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안부
좀 아팠다.
지지난 주말부터 꼬박 일주일을 무력증과 우울증이 동반된 저질감성, 무지이성으로 보냈다. 이 책 저 책, 제대로 끝낸 책도 없고 글도 써지질 않았고 컴퓨터도 미덥지 못했다. 아이도 할머니댁으로 보내고 모처럼 혼자서 휴일을 즐길 수 있었는데 때마침 당도한 장마와 함께 나는 고독을 향해 깊게 침수하고 말았다.
그동안 온라인 친구 한명이 신간을 보내주었고 우연히 지인이 된 한 분도 책을 보내주셨다. 평가단 책도 오고 어디서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 곳에서 뜻밖의 책도 왔다. 모두 그 모진 비를 뚫고서 내게로 온 것들이었다. 책은 금방 쌓여갔고 높이가 올라갈수록 그들이 상관없는 남처럼 보였다. 내 마음이 떠나려는지 알고들 그러는지 공교롭게도 책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마음을 다친 것 같아 그냥 다시 마음이 내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종종 작가들 중에는(특히 시인) 마음을 다치면 며칠 끙끙 몸살을 앓는 분들이 있다는데 작가도 되지 못한 주제에 그런 건 꼭 빼놓지 않고 닮아 있다. 무엇보다 억울하게 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안 그래도 쓸쓸한 내 가슴을 짓눌렀다. 자고나면 청천벽력같은 뉴스의 사상자, 피해자로 내 가족이 나오는 일을 나도 겪은 바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부턴 모든 죽은 사람의 일이 철저하게 죽지 않은 사람의 몫이 된다. 우리 집에 수해가 난 것도 아니었고 내 동생이 MT 갔다 죽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들 이웃이라도 된 심정으로 내내 상중인 기분이었다.
그래도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은 많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자동차가 줄었다. 소음도 줄었다. 공기는 덜 맵지만 더 무겁다. 어쩌면 휴가는 나처럼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인문평가단 활동을 한 뒤로 나는 솔직히 말해 소설이 점점 낯설어진다. 소설언어가 좀 허탈하다고나 할까. 차라리 드라마 언어가 사실적이라는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내 생각인데 소설을 오래 읽으면 작가가 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리뷰를 오래 쓰면 위선이 자신의 경쟁력이 되는 것 같다.
#2. 변심
어느 출판사 대표님이 리뷰대회 심사와 관련해 기수상자들은 자신을 뛰어넘어야 수상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씀을 하셨다. 문학상의 예를 들며 신규 참가자와 동일한 심사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솔직히 말해 한번 일등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보다 더 나은 글을 쓰기가 매번 쉽지는 않다. 나는 내 스스로 그 이전 리뷰를 (조금이나마)뛰어넘었다고 생각하거나 그전 리뷰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썼다고 생각할때만 접수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아니다. 접수를 결정한 바에야 넘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가 맞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하건 나는 가장 피곤한 경쟁자를 나 자신으로 생각했으며 내 글을 깨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 믿어왔다. 나는 꼭 대회 리뷰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내가 정한 엄정한 기준에 결격사유가 생기지 않도록 유의하며 글을 써왔다. 전에 소설 평가단 할 때 리뷰대회한다 하면 꽤 완성도 높은 글을 써내던 분이 평가단 미션으로는 채 두 장도 되지 않는 리뷰를 올리는 평가단을 우연히, 심심찮게 목격했다. 분량의 문제가 아니고 한눈에 보아도 민망할 정도였다. 바쁘셨을 터이고 그럴만한 사정이야 충분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좀 슬퍼졌었다. 혹자들은 리뷰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 반문할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 평가단은 (읽고 싶은)책만 읽고 꽂아두는 것이 아니고 (읽기 싫은 책이라도)글로 써내는 것이 임무라 들었다. 또 평가단 뽑을 때 기준 삼은 것이 그 사람이 가장 잘썼다고 접수하는 리뷰로 알고 있다. 물론 매번 대회수준의 글을 서낼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쪽팔리지 않는 글을 써내겠다는 자기의지는 버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젠 좀 생각이 바뀌었다. 나를 이기는 것에 지쳤다. 내 자신을 넘는 것만이 내가 나를 증명하는 길은 아니라는 생각. 내가 정한 기준을 무슨 자기검열처럼 옥죄면서 타자를 비추는 태도. 나는 이만큼 하는데 누가 나를 욕할 것인가 하는 과잉충실. 이런 것에서 좀 자유롭고 싶다. 나보다 나은 나가 아닌 내가 모르는 나, 내가 생각하지 않은 나, 나와는 다른 나를 찾아보자, 하는 식이랄까. 내 자신을 별로 이기고 싶지 않다. 아프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인문분야는 그러한 내 리뷰서사의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맞는 것 같다. 좋은 공부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3. 기준
이번 달 추천 페이퍼를 쓰기 전에 고려해보고 싶은 것은 다양성이다.(다 적고 다시 읽어보니 낯 뜨겁다) 4번의 미션에서 주로 선택된 책들은 정치와 철학이었다. 이 분야가 선호도가 높은 건 다들 정치와 철학을 특별히 좋아해서 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컨텐츠로서 가장 주목을 받을 확률이 많기 때문인 듯하다. 전에 어떤 분이 세상에 회자가 많이 되는 책을 가장 먼저 읽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라는 말을 했는데 그건 세상에 회자가 안되기 때문에 이런 책을 더욱 읽어야 하지 않느냐와 같은 논리에 불과하다. 기준을 세상의 회자에 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준은 누가 만드는가. 많이 보고 들은 책을 읽고 싶다는 건 광고 노출빈도가 많은 제품을 사겠다는 것이다. 광고는 자본이다. 자본은 권력이다. 결국 세상에 회자되는 순이 권력의 층위를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며 그것에 응대하겠다는 것 밖에는 안된다.
모르긴 해도, 세상에 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책을 추천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읽기는 싫어도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야 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내가 읽기 싫은 책이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다음의 책들이 내가 읽기 싫은 책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1. 몸에 갇힌 사람들 - 수지 오바크 / 창비 ........ (사회과학 > 여성학이론)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
요즘 하의실종패션이 유행이다. 예전에도 똥꼬치마니 핫팬츠는 있어왔는데 하의실종이라는 방송용어를 마치 새로운 트렌드인 것처럼 개념을 확장하는 언론의 관음증이 신물이 난다. 어제도 어느 여가수의 야구 시구패션이 볼성 사나왔다고 곧바로 기사처리하는 기자들의 수준이 곧 이 나라 언론의 수준이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해진다. 다같이 실컷 구경하고 즐겨놓고 그건 좀 문제있었다고 논란화 시키는 이중적 태도가 웃긴다. 특히 대상이 된 여자연예인에게 문제의 쟁점을 집중적으로 환원해놓고 사과까지 받아먹는 걸 보면 어째 페미니즘은 80년대 이전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미 공동의 상품이 된 여자 연예인의 육체에는 전혀 예를 갖추지 않는 이 분위기에 누구하나 저항할 의지없이 세상은 그렇게 얼굴이, 몸이 잘빠지고 볼일이다 주장한다.
이 책은 평가단 활동이 중반을 넘어서는 시점에 전혀 선택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예의라 할수 있다. 최근 젊은 작가의 단편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신체에서 해방되기 위해 육체의 일부를 자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읽은 바 있다. 인문이긴 하지만 여성학, 정신분석학의 하위에 놓여있는 책이라 관심이 가는 바이다. 목차를 보니 꽤 계몽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다이어트와 성형이 일상이 되버린 오늘날 몸에 대한 사고전환은 여성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2. 상식의 배반 - 던컨 J. 와츠 / 생각연구소 ........ (사회과학 > 사회학일반)
'뒤집어보고, 의심하고, 결별하라'
많은 대중들이 선택한 것이 꼭 옳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심지어는 그 결정이 옳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어도 그렇다. 이 책이 7월 초에 출간되었기에 지난달 추천 페이퍼에서 간발의 차로 누락되었는데 벌써 판매량은 가시적인 듯하다. 그러므로 평가단에서 이 책을 먼저 읽고 평가한다는 것이 썩 (마케팅적으로) 의미성을 획득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시기적으로 월초에 출간되는 책들이 평가단 추천시기 때문에 가장 어색한 피해를 보는 느낌이 든다. 지난달 초에 출간된 책을 한달 후에 추천하여 선정된 후 받아보고 서평을 썼을 땐 이미 이 책의 초기 운명은 지어졌다고 본다. 물론 알라딘 평가단이 책 판매량에 크게 영향력을 미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읽는 입장에선 신간의 의미가 퇴색해지는 건 사실이다. 한참 잘 팔리고 있(다고 보여지)는 책을 받아 읽다보면 좋든 싫든 아무래도 세간의 경향이나 초기 리뷰어들의 평가까지 서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왜 이 책이 높은 반응을 끌었는지 정도는 공동의 질문으로 남겨질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책의 제목을 잘 정한 것 같다. 원제의 명령동사형이 아니라 텍스트의 매스감이 매력있다. <상식의 배반>은 <긍정의 배신>, <확신의 함정>과 같은 우리가 순방향으로 늘 의지하는 딜레마에 대한 전복의지를 강렬하게 표명한 제목이다. 이런 식의 뒤집는 형식의 제목들은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무슨 시리즈처럼 트렌드가 되는 것 같아 베스트셀러를 겨냥한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상식을 의심하는 자세와 진실에 다가서는 몇몇 가능한 방법을 전해준다’는 그래서 ‘이 정도의 상식에서 벗어나도 내가 믿던 지식체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인문 MD의 소개가 솔깃함에 의지하고 싶다.
3. 사르트르와 카뮈 - 로널드 애런슨 / 연암서가 ........ (인문학 > 교양철학)
'우정과 투쟁'
나는 사르트르도 카뮈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적어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건 안다. 이 책이 궁금한 건 바로 지식인들은 어떻게 우정을 쌓고 또 어떻게 투쟁하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서로 생각이 틀리면 관계가 틀어지는 대표적인 직업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러곤 살면서 좀처럼 화해의 기회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작가라 생각한다. 그런데 서로 틀린 걸 확인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를 향해 비판의 일격을 가할 때 당사자들은 과감하게 우정을 버리는 것도 작가인지는 사실 긴가민가했다. 이들은 돈독했지만 사르트르는 카뮈를 “현실적 갈등과 동떨어져 있는 지식인”으로 규정했고 카뮈는 사르트르를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지 못한 자들”이라 비난했다. 세상을 안다는 것이 친구를 아는 것에 우선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라면 가급적 지식인의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도 작가가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불릴 때가 있었다. 우리로선 사르트르와 카뮈급의 거장이 부재하기에 예를들순 없겠지만(평론가들 끼리는 있었다고 들었지만) 찾아보면 논쟁사의 영역에 드는 분들도 있을텐데.
페이지를 보니 좀 두껍다.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
4. 로드 - 테드 코노버 / 21세기 북스 ........ (인문학 > 인문 에세이)
'여섯 개의 도로가 말하는 길의 사회학'
길을 가던 인간이 불편한 진실 여섯 가지와 조우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는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욕망의 길, 변화의 길, 위험한 길, 증오의 길, 번영의 길, 혼돈의 길로 보고 있다. 테마가 좋았다. 프롤로그를 보면 문학적 통찰력을 느낄수 있는데 문장이 노련하다. 몇 문장 그대로 옮겨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분야가 대표적으로 건조체인데 여행의 느낌이 감지되어 그런지 본능적으로 끌린다.
- 모든 길은 사력을 다한 싸움의 이야기다. 이윤을 위한, 전쟁승리를 위한, 발견과 모험을 위한, 생존과 성장을 위한, 혹은 단순히 거주를 위한 분투의 역사를 담고 있다. 각각의 길과 도로는 이동하고 연결을 맺으려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
-이 책에서 나는 세계의 모양과 구조를 개조하고 있는 여섯 개의 길들을 제시한다. 이 길들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그 길위의 사람들, 그 길에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여행자들과 함께했다.
-길위에 선다는 건 세상 속에서 가장 내가 또렷하게 살아있음을 느낀 방법중의 하나다. 도로 여행은 내 인생의 중심 줄거리였다.
-길을 주시하는 것은 역사를 들여다보고 인간의 진보와 한계를 측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난 세기에 국제 도로망은 로마인을 감동시킬 만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거의 만장일치로 길이 유용하다고 공언한다. 길은 인간세계의 혈액순환계다. 그 길이 우리를 인도하는 곳은 어디일까?
프롤로그 中에서
5. 인류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순간들 - 황광우 / 비아북 ........ (역사 > 세계사 일반)
이 책은 굳이 평가단이 추천하지 않아도 스테디셀러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함의하고 있다. 저자의 전작 <철학 콘서트>의 후광효과도 있을 터이고 저자가 언급하는 세계사의 명장면은 다분히 학습적이다.
이 책이 끌리는 이유가 아이러니하게 그 부분이다. 저자는 인류의 출현, 일부일처제, 아테네 민주주의, 로마 공화정, 자본주의, 프랑스혁명, 노예해방, 상대성 및 빅뱅이론을 주요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여기서 우리가 배우지 않은 역사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건 언제나 관점이고 결론이다. 사건의 배경을 연계하는 저자의 배경이다. 다음은 저자가 일부일처제를 말하는 방식이다. 선생님 같아서 친근감이 느껴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사람이 두 번째로 들어설 때의 강물은 원래의 물이 아니라 새로 흘러내려온 물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말을 통해 세상에 고정 불변한 것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늘 변화한다’는 진리를 설파했다. 많은 이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일부일처제도 그렇게 변하는 제도와 관습의 하나일 뿐이다. 일부일처제는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당연히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이 책은 초심으로 돌아가는데 유용할 듯하다.
내가 요즘 소설에 관심이 없어져서 그런건지 요즘은 눈에 띄는 소설들이 없는 것 같다. 주변에도 소설읽는 사람들이 없는데
작년 여름과 분위기가 판이하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걸까. 비록 나는 인문분야로 갈아탔지만 좀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아무래도 이번 남은 여름은 차가운 머리를 계속하여 유지해야 할듯 싶다.
가슴마저 뜨거우면 못견딜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