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의 문화 인문과학 코스모스 4
이로카와 다이키치 지음, 박진우 옮김 / 삼천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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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지라, 책을 주문했을 때의 마음과 책이 도착했을 때의 마음이 다르다..

그 며칠 사이에, 혹은 몇주 사이에 다른 일상이, 또 다른 관심이 끼어들면서, 처음 그 책을 주문했을 때의 절실함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책은 때가 되어야 읽는 이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두 달 전 주문했던 이로카와의 책을 꺼내 읽으면서, 왜 이 책을 주문했는지, 그 때의 마음이 되살아났다..

예전 일본의 도서관에서 근대사 관련 리뷰를 하면서, 목록 1순위에 뽑아두었던 역사가..

하지만 그 묵직하고 값나가는 <메이지 정신사>를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공짜 복사카드로 열심히 돌렸던 기억이 난다.. 박스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겠지만, 복사된 책이란 한 번 박스에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기 힘든 법이다..

 

일본 민중사학, 특히 민중사상사 분야에서 이로카와 다이키치라는 이름은 보통명사로 통한다.. 주저인 <메이지 정신사>가 함께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메이지의 문화>라는 이 책만 보더라도-특히, 자유민권운동을 다루는 3, 4, 5장은 압권이다- 100여년이나 떨어진 과거, 지방 민중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이 잘 드러난다.. 그 세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사료를 찾아 몸소 지방의 여기저기를 뛰어야 하고, 운좋게 발견된 소수의 사료를 정밀하게 읽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역사적/문화적 상상력을 더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는 민중의 세계는 결코 <진보>라는 이름의 사관으로 일관되게 정리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에는 다양하고 모순적이면서 굴절된 가치관, 심성, 그리고 주의들이 충돌한다.... 서양의 한 정치사가는 이를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아주 훌륭한 개념어로 포착해냈다.. 물론 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한 차원 위의 수준이다.. 하지만 개념을 통한 정제된 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논의는 이미 60년대 이로카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통속도덕>이라는, 아직은 서술적인 개념을 통해, 근대 일본의 민중봉기는 통속도덕의 충실한 실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통속도덕이란 소생산자가 사회적 격동을 견디며 살아가는데 어울리는 생활원리를 말한다. 하지만 경제적 불황과 과중한 세금수탈로 사회가 파탄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막다른 길에 봉착하게 된다. 봉기는 이러한 통속도덕에 입각해서 합법의 계단을 올라가던 이들이 합법의 틀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결코 어떤 <-주의>, <-사상>의 성숙이라고 정리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봉기가 어떤 <매개>를 통해 일어나는가이다.. 여기에 민중봉기가 갖는 다양한 측면들이 또 한계들이 존재한다..

 

아주 간략히 이로카와의 방법론을 정리해보았지만, 이건 방법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세계를 복원해낸다는 것은 실증주의적인 작업을 넘어, 벤야민의 말처럼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던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미 습기가 차서 읽기도 어려운 예전 문서들을 일일이 읽어나가면서,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통의 세계에 갇혀 있는 그들의 정신에서, 봉기로 이어지는 계기들을, 그 도주선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떤 논리-소위 '진보'-에 입각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짜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다만 면면히 흐르는 지하수와 같은 그 생동력에서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역사적 작업은 1960년대, 내부로부터 변혁의 열기가 들끓어오르기 시작하던 일본 사회에서, 이 사회를 바꿔내기 위한 하나의 무기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에게도 민중사학의 시대는 있었다.. 저 신화처럼 이야기되는 80년대의 경험이 진보적 민중사학을 만들어냈고, 그 흐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의 민중사학적 관점으로 씌어진 글들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은 도대체 저자가 생각하는 <민중>이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세계로 다가서려는 최소한의 학문적 고민도 없이, 민중이 (저자가 꿈꾸는) 역사의 원동력으로 호명되는 모습을 아마 한 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저 바다 건너 이로카와가 딛고 서 있는 땅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대한 민중 봉기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농민들은 왜 그 전쟁에 참가했을까.. 그들은 그 봉기의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전통의 세계관을 다시금 돌이켜보고, 또 이를 변형시키고, 또 파괴해가면서, 자신들이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들어섰던 것일까..

 

섣불리 1894년과 1945년과 1980년 광주를 연결시키기 전에, 해야만 하는 많은 작업들을 우리는 스스로 방기해왔다.. 그리고 시대는 다시 수상해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뿐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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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2017-09-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970년에 적혔을 우레 소리를 들으면서 떠나보낸 동지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짧은 후기를 보면서 현실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단계적 진보로서의 과정이 아닌 역사의 순간 속의 인간을 살려내려고 하는 시도가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참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역사학의 저서 중에 이런 시도가 있는지 제가 과문해서 모르는건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생쥐스뜨 2017-09-2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이니치의 역사학까지 한국 역사학 안에 포함할 수 있다면, 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이 그나마 맞닿아 있는 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