 아니고 심지어 보상도 아닌 독립 축하금’. 실로 동일한 논리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을 협박처럼 들이대면서 자신들이 나중에 감당해야 할 책임을 미연에 회피해버렸던 것이다그리고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회사는 자체 내 실험을 통해 폐수가 미나마타병의 직접적 증상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실험결과를 숨기고 공표하지 않았다.

 

결국미나마타병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의학진과 사회운동가들이 대거 미나마타로 몰려오면서그리고 1965년 니가타에서 제 2의 미나마타병이 발병사회적으로 문제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1968최초 발병이 있은 지 15년 만에 마침내 공해병으로 정식 인정된다(하지만 이미 그보다 6년 전인 1962년 구마모토대학 의학부에 의해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이미 400호 고양이 실험을 통해 그 원인을 알고 있었으면서도구마모토 대학의 논리에 대해 공장에서 배출된 무기수은이 왜 신체에 들어가면 유기수은으로 바뀌는지 알 수 없다며 반론을 폈던 공장 측의 행태를 더더군다나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1969년 6(미나마타병 제 1차 소송미나마타의 29세대 112명이 질소공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냄)부터 진행된 일련의 재판들에서 피해 환자 측이 승소하면서점차 구제의 길도 열리게 된다. <공해 피해구제법>(1974년 공해건강피해보상법으로 바뀜)이 실행된 것도 이 해(1969)이다앞서 언급한 1959년의 위로금’ 계약의 경우도계약 성립시 계약자의 '무지'(innocence)로 인한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결에 의해 무효가 선언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는 이미 미나마타병이 발견되고 폐수가 첫 의혹을 샀던 1956혹은 첫 사망자가 나왔던 57그도 아니라면 이후 대량의 사망자가 속출하던 59년의 시점에아니 그 이후라도 신속하게 대처했더라면 수많은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회사 측의 방해와 정부의 늑장대응으로 더욱 큰 참사를 낳았다는 점이다이는 미나마타병이 하나의 의학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하라다 마사즈미 교수 등의 주도로 앞서 언급한 우이 준구와바라 시세이 등이 매주 강사로 참여한 미나마타학이라는 강좌가 개설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질병의 사회성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또 하나그 동안 미나마타병 환자들은 질병이 주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전염이나 천형’ 등 의학적 지식의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편견과 낙인또 미나마타병 논란의 여파로 회사가 철수하면 지역경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하는 지역시민들의 시선 때문에 맘대로 고통을 호소하지도 못하는 이중의 고초를 치러야 했음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어디 미나마타뿐이랴, 2011년 3월 후쿠시마 방사능 누출사고 이후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것처럼 중앙과 지방의 착취-피착취 관계-왜 도쿄전력의 발전소가 간토에서 그렇게 떨어진오히려 도호쿠 지역에 가까운 후쿠시마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지역 주민들의 동의에 입각한 헤게모니적 지배 아래 작동하고 있는 현실은 근대 일본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법정에서의 승리하지만 미나마타병임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벽이 남아있었다실제로 고양이가 100퍼센트 멸종된 시라누이해 연안에 살던 20만 명의 사람들 중미나마타병으로 인정된 환자는 2,265즉 기껏해야 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미나마타병에 걸렸다고 하소연했지만환경청과 미나마타병 의학전문가 회의는 계속해서 이를 거부하며심지어 재판소의 미나마타병은 의학적이지 않다고 항소했던 것이다그리고 보상금을 둘러싼 난항과 환자들이 보상금을 바라는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상황 속에서 주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실제로 우리도 종종 소위 학문적’ 글들에서 확인하지 않는가. ‘객관적 가치중립이라는 입장에서 주민들이 토해내는 일련의 목소리그리고 행위들을 이해관계니 전략'strategy이니 하는 식으로 기술하는 글들을과연 그들은 한없이 추락해가는 '절망의 심연', 그리고 그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최소한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돈은 한 푼도 필요 없어그 대신 회사의 잘 난 사람들위에서부터 줄줄이 수은모액 마시라고 해위에서부터 차례로, 42명이 죽을 때까지그 부인들도 마시라고 해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가 태어나게그리고 그 다음에 순서대로 69미나마타병에 걸리라고 해그러고 또 100명 정도 잠재 환자가 돼보라고 해그거면 충분하니까!

 

여기서 '수은모액'은 1968년 5월 질소공장이 결국 미나마타병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히드 생산을 중지하고그에 부수한 유기수 폐수 100톤을 의미한다공장은 이 100톤의 폐수를 한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드럼통에 주입하던 중공장의 조합에게 들켜 저지당했고이후 이 유기수은모액은 죄업의 상징으로 남았다고 한다. ‘황당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쨌거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당시 한국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도 하고그래서 '착잡한이야기이기도 하다제 3의 미나마타병(제 2의 미나마타병은 60년대 중반 일본의 니가타에서 발생했다지역사회의 신속한 대응과 회사와의 투쟁으로 이 사건은 '다행히조기에 수습되고또 이 지역의 운동세력 이후 미나마타 지역과 연대하면서미나마타 지역에 대한 보상의 길로 발전하기도 했다)이 한국에서 발생할 수 있었을 위험을 미연에 구해준 회사의 노동조합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처음 책을 읽으면서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근대 일본 사회의 민중들의 원한(み・)이라는 문제였다메이지시기를 거쳐 '전후'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는 민중들의 분노나 원한의 감정을 끊임없이 억압해온 사회라는 것은 이제는 일반적인 정설이다. 다시 말하면근대 일본이라는 윤리적’ 세계는분노라는 감정을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즉 그러한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미덕에 반하는” 것으로 폄하하는그래서 ()과 한()을 잊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이다패전 직후 일본 사회 내에서 소위 <전쟁 체험파戦争体験派>를 중심으로 분노를 망각해버린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전개된 바 있지만이 역시 전쟁의 그림자가 걷혀 가면서 소멸되어 버렸다이렇게 분노나 원한을 잊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에서 일본사회의 민중들은 항상 권력에 순응하며 살아왔다는 그런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그들의 원한이 어떻게 새로운 정치로 전화될 수 있는가그 가능성의 한 측면을 찾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을 꺼내 들게 된 이유였다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은 좋은’ 텍스트는 아니다저자의 강력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그리고 미나마타병이라는 실체의 압도적인 무게감에 짓눌려다른 생각들을 펼쳐나가는 것 자체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악마로서의 미나마타병에 대한 대립 항으로써저자가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해내고 있는 근대 이전의 미나마타 사회라는 구도 역시 '엄밀한의미에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하지만 이를 단순히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 근대의 대립 항으로 전근대를 찬미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가벼운비판이다왜 그녀는 지역사회 주민들그것도 미나마타병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고또 그 자신들 역시 현재의 증상에 신음하는혹은 이들 환자들을 보면서 자신도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처지에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구술을 통해이런 아름다운 전근대의 세계를 그려냈을까오히려 이 작품은 이런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이 세상에서 추방당한 채고해정토(苦海淨土)를 헤쳐 나가는 사람들의 <그 후それから>를 포착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저자도 스스로 밝히듯이 이 책은 사회과학도엄밀한 의미의 르포도 아니다오히려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가 서로 만나고 겹쳐지는 흔적trace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 글은 예전 어떤 잡지에 서평으로 실은 글을 (참고문헌과 인용을 포함하여) 많이 축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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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 - 팽창을 향한 야망과 예정된 결말
브래드 글로서먼 지음, 김성훈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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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헤이세이 30년의 기록>을 읽은 후, 내친 김에 브래드 글로서먼의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을 이어 읽다.. 그러고보니 이번 주 초에 읽은 R. 맥그리거, <미국,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꿈꾸는가>와 시기에 있어서나, 대상에 있어서, 그리고 접근방법에 있어서도 다소 겹치는 책이다..

 

구미 출신의 소위 '일본통', 국제문제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일본 사회 인식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1970-80년대에 일본에서 살았다면, <일등국가 일본Japan as Number One>과 같은 책을 썼을 것이다(실제로 하버드 교수가 쓴 동명 저서가 있다)..

당대 구미 학계에서 나오던 <일본론>의 주류가, 일본의 경제적 풍요를 부러워하고/질투하면서 그 경제적 잠식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양가감정이 뒤섞인 것들이었다고 한다면, 2010년대 이후의 <일본론>은 "너희들.. 어떻게 된 거니.. 왜 이렇게 된 거야.. 뭐가 문제니.. 내가 분석해줘?"라고 걱정해주면서, 일본형 시스템이 갖는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주적인) 중국의 부상과 같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그래도 (중국보다는 믿을 수 있는) 너네들이 좀 버텨줘야 하지 않겠니"라고 온정의 시선으로 다독여주는 텍스트들이 대세가 아닌가 싶다..

 

이 책 역시 1990년대 중반 버블 붕괴 이후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현실 속에서 갈 길을 잃어버린 채(잃어버린 10년+ 또 10년 하면서) 방황하는 일본 사회에 불어닥친 쇼크들- 리먼 쇼크, 정치 쇼크, 센카쿠 쇼크, 동일본대지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내부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현재적 전망을 제시하는 다소 '안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저자가 국제정치 전문가이다보니, 아무래도 내부적 문제들에 대한 검토 역시 자민당으로 대표되는(물론 3년간의 민주당 시절은 아마추어들의 막간극으로 처리되지만) 일본 정치시스템의 구조적 한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정치 이외의 다른 층위들에 대한 검토가 유기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당장 드는 의문은 그렇다면 80년대까지 일본 사회가 잘 나갔던 것은 일본 정치가 선진적이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항상 그 때도 일본 정치는 문제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는데..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글로벌 사회, 그리고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정치'의 영역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말인가? 이런 '엉뚱한' 문제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줄기차게 되풀이하는 <일본형 시스템> 자체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데, 대개 그렇듯이 이 <일본형 시스템>이 마치 자동인형처럼 계속 설명 없이 등장하면서 문제를 정리해버리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 결과 80년대까지는 전세계적으로 상찬되던 <일본형 시스템>이 지금은 일본 사회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다소 이상한 결론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과연 일본형 시스템이란 것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살았지만, 나 역시 <한국형 시스템>이라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다..

 

책이 끝날 때 쯤에야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을 <피크 저팬>으로 정한 이유를 말해주는데.. 쉽게 말하면 '지금'의 일본사회야말로, "잃을 것이 너무 많으며, 자신들이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는 생각에 점차 물들어가면서도 큰 변화에서 오는 불확실성보다는 오늘날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선호하는 사회"라는 것인데.. 그래서 지금이 피크야.. 음.. 왠지 후루이치 노리토시와 같은 20대 사회학자가 썼던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같은 모순형용의 패러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그러한 진단이 진정 옳은 것이라면, 정작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할 지점은 과연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일까 라는 부분일 것이고, 이는 정말 구체적 현장의 경험에 기반한 연구를 통해 나올 수 있는 이야기들일텐데.. 현재의 국제정치학적 방법론으로는 풀 수 없는 과제인 듯 싶다(그렇다고 국제정치학의 프레임이 무용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최근 현대 일본에 관한 책들을 읽고 나니 부쩍 일본에 가서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두 눈으로 그들의 삶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일본에 못 간지 벌써 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말.. 백문이 불여일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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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 헤이세이 30년의 기록
사토 마사루.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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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그동안 <현대 일본 사회>에 무관심했던 것을 반성하며..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일본의 나름 알려진 두 논객 사토 마사루,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대담집인 <일본은 어디로 향하는가: 헤이세이 30년의 기록>과 미국의 국제문제연구 전문가인 브래드 글로서먼의 <피크 재팬: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 이렇게 두 권이다.. 읽다보니 뭔가가 쓰고 싶어져서 오랜만에 100자가 넘는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성향상 그다지 대담집을 선호하지 않지만-꼭 그런 건 아니다.. 푸코나 부르디외와 같은 대가들의 대담은 가끔 원저보다 깔끔하고 명료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참고한다-,

현대 일본 사회.. 특히 '헤이세이' 시기 일본 사회문화에 대한 좋은 책들을 찾아보기 어렵고, 또 무엇보다 주말에 몸이 아파 누워 있는데, 누워서도 볼 수 있는 책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으로 책을 들고 침대로 갔다..

 

가타야마 모리히데는 예전 <미완의 파시즘>이라는 책으로 한 번 접한 적 있는데.. 그 책 자체가 지극히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아시아-태평양 전쟁 사관의 한 변종에 입각해서 씌어진 책이었기 때문에,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냥 지나치게 편향되지는 않은, 나름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라는 느낌이었고, 그 면모는 이 책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한편 사토 마사루는, 예전 일본 서점의 신서 코너에서 저자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어 흘깃 본 적이 있었는데, 그 풍채나 느낌이 전형적인 일본의 우익 인사같아서 굳이 이런 책들까지 읽어야 하나.. 하며 지나쳤던 저자였다.. 이번에 이 대담집을 읽고 관심이 생겨 검색해봤더니 한국에 의외로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는 걸 보고 다소 놀랐다.. <국가의 함정: 외무성의 라스푸틴이라 불리며>이라는 책이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데, 이 책은 미번역이지만, 이 책을 토대로 한 사토 마사루*이토 준지의 <우국의 라스푸틴>이 번역된 적이 있었다(일부 품절이다).

풍채나 느낌이 과거 사이고 다카모리의 그것과 비슷해서.. 사토가 약간 의식하며 따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야말로 일본 우익의 정신적 아버지니까) 동시대를 읽어내는 '동물적' 감각은 책상물림, 즉 학자이자 교수인 가타야마보다 사토 쪽이 몇 수 위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그 감각은 러시아 대사관, 외무성 국제 정보국 분석 1과 근무, 그리고 국내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되어 그 '덕분'에 꽤 긴(512일) 수감생활도 했던 '독특한' 이력에서 만들어진 것이리라.

 

헤이세이 30년이라는 꽤 긴 시간을 두 저자가 훑어내듯이 대담하는 기획이니만큼 깊이 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고, 다만 1989-2019년.. 즉 동시대의 일본 사회를 사적이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리한 연표(역시 연표를 만들어내는 데는 일본인들을 따라갈 수 없다..)와 그 연표에 기대어 30년의 역사를 거칠게 리뷰해나가는 대담은 꽤나 신선했다.. 가타야마가 개략적으로 리뷰를 하면, 사토가 자신의 견해를 푹 찔러넣고, 거기에 가타야마가 자신의 배경지식으로 부연하는 만담식 구성이 나쁘지 않았고, 가끔씩 지나치다는 느낌도 받지만, 그래도 40-50대 아저씨들이 여전히 이정도로 발랄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적어도 알쓸신잡, 꼬꼬무 같은 정도의 프로그램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국사회보다는 지성적으로 몇 수 위인 것은 분명한 사실.. 무엇보다 당대에 유행했던 영화나 책들 같은 레퍼런스를 얻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아마 이 책에서 그나마 건질 수 있는 가장 중심적인 메시지는 헤이세이기에 접어들면서, 정치 문화에서 모호한 존재나 중간단체가 배제되고, 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관례의 영역이나 관습의 세계가 인정되지 않는, 그래서 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칫 투명한 것처럼 보이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것일텐데..

하지만 저자들의 그 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 이전의 일본 사회에 그런 모호한 존재나 중간단체가 존재했던 것인지, 그리고 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관례나 관습의 영역이 진정 올바른(just)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왠지 다나카 가쿠에이나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상징되는, 자민당의 예전 좋았던 시절, 부패해지만, 적당히 결단력도 있는 보스형 정치가들이 군림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지만 이런 관례나 관습의 영역이 사라지고 법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싸움의 무대로서 광장을 빼앗기고 법정만이 남은, 모든 싸움에서 법의 언어에만 의존하는, 그리고 그 결과 '약자의 무기'(weapons of the weak)마저 사라져버린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동시대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메시지는 어떤 울림을 준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계속되는 소송들이 잘 보여주듯(굳이 카프카의 <소송>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법은, 소송은 결코 약자에게 유리한 싸움의 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기에 누워 읽다가,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인터넷으로 당시 유행했던 드라마, 영화, 소설들을 검색도 해가면서 나름 흥미롭게 읽었다.. 책이 다루는 시기가 예전 일본에 살았던 시기와 일부 겹치기도 해서 옛날 생각들을 떠올리며 몽상에 잠기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책 읽는데 이틀이 꼬박 걸렸다.

 

책을 덮고 나서 1987년 이후의 한국사회를 이런 방식으로 읽어보는 기획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뜬금 없는' 생각도 해봤는데.. -강만길, 서중석, 혹은 (계통은 조금 다르지만) 강준만과 같은 할아버지들의 지나치게 '올바른' 현대사 읽기 방식이 아니라-, 장르를 넘나드는 이런 대담을 소화해낼 수 있는 식견의 논객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지나치게 진지한, 그래서 유머 감각이 떨어지고 사람들을 무조건 가르치려 드는, 더구나 자신의 분야를 제외하고는 지식이 빈약한 자칭 '진보'와, 그저 무식할 뿐인 '우파'(우리 사회에 '보수'의 품격 같은 것은 없다는 의미에서) 사이의 '회색지대'가 필요한데.. 그래도 다소 풍자 감각은 가지고 있던 진중권도 저렇게 타락해버리고.. 사실 한국사회에 논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ps. 글로서먼의 <피크 저팬>은 장을 바꿔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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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08 16: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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