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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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 ‘풀꽃’되다


    냄새에 관한 기억은 이토록 선명하다. 그건 살면서 다른 곳에선 맡아 본 적이 없는, 내가 아는 종류의 모든 동물의 분뇨와 내가 먹어본 온갖 음식들이 썩어가는 냄새를 합치고도 모자랄만한 강도였다. 지난 시절 내가 출퇴근하던 고속화도로 일정구간엔 도저히 자동차 창문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다가도 그곳만 지나치면 상상할 수 없는 악취로 정신이 버쩍 들었고 재빨리 외부공기 차단버튼을 눌러야했다. 어쩌다 잊어버린 날엔 뒤늦게 조치를 취해 봐도 소용없었다. 이미 차량으로 유입된 냄새는 그 구간을 완전히 빠져 나온 후라야 해결될 사안이었다. 혼자인 경운 인상만 찌푸리면 되었지만 가족, 지인들과 동승한 경우엔 코를 막고 서로 누가 범인인지 짓궂은 분위기가 되기 일쑤였다. 신도시로 이사가서 근 십년간 나는 그 냄새를 맡아왔고 또 부지런히 막아왔다. 희한한건 (서울로)출근할 땐 같은 구간에서 전혀 나지 않던 냄새였지만 퇴근할 땐 예외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꼭 한번은 가스구간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매일 겪으면서도 매번 낯설었다.

    악몽의 구간은 바로 쓰레기처리장이 위치해 있던 지역이었고 내가 살고 있던 시에 같이 속한 지역이었다. 행정구역상 같은 시였지만 누가 사는 동네를 물어보면 우린 절대 ‘시’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불문율이기도 했는데 우린 ‘**시’민이 아닌 ‘**구’민이기로 암묵적 합의를 본 것이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쓰레기처리장을 비롯해 하수처리장, 납골당 등의 혐오시설이 이쪽으로 이전되어 새롭게 건립된다는 소식에 흥분했고 주민반대 서명, 단상점거같은 저항도 주저하지 않았다. 아침시간이면 옆 동네에서 건너오던 토끼굴이나 샛길도 우리만 이용해야 한다며 막아버리던 사람들이었다. 어이없게도 자기 아파트 출근차량을 큰길로 먼저 내보내려는 경비 아저씨들끼리의 신경전도 볼만했던 동네이다. 당시기억으로 엘리베이터엔 무슨 건인지도 모를 결사반대 서명 종이가 게시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옆 단지 아파트 신규분양 때문에 집값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던 그 시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도로에서 냄새가 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금새 그 구간의 기억을 쓰레기 처리하듯 망각의 수거함에 투척해 버렸다. 신규 시설이 운영중인지도 모르게 쓰레기는 잘 처리되고 있었고 우린 그 다음과제에 열정을 쏟았다. 요즘 우리 지역의 아파트 벽면엔 ‘지하철 **역사 개통’의 대형 현수막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다. 지하철 역이 아파트 단지 앞에 개통되어야 집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지역은 늘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강렬히 반대하고 또 무언가를 급격히 추진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 돌아서 생각하면 고개를 들 수 없지만 같이 연대하는 순간 결코 잘못을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적고나서도 참 낯익은 모습이다.

    이렇듯 내 세대, 내 이웃 대부분은 거대 메트로폴리스 계획아래 잘 설계된 중산층을 꿈꾸며 오늘도 부동산의 호재와 악재 소식에 울고 웃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70년대 이후에 태어나 속물정신과 위선이 유일한 경쟁력이 된 우리 세대는 자본주의라는 악덕에 길들여진 그 결과 대략 하우스푸어로 요약되는 삶에 도착해있다. IMF 사태와 금융위기, 조기은퇴에 내몰린 우리 윗 세대가 자녀의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노후준비를 전혀 하지 못하는 실정을 보면서 우리 아랫 세대가 반값등록금 투쟁의 힘없는 주체가 되는 걸 보면서도 한국사회에서 대학졸업이라는 사람구실의 자격증을 위해 속절없이 자녀교육에 몰두하고 있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희생과 역할이라는 유산을 마지막으로 물려받은 우리들이지만 바로 다음 세대에 여성의 결혼과 육아, 교육의 문제를 처절하게 푸념하며 결혼과 출산의 부정적 견해를 매일같이 전수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선배로 두었지만 그들이 앞장선 민주화에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고 현 유권자로서도 뚜렷한 이념을 내세우는 쪽은 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서점을 통해 정의관련 서적만 들춰보는 침묵의 세대가 되어버렸다. 기성세대, 기득권층을 늘 비난하던 우리 세대는 사실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지만 이대로라면 그들만도 못하지 싶은 열패감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우리 자신도 낯설은 형국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우리와는 상관없이 하루가 멀다하고 정부의 젠트리피케이션(도심재개발)에 관한 계획발표가 미래청사진처럼 전시된다. 자고나면 해외의 유명 건축가들이 앞 다투어 우리의 공공기관을 문화적, 예술적, 미학적으로 리노베이션한다고 홍보한다. 국토는 언제나 공사중이고 젊은 작가들은 (우리도 답답한 심정인데) 재개발로 밀려난 빈곤층이 더 이상 어디로 가야할지 집요하게 묻고 있다. 금방이라도 잡지에서 튀어 나올듯한 화려하고 첨단적인 파사드는 곧 도시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고 이는 모든 도시인의 욕망을 자극하며 이미 예정된 부동산과 연계하여 돈있는 자본가가 추가적 자본을 취득하는 메트로폴리스적 불문율이 되는 것이다. 어느덧 예술은 상업성을 상쇄하기 위해 공공화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시 상업적인 가치를 창출한다. 자본주의가 세계의 운명처럼 보인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삶은 이제 지구전체의 도시화, 자본화로부터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결정으로 부동산 투기세력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소식도 그 연장선상에 있을 터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가 활황하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한 낯익은 이 풍경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의 궁극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아니 우리는 진정 우리가 원한 것들을 향해서 개발도 성장도 다 함께 이루어 온 것이긴 한 걸까.

    이 책은 지난 삼십년간 누구보다 열심히 자본주의를 달려온 우리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대체 무엇을 만들어왔는지 고개 들어 묻고 있다. 우리가 지난 시절 만들고 키워온 것은 다양한 인간 욕망의 현란한 그림들에 지나지 않는다 답하고 있다. 쓰레기는 우리 욕망의 나머지 배설물이 아니라 사실은 욕망의 근원적 실현물이었다 말씀한다. 우리가 불철주야 만들어 온 것이 시간이 지나 버림받았다고 해서 우리 욕망도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태우고 소독하고 묻고 은폐해도 욕망은 대를 이어 질량보존되는 가장 명징한 진화물이었다. 쓰레기가 ‘검고 희고 붉고 푸르고 노랗고 알록달록 반짝이기도’ 하는 것은 우리 욕망이 그토록 다채롭고 아스라한 ‘무지개’ 빛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중 ‘푸른’ 빛만이 도깨비로 승천한 것은 우리의 하늘과 바다가 아직까진 의심없이 푸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땅에서 수없이 태워버린 욕망의 잿더미는 어디로 날아서 어디로 돌아오는가. 이 책을 읽는 내내 유독 불편했던 건 특이하게도 심리적 호흡과 영안의 시야였다. 목에 시커먼 매연이 넘어가듯 온 시간이 매캐했고 눈앞은 뿌옇고 따가왔다. 우린 우리가 버젓이 만들어 온 것들, 그것으로 이루어진 세상에 한참이나 무지했고 무례했고 오만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사법은 낯선 감정들로부터 기인하는 낯익은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메타포를 함의해 왔던 황석영 소설의 힘인 것이다. 그는 (늘 그래왔듯) 작품의 출간시기 역시 마치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매 시기 무엇보다 간절한 사회, 정치적 요구를 수용해왔다. 한마디로 지금 이시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소설을 현자처럼 제시해 온 것이다. 한국분단 60주년, 경부고속도로 40주년을 맞은 작년의 시점에 한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지역, 부와 명예를 단적으로 제시하는 강남땅의 형성사를 통해 개발논리에 짓밟힌 국민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하지 않았던가. ‘황석영 가는 곳에 가지마라’는 세간의 소리는 어딜가든 그가 투철한 시대의식을 잊지 않고 역사의 현장을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의 방증일 터이다. 이번에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가 지나칠 수 없었던 현장에선 무엇이 그의 불꽃을 태우게 하였을까. 혹시 붉은 불꽃보다 더 뜨겁다는 푸른 불꽃에 몸과 마음이 한껏 데인 것은 아닐까. 저 멀리 우주 별에서나 볼 수 있다는 ‘낯설은’ 푸른 불꽃이 그의 헛헛한 가슴에 기어이 ‘낯익은’ 풀꽃을 피우게 한 것은 아닐까.



인연의 진실, 이름의 상실


   소설은 열네 살 소년이 엄마와 쓰레기트럭을 타고 꽃섬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부로서 일주일중 가장 싫어하는 날이 바로 재활용 쓰레기 분리 수거날이다. 그날만은 남편이 내편으로 보이는 날이기도 하다. 지난 설 명절 때 집집마다 택배로 도착한 박스들이 대거 방출된 그날은 흡사 또 다른 아파트 건설현장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인가 깜빡 잊고 쓰레기를 다음날 새벽에 긴급히 배출하던 중 나는 말로만 듣던 쓰레기트럭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온다는 스티로폴, 플라스틱 수거차량은 쓰레기라기 보다는 건설자재를 실은 공사용 트럭같았다. 대부분 먹거리 포장용인지라 나는 저 많은 분량을 누가 다 먹었을까만 생각했지 그 차량이 어디로 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소년과 엄마가 올라 탄 트럭은 이처럼 잘 분리된 쓰레기가 아닌 음식물을 포함한 각종 쓰레기가 혼합된 차량일 터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부엌 한 켠에 쓰레기를 일률적으로 투입하는 배출구가 달린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다. 아파트 뒤편에 가면 그렇게 통로를 타고 내려온 온갖 쓰레기가 집결되는 장소가 있었고 트럭은 그것들을 원형그대로 수거해갔다. 내 기억으로 그땐 지금처럼 쓰레기가 많지도 않았고 음식물을 버리는 사람도 적었기 때문에 (아무리 섞여 있었다지만) 총체적인 냄새도 덜했다.(견딜만했다) 같은 단지 친구들과 그곳에서 트럼프 카드를 발견하곤 우리끼리 환호성을 지른 적도 있다. 딱부리 모자는 그 시절의 종합트럭 한 켠에 몸을 실은 게 아닐까. 처음 나는 어린 시절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마을 소독차량을 신나게 뒤 쫓아가는 심정이 되었다. 차량 꽁무니를 따라가는 어린아이마냥 소설의 도입은 흥미를 자극했고 기대감을 드높였다. 어쩐지 남들이 버린 쓰레기를 낱낱이 구경이라도 할 것 같았달까.

    아마도 쓰레기에 함께 실린 모자의 서글픈 처지보다는 쓰레기 세상을 확인하려는 설레던 마음이 많았던 듯하다. 그건 남들은 뭘 먹고 어떻게 사나 알고 싶은 속세의 심정이었다. 쓰레기를 보면 그 사람의 생활수준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영수증을 보면 경제능력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참으로 잘 배워온 속물근성에 다름없었다. 그런 심보가 사라지기 시작한건 그들 모자가 아수라반장을 만나고 부터였는데 어린 시절 마징가 제트, 로버트 태권브이, 마루치 아라치에 열광했던 나로선 그의 얼굴이 두말없이 불안과 불행의 캐릭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서야 그가 낯익은 세상과 낯선 세상을 동시에 살아가는 우리 시대 자본에 훼손된 보통시민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작품엔 아수라반장처럼 인물의 실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두어 번 등장하는 딱부리의 본명 최정호와 땜통의 본명 영길은 이 작품과 상관없는 서류상의 실명처럼 낯설기만 하다. 어른들은 주로 헬맷, 장갑, 마스크, 각목등으로 도구화된(산업화 도구들로) 인상착의로 대신하고 아이들은 개성이 강조된 재미난 별명으로 일관한다. 딱부리, 땜통, 두더지, 깨비, 메뚜기, 헌데같은 별명은 아직 도시화, 디지털화되지 않은 아나로그적 낭만성, 순수함, 서정성을 자극했다. 아직 예능이 르네상스를 맞기 전 정극 코미디 상태라고 할까. 김서방네 식구들은 서울가서 찾는다는 그 김서방의 불특정 다수가 지닌 보편성을 상징하고 그들 식구와 교신하는 빼빼엄마는 무당의 혼령을 익살스럽게 풍자한 동화적 캐릭터로 느껴졌다. ‘샛강말, 여울목, 버드나무, 땅콩밭’등의 전원적 배경은 오염되지 않은 꽃섬의 원형적 언어로 이해되었고 ‘부대, 본부, 소세지, 초코볼, 벽돌게임, 슈퍼마리오’등은 군대문화, 미국과 일본문화에 대책없이 노출, 포섭되던 내 80년대 초등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후리가리, 시라이꾼, 야코, 씨레이션’등의 관용된 구어체로서의 외래어는 시대상을 환기하는 황석영 소설의 중요한 수사법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렇듯 등장한 모든 인물들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저씨, 엄마, 아줌마, 형, 동생, 꼬마라는 세대적 구분만 있을 뿐 역할 및 관계의 구분은 경계가 흐릿했다. 이들은 원래 꽃섬에서 삼대가 모여 살았다는 김서방네 식구 스무 명처럼 (거울처럼 반사되어) 결국엔 동질성을 가진 공동체로 보였달까. 작가는 인물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름을 짓지 않았다 말했지만 쓰레기 마을에 기거한 그들은 외려 이름하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와 주관적 인연을 맺은(맺어온) (뗄래야 뗄 수 없는)친근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언젠가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의 작품은 불교의 연기론을 배경으로 하였다는 말씀을 기억한다. 연기론(緣起論)은 세상 모든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불교철학이다. ‘연기’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연이라는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이다. 김서방 네와 딱부리 네와의 관계, 그들 모두와 쓰레기 모두와의 관계, 그 쓰레기 세상과 지금 우리 세상과의 관계, 그것은 막연한 인연의 소설적, 우발적인 그물망이 아니라 필연적인 자본주의 그물망 내에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황석영식 세계관의 반영인 것이다.


                   온 세상의 산 것들과 물건들이 너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마라.  -207p


    하지만 책을 덮고 시간이 좀 지나자 나는 그들이 개별적 존재로 기억되지 않았고 먼 훗날 쓰레기섬에 다시 피게 될 풀꽃들의 미래만 어렴풋한 잔상으로 남았다. 나는 역시 내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그림만 기억하는 이기적인 독자였다. 불꽃도 풀꽃도 모두 내 탓은 아닌 듯했는데 이 부채감, 죄책감은 무엇이었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김서방네와 딱부리네, 빼빼네에게 미안했던 건 역시 그들이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이 다시 비현실적으로 인식되면서 이번엔 내가 아수라백작이 되어 버린 듯했다. 이 작품은 물질적 쓰레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거울을 자각하게 하는 서사였기에 지난 시절 쓰레기와 난지도를 우리사회의 거울로 삼은 시인들을 생각나게 했다. 이른바 난지도 문학의 대표시인 신현봉은 쓰레기처럼 난지도에 도착해 “일찍이 내 석자 이름을 묻고 잘 썩어진 나는 새보다 가볍게 가스처럼 소리없이 날아오르길 바랬다”(쓰레기, <난지도>, 1994)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쓰레기와 함께 썩고 있는 난지도가 “쇳덩이도 녹일 지독한 눈물을 흘리며 화려하게 다시 태어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간절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난지도는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어 쓰레기같은 정신상태가 된 사람과 동일시되었다. <난지도 가는 길, 1998>로 유명한 정태준 시인은 “검은 욕망이 불길로 솟아 오르는 곳”인 난지도로 가는 사람들은 “도야지가 달려드는 주택복권 꿈을 안고 난지도로 떠”난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무지개가 떠있는 난지도로 가는 길에 “모두 이름을 잃어 버린다”고 익명이 된 주체의 슬픔을 강조했다. 딱부리가 꽃섬에 도착해 가장먼저 의문을 가진 것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들이 모여드는 이곳에서 과연 내 이름이 쓸모있는 것일까, 였다. 이름이 곧 인생과 동격화되는 것은 이름의 필요성, 실효성, 대표성에 기인하지 않을까. 쓸모없는 곳 천지에서 이름은 자기기능을 상실한다. 이름은 정상적인 가정과 학교, 조직사회에서 필요한 표식이지 쓰레기 섬에선 버려진 쓰레기보다 못하거나 겨우 쓰레기만한 장식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딱부리는 여러 별명 중 쓰레기 줍듯 취사선택해 자신의 이름을 쟁취한 케이스니 꽤 진취적, 합리적, 능동적인 소년은 아닐까. 어짜피 우리네 인생은 최고로 바르게 살아서 호례호식(본명 최정호답게) 하며 살기는 어렵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현명한 처사가 아닐까.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별명이 부끄럽거나 맘에 들지 않아도 자기속성에서 근거한 별명을 인정하는 정직성을 보여준다. 최정호를 거부하고 딱부리를 택한 주인공은 나라에서 새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곳에 들어갔다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새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는 어른들의 허울좋은 위선을 향한 역설적 은유는 아니었을지.



송신자와 수신자들


    작가는 이렇듯 시종일관 (자신처럼)세상이치를 일찍 깨달아 열 여섯 살로 보여야 했던 열 네 살 딱부리의 시선으로 꽃섬의 일상을 나열하고 사건을 주시하며 현상을 사유한다. 때문에 화자가 딱부리는 아니지만 열네 살 딱부리의 시점과 육순이 넘은 작가의 관점은 동일시된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논리적으로 나와 동세대인 딱부리의 행보가 더욱 와닿아야 했지만 종종 그는 나보다 어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어쩐지 동생격의 땜통의 시선이 가장 인상깊었고 마음에 끌렸다.(그 때문에 가슴이 많이 아팠다) 말하자면 땜통은 쓰레기 마을의 어린왕자가 아니었을까 싶어서. 땜통은 딱부리가 아버지의 폐품수집을 대물림하듯 아수라 백작의 ‘왼쪽 뺨을 거의 덮을 정도로 푸르고 큰 점’이라는 치명적 외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였다. 땜통은 왼쪽 뒷머리의 흉측한 화상때문에 허름한 야구모자를 쓰고 다닌 아이였다. 땜통은 딱부리에게 그 동네에서 자기만 알고 자기만 볼 수 있는 ‘파란 불’을 기쁘게 자랑한다. 땜통은 딱부리형도 ‘쓰레기차에서 뚝딱하고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꽃섬을 금은보화가 가득한 도깨비나라쯤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이 책에서 김서방네 식구와 접신하는 빼빼엄마와의 인연도 흥미로왔지만 가장 눈길이 가던 관계는 바로 땜통과 김서방네 막내 꼬마와의 우정이었다. 땜통은 유일하게 그들 도깨비 나라에서 송신하는 푸른 불빛을 수신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인간계의 드문 메신져로 보였달까. 우주나 다른 차원에서 전해오는 메시지를 수신하고 번역해주는 채널러라고도 볼 수 있다. 나는 가장 어린 친구들이 주고 받는 메시지가 곧 이 소설의 핵심이라 생각되었고 그들의 소통으로 전해지는 에너지야말로 이시대의 황석영 소설이 구현하는 문학적 구원이라 믿었다.

    땜통은 아프다고 말하는 김서방네 꼬마에게 ‘쓰레기장에선 온갖 것이 다 나오므로 뭐든 구해올수 있다’고 말한다. 가슴저리도록 순수한 그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통찰이 아니던가. 쓰레기는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이고 우리는 그것들을 모두 버린 바 있다. 그러므로 쓰레기는 인류의 모든 노력의 총체인 것이다. 신현봉 시인은 ‘쓰레기는 못쓰는 것의 대표이지만 쓰레기는 처음부터 쓰레기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고마움을 느낀 꼬마는 여러 번 ‘너희들 곁에 늘 같이 살고 있다’고 답을 하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입장은 세상사는 외로움쯤은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에서도 저런 말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인물들은 쓰레기라는 절망의 산앞에서도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땜통은 힘들고 외로울때 꼬마를 떠올리며 김서방네가 살고 있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까지 말한다. 작가는 김서방네 식구가 살았던 원래 꽃섬의 생태와 환경, 농촌모습을 전하며 그곳이 곧 우리가 거쳐온 고향이자 앞으로 돌아가야 할 이상향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지금의 지옥도 예전엔 천국이었으니 그러므로 지금 지옥도 다시 천국이 될 수 있다고.

    김서방네 식구가 메밀묵을 좋아했다는 것은 자연에서 채취되는 식물로 가공하지 않고 손수 만들어 온 식구가 나누어 먹는 소박한 온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할아버지는 어렵게 메밀가루를 구해와 빼빼엄마와 함께 전통적인 방식으로 메밀묵을 만들고 백년 묵은 버드나무아래서 감사의 눈발과 하늘과 강물을 벗삼아 김서방네에 제의를 올린다. 메밀묵을 만든 할아버지는 말했다. ‘요즘 세상에 안 하게 된 짓이 어디 한 두가지냐’고. 할아버지는 ‘안하게 된 짓’을 부러 시범보여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이 ‘안해도 되는 것’, ‘안해야 될 것’은 아니라 증명하시는 듯했다. 김서방네 식구들은 말한다. 우리는 꽃섬에서 ‘오래오래 살았다’고. 그 사실을 알고 계신 할아버지는 거든다. 저들이 원래 ‘꽃섬의 임자’였다고. 그 말씀은 꽃섬은 꽃섬을 가장 꽃섬답게 하는 사람들이 주인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땜통과 딱부리는 김서방네 꼬마손에 이끌려 꽃섬이 원래 꽃섬답게 아름다웠던 풍경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구경하고 돌아온다. 샛강이 흐르고 버드나무 우거진 그 곳에선 돛을 단 조각배가 떠다니고 어미 소가 풀을 뜯으며 풀꽃이 피어난 강가에 오리가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한가롭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연상되던 이 장면은 어쩐지 조금 슬펐다. 이제 우린 그 시대로 돌아갈순 없는 것일까. 착찹함을 추스르기도 전에 사계절 그곳의 자연에 순응하며 농사짓던 그들은 가을 내내 일해서 씨앗을 얻었다고 자랑한다. 여기 씨앗이 자랑이 되는 이유를 보라. 꼬마의 전언은 곧 작가의 예언이자 우리 모두의 희망이 아니었던가. 우린 왜 봄이 오면 싹이 튼다는 사실을 봄에만 깨닫는가. 왜 봄이 아닐 때만 봄을 기다리는가. 봄은 확실히 좋은 것이 분명한데 왜 그 좋은 것을 좋아졌을 때만 기억하는가. 아니 나빠졌을때만 그리워 하는가. 그렇게 좋았다면 더 좋도록, 늘 좋도록 우리 다음 세대도 같이 좋아지게 노력할 순 없었는가. 


         저건 풀꽃들 씨앗이야. 우리 식구들이 모두 거두었어. 봄이 오면 꽃섬의 흙이 있는 어디에나 뿌릴 거다. -137p


    슬프게도 이 작품에서 땜통은 쓰레기 폭발로 인한 화재를 피하지 못하고 유일하게 죽어지는 인물이었다. 지난달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주상복합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는 포이동 판자촌에서의 화재소식을 접했다. 그들의 주거지 몇 십 채가 전소되었는데 재산피해는 일억도 되지 않았다. 강제철거를 당할까봐 인근 학교로 피신하지도 못한 채로 최근 이어지는 장마까지 견디고 있었다. 범인은 어이없게도 자전거타고 놀러온 어느 초등생이었고 소년은 재미삼아 스티로폼에 불을 한번 붙여본 후 자전거 타고 돌아갔을 뿐이었다. 소년이 판자촌에 살고 있는 아이였을까. 쓰레기 구역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쓰레기가 돈이라는 걸 안다. 땜통이나 딱부리를 보면 쓰레기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절로 터득하게 되는 그 세계 법칙쯤으로 이해되는데 말이다. 나는 어떤 책을 읽으면 꼭 그 책에 어떤 내용과 거의 유사한 사건이 신문이나 방송에 등장하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예를 들어 소설에서 주인공이 거리를 돌면서 자판기의 동전을 훔쳤다 하면 바로 다음날 같은 사건이 뉴스에 뜨는 식으로) 판자촌 화재는 꽃섬의 화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어쩐지 불장난을 일으킨 그 소년 때문에 땜통이 죽은 듯이 느껴졌고 결국 초등생과 같은 자식을 둔 나 때문에 땜통이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최소한 무관하단 생각은 할 수 없었다. 판자촌 화재 때문인지 땜통의 때묻지 않은 소년성 때문인지 부모에게 버림받고 교육의 사각지대에서 쓰레기로 성장해온 짧은 인생이 쓰레기 더미에 묻혀 쓰레기처럼 소각되는 운명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나를 죄스럽게 했고 그렇게 당하는 죽음이 많이도 서러웠다. 쓰레기더미 속 돈뭉치는 일찌감치 땜통의 운명을 예감한 그들이 선사하는 마지막 선물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땜통이 죽음으로 해서 더 이상 김서방네 꼬마와의 교신은 끊긴 것일까? 이제 꽃섬의 원형은 어디서도 추억되지 않는 것일까? 그리움의 인연은 전승되고 그리워 하는 방법은 복제되는 것이 아닐까. 다행히도 우리에겐 딱부리가 있었고 딱부리에겐 죽은 땜통이 예전 꼬마의 역할을 해주리라 믿어본다. 딱부리가 죽으면 딱부리가 누군가에게 김서방이 되는 것이라 믿고 싶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땜통처럼 꼬마처럼 이 세계의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꽃섬의 원형을 송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땜통이 꽃섬 아이와 우정을 나누었다면 빼빼엄마는 먼저 간 혼령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종의 무녀였다. 이를테면 김서방네 식구들이 병이 났을때 제수음식을 마련해 굿거리를 해주는 역할이랄까. 그녀는 자주 선조들의 목소리로 불호령을 내리기도 하고 노랫가락을 읊으면서 인생의 깨달음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녀의 헛소리는 만물상 할아버지의 충언과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생생한 목소리로 남았다. 특히 ‘여기 니들만 사는 줄’ 아느냐며 ‘니덜 새끼 다 없어져도 세상은 그대루’라는 외침은 물신에 지배당한 우리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꾸짖는 작가의 간곡함으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작품 후반부에 딱부리의 환상으로 전개된 슈퍼 마리오 게임의 한 장면 역시 작가의 시점을 대리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환상 속에 깜짝 등장한 김서방네 할아버지 또한 작가의 마지막 당부를 의미한다고 여겨졌다. 딱부리는 게임 속에서 자본주의가 ‘이것은 무수하게 반복되는 행진이며 최대의 성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전자게임과 같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고 김서방네 할아버지는 점수를 따기 위해 더 이상 성문으로 들어가지 말 것을 유언처럼 조언한다. ‘너희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게 되고 너희가 없어지면 우리도 없어지는’거라는 말씀은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어 서로 의존하여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므로 그렇더라도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감동으로 내려앉았다. 작가는 관계와 인연, 그리고 절망속에서도 그로 비롯된 소통을 망각하지 말라는 당부를 재차 강조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쓰레기다운 쓰레기, 사람다운 사람


    요즘 공교롭게도 젊은 작가들의 작품과 육십대 이상 문단의 대가들의 작품을 번갈아가며 동시에 만나게 된다. 젊은 작가들이 제공하는 상상의 에너지가 있고 노년의 작가들이 선사하는 웅숭깊은 메시지가 있다. 황석영 작가를 앞세워 그 비교대상으로 젊은 작가들을 폄하하거나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들추어 새삼 황석영 작가의 대단함을 주장하고 싶진 않다. 그건 독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고 이미 황석영 작가는 그런 평가가 의미 없는 분이다. 다만 이번 작품으로 만년문학의 시작을 공표하고 기존의 성과를 다 불태워버린 폐허의 장소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그 잿더미와 함께 다음 세상의 풀꽃의 씨앗을 발견한 작가의 짙은 연민에 고개는 숙이고 싶다. 문학은 기록이면서 기억매체라 하였다. 문학을 통해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것만이 아니라는 걸 이번 독서를 통해 깨닫는다. 엊그제 즉각적인 인터넷 검색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낮다는 연구결과를 보았다. 새로운 매체가 기억의 방법, 기억의 과정 및 질량마저 바꾸어 버린 것이다. 결국 자본이 우리에게 단계적으로 주입한 건 기억의 매립이요, 가치의 소각이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마치 새해 첫날 검푸른 동해의 수면위로 붉게 타는 태양이 서서히 깨어나듯 한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을 경험했다.

   
 
새마을 모자를 쓴 아버지와 머릿수건에 몸빼 입은 어머니와, 흰 수염의 할아버지며 할머니, 낡은 양복차림의 큰 아버지, 예비군복 입은 외삼촌,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이모부부, 고모부부, 사촌형제들, 형들과 누이들, 그리고 식구들 중의 막내꼬마가 나타났다.    -133p
 
   

    오래전부터 늘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그분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위로 다시 기다렸다는 듯이 빙긋 미소짓게 되는 또 하나의 장면이 겹쳐졌다.

   
 
나뭇결이 갈라지고 터진 절굿공이, 끝이 모두 닳아버린 수숫대 빗자루, 뒤축이 떨어져나간 남녀 고무신 한 짝씩,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 쪼개진 물소뿔 마고자 단추, 부러진 곰방대, 이 빠진 참빗, 실 밥터진 골무, 손잡이가 반질반질한 참나무 도끼자루, 옻칠 벗겨진 실패, 타다 남은 부지깽이, 귀퉁이 떨어진 밥주걱, 앙증맞은 나무 팽이 따위의 물건들 가운데 불에 그을렸거나 반쯤 타버린 것도 있었고 말짱한 것들도 있었다.    -224p
 
   

     
    저들은 누구보다 사람다웠고 이것들은 무엇보다 쓰레기 답지 않았다. 그래, 저들같지 않은 우리는 사람다운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한번도 쓰레기 다운 것을 쓰레기로 버려온 것이 아니라는 뜻만 같았다. 많은 사람들, 많은 시간들, 더 많은 추억들, 더 아픈 물건들이 모두 쓸려 가버리고 폐허가 된 내 가슴에 그들이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새겨지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중에 ‘녹이 파랗게 슨 은비녀’는 오래전 내 할머니가 보물처럼 간직하던 물건이었다) 쓰레기 이야기였지만 내게 남겨진 건 ‘서루간에 정들어서’ 버릴 수 없었던 아니 내가 오래전에 버렸다고 생각된 그래서 결국 사라진 모든 쓰레기 아닌 것들이었다. 작가는 사람이고, 시간이고, 공간이고, 물건이고 이 모든 사라진 것들의 영혼을 달래주려 했던 것이고 그럼으로써 우리 살과 뼈를 관통하는 무형의 에너지를 촉발해준 것이었다. 문학에서 기억을 복원하는 일은 구원이고 치유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 생의 기운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글로써 상기되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작가의 기억 저 너머의 세계는 얼마나 소중한 문학유산인가.

    황석영 작가는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그래서 당연히 잊혀진 것들, 그 실용적 가치가 소멸된 것들, 사소해보여 남루한 것들을 문학으로 복원해 이렇듯 무형의 위엄을 보여준 것이다. 그가 환기해준 쓰레기의 기억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 온 것은 쓰레기가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치 쓰레기를 생산하려고 무언가를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우리는 버려야 할 것을 키우고 버리지 말 것을 버려오지 않았을까. 그렇담 여지껏 쓰레기가 된 것들은 다시 주워들고 쓰레기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들을 버리면 되는 걸까. 그러니까, 중요한건 버리고 안 버리고가 아니라 무엇이 쓰레기인지 똑바로 아는 것이 우선일 터이다. 이제 우린 어떤 쓰레기를 버릴 것인가.

    메트로폴리스라는 초대형 우주선에서 배출한 쓰레기가 가장 많은 나라가 어디였던가. 미국이다. 전 세계에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는 어디인가. 중국이 되었다. 지난 삼십년간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를 지진처럼 뒤흔들고 있는 중국 때문에 위기를 느낀 미국은 실패와 교착만 반복하는 다자간 협력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다시 연대하자며 세기말적 자본주의의 위기와 불안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느 한쪽이 지는 제로섬이 아닌 모두 다 이기는(것으로 보였던) 윈-윈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럴듯 해보이지만 이는 계속 끝간데 없이 성장과 발전만 우선가치로 두자는 국수적, 퇴행적인 시각으로써 반문화적, 반환경적, 반평화적 결론임이 불을 보듯 자명하다. 슬프게도 서구 자본주의와 민주화, 근대화를 최단시간에 이룩한 우리는 적어도 저들간의 싸움에서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에 속한다. 올 초에 터진 원전폭발과 방사능 오염위기도 일본을 안전모델로 삼은 우리로선 뜻밖의 악재였다. 오년 전 원자력 홍보관을 설계할 당시 우리는 아오모리의 원전과 홍보관까지 돌며 샅샅이 벤치마킹했다. 일본은 안전을 신앙처럼 학습해온 나라였고 그들의 안전 홍보 및 체험 교육의 수준은 지금도 세계 제일이다. 쓰레기에 누구보다 강박적인 나라 일본이 배출한 원자력의 쓰레기는 무엇을 의미하나. 그대로 우리가 공들여 만든 것들이 더없이 낯설게 돌아오는 그러나 그 역시 우리가 추구한 것이기에 알고 보면 낯익은 세상의 가장 소름끼치는 실례일 것이다. 인간은 자본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산할 수 있을진 몰라도 그것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원적으로 통제해야 할 것은 미래에너지의 시스템이 아니고 원래 쓰레기의 모태가된 욕망의 발전소가 아니겠는가.

    다시 돌아와 소설이라는 순수문학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는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의 욕망의 찌꺼기, 쓰레기 같던 탐욕, 시기, 질투, 그리고 나를 옥죄고 목조르던 성과위주의 도전의식, 비교와 원망에서 허우적거리던 오래된 열패감 같은 기억들을 모두 불태워버린 듯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오래된 컴퓨터를 리폼하듯 바이러스 먹은 모든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운영체제를 다시 셋팅해야 할 시점처럼 한순간 정화된 희열감을 맛보았다. 내 기억의 쓰레기는 어디로 날아간 것일까. 우리가 세계를 바꿀 순 없겠지만 세계가 주입하는 욕망만은 세계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욕망을 모두 버리고 도인처럼 살아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오늘처럼 우리가 버려온 것들을 확인하며 앞으로 우리가 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 버려야 할 것들은 서로 묻고 답하며 나누고 싶다. 그래서 잊지 않고 싶다.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정말 쓰레기로 마땅한 것들만 쓰레기로 배출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쓰레기가 쓰레기 다워야 세상이, 나라가, 사람이 사람다워진다는 걸 통감하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번 책을 덮고서야 내가 알던 난지도가 난지(亂地)의 섬이 아닌 난지(蘭芝)의 향기를 상징하는 섬이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꽃섬’이 쓰레기섬의 역설적 은유가 아닌 원래 자신을 함축하는 실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월이 지난 지금 다행스럽게도 그 이름은 꽃피고 새우는 초지(草芝)와 난지(蘭芝)의 풀꽃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딱부리의 바람과 예언대로 그곳은 질기고 푸른 생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다. 나 역시 불모의 난지에서도 희망의 불씨가 풀꽃으로 피워 오른 것처럼 모질게 흔들리는 바람앞에서도 질기게 살랑이는 풀씨가 되고 싶다. 아니 풀씨로 살고 싶다. 혹시 언젠가 풀꽃이 되지 못한다 해도 나는 가을 내내 열심히 씨앗을 거두어 다음의 봄에 뿌릴 준비를 하는 인간이고 싶다. 그렇게 부지런히 거두고 거두어 내가 만들어 놓고도 정작 낯설은 내 인생의 꽃섬 하나 만나는 그날을 가만히 기다린다. 그 꽃섬에서 내가 힘겹게 버리고 태우고 묻어온 내 인생의 모든 쓰레기들에 애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제 한류가 낯익은 풍경이 된 이 시점에 출판 7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의 역량에 가장 근접해있는 황석영 작가의 수상소식도 함께 조용히 기다려본다. 부디 그 소식이 전 세계에 낯설은 뉴스가 되지 않을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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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제1회 웹진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장욱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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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최상의 질문

   소설집은 대개 나로 하여금 다시 현실로 복귀하도록 하는 유용한 장치가 되어주었다. 특히 장편은 좀 더 비현실에 오래 머물게 하는 반면 단편은 분절음을 통해 약속된 시간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특히 한명의 작가가 아닌 여러 명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은 더 그렇다. 도무지 앞선 작가에 대한 적응시간을 허락하지 않고서 다음 작가로 이어지는 무례함 속에서 너그러움, 유연함, 편안함을 유지시키긴 어려운 법이었다. 그 중에서도 문학상 수상집은 좀 더 피곤하고 그런 와중에 수상의 기준이 ‘젊음’이나 ‘가능성’일 경우엔 상당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내 나이에) 나이든 어르신보다 젊은이를 만나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 것과 같은 이치다. 확실히 나보다 젊은 사람의 글은 힘들다.(그렇다고 나이 많은 사람이 더 쉽다는 뜻은 아니다) 어렵고 쉽고를 떠나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두 달 전 읽은 소설집 <깊은 밤, 기린의 말>의 작가는 한명 빼고 모두 나와 같거나 나보다 한참 위였다. 그들의 소설은 살아온 시간만큼 무겁고 견뎌온 세월만큼 깊숙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들이 자연스레 나를 위로하고 내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한다는 것을 독서하면서도 실감한다.

   한 달 전 웹진문학상과 성격이 비슷한 <젊은 작가상 수상집>을 읽었을 땐 작년의 같은 소설집보다 힘들었다. 그들의 에너지가 내게로 전해와 내 몸으로 흡수되기엔 거리가 있어 보였고 문제는 (그들이 아닌)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부담이 피부로 체감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작품성과 내가 받은 감동의 수준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이번 <웹진 문지 문학상 수상작품집>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소설집은 단편의 모음집이기 때문에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의 작품을 어떤 순서로 엮었는지에 따라 개별하는 각 단편의 의미가 다르게 전달된다고 느껴왔다. 이번 수상집에 수록된 5월 선정작 최제훈의 <괴물을 위한 변명>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나는 이 작품을 각기 다른 소설집을 통해 세 번째 만나게 되었다. 작가와 작품이 똑같았지만 그때마다 느낌은 조금, 혹은 많이 달랐다. 결과적으로 매번 새로웠다. 단편들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소설집에선 유기적인 에너지를 생성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같이 엮어진 작가들과의 공동체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작가들이 ‘한국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문학적 가능성의 최대치’를 발산하였다고 한다면 당연히 독서에너지가 많이 소모될 수 밖에 없고 그런 만큼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문단에서 말하는 가능성의 최대치라는 기준이 일반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란 퍽이나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최대치는 곧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 최상의 질문을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축제의 장이 곧 이번 수상집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경험과 연륜이 많은 작가들이 주로 대답형, 깨달음의 단편을 송신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젊은 작가는 아직 더 질문해야 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부지런히 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가끔 휴대폰에 MMS수신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뜰 때 나는 송신자측의 에러라기 보다는 수신자측의 과부하가 원인이라 생각한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질문이 힘든 것은 질문을 받는 자의 역량인 것이지 보내는 자의 결함이라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질문은 아마 스스로도 정답을 찾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그것은 앞으로 자신과 독자들이 같이 찾기를 바란다는 부탁의 의미가 아닐까. 질문이 훌륭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답이 얼마나 적확하느냐와는 다르다. 좋은 질문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또 문학에서 질문은 대답할 수 없어야, 아니 어쩌면 평생 그것에 답하기 위해 더 살아보아야 할지도 모를, 그러고도 답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를, 그런 것이 질기도록 우리 생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질문이 아닐까. 책을 덮고 결국 마음을 열게 된 것은 내가 쏟은 에너지가 살면서 다양한 질문의 무늬로 각인될 듯 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독특한 질문들의 전시장이었고 시너지는 다시 일상을 시작할, 그러면서 답을 발견하고자 두리번거릴 동력이 되는 관람이었다. 물론 질문이 다소 난해해 그 반발심리로 오용과 오독이 얼마간 두렵지 않은 운좋은 기회가 아닐까 싶지만.

  이 책에 실린 열 한편의 작품은 웹진( http://webzine.moonji.com/ )이라는 인터넷 공간에서 독자와 소통의 기회를 가지면서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력들을 가지고 있다. 우선 편집상의 재치를 언급하고 싶다.





 

 

 

 

 

 


<인터뷰 QR 코드를 스캔하면 작가와의 인터뷰 동영상을 확인가능>

   각 단편은 앞머리에 평론가와 인터뷰한 내용을 싣고 있는데 QR코드를 스캔하면 바로 해당글의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똑같은 내용을 작가의 육성을 통해 전달 받는 것이 흥미로왔고 답으로 언급하는 내용들을 더 가깝게 확인할 수 있었다. (글로 보는 것과 전혀 달랐다) 종이매체를 통해서 다시 원래 순간이 재생되는 편집방식은 ‘<웹진문지문학상>이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웹진이라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1년 동안 심사의 과정이 중계되고 결과가 발표되는 문학상’이라는 취지와 특성에 잘 부합하는 전략이었다. 이른바 3D와 스마트폰 시대에 걸맞는 문학상의 재현이었다. 최종적으로 몰아서 이들 인터뷰를 들어보았고 글이 아닌 목소리를 통해 나는 그들이 질문하고자 하는 화두에 조금은 더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답하고 있었다. 무엇을 물어 본 것인지 자신들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의 핵심을 답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공교롭게도 살면서 우리가 묻어 온 것, 우연찮게 파묻혀 버린 진실, 혹은 기를 쓰고 진실의 부재를 메울 것들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들이 물어 온 것은 지난 시절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묻어 온 것이 아니었나 싶도록. 그들이 묻고(問) 묻은(埋)것, 그것은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구경만 하기엔 난감한 사안이었다. 서로가 얼굴만 맞대고 한참동안 말이 없을 확률이 많은 차원인 것이다. 그들은 왜. 우리는 왜. 나는 왜.



말할 수 없는 것을 ‘묻다’(問)

   열 한 편 중 대상으로 선정된 이장욱의 <곡란>은 이들 질문 중 가장 정곡을 찌르는 한 가운데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가장 어렵고도 가장 듣고 싶은 그래서 누구나 하고 싶지만 선뜻 주저하는 질문일 터이다. 이 작품은 소설가의 문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문 닫고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가장 크다고 느껴진다. 물론 대상의 아우라, 이장욱 소설의 노련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소재와 주제가 죽음을 말하는 소설가, 즉 작가로서 자신의 고뇌를 고통스럽게 전시하였기 때문이다. 이장욱은 진실과 허위가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을 최대한 길게 포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자에게 은밀한 힌트와 함정을 동시에 제시하면서 진실찾기 게임을 진행하는 유머와 재치는 이장욱 소설의 결말이 누구보다 궁금하도록 만드는 보기드문 특장이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그가 <고백의 제왕, 2009>, <변희봉, 2010>,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2011>등에서 보여준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장치가 작가가 조성한 어느 깊은 골짜기에서 결국 타협하는 인상을 받았다.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 오만스러운 것이라는 생각, 소설가가 죽음을 선택한 주인공을 구원할 수는 없다는 패배감, 섣부른 희망 같은 것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죽음자체의 풍경을 진짜 죽음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퇴락한 지방 소도시에 사는 여관주인 김상태는 ‘귀신잡는 해병대 출신’이다. 동네가 목란동이라 그곳은 ‘목란장’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김상태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귀신을 잡지는 못하는, 살다 별 꼴을 다보는 변변치 못한 중년남자로 등장한다. 목란장 202호에 자살의 모임을 제안한 소설가 고희성과 닉네임이 스몰, 코끼리인 그들이 모여든다. 이 작품에서 목란장은 전구하나가 나가는 바람에 곡란장이 되는데 곡란의 ‘곡’을 죽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골짜기(곡,谷)로 볼 것인지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 나오는 만곡(곡, 曲)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곡, 曲)로 들을 것인지는 사람마다 틀릴 듯하다. 그 어떤 의미의 곡이 되든 그것은 인생 최대의 환란(난, 亂)의 시간이 되는 것에 공감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가장 의미심장했던 대목은 그러한 곡란의 현실에서 소설가로서 고희성이 평소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는 사람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분이다.

   
 
죽음은 삶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 아닐까. 죽음은 죽음자체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만 충만한 것은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 의문은 고희성의 머리에 접착제처럼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   -29P

나는 소설을 씁니다. 소설을. 죽음을 대면하는 소설을 씁니다.  -45P
 
   


   자연, 문장에서 고희성을 이장욱으로 읽게 된다. 이들을 마치 연극무대 대하듯 몰래 지켜보는 김상태는 삶과 죽음에 초연했다기 보다 그것들을 무시하면서 일상을 버티는데 익숙한 오늘을 사는 대다수 소시민의 표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왕년에 귀신을 잡는 해병대 출신이었더라도 막상 자기 생에 들이닥친 죽음의 현장에선 의미없는 과거인 것이다. 죽음은 그것이 처해지는 입장과 그것을 바라보는 시점이 중요한 사안이 아닐까. 이 소설에서 김상태의 시선으로 전달되는 죽음의 풍경은 다소 우습고 지루하고 어이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가 고희성의 시선으로 관통되는 죽음의 풍경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자살로서)누구나 자신이 죽어야 할 이유는 타당하지만 타자가 선택하는 것엔 상대만큼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설가가 보기에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는 곧 살아야 할 이유와 동일했다.

   나는 평소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 여겨왔다.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좌절의 아픔이 클 것이고 그것을 해결해야한다는 의지또한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소설이 웃기면서 슬펐던 건 바로 죽고 싶은 욕망 끝에 그동안 버티고 있던 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림에 있었다. 그들이 연출하는 죽음의 풍경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에 다름없었다. 작가는 누가 죽거나 사는 것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그동안 죽는 것으로 삶을 택했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등장시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상을 지속하는 여관주인 김상태의 일상을 제시한다. 이들이 경험한 건 죽음의 허상일까, 삶의 실상일까. 각자가 견뎌내야 하는 고유한 자기 죽음의 무게, 낯선 자기 죽음의 풍경들만 남겨지고 우리는 무력감에 도취되어 죽음의 감각을 상실한다.

   이 작품을 읽고 나는 2010 이상 문학상 대상 수상작 박민규의 <아침의 문>을 떠올렸다. 물론 여관방에 같이 투숙했다가 다음 날 아침 유서를 남기고 함께 투숙한 사람이 죽어버린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라는 작품도 중첩되었다. <아침의 문>에선 인터넷 동반자살이라는 소재와 죽음을 택한 자의 시선, 죽음으로 달려가는 과정상의 불가항력적 에너지, 추상을 구체화한 스타일적 유머들이 언뜻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박민규 작가는 죽음의 끄트머리에 또 따른 생명의 탄생을 기묘하게 중첩시켰고 이장욱 작가는 그들의 선택에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 일말의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불친절한 결말이었다. 그는 왜 그 누구에게도 손길을 내밀지 않은 것일까.

  그러나, 죽음이 두렵다고 느껴질 때 내가 외우는 문장이 있다.

   
 
가장 두려운 악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에피쿠로스
 
   


   이미 2천 년 전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정면에서 극복하려 했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죽음은 죽음과 동시에 어떤 고통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든 죽음을 바라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 철학자의 가르침대로라면 어떤 소설가도 죽음을 대면한 다음 죽음이나 삶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장욱은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고희성은 여전히 묻는다. 그렇다면 자신은 소설가로서 죽음을 말할 수 없는 것이냐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냐고. 독자인 우리는 태연스럽게 대답할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려고 소설가가 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세상에 말할 수 있는 것들만 있었다면 아마 작가는 존재치 않았을 것 같다고. 우리끼리 말하고 나면 그만일거라고. 죽음 역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닐 것이며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말할수 없다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을 ‘묻다’(埋)


1. 매몰埋沒의 현장

   아마도 묻히는 쪽이 피해자가 된다면 그건 매몰당하는 일일 터이다. 한국 현대사에 매몰의 현장으로 선명하게 각인된 장소는 아마도 삼풍백화점일 것이다. 거리감은 있지만 칠레의 광부도 비슷한 느낌이다. 이 책에서 생이 매몰된 장소는 이국 만리 바닷가에서부터 시장터 붕괴되는 주택, 잠실 메인스타디움, 엄마의 자궁등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실체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보다 심층적인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매몰된 사람모두 각자 생을 부여잡았던 신념들이 누구보다 오롯했음을 알 수 있다. 어부의 노동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사이비 신교도는 교주가 죽어도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는 고집이, 학교 대표로 뽑힌 꼬마는 자기가 아는 모두에게 내 모습을 자랑하겠다는 포부가, 뱃속에서 살아남은 쌍둥이 소녀는 소중한 생명으로 존중받고 싶다는 본능이 강렬했다. 이들 모두는 누구보다 강했던 자신의 신념이 서서히 매몰되면서 육체적, 심리적 죽음을 맞이한다. 대개 동료 혹은 경쟁자의 매몰되는 순간을 자기 눈으로 확인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이 매몰되는 순간마저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정용준의 <가나>는 이미 익사하여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 직전의 시간을 복원해 내는 아련한 문체를 통해 생의 슬픔을 심연의 바닷속으로 침몰시킨다. 익명의 익사자가 숨지면서 죽음으로 가져가는 이별의 고통은 그대로 우리가 익사자를 관망하는 죄책감으로 이어지며 바닷바람을 동반한 서러움을 남김없이 주입한다. 바람과 함께 죽어가는 순간을 중계하듯 아름답게 그려내는 장면 구성이 인상깊었다. 정용준은 <떠떠떠, 떠>를 통해 익숙한 서사를 극적으로 몰아부치는 추진력을 확인한 바 있다.

   김성중의 <게발선인장>은 사이비 종교를 삶의 유일한 끈으로 여겨온 어느 할머니의 생의 애착을 그렸다. 외현으로 드러난 것은 할머니를 주인으로 둔 세입자 대학생과 할머니가 받들어 모시는 교주 노인을 통해 인간이 보여주는 맹목성의 긍정과 부정을 질문하는 형식이다. 할머니는 노인과 이웃의 배신, 재개발 시행으로 삶의 터전을 잃는 처연한 매몰자의 운명이 된다. 살면서 할머니가 잘못한 것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 밖에 없었다. 할머니에게 매몰이 색다른 구원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홍의 <나의 메인스타디움>은 80년대 대규모 국가적 축제에 동원된 어린 소녀의 심리변화를 통해 아무리 발버둥쳐도 손해를 입지 않고선 거대 메트로폴리스를 탈출할 수 없는 현대인의 서글픈 자화성을 반추하고 있다. 외국인을 향한 가식적인 친절, 눈에 보이는 성과, 남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조건들을 추억으로 매몰당하며 빠르게 지나쳐온 오늘에 당신과 내가 마주한다는 이야기는 올림픽 정신을 강요받고 자란 내 세대에게 익숙한 서사였다. 그렇게 보자면 내 세대는 단 한번도 교육현장에서 육체적, 심리적 매몰을 경험하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엄마의 뱃속에서의 최초 모태 기억을 극복하지 못하고 트라우마 속에서 고통스런 현실을 반복한다는 최은미의 <눈을 감고 기다리렴>은 흡사 성장소설의 언어를 한껏 과시하는 듯했다. 뱃속에서 쌍둥이로 태어난 나머지 소녀는 사람들이 형제의 피와 살을 통해 살아난 독한 가해자로 인식하지만 정작 생존한 당사자는 엄마의 자궁속에서 매몰된 것은 자신이 누려야 했을 당연한 생의 안온, 그 보금자리로서의 요람이었다 말한다. 이홍의 <나의 메인스타디움>과 최은미의 <눈을 감고 기다리렴>의 경우 주인공은 죽지 않고 계속 매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앞날을 살아갈 것을 예고하고 있다. 한번 사정없이 매몰되었다고 기억이 지워지거나 긍정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는 것. 사람에게 매몰의 추억은 곧 성장의 기억은 아닐까.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내가 새삼스레 환기하는 것은 생의 어느 시기에 예고없이 닥쳐오는 실체로서의 고립감이다. 사람이 어딘가 무엇으로부터 파묻힌다는 것은 필히 타의적인 외로움을 동반한다. 이것은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우리가 눈감는 날까지 누구에게나 동일한 생체반응이 아닐까 싶어서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듯 수많은 매몰된 현장을 털고 일어서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인 것이다. 그렇게 다시는 매몰되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생의 끈을 찾아 헤매는 것이 남은 생을 보장하는 일인 것이다.


2. 매장埋葬하는 사람들

   누군가에 의해 파묻히지 않고 직접 매몰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 채로 묻거나 혹은 우연에 의해, 때론 실수로 인해 그들은 시간을, 공간을, 사람을, 기억을 매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유의 <커트>는 '가위'가 제공하는 폭력의 기억에 천착한다. 이 작품에서 ‘가위’는 미용사가 최초로 획득한 자기방어의 도구였으며 최후까지 잡고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공격의 장치이다. 예상했듯이 가위를 손에 쥔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이들은 사회적 약자이면서 하나같이 빈곤층에 속하는 경우였다. 손끝의 고통을 잃어버린 딸아이와 그 딸아이를 버린 미용사, 그 아이를 받아 기른 미용사. 이들은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에 가위로 커트함으로써 생을 지켜내온 공통의 이력이 있다. 머리카락을 잘라 쓰레기로 처리하듯 그렇게 상처도 매장시켜 온 것이다. 상처를 매장하는 것은 이들 여성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이자 삶의 수동적 전략이었다. 황정은의 <옹기전>에선 특이하게도, 실제로 항아리가 매장당한다. <커트>에서 ‘가위’처럼 <옹기전>은 ‘항아리’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항아리가 실마리고 항아리가 함정이다. 어린 소년이 항아리 하나를 머리에 이고 무법자처럼 자기식대로 밀고 나가는 모습은 꼭 작가 황정은의 소설작법과 닮았다. 철거가 한창인 옆 동네에서 우연히 발견한 항아리가 매일 밤 서쪽으로 가면 다섯 개가 더 있다는 소식을 전해줌으로써 소설은 속도감을 더해간다. 하지만 어렵사리 도착한 서쪽 끝에서 그들 항아리는 늘 반복되 오던 전몰의 광경을 선사하고 우리는 (원래부터)구경꾼인 채 그 무엇도 그곳에서 건져오지 못한다. 공사꾼들이 쉬지 않고 매장하는 항아리는 문학이 환유할 수 있는 공사판 한국사회의 뒷모습일 터이다. 이 작품은 보다 본질적으로 확실히 매장하는 서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수상집이 전언하는 장소에 가장 근접한 작품일 수 있을 것 같다. 연쇄살인범이 자신의 가족과 지인과 자신의 인생마저도 매장하는 과정을 우발적 서사의 메타포로 그러나 무덤덤하게 연출한 정소현의 <실수하는 인간>은 역으로 우리가 그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해온 이력을 묻고 있다. 누군가 그들의 행복과 희망을 처절하게 외면하고 깊숙이 묻어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사람과 세상을 매장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냐 반문하는 것이다. 정소현은 단편의 서사에서 장편의 호흡과 드라마틱한 전개및 결말을 선호하는 작법이 감지된다. 이 작가의 장편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내가 대학생 시절에 ‘묻어버린 아픔’이라는 가요가 유행한 시절이 있었다. 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안타까와하던 청춘이 자신의 욕심을 가슴에 묻고 그 애절함으로 부르짖는 노래였다. 가사중반에 ‘변한 게 세상이라지만 우리 사랑 이대로 간직하며 먼 훗날 함께 마주 앉아 둘이 얘기할 수 있으면 좋아’라는 아픈 구절이 있다. 묻어버린 아픔이 먼훗날 행복으로 승화하는데는 오래 간직만 하고 사랑했던 순간의 기쁨만을 추억으로 새겨두는 자세가 필수적인 것이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은 상처를 묻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가슴에 묻는 방법을 배운 적 없기 때문에 남의 가슴에, 혹은 남의 장소에, 심지어는 남의 삶까지도 잔인하게 묻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 매장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사랑, 그 하나가 죽을만큼 절실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을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들은 남들의 가슴에 못을 박지는 못하지 않을까. 우리가 묻고 살아야 할 것이 나의 실수나 과오, 내가 저지른 탐욕, 복수의 결과뿐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매장하는 생을 중단할 확률은 없어 보인다. 나는 그 사실이 제일 슬프고도 쓸쓸했다.

3. 매립埋立의 꿈

   그렇다면 매몰되고 매장하는 이 고독한 세계에서 구멍난 그곳은 영원히 방치된 채 외면당해야 하는가. 누군가 파헤치고 깨끗이 묻어버렸다면 겉으로는 이상이 없어 보일지 모르겠다. 소중한 실체가 사라졌다 해도 시각적으로 무언가 사라졌다는 느낌은 받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이 화려하고 거대한 자본주의에선 하나둘 사라지는 모든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듯이. 이 책에서 젊은 작가들은 하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된 하나, 그 나머지 하나의 구멍을 메우는 방법으로 매립을 선택한 듯 했다. 언뜻 보기에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라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중요한건 나름대로 메우는 행위를 통해 조심스레 복원되는 우리네 현실일 것이다. 그 현실은 거의 진실에 육박하는 무게감을 조성한다. 어떤 책에서보다 이번 수상집에서는 현실을 메우는 방법이 독특했는데 나는 그것이 작가들의 내부 자아들간의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가적으로 동등한 대립항들이 그대로 소설로 노출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 옛날 이야기를 메우고, 자신이 잃어버린 놓쳐버린 관계를 메우고, 혼란스런 자아를 메우는 듯 보였다. 열심히 메워서 이루어진 것은 어느 한쪽의 완성이 아니라 여전히 완성되지 않는 같은 비율의 양쪽 동등함이었다. 저울로 잰듯 그들은 중립과 균형만이 서사의 목적이라 여기는 듯 했다. 그들이 전해준 저울위 팽팽한 에너지야 말로 다른 작품들이 허물어 놓은 거대한 구멍을 다시 채울수 있을 만큼.

   나는 최제훈의 <괴물을 위한 변명>을 『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과 『퀴르발 남작의 성』이라는 작품에서 만났으니 이번에 세 번째이다.『현장 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소설』에선 단연 가장 참신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고 외려 『퀴르발 남작의 성』에서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얌전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이번 수상집에서는 원래 이야기를 자기 스타일로 매립하는 솜씨좋은 기술자로 보였달까. 작가는 메리 셰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 재해석하는 과정을 서사로 이끌어 가면서 프랑켄슈타인이 괴물로 인식되기까지의 그 변질된 진실을 허구로 구성해낸다. 무언가 최초 원작에서 감지한 허점에 자신만의 논리를 덧대고 그 자리를 능숙하게 봉합해 완전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최제훈이 말하는 괴물에 대한 변명은 궁극에는 누가 괴물인지 질문하는 섬뜻함으로 남겨진다. 작가는 이야기 전승과정에서 진실의 누락 및 수정 여부를 허구로 추적, 심문하는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그는 괴물이라는 환상에 대한 개념 사용여부와 목적 및 이용 행태는 모두 우리 인간의 몫이었음을 주장한다. 가장 극적인 논리는 박사의 괴물적 자아가 곧 괴물 프랑케슈타인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슬몃 그동안 우리가 보고 떠들어온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은 우리안의 온갖 추악한 욕망과 허영, 광기의 조각들을 한데 묶어 놓은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아닐까. 이 작품을 세 번 읽으면서 얻은 깨달음은 누구나 자신속에 자기가 만든 괴물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최제훈 작가에 괴물조각이 소설이라는 문학으로 바느질되어 탄생한 것이라면 우리들에게도 내재된 괴물조각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완성되리라 하는 타당한 변명을 내밀수 있었다. 결국 그는 자기속의 괴물, 또 다른 자신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 괴물을 깨끗하게 매립했고 그것의 결과는 꿈처럼 이루어졌다. 이제 그가 창조한 괴물을 우리에게 비추어 볼 때가 아닐까.

   김유진은 배경이 되는 공간과 인물간 관계를 암시하는 정황을 글로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이다. 캐릭터나 사건이 분명하지 않고 말 그대로 <희미한 빛>을 의지삼아 안개처럼 시공간을 장악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대단한 일 하나 없이도 시종일관 독자를 긴장하게 하는 에너지를 지녔다. 나는 회화적, 감각적, 미학적이라는 수식과 더불어 연극적이라는 작법을 덧붙이고 싶다. 이번 작품에서 감지되는 연극적 기운은 나와 나의 옛날 남자친구 B, 지금 내가 동거하는 L, 그리고 L의 여자친구라는 우연한 사각관계이다. 나는 한마디로 그 누구와도 제대로 소통하지 않으며 고립된 존재로서 그저 얽혀있는 관계 속에서만 긴장을 발휘하는 경우였다. 그녀가 소통의 부재, 관계의 상실을 메우는 방법은 일상의 습관이면서 그것의 관찰 혹은 묘사의 디테일로 보인다. 주인공이 자신이면서 마치 자신은 연출자나 관람객처럼 카메라에서 빠져나와있는 듯한 무심함이 고독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핵심이었다. 김선재의 <독서의 취향>은 이 책에서 가장 철학적으로 느껴졌으며 가장 관념적인 주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고 나가는 작가의 의뭉스러움이 놀라웠다. 이 작가가 자신을, 소설을, 이야기를 메우는 방식은 자기해체였는데 그 환상은 지독히도 현실적이어서 반전스러울 정도였다.

  이 작품에서 나와 안나, 그리고 안네의 관계를 의심할 수 있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시는 시인이 쓰고 나는 책이나 팔고 나와 살지 않는 안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와 사는 안네는 나를 지상에 단단이 묶었다.  
-363P

 
   


   이 소설은 ‘나’라는 인간을 ‘안나’와 ‘안네’로 분리하는 그 곳의 분열과 혼란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안나’가 나의 가장 안쪽(內)에 있는 나도 알 수 없는 나, 즉 내가 아니라 생각하는 나라면 ‘안네’는 그 안쪽에서 ‘안나’와 대치하는 입장의 상대적 개념(네)으로서의 2인칭 나라 할 것이다. 결국 나는 원래 ‘나’와 ‘안나’와 ‘안네’의 총합인 것이 이 작품을 이해하는 전제인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조건을 받아들이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그것은 세 명의 자아가 서사를 통해 각기 주장하는 바가 상이하고 그것들이 상충되는 위치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말더듬이면서 시인이면서, 독서가이면서 서적외판원인 나는 나를 감상하기 위해 취향을 분리하고 현실 오작동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기 현실을 메워버린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작품 말미에 늘 그렇듯 모든 것이 ‘개인적 감상이 만들어낸 형식적 오류’라는 것을 인정하고 분리된 현실을 제자리로 복원시킨다. 이것이 나가 말하는 자신의 ‘독서의 취향’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현실은 취향이나 감상의 문제가 아니고 진심이나 비밀과 별 상관없는 종류의 텍스트였으며 그곳은 나의 분리가 필요치 않은 여기, 이곳인 것이다. 잔인한 건 언제나 현실이라는 사실만 믿을만한 사실이었다.



   먼저 출발한 <젊은 작가상 수상집>의 경우와 비교하자면 <웹진 문지 문학상 수상집>은 조금 더 중립적이다. 물론 중립의 기준은 순전 독자인 내 기준일 터이다. 질문하는 영역이 간접적, 내재적이며 답하는 방식이 관념적이다. (작가의 인터뷰를 육성으로 꼭 듣기를 권한다) 젊음이 이런 것이라면 젊은 작가는 지금 한국문단에서 가장 치열하게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틀림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반가우면서도 또 가장 괴로울 때가 소설가의 질문이 곧 내 인생의 질문과 일치할 때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이장욱의 <곡란>은 최근에 내가 하고 있는 고민과 가장 많이 겹쳐진다. 나는 언젠가부터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오늘을 살았구나 보다는 오늘도 죽었구나,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하루하루가 살아내었다는 생각보다 이로써 오늘은 다 소진했고 내 인생에서 죽어진 날이 되었구나 싶은 것이다. 하루 죽었다... 산다는 것을 죽는 그날까지의 마이너스 여행이라 보았을 때 오늘 하루는 그 전체 일정에서 다 써버린 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누구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실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같은 실상임을 나는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일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고 모르는 것이 무서운 것이므로 죽음을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면서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도 죽음을 알면서 그것을 알았다고 말하거나 글을 쓸 수는 없겠구나를 가슴치며 땅을 치며 마침내 실감하게 되었달까.

   하지만 나는 답이 없어도 자꾸 묻다보면 어느새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거나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 이 작가들이 내게 던져준 질문들은 모두 소중한 계기가 되어 오늘도 죽어가는 내 자신을 한편 살아가게 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삶은 그렇게 죽음을 번복하며, 자신을 전복함으로써 답을 찾아가는 여정의 반복일 것이다. 또 하나의 길을 만들어준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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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7-15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작가상..이제 겨우 절반 읽었는데 말입니다. 문학상 수상집이 좀더 피곤하다는 말씀, 적극 공감입니다. 히
그래서 좀더 쉬었다가 나머지 절반 읽으려고요. 아..근데 웹진문학상..그것도 문지..이라니까 자꾸 읽고 싶어집니다요. 중립적이라는 말씀도 좀 궁금하구요. 아..qr코드를 배워서 저 동영상, 꼭 볼겁니닷. 아이폰도 있는데 말입니다. 써먹지를 못하네요..ㅠ.ㅠ

저는 <게발선인장>이 제일 눈이 가네요. 주위에서 좀 보는 할머니들이어서요.
 

 

#1.  바보같이.


비가 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우울한 핑계를 완벽하게 댈 수 있으니까.

지난 주말 이 년 만에 귀국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고 전화너머 잡음도 꽤 들려왔다. 이년 전, 떠나기 전에 꼭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우리는 여의치 않았고 그냥 서로 약속만 덩그러니 버리고 말았다. 만나지 못했어도 그때 헤어지기 직전의 그리움만큼은 또렷이 기억한다. 영영 못 볼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자주 만나온 것도 아닌데 그땐 그 헤어짐이 많이도 안타까왔다. 아마도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우린 그때 어떻게 되어있지 하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슬픔이었던 것일까.

나는 지난 이 년 동안 모든 게 좋지 않았고 그 친구는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 이년 동안 나는 그 전에 내가 쌓아 놓은 것들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그 친구는 같은 기간에 나와 반대인 것 같았다. 그건 그냥 아주 오래된 친구끼리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는 서로간의 기대치, 그것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별 볼일 없어졌으므로 괜한 자격지심인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전화를 걸겠다는 친구의 목소리를 정말 다시 듣게 될까봐 나는 두려웠다.

혹시나 비가 그치면 그 친구가 내게 연락을 할지도 몰라 나는 쇼핑을 했다.

여름 샌들을 사고 원피스를 사고 목걸이를 샀다. 친구가 근처로 온다하면 나는 늘 그렇게 입고 다녔던 것처럼 새로 산 옷을 입고 나갈 것이고 친구는 아마 여전하구나, 이렇게 웃어줄지도 모르니까. 그러면서 제발 전화를 하지 말기를, 아니 한번은 전화해주기를, 번갈아가며 선택했다. 바보같이. 트윗에선 모르는 한분이 이런 내 심정을 위로해주었고 나는 특별히 고맙다 답하지 않았다.



#2.  부질없이

오늘같이 감정을 많이 소모한 날엔 내 자신을 미워한다. 이곳이 좋아지려 하는 것에 대체 무엇이 좋은 건지,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거울아, 거울아. 너는 무엇이 좋아. 여기가 왜 좋아. 부질없이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운 걸까.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는 것이 고마운 것일까.

누군가 내 글에 답을 해주는 것이 기쁜 것일까.

남들이 메기는 나의 가치는 그 사람들의 가치인 것이지 내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는 좀 진부하면서도 논리에 안맞아 보이는 메일을 한통 받았고 이곳에서 판매하는 티셔츠를 사려고 했으나 자세히 보니 사서 입을 것 같지는 않길래 마음을 접은 내 자신에게 한껏 욕을 해주었다. 자신을 자학하면서 그것으로 윤리성을 회복하려는 위선에 총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모두 비 때문이라고, 비가 많으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슬픔이 아니라 우기면서 나는 아직 남은 저녁을 계획한다.



#3. 진부하게

답이 좀 뻔 하다 생각되는 에세이집을 붙들고 이런 위로야 말로 늘 가던 떡볶이집처럼 정겨운 것이다 생각했다. 새로운 위로란 무엇인가. 누구든 뻔한 그 대답을 듣고 싶어 위로를 바라는 것 아닌가. 속담처럼 격언처럼 나는 진부한 위로를 기다리고 그것을 사랑한다. 세상의 모든 일상은 진부했고 거의 모든 사람 또한 그 일상을 못 넘었다. 간혹 넘은 사람도 진부함을 지나왔다. 
 


꿈도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을 품고, 생각하면 즐거워야 한다. -15p

결국은 그 어떤 것에 시간을 얼마나 바치느냐에 달려 있고,
시간을 바치는 그 시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17p


나는 주도면밀한 잔머리를 잡아 낼 수 있다. 상투적인 위선을 재빨리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보다 내가 그렇게 해보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 세계에서 어울려 살아가려면 적당한 잔머리와 위선은 어쩌면 훌륭한 미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그럭저럭 유지되는 게 아닐까 싶다. 옛날에 나 좋다고 나 알고 싶다고 러브콜 보내던 처자가 예전에 내가 했던 잔머리와 위선을 똑같이 복제하여 사랑을 받으려 한다. 아니 사랑받았다. 좋을 것이다. 나는 그것의 끄트머리도 대충 짐작이 가는데, 그래서 아팠고 슬펐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



 

#4. 정면에서

나가수의 약발이 떨어질지 알았고 1박 2일과의 정면도전에서 패배할 줄 알았다. 잔머리였다. 정면승부는 잔머리의 승부와는 달라야 한다. 나 역시 잔머리의 승부는 하고 싶지 않다. 좀 알아준다고 조금 알려졌다고 누군가 관심을 가져줬다고 순간의 성취에 들뜨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누군가 어떤 이유로든 나를 공격하거나 돌려서 비난하거나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상처 받지 않을 것이다.

   
 


글을 쓰든 안쓰든 나는 위선자다. 나는 그걸 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그러나 글을 씀으로써 그 위선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떤 글도 쓰지 않을 것이다.

-고종석 일일 연재, <해피패밀리> 6회 中  http://cafe.naver.com/mhdn/27657 

 
   


오늘 아침 나를 울린 문장. 그러나 나는,

어짜피 위선자인거 크게 되는 위선자로 살고 싶다.
위선도 커지고 커지면 예술이 되는 거 아닐까. 창조의 환희로 거듭나는 거 아닐까.  

그리고, 

다시


당신도 오웰처럼 주제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주제나 메시지가 처음부터 명확하게 포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주제나 메시지는 작품을 본격적으로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나며, 작품에 대한 고민을 거듭할수록 더욱 명확해진다. 주제는 구조의 결함을 발견하고 고칠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독자를 감동시키는 원동력 또한 주제에서 나온다. 비록 많은 단어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주제가 반복되어 점점 쌓여나갈 때 생기는 효과는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288p


 

 

 

글 안 쓰는 위선자보다 글 쓰는 위선자로 살 것이다.
그래야 내 위선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진실하게, 진부하지 않게, 진지하게, 진심으로, 잔머리 쓰지 않고.  

나만을 위해.

 

이제 좀 친구를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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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2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3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7-1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죠, 위선이라 하시든 아니든 간에 저는 한사람님의 페이퍼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인데요.
아마...... 중간에 인용하신 데미안의 문구처럼 '제 자신 안에도 비슷한 것이 들어앉아' 있어서
같이 괴로와하고 있나 봅니다. 개인 심리학에서 아들러가 인간의 삶의 목표는 '우월의 추구'라고 하더군요.
목표를 삼고 노력하고 발전하는 것도, 모두 열등 의식 때문이라고.

어쩌면 말이죠, 위선이라고 괴로와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순수성에 대한 강박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모두 비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려볼까요...

한사람 2011-07-13 08:28   좋아요 0 | URL

그래요..?
생각의 가공을 거치지 않아서 그럴까요? ㅋ
사실 이런 글들을 이곳에 써오진 않았어요
(이곳은 오로지 리뷰만 올렸었죠 ㅋ)

'우월의 추구'는 몹시 공감가는 개념이네요
그 바탕이 열등이라는 것도요

사람이 글보다 더 예쁜 경우는 없다고 하더라구요
사람이 글만 못하다는 말이죠
대개 글 잘쓰는 사람을 직접 겪어보면 그의 글만 못하다고 하네요
글과 사람이 똑같기가 참 힘들죠

그말이 참 슬프면서 나라고 별 수 없지, 싶어서 쓴 글입니다^^
(헉, 스스로 글좀 쓴다는 이야기?? ㅍ.ㅍ)

달사르 2011-07-1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 소설의 주인공이 저런 생각을 한다는건 고종석도 저런 생각을 한다는 의미인데..그럼에도 고종석은 글을 쓰는구나..저런 고민 속에서도 글을 쓰는구나..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한사람님도, 고종석도, 모두 글을 쓰는 위선자라도 하고픈건.. 그만큼 글이 좋고,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생각해요.

한사람 2011-07-16 00:31   좋아요 0 | URL

전 제가 위선자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ㅠ.ㅠ
그래서 남의 위선을 귀신같이 포착해요
내가 가진거니까..

특히..
저 사람은 내게 호감가졌던 게 아니고..
나를 진심으로 대했던 게 아니라는 느낌은 거의 백프로여요 ㅠ.ㅠ
 
[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1. 어제의 불만


   이 책은 적어도 우리나라의 바깥에 있다. 물론 그렇게 예상했기 때문에 이 책에 끌렸던 것이 사실이다. 바깥에 있는 그들이 말하는 ‘불안’은 안에 있는 우리의 거울이 되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불안을 지병처럼 달고 사는 작금의 시대에 범 세계적으로 거시적인 불안을 관찰하고 함께 미래를 성찰하고자 하는 소박한 독자의 심정이었다. 바로 그런 뉘앙스의 제목 덕분에 다른 객관적인 정보들을 간과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언짢은 것은 원제를 왜곡했다는 사실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칼럼니스트인 기디온 래치먼(Gideon Rachman)이 집필한 책의 원제는 <Zero-Sum Future: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이다. ‘제로섬 미래’이면서 부제가 ‘불안의 시대에 놓인 미국의 파워’인 것이다. 문법상으로만 보아도 중요한건 미국의 힘인 것이지 세계의 불안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출판사는 떡하니 <불안의 시대: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이라는 인문교양학적인 제목으로 바꾸어 제로섬의 경제학적인 이미지와 아메리칸의 부정적 뉘앙스를 덮어버린 것이다.(허긴 제목이 ‘미국의 힘’이면 역학적 결과에 관심있는 독자들만 이 책을 사볼 것이 자명하지만)

  나는 책을 덮고서 표지에 그려진 다섯 개의 커다란 돌멩이 위에서 불안하게 서있는 코끼리를 확 밀어 버리고 싶었다. 이 책은 결국 다섯 개의 돌멩이를 흔들림 없이 균형을 맞추어 잘 쌓아보자는 것인데(그래야 코끼리가 제대로 힘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코끼리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선 원래 능력자인 코끼리의 문제이기 보다 그런 식으로 돌 쌓는 자, 혹은 그렇게 쌓여진 돌의 문제라는 의미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코끼리더러 불안한 돌 위에 서라고 한 적이 있단 말인가. 번역만 사실대로 정직(?)하게 했어도 이 최종적인 불쾌감은 줄었을 듯 하다. 책덮고 난 후 코끼리에 가려 원제목을 확인하지 못한 실수에 스스로를 자책했다. 조금만 더 찾아보았으면 저자가 최근에(2010-2011) 이 책 말고도 제로섬을 타이틀로 한 책을 두 권 더 출간했고 제목엔 모두 제로섬이 저자의 법칙처럼 네이밍되어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원서의)책 소개만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제로섬의 법칙을 벗어나려면 그 대안으로서 미국에 힘을 실어주자는 식의 결론은 접할 수 없었겠지만 적어도 이 책이 인문학보다는 비즈니스, 경제학 분야에 속한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 Zero-sum World :                                                  < Zero-sum Future :
    Politics, Power and Prosperity After the Crash, 2011>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 2011>


  경제학에 속한다는 것이 잘못되었고 그럴 줄 알았으면 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 아니라 저자가 내리는 결론이 인문학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며 페이지를 넘겨간 것이 얼마간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저자는 오랜 기간 경제기자로서 여러 지역의 특파원 생활을 하였고 현재 영국에서 발행하는 국제 경제신문의 칼럼을 맡고 있는 저널리스트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오늘 아침(2011. 7.9) KBS 2 라디오의 <박경철의 경제포커스>에서도 번역자와 함께 소개되었고 경제 전문 케이블 TV SBS CNBC 채널에서도 이미 상세하게 브리핑 된 책이다.(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152729) 아마존에 등록된 이 책의 원서엔 대부분 긍정적인 서평이 올라와 있으며 이 책이 21세기라는 불안의 시대를 깊고 넓게 알게 하면서 앞으로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어 무척 유용하다는 식의 ‘Essential Reading’이나 ‘The perfect guide’라는 표현이 주를 이룬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의 결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보다 불안한 상황이니 기왕이면 오래 반장 해먹은 친구를 중심으로 의기투합해 다시 똘똘 뭉치자는 굉장히 동양적 사고방식을 투영한다.(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는 식민지 분단국가의 오래된 대 국민 정체성 아니었던가) 각자 흩어져 하던 대로 자기 목소리를 높이자, 보다는 낫겠지만 문제는 이 책이 주장하는 불안 및 불안해소의 주체로 보인다. 누가 더 불안하고 그리하여 누가 불안을 해소할 것인가, 그렇게 되면 누가 덜 불안해지나 하는. 이 책에서 세계는 미국이고 이 책에서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는 오로지 미국의 경쟁국가로만 의미를 획득한다. 조금만 더 부풀리면 미국이 아주 유례없이 불안하므로 세계가 멸망하는 꼴 보기 싫으면 다시 미국을 불안하게 하지 말자는 뜻으로도 들린다. 첨부되는 자료와 기사는 더없이 세계적이나 그로인한 통찰은 누구보다 미국적임을 이 책을 접한 독자들은 피부로 체감할 터이다. 허나, 이 책의 피상적이고 오만한 결론과 상관없이 서구 강대국의 서구적 시각은 2011년 현재 지금 이와 같다는 것이 우리로선 중요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급작스럽고 황당스런 결론을 가지고 우리가 옳고 그름을, 혹은 장점 단점을 논하는 것은 이 책을 대하는 자세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거의 신문 칼럼의 연장선상에 있는 외교 및 경제 리포트의 성격이 강한데 오늘자 런던 발, 뉴역 발, 도쿄 발 경제 사설을 보고 그 결론이 한국의 국민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 하여 당신네들은 틀렸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 의미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저자가 그토록 부르짖는 2008년 금융위기 같은 범 세계적 사태만 하나 터져준다면 또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바뀔 수 있는 성질의 텍스트가 아닐까. (물론 텍스트만 바뀌고 기본적인 믿음은 거의 종교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긴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해온 대로 평소 분석위주의 기사들로만 마무리 짓고 나머지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식으로(기사가 아니라 책이니만큼) 마무리만 지었어도 별 문제는 없었을 듯하다. (우리 언론에서도 저자의 결론은 무시(?) 하고 그저 시대를 나누어 잘 정리한 것에만 언급하지 않는가) 문제는 저자가 자기수준에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 결론을 우리 수준에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음이다. 결론의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직업적으로)결론을 내는 것이 저자의 역할이었고 그것은 이 책에서도 유효할 수 밖에 없는 습관이자 패턴, 업무라고 여겨진다.

  미국위주의 초국수적 결론만 제외하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가 지난 30년을 '전환의 시대', '낙관의 시대', '불안의 시대' 의 세 시기로 구분하면서 각기 그 시대를 정의했다는 것이다.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역할이자 사회가 동의한 능력이 아닐까. 저자는 구분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기자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를 규정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낱낱이 풀어놓았다. 이 책의 성과는 바로 국제 정치관계에 있어 지난 삼십년간의 역학구조와 그 변화를 자신의 발품을 팔아 조사하고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손으로 기록한 결과들로 재건축 했다는 것이 아닐까. 저자의 결론을 우습게 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사실 그 삼십년의 세월에 있다는 생각도 한다. 저자는 늘 현장에 있었고 인물의 곁에 있었고 사건과 추이를 몸으로 겪은 사람이었다. 물론 많이 알고 그래서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이 꼭 훌륭한 정답을 내라는 법은 없다. 나 역시도 밤을 새워서 고민해 놓고 다음날 아침에 내리는 결정은 그 전날 전혀 밤을 새우지 않았어도 좋을 만한 결론일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많이 고민한 사람은 말할 수 있다. 보따리 풀듯 고민한 내용들을 풀어 놓을 수 있다. 누군가는 그 고민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고 전혀 다른 해결책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이 책 역시 우리같이 강대국이 아닌 변방의 나라의 국민이 보기엔 퍽이나 자존심 상하는 결론이겠지만 지난 세월 우리라고 옳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만 대통령으로 뽑아주진 않지 않았던가. 이 책은 논리로 구축된 오늘의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축되는 과정에는 공감하고 그 흐름을 우리의 필요성에 따라 잘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또 내가 보기에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써온 고민들이 중요한 것이지 대안이나 결론은 스스로도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결론을 설파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2. 오늘의 불안

  이 책의 시대 구분은 1978년, 1991년, 2008년을 기점으로 이루어진다. 각기 전환, 낙관, 불안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중국의 개방, 소련의 해체, 미국의 금융위기가 변화를 이끈 주체로 규정된다. 시작은 1978년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며 마지막은 G2로서 중국의 위협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삼십년간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를 뒤흔들고 있는 주체는 바로 중국이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미국입장에서)중국으로 시작해 중국으로 끝난다는 인상을 주는데 70년대 말 이후 덩 샤오핑의 개방정책 추진을 기점으로 세계화, 자유화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삼십년의 시기를 구분하는 잣대로 근거한다. 이 책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아마도 중국의 변화흐름을 훑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도 소련도 다 극복해온 미국이니 거대 중국도 헤쳐나갈 수 있다(니들이 도와준다면)는 메시지가 우리로선 참 재미난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가 북한과 화해하여 행여나 통일이라도 할까봐 불안한 나라이다. 일본은 행여나 우리가 자신들을 앞지르며 아시아의 일인자가 될까봐 노심초사 좌불안석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미군을 보험삼아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로선 복잡한 역학관계로 인해 어느 하나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순간이 없는 실정이니 그들간의 리그는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중국과 미국은 북한의 행동을 억제하는 데는 공동으로 협력한다. 하지만 두 나라 간에는 이러한 협력을 제한하는 암묵적인 라이벌 관계가 있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 국경 바로 앞에 미군 기지가 들어오는 것을 중국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355P
 
   


  일례로 오늘아침 신문엔 지난 4일 열린 故 로널드 레이건(1911~2004)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동상 제막식을 기사화하면서 바로 레이건의 길을 갈 것이냐 카터의 길을 갈 것이냐를 여론화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0/2011071001267.html

  이 책에서도 전환의 시대를 이끈 레이건은 중요한 ‘냉전시기의 정치가’로 상징화 되고 있었다. 저자는 대처총리와 레이건의 파트너쉽을 자세히 언급하면서 같은 세계관을 가진 두 사람이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과 소련에 대한 강경 노선을 펼쳤고 결국 소련을 해체하고 탈냉전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친구였던 레이건을 기리는 대처의 축사에 "다음 세대들이 이 동상을 보며 그가 우리에게 베푼 것을 되새기기를 바랍니다." 라는 구절의 '다음 세대(future generations)'와 '되새긴다(remind)'란 표현을 특히 강조하며 바로 한반도 역사의 ‘동어반복(同語反復)적’ 속성을 이어 붙여 그것에 설득력을 실으려는 논설위원을 볼 수 있었다. 레이건은 평화를 주장하기 보다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소련을 압박하는 정책’을 씀으로 해서 냉전체제를 종식시켰는데 이를 교훈삼아 한반도는 평화를 어떤 식으로 지켜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공산주의와 공존하며 평화를 외쳤던 카터 대통령을 빗대며 인권과 평화를 앞세운 패배주의를 지향할 것인지도 비교화법으로 질문한다. 우리의 대북관계 노선 및 정책은 이렇듯 이미 고인이 된 레이건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대처의 생각, 영국자 신문의 사설과 무관하지가 않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낙관의 시대를 부활시키자는 저자의 생각은 오늘자 신문의 논평과 중첩되면서, 그것이 바로 한반도의 평화논리와 결부되는 것을 목격하곤 이 책이 꽤 영향력있는 책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음이다.

  이 책의 저자는 후반부로 갈수록 미국의 힘이 막강했던 ‘낙관의 시대’의 정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는데 그것이 역사적인 시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개인적인 뉘앙스로도 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낙관의 시대에 <이코노미스트>의 판매부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도 나타났다. 내가 이 잡지사에서 일하기 시작하던 때인 1991년, <이코노미스트>의 판매부수는 매주 30만부를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이코노미스트>를 떠날 때인 2006년에는 100만부가 넘게 팔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이코노미스트>가 시사주간지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낙관의 시대를 특징짓는 경제사상, 특히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활기차게 전파했다는 사실 때문에 의미가 있었다. 한 예로, 미국의 국제 관계 권위자인 마이클 만델바움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화를 알리는 주보”라는 말까지 했다. -155p
 
   


  저자가 규정지은 낙관의 시대는 정확히 자신이 이코노미스트에 근무한 세월과 일치한다. 즉, 전 세계에 자유무역과 세계화를 전파하는 선봉장으로서 앞장서온 저자는 그 시절 언론계의 클린턴, 빌게이츠에 다름 아닌 것이다. 클린턴 정부와 빌 게이츠 그리고 우리의 김대중 정부를 떠올려 보면 그 시절 IT 혁명으로 미국의 낙관주의를 적극 수용, 개발한 발빠른 이력이 겹쳐지고 한국은 미국이 선도하는 세계적 정책의 영향하에 위치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또 하나 아쉬운 건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은 유독 작고 볼품없는 나라로 생각된다는 것. 그것은 저자가 분석하는 국제정치의 역학적 논리에 있어 한국은 그다지 중요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난 시절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처럼 자신들을 위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미있는 나라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늘 자기들 편이라는 확고한 믿음의 방증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저자는 한국과 북한을 말할 땐 마치 저 위에서 한참 아래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거의 반복되는 형용으로 일관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한국과 태국이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휴전선 너머 북한을 바라보면서 경제적 고립은 훨씬 더 나쁜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11p

세계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아시의 떠오르는 중산층은 과거보다 영양상태가 더 좋아지고 있다. 따라서 식량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267p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고립된 국가중 하나인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었다. 276p 

국제적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는 것과 문제를 진정으로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반드시 같다고 볼 수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도 고립된 국가 중의 하나인 북한이 확실히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핵에 관한 국제적 합의의 맹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297p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에 대한 그 어떤 평가를 하진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개최된 정상회의는 잘도 언급하면서 작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이 책이 올해 출간되었고 정상회의가 작년 말이니 저자의 성격상(?) 서울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이 환율문제 등과 관련해 신경전을 벌인 정도의 에피소드는 첨언할 만도 한데 어쩐 일인지 서울 정상회의는 논외에서 제외된 느낌마저 들었다. 마치 그런 건 우리만 중요해보였다고 할까. 당시 파이낸셜 타임즈는 “새로운 조직이 리더쉽을 장악했다”고 까지 보도했다는데 저자의 눈엔 우리의 리더쉽 같은 건(대세에 지장이 없으므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저자가 지목하는 것은 언제나 중국이었다. 세계화와 밀접한 기후변화와 관련한 문제도 대립을 이루는 건 중국이었고 미국을 제치고 온실가스 배출량에서 1위를 달성한 중국을 걸고 넘어지는 식이었다.

   
 


무엇보다도 미국과 중국 간의 직접적인 협상은 두 나라가 중요하게 판단하는 국익이 서로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계속 교착 상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많다. 기후 변화에서 글로벌 경제 불균형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중국은 점점 더 한쪽의 이익이 다른 쪽의 손실이 되는 제로섬 관계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 -291P

 
   


  결국 이 책의 원제인 제로섬의 문제는 곧 중국과의 대결에서 손실이 발생할지 모르는 미국의 심리적 불안을 상징하는 키워드였던 것이다. 저자는 효과적인 다자간의 협력도 필요하지만 실패와 교착을 반복하는 상태에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은 낙관의 시대에 막강했던 미국의 파워라 주장한다. 문서상의 합의는 실질적인 도움, 수행 능력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제로섬의 도래로 더 이상 오바마 정부의 ‘글로벌 문제에 관한 글로벌 해법’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 저자가 내리는 삼십년간의 처방인 것이다.


   
 


중국은 위안화의 가치와 외환 시장에서 자유롭게 변동하지 못하도록 해 그 가치를 고의적으로 평가절하함 으로써 미국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했다. 중국은 이렇게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내 자산을 구매함으로써 달러가 미국에서 재순환하도록 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의 이자율은 떨어졌고, 결국 2008년 경제위기의 원인이 되었던 신용 붐이 일어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이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 함으로써 중국산 제품의 가격을 인위적으로 하락시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미국과 유럽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이다. 341P

 
   

  저자는 미국 내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의 시각을 타전하며 2008년 금융위기의 책임을 은근히 중국으로 돌리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여지를 독재국가라는 개념으로 더 굳건히 하려는 논리의 발판으로 삼는 듯 했다. 금융위기로 바탕을 다지고 기후변화로 역량을 만들어 독재국가로 굳히기에 들어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들 중 두 나라가(인구는 두 나라를 합쳐 15억이 넘으며, 군사력은 세계 2위와 3위를 차지한다) 독재국가이며, 이들은 가까운 미래에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3. 어제 오늘의 대안 

  독재국가의 지배를 받게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저자는 삼십년 동안 세계화, 자유시장, 민주주의 사상을 언론을 통해 전파하는데 앞장서온 사람이었다. 라이벌을 두려워하고 과대평가하지 말 것이며 EU는 더 확대되어야 제로섬 논리를 해체하는 역학적 힘을 키울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며 미국국민은 세계화가 윈윈 세계를 창출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말아야 ‘발전은 결국 다시 시작될 것이다’, 는 것이 불안의 시대에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이었다. 속된 말로 중국은 80년대 일본보다 위협적이지 않고  생각보다 자기들을 앞서는 것도 아니라는 식이다. 세월의 통찰에 비해 오늘 내리는 처방은 참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철학적이기 까지 하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예전에도 그래왔던 거 처럼 앞으로도 잘 될거라고 믿는것이 최선이라니. 돌려 말하면 사실 대안이 없으니 우리의 저력과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해온 시간들만 믿자는 것으로 들리는데 이쯤되면 웃기다기 보다 슬퍼해야 할 자조적 답안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자본주의는 명목상 미국의 보호아래 지난 삼십년간 80년대 맥도날드가 2000년대 스타벅스라는 서구 다국적 기업으로 교체되면서 동반 성장해왔다. 1950년 전후의 악조건 속에서도 반세기 이상 이만큼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온 나라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든 성과지향적인 삶 자체가 국가와 개인의 성공을 앞당기는 우선된 가치였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 핵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었고 미국이 도와주었고 미국이 우릴 자극했고 우리도 미국에 기여했다. 세계적으로 소련과 중국과 일본과 미국사이에서 그 국제적 정세를 좌우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그만큼 한반도의 미래가 세계적 변화와 맞물려 있으며 세계적 평화와 상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조금은 더 흥미롭고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다시 제로섬의 법칙을 환기하자. 내가 이기면 당신이 지는 게임. 나의 성공은 타자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최근 성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내가 탈락되지 않으려면 누군가 탈락해야 하는 것이 서바이벌 시장의 법칙인 것이다. 오늘날 잔인한 경쟁의 원칙은 윈윈이 아니고 제로섬인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제로섬의 게임규칙을 대체할 대안이 협력이나 양보가 아니고 한 명의 영웅을 믿고 따르는 방식인 것은 그 길고긴 분석에 비해(분석이 아쉬울 정도로)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고 헐리우드 적인 것이 아닐까. 내 목소리만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아니 더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일단 돈 먼저 벌고 나서 파이를 나누겠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세계는 효과와 이득이 배려와 이해보다 중요한 것인가.

  다시 윈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서운하다. 낙관의 시대로 돌아가 대처와 레이건의 리더쉽으로 민주주의 복음을 전파하던 그들만의 행복은 우리의 그것과 상이하다. 우리는 다 같이 이기는 것도 소중하지만 다 같이 져도 서로를 안아주는 민족이 더 절실하다.

  다 이길 수 없다면, 누군가는 패배해야 한다면 모두 지는 것은 어떠한가. 조금씩 이윤을 포기하고 나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쌀 한 줌을 나눌 수 있는 진심과 정이 아쉽다. 우리가 (그들이 말하길)중국 중심의 아시아에 살고 있는 운명으로서 현재 서구의 시각을 파악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일인가. 협력의 시대가 아니라 경쟁과 분열의 시대라는 저들의 분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꼭 이겨야 한다고 말해왔던가. 이기는 것만이 발전이라 누가 주장했던가. 어짜피 어느 시대건 늘 이겨왔던 패권자는 말한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국가들로부터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이렇듯 서구세계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슬로건과 함께 미국과 끈질기게도 연대하며 미래의 파트너쉽을 구현하고자 노력한다. 너무나 좋은 말이기에 이 책을 덮은 나 역시 그 말만은 잊지 않고 싶어진다. 미국이나 영국, 혹은 중국, 일본의 속내를 아는 것은 우리로선 유익한 일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런 의미있는 결론에도 절대 상처받거나 흥분하지 말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얼마간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보다 많은 독자들이 서구중심의 이런 결론을 같이 알고서 부디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결연함을 소원하는 바이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힘겹게 읽으면서 얻은 유일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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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일 말머리에 하시는 말씀, 무엇인지 알아요.
요즘 책 소개에 많이 속아넘어갔거든요. 또는 제가 잘못 안 경우도 많죠.
최근에 <괴짜 생태학>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어요.
저자의 관점과 의도가 저랑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의도 파악 중이예요.

음..... '평정심 유지', 진정 제가 원하는 일이네요.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승질날거 같은데요. ㅎㅎ

참, 한사람님.. 아마존 링크에 줄그은 부분부터해서, 아래 모든 페이퍼에 밑줄 긋기가 되어있어요.
수정하셔야 할거 같아요. 아니면 서재지기에게 문의하시던가요.

가연 2011-07-17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저도 원제를 보고 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요.. 저는 처음에 저 말은 봤지만 저게 원제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에휴

윈터 2011-07-2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제, 표지 이미지에 대한 코멘트에 공감합니다. 이 책 읽고, 오랜만에 황당한 독서를 했네요.^^
 

 

#1. 셀렙과 표준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더욱 유명해진 김난도 교수는 소비자학과 교수이다. 현재 주요 일간지에 트렌드 노트라는 타이틀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08/2011070800979.html


그의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11’에도 언급된 바 있지만 유명인, 연예인을 뜻하는 셀렙(celebrity의 준말)은 단순한 추종에서 지나 어엿한 우리 욕망의 아바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로 발생한 경제효과가 곧 우리사회의 소비자 트렌드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현빈 운동화, 고소영 백, 지드래곤 귀걸이, 김연아 망토등 그들이 착용하고 노출된 상품은 그대로 완판되거나 세간에 회자가 되곤한다. 셀렙이 소비행위의 표준이 된 시대인 것이다.

최고인 그들이 선택하는 제품은 최고일 것이라는 믿음이 먼저이고 그렇다면 나도 그것으로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고의 이미지는 얻을 수 있겠다가 그 다음이다. 광고주는 이 트렌드를 제일 빨리 파악했기 때문에 미니시리즈엔 PPL광고가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다. 시청자들은 드라마에 앞서 ‘이 드라마는 PPL광고를 포함하고 있다’는 자막을 확인했다손 치더라도 한번쯤은 주인공이 마신 음료수를 충동구매할 확률이 많아진다.

<트렌드 코리아 2011>의 'Tell me, celeb' 편에서는 셀렙을 닮고 싶어하며 셀렙을 따라하는 트렌드를 말한다. 그들의 결정이 내가하는 의사결정의 시간과 노력을 줄여줄 것이라는 믿음은 그들처럼 최고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의미한다.

패션에만  해당될까 싶었는데 그 분야도 다양해졌다. 현빈이 잠시 들고 있던 소설, 현빈 서재에 꽂혀 있던 시집들은 그대로 셀렙의 최신트렌드가 되면서 출판사들을 잠시나마 기쁘게 한 적도 있다.  현빈이 진짜 그 책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예로 유명작가가 어떤 책을 추천하는 경우보다 마케팅 파워는 막강했음이다. 운동화야 신으면 그만이지만 이 참에 나는 그 책들을 산 시청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래 <천재토끼 차상문>은 재미가 있으셨는지.


#2.  파워북로거도 셀렙일까


유명연예인만큼은 아니지만 얼마전 네이*의 파워 블로거의 거대 수수료가 논란이 되면서 구매에 영향을 미치는 파워 블로거들을 향한 비난과 질타, 대안마련이 이슈가 된 적도 있다. 이 불똥이 서평을 쓰는 파워 북로거에게 까지 튀어 오늘 아침 내가 아는 블로거의 닉네임 두어 개를 신문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성석제 작가는 젊은 작가상 심사를 맡으며 ‘누가 누구를 누구 마음대로 젊고 늙은 작가로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음의 기준을 생산의 힘으로 본다면 수긍할 만하다’고 한 바 있는데 누가 누구를 누구 마음대로 파워 북로거라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파워의 기준을 수익의 힘으로 본다면 절대 수긍하기 힘들다가 내가 빗대고 싶은 말이다.

일간지의 한 논설위원은 말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0/2011071001260.html

   
 

작년 12월 인터넷 포털사이트들은 '물만두'라는 필명을 가진 서평(書評) 전문 블로거의 부음을 전했다. 2000년 3월부터 인터넷에 쓰기 시작한 리뷰가 무려 1838편. 그의 전공은 추리물·SF 같은 장르소설이었다. 이 분야 마니아 중에 '물만두'의 리뷰를 한 번쯤 읽지 않은 독자는 없다고 할 정도다. 그는 리뷰를 하고는 별 표로 점수를 매겼다. '물만두'가 별 다섯을 주면 출판사는 마치 큰 훈장을 받은 듯 신문의 책 광고에서도 이 사실을 빼놓지 않고 자랑했다.

 
   


논설위원은 처음에 알라딘의 물만두 님을 언급하며 파워블로거의 영향력을 비유하는 내용으로 글을 시작한다.


   
  한 출판사는 얼마 전 중국계 미국 소설가 이윤 리의 장편소설 두 편을 동시에 출간했다. 하나는 이미 나왔다가 절판된 구작(舊作)을 새로 찍은 것이고 하나는 신작을 번역해 낸 것이었다. 처음엔 신작 쪽이 훨씬 많이 팔리더니 언제부턴가 구작이 더 팔리기 시작했다. 출판사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나중에야 젊은이들한테 인기있는 여성 소설가가 트위터에서 구작에 대해 "너무 감동적이어서 밤을 새워 읽었다"고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 역시 이외수 작가가 강력추천한다는 말씀 하나만 믿고 생판 모르는 작가의 책을 주문한 적이 있다. 내가 팔로잉 하는 작가가 추천한다고 하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읽어볼 마음을 가지게 되는게 책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일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도 책에 한한한 셀렙을 그 표준으로 삼고 있는 경우이다.


   
  온라인 공간에 쓴 서평을 통해 출판시장의 독자들을 몰고 다니는 필자를 '파워 북로거'라고 한다. 북(책)과 블로거 합성어다. '폭주 기관차' '파란 여우' 같은 필명으로 50~60명의 고수가 활동하고 있다. 소장 학자나 대학원생, 문인에서 평범한 회사원, 자영업자, 약사, 통역사에 이르기까지 직업도 다양하다.  
   


웃긴 건 인터넷 신문에는 ‘폭주기관차’인데 종이신문에는 ‘바람구두’로 바뀌어 있다. 간밤에 무슨 이유로 닉이 바뀌었는가. 혹 해당 논설위원도 닉네임의 노출로 인한 영향력을 미리 확보한 것은 아닌가. 한눈에 거슬리는 문구는 독자들을 '몰고 다니는'식의 표현인데 누가 누구를 어디로 몰고 간다는 것인지.


   
  '로자'라는 유명 북로거는 인문학 분야가 주전공이다. 그의 서평 블로그에는 하루 1000여명이 방문한다. (그가 쓴 리뷰는 당연히 해당분야 책 판매 부수에 무시못할 영향을 준다) 다음의 북카페 '비평 고원'처럼 인터넷 서평꾼들이 커뮤니티를 이뤄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이 카페는 개설 11년 만에 회원수 1만2183명이 됐다. (이 카페는 개설 이후 11년 동안 40여만명의 방문객을 맞았다) 출판사 입장에서 볼 때 파워 북로거들의 초기 평가와 입소문은 자기들이 낸 책이 베스트셀러로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가 될 수 있다.  
   


괄호 안에 쓴 내용은 오늘 아침 추가된 글이다. 마지막 문장은 삭제되면서 ‘무시못할 영향’으로 대체되었다. 로쟈님의 서재는 나도 자주 가는 편인데 이 글이 그의 영향력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비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왜일까.


   
  한 출판 잡지가 파워 북로거 5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출판사에서 대가성 서평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자가 12명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대가를 받고 원하는 대로 서평을 썼다"는 응답자도 4명 있었다. 인터넷 북로거들의 서평이 영향력을 갖는 것은 그들이 이해(利害) 관계를 떠나 객관적인 리뷰를 한다고 독자들이 믿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깨지면 출판시장의 장래를 위해서도 좋지 않다는 걸 출판사들은 알아야 한다. 파워 북로거들도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유혹을 거절해야 한다.  
   


로쟈님에 덧붙여 결정적으로 거슬리는 건 이 짧은 논평의 결론이다. 같이 실린 그림에서도 상징되듯이 뒷돈 챙기면서 아이패드로 추천을 작성하는 북로거의 뒷모습이 결론인 것이다. ‘파워 북로거들도 자기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 유혹을 거절해야 한다.’는 충고의 말씀도 맞는 말이긴 하나 썩 기분좋은 뉘앙스는 아니다. 이 글을 접한 일반 독자분들은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순수성 하나만 믿고 그 사람의 추천을 신뢰해왔는데 일개 서평자들도 (수수료 챙겨온 파워블로거처럼)‘출판사의 대가성 청탁’의 상업적 영역에 위치해 있음을 사실상의 결론으로 단정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3. 파워북로거의 파워는 무엇을 의미하나


당신은 서평자인가? 독자인가?

1. 독자라면 평소 서평을 훑어보고 그것에 영향을 받아 책을 주문한 적이 있는가?

2. 서평자라면 혹 출판사의 부탁을 통해 적정한 대가를 받고 서평을 작성한 적이 있는가?

3. 내 추천이나 리뷰를 읽고 책을 구매한 사람이 'thanks to'하여 적립금을 받아 본적이 있는가?


서평자와 독자 모두에 해당하는 내 경우 1번은 예스. 2번은 노. 3번은 예스

나는 파워북로거는 아니지만(물론 내 기준에서) 출판사로부터 서평을 부탁드린다는 명목으로 받은 책은 딱 두권이다. 내가 유명하거나 구매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우연히 내 (자사 책의)서평을 읽은 편집자분이 예고도 없이 책을 보내왔거나 출간된 신간이 있는데 감사의 뜻으로 보낸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분들은 나의 서평을 담보로 책을 보냈다기 보다는 사실 감사의 성격이 더 많았고 나는 서평을 의무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행히 보내주신 책들이 모두 퀄리티가 있는 작품들이었고 서평을 쓸 때도 그들의 청탁(?) 때문에 안좋은 점을 말 안하거나 좋은 점을 부풀리거나 할 성격의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좋은 말하기가 민망한 작품이었다면? 기껏 책 한권 받으면서 내 양심을 팔아야 하나를 생각하기 전에 나는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아보려고 마음을 가라 앉혔을 듯하다. 그리곤 덜커덕 받아버린 내 책 욕심에 후회를 하고 말았을 것이다.

작년에 타 온라인 서점의 파워블로거 한분이 나에게 신간으로 출간예정인 ** 출판사의 책에 대한 서평 의뢰를 당신도 받았냐고 물어왔다. 나는 파워블로거도 아니었고 그런 관행이 있는지도 몰랐다. (파워블로거들끼린 자신이 출판사로와 해당서점으로부터 추천을 받았느냐의 여부도 자존심에 관련된 사안이더라) 그 블로거는 자신은 그 책이 별로 호감이 가지 않지만 그쪽 온라인 서점의 파워블로거로 활동하고 있으니 온라인 서점에서 추천한 블로거로서 거절하기 난감하다는 말을 했다. 출판사는 일단 노출수가 많고 서평을 많이 작성하는 파워블로거에게 가제본인 상태의 책을 보내고 그들로부터 초기 화제성을 유발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물론 가제본이지만 나중에 출간되면 정식 책을 보내준다고 하며 서평을 쓸 사람을 신청받는 경우는 꼭 파워블로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의적으로 신청한 것이니 문제가 될건 없다.

문제는 한 번의 노출로 판매에 영향을 미칠 만한 급의 블로거를 콕콕 찍어서 그들을 리스트업한 후 그들에게 책을 안기는 출판사가 아닐까. 서평자 입장에선 책 준다는데 까짓 서평이야 쓰면되지 식의 단순한 생각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 이렇게 해서 누이 좋고 매부좋은 식으로 서평을 써드리고 우연히도 그 서평을 읽은 독자들이 그것을 백프로 믿고 그 책을 구매한 후 그 블로거에게 적립금을 안겨 드렸다고 치자. 그런데 노출되는 빈도수가 많다보니 적립금의 금액이 가랑비에 옷젖듯 쏠쏠찮다고 치자. 우린 누가 누구를 무슨 명목으로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서평을 오래 써온 분들은 느끼는 것이겠지만 의무적인 서평과 자발적인 서평은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떻든 서평쓴다는 수고는 책받은 자로서 감내해야 할 시간임은 틀림없다. 서평자로 활동한 적 있는 조지 오웰은 본질적으로 모든 서평은 사기이며 서평자는 한 편의 (직업적으로)서평을 쓸 때마타 한 파인트의 양심을 하수구로 흘려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한 바 있다.

 

 

 

 

 

 

 

 

지난 달에 내가 쓴 리뷰중에 추천을 무려 오십 개나 받은 글이 있다. 글이 훌륭해서라기 보다는 그 책의 리뷰를 처음 썼기 때문에 알라딘과 출판사에서 내 글을 노출시킨 덕일 것이다. 그 결과 내 리뷰를 읽고 책을 구입한 사람은 열 명이 넘은 것 같다. 한 권에 60원씩 떨어지는(저급하구나) 셈이니 나는 600원의 이득을 본 셈이다. 그 책 말고도 지난 달에 이것 저것 내게 적립금이 십원, 백원씩 쌓여가고 있는 실정이다. (옆 동네는 3프로이므로 책 한권에 몇 백원이더라) 놀라웠던건 별 유명하지도 않은 시집과 내가 아직 읽지도 않은 책인데 누군가는 그 추천을 통해 책을 샀다는 사실이었다. 큰 돈은 아니지만 나는 이 적립금의 무게가 커질수록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파워북로거의 명예와 자존심을 마지막 결론으로 내린 저런 글을 볼 땐 더욱 그렇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고 누구도 책임지라한 적 없지만 일개 동네 서평자인 내 스스로 떳떳하기 위해 매일 아침 자기선언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아니 어쩜 나는 이렇게 글을 써대면서 속물이 되지 말자, 젠 체 하지 말자, 과장하지 말자, 솔직하게 쓰자, 그런 말들을 몸과 마음에 열심히 타이핑 해본다.



이건 아니다. 아니올씨다, 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아는 파워북로거님들은
적립금이나 떡밥으로 받은 돈 역시
다시 책사는데 활용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인생 구력때문에
오늘 아침은 이 그림이 나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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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1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월요일이네요.
이 글 잼났어요. 저는 알라딘 서재 처음하면서 참 신기했거든요. 이제 겨우 1년 반밖에 안 되었구요.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된거죠,
서평단도 있고, 출판사에서 선물로 책도 받기도 하고, 읽지않은 책 추천 페이퍼도 있다는 것을. ^^
이후 저도 읽지 않은 책을 페이퍼에 올린 적이 있어요, 이래도 되나 하면서.
그리고 나중에 몽땅 읽은 후, 이 책 형편없네 하고 팔아버린 적도.

저는 서평이든 리뷰든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서평단은 엄두도 못 내죠.
저처럼 말이죠, 글이나 인문 등등과 관계없이 IT와 20년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참 신기한 세계예요, 여기는~
(그리고 가끔 환상이 깨지는 세계이기도 해요... 아하하)

한사람 2011-07-11 12:26   좋아요 0 | URL

IT업계 20년이라니 놀라워요~
남겨주신 글들은 서정적, 낭만적이었다고 생각했거든요 ㅋ

저는 책을 그리 빨리 속독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일정상 서평신청을 하지 못하는 쪽에 속해요~
어쩌다가 정말 읽고 싶은 책만 하는 편이구요
추천페이퍼도 제가 작성하면서 ..책도 안들쳐보고 읽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이래도 되는건가(물론, 평가단 책을 선정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싶은 생각을 아주 최근에야 하게되었어요..
뭘 알고나 추천을 한다는 건지, 그래서 전공자나 로쟈님 같이 알려진 분의 추천에 도움을 받는 편인데
점점 추천한다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어요


글샘 2011-07-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해서 책을 얼마나 사 볼는지요. ㅎㅎ
물론 제 블로그에서도 몇 분은 제가 올리는 족족 사들이다가 파산하신다고 엄살피우던 분들도 계셨지만...
돈받고 서평쓰는 걸 조지 오웰이 쓰레기 시궁창이라고 한 건,
어디까지나 신문사 같은데 주례사 비평을 기고할 때 이야기구요.
인터넷 블로그처럼 자율적으로 써나갈 땐, 이야기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느낌표>같은 프로는 획일성의 비판도 받지만, 암튼 그런 책이라도 읽게 만들잖아요.
물론, 돈받고 서평쓸 정도로 수준높은 서평가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떻게든 책을 사보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무슨 수라도 쓰면 좋겠습니다. ㅎㅎㅎ

한사람 2011-07-11 12: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글샘님. 무척 반가워요^^

제가 저 기사에 언짢았던건 그래도 '백' 안사고 '책'사는 쪽의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그래도 다른게 아니고 책을 추천하는 집단에 속한다는 스스로의 탈속물적(?)인식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글 같아서 발끈했던거 같아요 ㅋ

그래도 여기 알라딘은 이런 이야기와 생각을 나눌수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기쁘네요~

그렇게해서라도 책을 좀 많이 보는 풍토가 조성된다면 백사드는 풍토보다는 낫다는데 동의합니다^^

반딧불이 2011-07-11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부분 공감이 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책을 꼼꼼이 읽고 공들여 쓴 리뷰에 대해서는 늘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중의 하나에요. 그런데 늘 읽지 않고 쓰는 리뷰, 낚을 목적으로 쓰는 글이 너무 많고 문제도 항상 이런데서 생기는군요. 이런 기사 때문에 정작 제대로된 글을 쓰시는 분들이 상처받거나 동급으로 쓸려가는것 같아 안타깝네요.

한사람 2011-07-11 13:4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딧불이님.
보면 늘 소수의 윤리가 다수를 먹칠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부정적인 건 더 영향력이 크고 또 빠르니까요
이렇게 생각있는 블로거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힘이 실리는 듯한 느낌이어요^^
고맙습니다~

마늘빵 2011-07-11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깨끄미 사건과 북로거를 연결지으면서 글 하나를 썼었는데, 조선일보가 언급한 저 출판잡지를 직접 보고 후속 글을 쓰려던 참에 이 글을 보네요. 해당 잡지와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대가'의 영역, 맥락을 어떻게 잡느냐가 궁금한데, 만약 서평단에 속해 책을 받는 것조차도 대가로 본다면 이건 아니다 싶고. 대가청 청탁 운운하면서 서평단에 속해 책 받고 글 쓰는 사람들까지도 매도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일단 해당 잡지를 열어봐야겠어요.

한사람 2011-07-11 13: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아프락사스님!
저도 그때 올려주신 글 읽고 슬며시 누르고 왔어요 ㅋ
그 파워블로거가 제 이웃인 파워블로거와도 아는 분이고
그쪽 계통에선 정말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그 파워블로거 때문에 며칠 맘고생이 심한 것 같았어요
(많이 알려진 블로거에게 기업에서 먼저 연락해서 이벤트 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 잡지가 궁금한데
아프락사스님께서 이렇게 글까지 남겨주셔서
두눈에 힘이 불끈 들어가네요^^
진상을(?) 조사하셔서 또 날카롭고 유익한 말씀 기다리겠습니다^^

stella.K 2011-07-11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드문 경우긴 하지만, 작년에 출판사에서 책 보내 줄 테니 읽어보고 서평 쓰겠냐고 청탁 받아 본적은 있어요.
그렇게 무조건 안기는 건 아니고, 의사를 물어보죠.
하나는 좋다고 했고, 한 출판사는 거절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어서.
좋다고 했던 건, 책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출판사가 평판이 좋아 받아들인 거지만,
역시나 책은 실망을 해서 서평을 그다지 좋게 써 주지는 못했어요.
나 하나 혹평 썼다고 해서 그 책이 망하는 건 아닐테니 전 그냥 솔직히 써요.
물론 마음은 편치 않죠.
제가 얼마 전에도 김애란 소설을 혹평했지만,
이만한 글에 좋은 평을 내리면 작가들이 글을 게으르게 쓸 것 같아서 말이죠.
작품의 하양평준화. 그럼 정말 그 한 줄에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작가들이 너무 불쌍하잖아요.ㅠㅠ
하여간 돈이라는 게 그래요. 쩝.
그래도 아시겠지만, 떡밥이라봤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공들여 써봤자 받는 건 얼마 안되고, 그래도 출판사가 이윤을 챙기는 건 그의 몇배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책값만 생각하지, 쓰는 공력, 읽는 공력, 시간등은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 같아요.
때로 그게 책값을 훨씬 상회할 수도 있거든요.
물론 서평 하나 쓰는 데 거의 한나절을 써도 아깝지 않은 책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도 많아요.
그래서 전 아무책이나 서평 써 주겠다고 하지 않아요.
사실 제가 더 기분 나쁜 건 알라딘 한 달에 한번씩 주는 이달의 당선작이 더 기분 나빠요.
그놈의 알사탕은 받아도 기분 나쁘고, 못 받을 땐 더 기분 나쁜 거 있죠?
언제나 그렇지만, 상업주의와 관련된 모든 건 처음엔 단데 나중엔 쓴 것 같아요.

한사람 2011-07-11 14:0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아니다 싶은 책은 정말 서평쓰기가 곤란해요
작년에 서평단 할때 무작위로 선정된 소설중에 그런 책들이 몇개 있었어요 ㅠ.ㅠ

저는 감동적이었다고 뻥치는 분들도 웃기지만
사실 뚜렷한 논리를 대지 않은채 그냥 자기 맘에 안드니까 혹평하는 분들에 반발심이 생겨 그 책을 읽어보고 그 정도는 아니라는 평을 쓴적도 있었네요 ㅋ(한가했다는 ㅋㅋ)

그리고 떡밥 말씀하셨지만 서평써서 떼돈벌었다는 사람은 못봤습니다.
당선축하금이나 적립금, 혹은 상금들도 알고보면 (파워북로거의 경우)
시간과 노력의 산물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걸로 이득챙기면 얼마나 챙기겠어요..
다시 책을 사거나 언젠가 책 사려고 모아들 두시지 않나요?

이달의 당선작은 운좋게도 잘 선정되는 덕에 (받아먹는 입장에서)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것도 받자마자 책값으로 다 나가게 되던걸요.
결국 그 적립금으로 책 사서 또 서평쓰고 또 적립금타서 책사고~ 하는 것의
반복이더라구요..


pjy 2011-07-11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 눈은 다 비슷한가봐요, 첨에는 카더라통신에 현혹되더라도 결국은 시간이 지나다 보면 다들 어느정도 판단을 내리게 되는거 같아요~
작정하고 남다른 파워?를 목적있게 행동 하시는 분들은 일반 사람들의 생각보단 꽤 많은 돈을 챙기신다고 듣긴 들었는데....결국은 곪았던 상황이 터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일을 시작되어도 진행과정상 오해의 소지가 생기고 일이 꼬이고 이상한 결과가 나오는데..첨부터 수상한 의도로 시작한다면 결과가 아무래도 아주 좋을수는 없겠죠~뭐, 티가 나게 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객관적 판단이 어려워서 저 혼자 느낌이지만 친하게 생각하면 쫌 많이 용서해주고, 안 친하게 생각되면 덜 용서하고 이래요-_-;

한사람 2011-07-11 18:13   좋아요 0 | URL

주변에 파워블로거들을 보면 처음엔 의도없이 순수함을 가지고 작성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차츰 변화하는 것 같아요~
누가 어떤 식으로 이익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었거나
우연한 기회에 돈이되는 방법을 알았다거나 ㅋ

제 경험상(?) 심사위원이나 독자 혹은 지인이라도
서평으로 쓴 글의 진위여부, 감동여부는 절대 구분, 확인할수 없다고 봐요
글은 그만큼 진심없이도 재주만으로 감정을 창조할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심을 다해 거짓말치면 속는 수밖에요 ㅠ.ㅠ
물론 어느정도 의심이 되는 글들, 노골적인 홍보, 틀에박힌 칭찬들을 눈치챌수 있다고 해도
작정하고 속이면 속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언제나 저를 슬프게 하죠..

cyrus 2011-07-11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씁쓸하네요. 파워블로거 사태가 책블로거들에게도 문제의 여파로 다가오게 되다니
정작 책과 글쓰기가 좋아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분들이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게 되네요.
제가 블로그를 하게 된 것은 책 읽고 글 쓰게 좋아서 한 것도 있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책을 사기 위해서 적립금이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예전에 리뷰대회에도 관심을 가졌고 지금도 그래요. ^^;;
간혹 순수한 의도로 한 블로그 운영이 적립금 때문에 변화될까봐 스스로도 자중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하기도 해요.

그래서 글 한 번 쓰는데 나름 정성들여 쓰려고 하는 편이에요.
비록 얼마 안 된 적립금이지만 정성들여 쓴 글을 통해서 땡스투받게 되면 뿌듯하거든요. ^^


한사람 2011-07-11 22:46   좋아요 0 | URL

맞아요..사고 싶고 보고 싶은 책은 많고
욕심대로 다 샀다간 거덜나기 십상이죠
시루스님은 도서관도 부지런히 다니시는 학생이지만
저는 사고 싶은 책은 꼭 사고야 마는 편이라 ㅋ
적립금이 사라져갈땐 마음 한켠이 영 허전해 지죠 ㅋㅋ

하지만 대충쓰고 떡밥을 받았다는 소리는 듣기 싫으니
스스로도 정성을 다하게 되는게 아마 시루스님 같은 서평자들일거여요
저 글을 쓰면서 저만 깨끗한 척 한거 같아
부끄러운데 어떤 분은 아예 떡밥이 걸려있지 않으면 리뷰를 올리지 않는다고 한 분도 있어요
바꿔 말하면 뭐라도 주는 곳에만 리뷰를 게시하는 것이죠
(웃긴건 떡밥이 안걸리면 바로 자삭 들어가죠^^)
어찌보면 계산적인 것 같아도
뭐라 할수 없는 개인적인 부분이죠~
자기글 자기가 지키겠다는데 관리의 영역까지 윤리의 잣대를 들이댈수는 없어보여요
다만 대놓고 속물적인 태도가 거슬리지만

까놓고 얘기해서 여지껏 나는 적립금 같은 건 한푼도 바라지 않고
서평을 써왔노라 말할 사람 누구일까요
문제는 바라는 욕심이 아니고 바라기 전에 진실한 자세로 글을 써야하는
스스로의 자기검열 같은데요..



가연 2011-07-17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추천을 누를 수 밖에 없는 글이네요ㅎㅎ 다른 부분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가장 마지막 문단 완전 공감됩니다, 파워북로거가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한사람 2011-07-17 15:14   좋아요 0 | URL

예, 파워의 기준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