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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평점 :
자우메 카브레의 단편소설집이 번역되었다..
중세의 이단심판과 아우슈비츠, 이행기 시대의 스페인이라는 세 시공간의 역사를 우르젤의 그림 속에 겹쳐쓰면서(팔림프세스투스) 이미 저질러진 악을 바로잡는 것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던졌던 <나는 고백한다>라는 작품에 한동안 압도된 적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책을 구했다.. 이번에 번역된 작품은 단편소설집이지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은 전작을 연상시키는 <나는 기억한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지배하던 우크라이나의 어느 지방. 자신의 기침 때문에 독일군에게 가족의 위치가 들통나 트레블링카로 강제이송된 이자크 가족의 이야기다. 그곳에서 친위대 대장은 이자크의 아버지에게 악마같은 제안을 한다.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핵심은 너희 가족 중 단 한 사람만 살려주겠다는 것.. 가족들은 아들 이자크를 살리기로 결심하고, 친위대장과 대머리 의사가 문밖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아버지 요제프는 이자크에게 권총을 쥐어주고 마치 모든게 놀이의 일종이란 듯 자신감과 소름이 돋을 정도의 차분함으로, 이자크의 동생 에디트, 어머니 미리암, 할아버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총을 쏘게 한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자크, 내 아들아 너는 살아 나갈 것이다. 우리를 위해 살 것이다. 네가 우리의 눈과 우리의 기억이 될 것이다. 팔레스타인으로 가거라, 그곳에 뿌리를 내리거라,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이스라엘에서 너를 위해 살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자크의 손을 잡아 권총을 입안에 넣고 아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지? 그냥 놀이일 뿐이란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축 처진 이자크의 손과 함께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손에 루거를 든 이자크는 이제 자신을 죽일 차례라는 생각을 해내지 못했다. 아홉 살의 아이가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생각해 내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감시병들은 승리의 웃음을 지으며 방 안에 들어왔고, 대머리 의사는 여러분이 방금 보신 것은 열등 인종들이 취하는 방어적인 행도으이 전형으로서, 이들은 고결한 자살을 생각하는 대신 자신들의 아들과 부모를 죽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다른 병사들에게 설명했다.
소설은 이자크가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후에도 과거의 기억-가족을 비극으로 몰고 간 자신의 기침, 그리고 트레블링카의 방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살에 이르는 그의 내면을 섬세하게 기록한다. <기억한다>는 결코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라는 것(고쿠분 고이치로의 말처럼 '중동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억이 말하기 시작하는> 그 상황이, 그 기억의 당사자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가히 압도적이다..
그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약속 중 일부만을 지켰다. 이스라엘에 남았다. 하지만 자식도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며 총구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금속의 차가움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행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 그에게 격한 기침, 참을 수 없는 기침 세계라 다시 찾아왔다. ... 그리고 그는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방아쇠를 당겼다. 처음 기침을 한지 사십년 만의 일이었다.
자우메 카브레의 작품을 다시금 한글로 읽을 수 있게 해준 역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악의 연대기의 전작이라고 할 수 있는 <환관의 그림자>, <파마노의 목소리>도 빠른 시기에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