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안부


   좀 아팠다.

   지지난 주말부터 꼬박 일주일을 무력증과 우울증이 동반된 저질감성, 무지이성으로 보냈다. 이 책 저 책, 제대로 끝낸 책도 없고 글도 써지질 않았고 컴퓨터도 미덥지 못했다. 아이도 할머니댁으로 보내고 모처럼 혼자서 휴일을 즐길 수 있었는데 때마침 당도한 장마와 함께 나는 고독을 향해 깊게 침수하고 말았다.

   그동안 온라인 친구 한명이 신간을 보내주었고 우연히 지인이 된 한 분도 책을 보내주셨다. 평가단 책도 오고 어디서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 곳에서 뜻밖의 책도 왔다. 모두 그 모진 비를 뚫고서 내게로 온 것들이었다. 책은 금방 쌓여갔고 높이가 올라갈수록 그들이 상관없는 남처럼 보였다. 내 마음이 떠나려는지 알고들 그러는지 공교롭게도 책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마음을 다친 것 같아 그냥 다시 마음이 내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종종 작가들 중에는(특히 시인) 마음을 다치면 며칠 끙끙 몸살을 앓는 분들이 있다는데 작가도 되지 못한 주제에 그런 건 꼭 빼놓지 않고 닮아 있다. 무엇보다 억울하게 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안 그래도 쓸쓸한 내 가슴을 짓눌렀다. 자고나면 청천벽력같은 뉴스의 사상자, 피해자로 내 가족이 나오는 일을 나도 겪은 바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부턴 모든 죽은 사람의 일이 철저하게 죽지 않은 사람의 몫이 된다. 우리 집에 수해가 난 것도 아니었고 내 동생이 MT 갔다 죽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그들 이웃이라도 된 심정으로 내내 상중인 기분이었다.

   그래도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은 많았다. 아파트 주차장에 자동차가 줄었다. 소음도 줄었다. 공기는 덜 맵지만 더 무겁다. 어쩌면 휴가는 나처럼 남겨진 사람들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인문평가단 활동을 한 뒤로 나는 솔직히 말해 소설이 점점 낯설어진다. 소설언어가 좀 허탈하다고나 할까. 차라리 드라마 언어가 사실적이라는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내 생각인데 소설을 오래 읽으면 작가가 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리뷰를 오래 쓰면 위선이 자신의 경쟁력이 되는 것 같다.



#2. 변심


   어느 출판사 대표님이 리뷰대회 심사와 관련해 기수상자들은 자신을 뛰어넘어야 수상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씀을 하셨다. 문학상의 예를 들며 신규 참가자와 동일한 심사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솔직히 말해 한번 일등을 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보다 더 나은 글을 쓰기가 매번 쉽지는 않다. 나는 내 스스로 그 이전 리뷰를 (조금이나마)뛰어넘었다고 생각하거나 그전 리뷰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썼다고 생각할때만 접수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아니다. 접수를 결정한 바에야 넘어보려 안간힘을 썼다, 가 맞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하건 나는 가장 피곤한 경쟁자를 나 자신으로 생각했으며 내 글을 깨는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 믿어왔다. 나는 꼭 대회 리뷰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내가 정한 엄정한 기준에 결격사유가 생기지 않도록 유의하며 글을 써왔다. 전에 소설 평가단 할 때 리뷰대회한다 하면 꽤 완성도 높은 글을 써내던 분이 평가단 미션으로는 채 두 장도 되지 않는 리뷰를 올리는 평가단을 우연히, 심심찮게 목격했다. 분량의 문제가 아니고 한눈에 보아도 민망할 정도였다. 바쁘셨을 터이고 그럴만한 사정이야 충분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좀 슬퍼졌었다. 혹자들은 리뷰가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 반문할지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 평가단은 (읽고 싶은)책만 읽고 꽂아두는 것이 아니고 (읽기 싫은 책이라도)글로 써내는 것이 임무라 들었다. 또 평가단 뽑을 때 기준 삼은 것이 그 사람이 가장 잘썼다고 접수하는 리뷰로 알고 있다. 물론 매번 대회수준의 글을 서낼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쪽팔리지 않는 글을 써내겠다는 자기의지는 버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젠 좀 생각이 바뀌었다. 나를 이기는 것에 지쳤다. 내 자신을 넘는 것만이 내가 나를 증명하는 길은 아니라는 생각. 내가 정한 기준을 무슨 자기검열처럼 옥죄면서 타자를 비추는 태도. 나는 이만큼 하는데 누가 나를 욕할 것인가 하는 과잉충실. 이런 것에서 좀 자유롭고 싶다. 나보다 나은 나가 아닌 내가 모르는 나, 내가 생각하지 않은 나, 나와는 다른 나를 찾아보자, 하는 식이랄까. 내 자신을 별로 이기고 싶지 않다. 아프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인문분야는 그러한 내 리뷰서사의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맞는 것 같다. 좋은 공부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3. 기준


   이번 달 추천 페이퍼를 쓰기 전에 고려해보고 싶은 것은 다양성이다.(다 적고 다시 읽어보니 낯 뜨겁다) 4번의 미션에서 주로 선택된 책들은 정치와 철학이었다. 이 분야가 선호도가 높은 건 다들 정치와 철학을 특별히 좋아해서 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컨텐츠로서 가장 주목을 받을 확률이 많기 때문인 듯하다. 전에 어떤 분이 세상에 회자가 많이 되는 책을 가장 먼저 읽고 싶은 건 당연한 이치라는 말을 했는데 그건 세상에 회자가 안되기 때문에 이런 책을 더욱 읽어야 하지 않느냐와 같은 논리에 불과하다. 기준을 세상의 회자에 둔다는 점에서 그렇다. 기준은 누가 만드는가. 많이 보고 들은 책을 읽고 싶다는 건 광고 노출빈도가 많은 제품을 사겠다는 것이다. 광고는 자본이다. 자본은 권력이다. 결국 세상에 회자되는 순이 권력의 층위를 갖고 있다는 걸 인정하며 그것에 응대하겠다는 것 밖에는 안된다.

   모르긴 해도, 세상에 회자가 되기를 바라는 책을 추천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읽기는 싫어도 우리가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야 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 내가 읽기 싫은 책이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다음의 책들이 내가 읽기 싫은 책들이라는 뜻은 아니다) 

 

1. 몸에 갇힌 사람들   -  수지 오바크 / 창비 ........ (사회과학 > 여성학이론)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 

요즘 하의실종패션이 유행이다. 예전에도 똥꼬치마니 핫팬츠는 있어왔는데 하의실종이라는 방송용어를 마치 새로운 트렌드인 것처럼 개념을 확장하는 언론의 관음증이 신물이 난다. 어제도 어느 여가수의 야구 시구패션이 볼성 사나왔다고 곧바로 기사처리하는 기자들의 수준이 곧 이 나라 언론의 수준이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해진다. 다같이 실컷 구경하고 즐겨놓고 그건 좀 문제있었다고 논란화 시키는 이중적 태도가 웃긴다. 특히 대상이 된 여자연예인에게 문제의 쟁점을 집중적으로 환원해놓고 사과까지 받아먹는 걸 보면 어째 페미니즘은 80년대 이전으로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미 공동의 상품이 된 여자 연예인의 육체에는 전혀 예를 갖추지 않는 이 분위기에 누구하나 저항할 의지없이 세상은 그렇게 얼굴이, 몸이 잘빠지고 볼일이다 주장한다.


이 책은 평가단 활동이 중반을 넘어서는 시점에 전혀 선택되지 않은 분야에 대한 예의라 할수 있다. 최근 젊은 작가의 단편에서 자신을 억압하는 신체에서 해방되기 위해 육체의 일부를 자르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을 읽은 바 있다. 인문이긴 하지만 여성학, 정신분석학의 하위에 놓여있는 책이라 관심이 가는 바이다. 목차를 보니 꽤 계몽적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다이어트와 성형이 일상이 되버린 오늘날 몸에 대한 사고전환은 여성의 문제만은 아닌 듯하다. 
 

 

2. 상식의 배반  - 던컨 J. 와츠 / 생각연구소 ........ (사회과학 > 사회학일반)
   '뒤집어보고, 의심하고, 결별하라'  

많은 대중들이 선택한 것이 꼭 옳은 결과를 가져오진 않는다. 심지어는 그 결정이 옳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어도 그렇다. 이 책이 7월 초에 출간되었기에 지난달 추천 페이퍼에서 간발의 차로 누락되었는데 벌써 판매량은 가시적인 듯하다. 그러므로 평가단에서 이 책을 먼저 읽고 평가한다는 것이 썩 (마케팅적으로) 의미성을 획득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시기적으로 월초에 출간되는 책들이 평가단 추천시기 때문에 가장 어색한 피해를 보는 느낌이 든다. 지난달 초에 출간된 책을 한달 후에 추천하여 선정된 후 받아보고 서평을 썼을 땐 이미 이 책의 초기 운명은 지어졌다고 본다. 물론 알라딘 평가단이 책 판매량에 크게 영향력을 미친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읽는 입장에선 신간의 의미가 퇴색해지는 건 사실이다. 한참 잘 팔리고 있(다고 보여지)는 책을 받아 읽다보면 좋든 싫든 아무래도 세간의 경향이나 초기 리뷰어들의 평가까지 서평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왜 이 책이 높은 반응을 끌었는지 정도는 공동의 질문으로 남겨질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책의 제목을 잘 정한 것 같다. 원제의 명령동사형이 아니라 텍스트의 매스감이 매력있다. <상식의 배반>은 <긍정의 배신>, <확신의 함정>과 같은 우리가 순방향으로 늘 의지하는 딜레마에 대한 전복의지를 강렬하게 표명한 제목이다. 이런 식의 뒤집는 형식의 제목들은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무슨 시리즈처럼 트렌드가 되는 것 같아 베스트셀러를 겨냥한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상식을 의심하는 자세와 진실에 다가서는 몇몇 가능한 방법을 전해준다’는 그래서 ‘이 정도의 상식에서 벗어나도 내가 믿던 지식체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인문 MD의 소개가 솔깃함에 의지하고 싶다. 
 


3. 사르트르와 카뮈  - 로널드 애런슨 / 연암서가 ........ (인문학 > 교양철학)
   '우정과 투쟁'


나는 사르트르도 카뮈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적어도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는 건 안다. 이 책이 궁금한 건 바로 지식인들은 어떻게 우정을 쌓고 또 어떻게 투쟁하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서로 생각이 틀리면 관계가 틀어지는 대표적인 직업이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러곤 살면서 좀처럼 화해의 기회를 만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도 작가라 생각한다. 그런데 서로 틀린 걸 확인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를 향해 비판의 일격을 가할 때 당사자들은 과감하게 우정을 버리는 것도 작가인지는 사실 긴가민가했다. 이들은 돈독했지만 사르트르는 카뮈를 “현실적 갈등과 동떨어져 있는 지식인”으로 규정했고 카뮈는 사르트르를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지 못한 자들”이라 비난했다. 세상을 안다는 것이 친구를 아는 것에 우선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라면 가급적 지식인의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도 작가가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불릴 때가 있었다. 우리로선 사르트르와 카뮈급의 거장이 부재하기에 예를들순 없겠지만(평론가들 끼리는 있었다고 들었지만) 찾아보면 논쟁사의 영역에 드는 분들도 있을텐데.

페이지를 보니 좀 두껍다.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다.



4. 로드  -  테드 코노버 / 21세기 북스 ........ (인문학 > 인문 에세이)
   '
여섯 개의 도로가 말하는 길의 사회학' 


길을 가던 인간이 불편한 진실 여섯 가지와 조우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는 세계를 연결하는 길을 욕망의 길, 변화의 길, 위험한 길, 증오의 길, 번영의 길, 혼돈의 길로 보고 있다. 테마가 좋았다. 프롤로그를 보면 문학적 통찰력을 느낄수 있는데 문장이 노련하다. 몇 문장 그대로 옮겨 적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분야가 대표적으로 건조체인데 여행의 느낌이 감지되어 그런지 본능적으로 끌린다.


- 모든 길은 사력을 다한 싸움의 이야기다. 이윤을 위한, 전쟁승리를 위한, 발견과 모험을 위한, 생존과 성장을 위한, 혹은 단순히 거주를 위한 분투의 역사를 담고 있다. 각각의 길과 도로는 이동하고 연결을 맺으려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다.

-이 책에서 나는 세계의 모양과 구조를 개조하고 있는 여섯 개의 길들을 제시한다. 이 길들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그 길위의 사람들, 그 길에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는 여행자들과 함께했다.

-길위에 선다는 건 세상 속에서 가장 내가 또렷하게 살아있음을 느낀 방법중의 하나다. 도로 여행은 내 인생의 중심 줄거리였다.

-길을 주시하는 것은 역사를 들여다보고 인간의 진보와 한계를 측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지난 세기에 국제 도로망은 로마인을 감동시킬 만한 것이 되었다. 우리는 거의 만장일치로 길이 유용하다고 공언한다. 길은 인간세계의 혈액순환계다. 그 길이 우리를 인도하는 곳은 어디일까?  
 
프롤로그 中에서




5. 인류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순간들  -  황광우 / 비아북 ........ (역사 > 세계사 일반)

이 책은 굳이 평가단이 추천하지 않아도 스테디셀러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함의하고 있다. 저자의 전작 <철학 콘서트>의 후광효과도 있을 터이고 저자가 언급하는 세계사의 명장면은 다분히 학습적이다.  

이 책이 끌리는 이유가 아이러니하게 그 부분이다. 저자는 인류의 출현, 일부일처제, 아테네 민주주의, 로마 공화정, 자본주의, 프랑스혁명, 노예해방, 상대성 및 빅뱅이론을 주요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한눈에 보아도 여기서 우리가 배우지 않은 역사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건 언제나 관점이고 결론이다. 사건의 배경을 연계하는 저자의 배경이다. 다음은 저자가 일부일처제를 말하는 방식이다. 선생님 같아서 친근감이 느껴진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에 사람이 두 번째로 들어설 때의 강물은 원래의 물이 아니라 새로 흘러내려온 물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말을 통해 세상에 고정 불변한 것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늘 변화한다’는 진리를 설파했다. 많은 이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일부일처제도 그렇게 변하는 제도와 관습의 하나일 뿐이다. 일부일처제는 영원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당연히 변화를 겪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이 책은 초심으로 돌아가는데 유용할 듯하다.





내가 요즘 소설에 관심이 없어져서 그런건지 요즘은 눈에 띄는 소설들이 없는 것 같다. 주변에도 소설읽는 사람들이 없는데
작년 여름과 분위기가 판이하다.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걸까. 비록 나는 인문분야로 갈아탔지만 좀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아무래도 이번 남은 여름은 차가운 머리를 계속하여 유지해야 할듯 싶다. 

가슴마저 뜨거우면 못견딜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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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2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2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8-0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번째 책은 저도 추천했네요. 지식인들은 불쌍한 사람들이지요.. 친구와 맞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을 순 없을테니깐 말이지요, 한편으로는 가장 인간다운 사람들이지요, 고독하다는 점에서. 사람이 다 홀로 살아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서로의 짐을 바라보면서, 에휴. 몰라, 결혼을 하면 좀 달라질까요? 풋.

한사람 2011-08-02 18:15   좋아요 0 | URL

너무 많이 알아도 세상을 편하게 살수는 없을 것 같아요.

생각이 틀리다는게 헤어질(?) 이유가 되는게 꼭 지식인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 책이 만약 선정되면 또 좋으면서 끙끙댈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결혼은 꼭 해보시라는 ㅋㅋㅋ(우울증의 후유증입니다 ㅋ)

마녀고양이 2011-08-0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의 페이퍼를 접하며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숨막히게 어려운 일이구나 싶은 느낌을 가끔 받아요.
저야 글을 쓴다라는 생각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곳에 있으니까요.

내내 비가 오는 여름은 의욕을 뺏아가는거 같아요. 그래서 긴긴 휴가를 가나봐요...
아프지 마세요. ^^

한사람 2011-08-04 13:53   좋아요 0 | URL

제 페이퍼가.. 좀 부담을 드렸다는 생각이 드네요 ㅠ

저도 편하게 글쓰고 자유롭게 떠드는 곳은 있는데..ㅋ

이곳에선 책과 글에 관련된 이야기만 해서 그런지..
엄숙주의를 좀처럼 벗어나게 되지를 않네요

그나마 다행인건 리뷰는 예전의 엄숙주의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중이거든요^^

이번 여름은 무척 끈적끈적 한거 같아요
습도가 일정량을 오래 유지하네요...이런걸 불쾌하다고 하나요?
어떨땐 서늘한 공포로 느껴집니다 ㅋ

보물선 2011-08-0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그저 소설 나부랭이만~ (비하하는 어투는 아님^^)

아항~ 에세이,인터뷰집 뭐 이런것도 읽는구나....ㅋ

한사람 2011-08-05 17:51   좋아요 0 | URL

나도 소설 나부랭이만 집어 들었소 ㅋ
근자에 와서 이쪽으로 턴 한 경우지
뱁새가 황새를 좇아가려 하니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소

그런데 또 몇개월 하다보니 이쪽도 할만하오 ㅋㅋ

교고쿠 2011-08-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냥...스스로 검열 안 하고 순수히 읽고 싶은 책을 추천하면 안 되는 걸까요? 전 주로 그렇게 하는데...
우리가 읽어야 하는 책이라던지 등의, 어떤 의무감을 갖고 추천하기보다는 저는 그냥 제가 읽고 싶은 책들로 추천도서 페이퍼를 작성하고 있어요. 스스로 검열까지 해야 한다면 숨이 막힐거 같은 느낌...

한사람 2011-08-08 18:21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교고쿠도님~

저는 사실 평가단책 말고는 인문분야의 독서를 거의 안하는 쪽이어요
그래서인지 스스로 읽고 싶은 책들도 없는 편(?)에 속해요

읽어야 하거나, 누가 읽어보라고 한 책을 선택하는 쪽이었죠

그런데 평가단 이름으로 책을 추천할땐,
저 혼자만 읽고 말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아요
n분의 일이지만 제 추천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자유롭지가 못해요 ㅠ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몇가지의 정보만으로 페이퍼를 쓰는 것에도 좀 웃기다는 생각도 하고요
이것저것 살펴보았다고 했지만 받아보고 막상 읽어보면 아닌 책들도 있었고요..

일차적으로는 제 판단을 믿지 못한다는 불신이 있구요
다음은, 소설처럼 재미나 경험을 위해 읽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욕심이 있고..
또 무엇보다..제 페이퍼를 통해
추천의 근거로 삼는 분들이 계시다는 판단때문에..(실제로 구매를 하시는 분도 있구요..ㅠ)

좀 엄숙한 내용이 되는 것 같아요..

인문독서를 좀 많이 했더라면..약간의 모른다는 자격지심도 있구요 ㅋ

교고쿠 2011-08-08 19:34   좋아요 0 | URL
으앗, 완전 저와 달리 서평에 큰 책임감을 갖고 임하시는듯...
사실 저도 그랬는데...저는 글쟁이로써 '글을 쓰는 것'에는 프로의 자부심을 갖고 임하려고 하지만(사실 프로라는 말을 쓰는 것이 부끄러운게, 글의 퀄리티는 전혀 프로답지가 못합니다) 평가단 도서를 추천할때는 책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읽어 보고 추천하는 것이 아닌만큼,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다고 비교적 관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선호하는 주제의 책을 추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인문사회분야 중에서는 빈곤,불평등,소수자문제, 그리고 철학에 관심이 많은데, 그래서 추천페이퍼 작성할 때는 주로 그러한 주제들의 책을 추천하곤 합니다. 물론 추천한다고 무조건 선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추천하고 있습니다. ^^

때로는 글이 정말 안 써져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많습니다. 건강 문제로 본의아닌 글쓰기 무기한 휴가(?)를 갖게 된 저는(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쓰는것은 아니구요...아무래도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것들이 있다 보니, 한 달에 10편 이상 쓰던 것을 3~4편 정도로 줄이게 된 듯 합니다), 그것을 계기로 글쓰기를 약간은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괜히 스트레스 받아봤자 건강이 악화되는데에 일조할 뿐이라는 생각과 함께... 너무 어깨에 짐 많이 올려두지 마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읽고 쓰는게 좋다고, 제가 이런 말씀 드릴 입장은 안 되지만 감히 말씀드려 봅니다, 흑.

(지금은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을 읽고 있습니다. 신간평가단 책들도 아직 완료 못한게 많은데...흑)

한사람 2011-08-08 22:57   좋아요 0 | URL

이번 평가단 활동이 끝나는 시점쯤에는 부디 많은 짐들이 내려져 있기를 바라요 ㅋ

빈곤, 불평등, 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저는 특별히 관심있는 분야는 없는 편인데 ㅋ
어떤 책이든 문장의 완성도가 높은 글을 좋은 책이라고 여기는 습관이 있어요
그러다보니...관념적 사유를 유도하는 책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좋은 말씀, 잘 새기고
어떤 틀에 갇히지 않도록 노력할께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1-08-08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와 카뮈 보고 싶어요. 작품들도 많이 못 읽었는데 무슨 엄숙주의인지는 모르겠지만요. 한사람님을 보면 습작을 하고싶은 욕구가 솟다가도 저는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니 겁이 나요. 말씀처럼 글을 누군가에게 보이고자 쓰면 자신을 넘어서기 힘들어요. 의무적으로 써내는 것도요. 그러지 않았을 때 훨씬 나다웠는데 요즘 특히 나를 버리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야 읽는 시간이 줄어서 쓸 거리도 줄었지만요. 역시 열심이시군요. 늘 자극이 돼요. 건강 챙기세요!^^

한사람 2011-08-08 22:53   좋아요 0 | URL

히히.. 글만으로만 보면 엄청 고민하고 뒤돌아서서도 책만 읽을 것 같고..
인문쪽 페이퍼는 완전 제 열등감에서 비롯된 일종의 방어의식 같아요 ㅠ.ㅠ

리뷰엄숙주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예전보다 나아졌다는 생각은 들어요
백편 정도를 스스로를 옥죄는 기분으로 써대었더니
이제는 맘편하게 쓰면 도통 리뷰를 썼다는 생각이 들지가 않아요...

리뷰만은 남들보다 제가 저를 의식하는 순간이 더 많아요..
그렇게..그냥 습관이 된거죠 ㅠ

요즘은.. 다른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해요
스스로 이때다 싶은 때가 와야 할텐데..
그런건 오지 않는거 같기도 하고
고민이 많아요^^


 

 

 #1. 흠모하기




이 책의 페이지를 앉은 자리에서 한 장씩 넘기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중간에 멈칫거리며 읽어보기론 고종석, 서경식, 알랭 드 보통, 데리다, 벤야민, 러셀, 아렌트...그야말로 그냥 내가 좀 아는 네이밍에 불과했다. 12년 5개월 29일... 218명이라... 이분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 이분이 고인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집어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늘 스쳐가는 서평가중 한사람에 지나지 않았을 듯하다. 죽어야 겨우 전달되는 진심이라니. 나도 참 무심한 독자가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대신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이 분의 노고와 열정에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그것이 뒤늦게나마 내가 할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했다. 
 



 

요네하라 마리 여사는 이십년 동안 하루에 일곱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마리여사가 15분에 읽은 책을 저자는 2시간 넘게 잡고 있었다고 한다. (<분노하라> 정도는 가능하겠다) 나는 속독하는 편도 아니고 책에 따라 문장에 따라 책 읽는 시간이 틀린 경우다. 얼추 에세이를 제일 빨리 읽고 장편, 단편, 인문 순으로 속도가 느려터지는 것 같다. 책이 어렵다고 꼭 늦게 읽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문장의 배열이 내 머릿속 사고의 체계와 코드가 맞으면 아무래도 익숙하니까 빠른 걸까. 쉬워도 안 넘어가는 책은 있다. 예를 들면 번역한 유명인사의 에세이 같은.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을 주로 담는 여행 에세이도 잘 안 넘어간다. 문제는 잡념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예전보다 책 읽는 속도는 느려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꼭 속독하는 것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요즘 들어선 책 한권 덮는데 오만가지 잡생각이 다 든다. 책을 읽는 건지 인생을 고민하는 건지 생각의 확장을 막을 길이 없다. 이 책은 전화부 두께를 자랑하는 일종의 사전이라 할 수 있는데 사전을 며칠 만에 다 읽을 순 없지 않은가. 마음의 여유를 머금고 잠시 소장의 기쁨을 만끽하며 읽는다는 즐거움보다는 가졌다는 소유감을 확실히 느껴보고 싶었다. 이 책이 이번 달 평가단 미션이었다면 어땠을까.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는 심정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기쁜데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 어쩌면 이 책은 서평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대신 사는 동안 곁에서 오래오래 아껴두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이 책을 펴내면서 소감을 밝히는 머리말이 에필로그처럼 수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교수가 아니어도 독자들이 흠모하고 찬양할 만한 인물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길라잡이 구실을 하는 일이 즐겁다고 말한다. 사상가를 가이드할 수 있다는 건 어떤 경지일까. 여행을 다 다녀보고 그곳을 정리하여 소개하는 가이드를 떠올려본다. 살아 생전에 임한 그의 여정이 참 아름다웠다는 생각을 한다.

 

 

#2. 따라하기




무엇보다, 몸이 잘 안 깨어나는 날은, 이런 모습으로 원하는 곳을 향해 발짝 다가간다는 게 자신 없어져 그냥 집에 틀어박힌다.                                                                                             -81p


어쩜, 지금의 딱 내 심경이다.


 

 

 

우리집은 경기도 어느 멀쩡한 산자락을 깎아 만든 아파트인데 가끔 폭우가 쏟아지거나 천둥 번개가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면 인터넷도 불안하고 핸드폰 연결도 희미하다. DMB도 잘 안터지고 물론 와이파이는 안 잡힌다. 심지어는 케이블 TV도 지직거린다. 몇 번 통신사에 전화하여 단말기같은 걸 에어컨 상단에 부착하여 보았지만 이런 식으로 비오는 날은 소용이 없다. 이런 날은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다들 집에 있는 건지 거리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집에서 피리를 부는지 빗소리에 실려 동요 몇 자락이 들려온다. 도시에서의 고립감은 무엇으로 오는걸까. 고독하다고 고립되는 건 아니지만 고립되면 고독하다. 맥락없는 커피 한잔에 이 책은 잘 곁들여진다. 사실 지난 일요일 다 덮으려 했는데 개인적으로 온라인 테러를 겪은지라 오늘에서야 신문 삼일치를 읽으며 기운을 차렸다. 뭐랄까. 집중하기 힘들때, 그러나 그냥 있기는 한심할 때, 그렇다고 에너지를 뺏기고 싶지는 않을 때, 이 책은 무의식의 동무가 되어준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이 ‘생각하는 일요일’이 아니고 ‘생각의 일요일’도 아니고 <생각의 일요일들>인데 일요일에 생각하는 것의 부담감을 많이 줄여준다. 일요일까지 생각해야 하는 힘겨움을 상쇄한다. 그 남은 하루라는 일요일의 절박함을 줄여준다.

소설가는 잡념도 푸념도 이런 식의 멜랑꼴리를 가지는구나, 싶은.

<소년을 위로해줘>를 연재때 읽지 않고 출간후에 읽었다. 그런데 작가가 연재를 할때 후기처럼 남겨놓는 글은 가끔 읽었었다. 정제되지 않은 듯해 보이려는 솔직한 고민 같은 것을 엿본 느낌.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것도 가공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는 것인데, 이렇게 책으로 모아놓고 보니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 여백을 메우기 위해 배치된 사진이나 진짜 여백은 휴가지와도 참 잘 어울리는 전략이다. 만약 이 책이 잘되면 그건 기획과 마케팅의 승리가 아닐까. 물론 은희경의 기본 네임 밸류는 당연한 전제이겠지만.

은희경의 문장들은 잘 정제된 보석같은 느낌이 들곤하는데 이 단정감, 단아함이 꼭 모범생 작가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작가는 트위터라는 공간이 예전에도 있었다면 고독을 견뎌내고 그랬기 때문에 소설가가 되지 않았을지 자문한다.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에서의 고독은 해소되는 게 아니다. 서로의 고독끼리 다정해져 고독한 채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해준다. 너도 나처럼 고독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것이 고독의 본질이고, 나는 그것을 소설로 써보고 싶어했을 것 같다. 지금처럼.    -75p
 
   


트위터의 시공간이 고독을 해소해주는 것이 아니고 서로의 고독끼리 다정해져 고독한 자신을 받아들이게 해준다는 말씀이 참 과학적으로 들려왔다. 트위터가 참 묘하게도 세상에 떠드는 그들과 고독을 나누진 못하지만 그냥 나란히 배열된 고독을 구경할 수는 있다는 것. 예를 들어 내 위에 이외수 작가가 떠드시고 내 아래 박범신 작가가 읊조리시는게 무릇 일개 독자인 나의 잡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지만 시간순으로 배열된 타임라인은 동일한 고독체의 전시장같다는 말씀이다. 내가 아무리 고독해도 이외수 작가, 박범신 작가와 다정할 순 없지만 우리가 각각 위치시킨 고독들끼린 다정해질 수 있다니. 그럼으로써 그들 작가들도 고독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니. 심지어는 그 고독의 본질을 소설로 써보고 싶었을 거라니. 미치겠다. 가끔 은희경 작가는 이런 철학적인 성찰의 지존을 보여주시는데 이번 산문들의 선물은 무겁지 않은 척하는 가벼움으로 위장된 꽤 튼실한 사념의 조직체들이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 아까운 시간이지, 아무리 고독하다 울고 있지만.

지난 주말부터 어제까지 여지껏 서평쓰면서 생긴 일 중에 가장 폭풍같은 사건들이 나를 통과해 지나갔다. 과거의 많은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앞으로의 다짐들을 조직하는 계기가 된 듯하다. 뭔가 옷 잘 안 벗는 여배우가 화끈하게 대역없이 베드씬이라도 찍고 온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지금 벗은 내 몸뚱아리가 아니고 앞으로 어떤 작품에 출연할 지가 걱정 아니겠나. 글이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쓰는 이 글들이 나의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글이 곧 나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나로부터 발생한 나의 것임은 틀림없다. 나의 글이 나의 모두는 아니지만 나의 모두는 나의 글인 날을 기다린다.

모든 것은 지나가지만 모든 것이 지나갈 때 우린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나를 이해해주지도 않는다. 슬픈건 나자신조차도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기란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했다.

‘소설가가 그 근처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소설가가 여전히 지식인이나 스승이어야 한다면 나는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사상가를 흠모할래. 철학자를 찬양할래. 평론가를 존경할래.

그리고


소설가를 따라할래. 
이렇게 비가 끝도없이 퍼붓는 날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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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2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이 평가단 선정도서였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도 다 리뷰들을 썼던 모양인데, 저도 그냥 소장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ㅠ

근데 저는 은희경씨를 아직까지는 탑에 놓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내보이기에 좋은 작가? 그 정도인듯 싶어요.
오히려 한사람님의 오늘 글이 더 좋다고 말하고 싶어요.ㅋㅋ

한사람 2011-07-28 22:09   좋아요 0 | URL

상상력 사전 같은 책은 리뷰쓰기 남감하죠 ㅋ
하루 이틀에 읽을 책도 아니고
이 책은 일단 두께가 백과사전이고 정말로 사전식으로 편집을 하셨네요
서평쓰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필독서라는 생각도 들구요

은희경 작가는 뭐랄까..
문장속에서 쉬크한 고민이 다시 문장으로 피어난 것이 좋아요

제 글이 좋아요??? ㅋㅋ

cyrus 2011-07-27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간 나면 <책만사> 읽고 있어요. 구입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 특정 학자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쓴 책들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직접 그 목록에
나열된 책들을 읽어보려고 해요. 사상가들이 워낙 많아서 쉽지 않은 일이지만요,, ^^:;

윗쪽 지역은 물난리 때문에 정말 난리던데 침수 피해 없으시길 바라요.

한사람 2011-07-28 22: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
목록... 저자와 그의 작품을 한눈에 정리, 확인할수 있다. 그것도 일인데 잘 모아주셨죠

제가 사는 쪽은 이번에 큰 타격은 안입었네요
늘 경기북부 지역이 피해를 입잖아요
이번에 강남이 참 예외지만요..
덕분에 이쪽에서 강남으로 출근하시는 분들 완전 생고생이었어요 ~

마녀고양이 2011-07-28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온라인 테러라니.. 무슨 일 있으셨나요?
가끔 페이퍼에서 그런 글귀들이 보이던데. 온라인 세상도 오프라인 세상과 많이 흡사해요, 그죠?

인간은 모두 혼자이고 소외된 존재라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그것이 사실이기에 우리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고립되었기에 함께할 수 있는 묘한 역설... 저는 그게 즐겁답니다, 물론 이렇게 비가 와서야 진정 즐겁기는 어렵지만요.

한사람 2011-07-28 22:14   좋아요 0 | URL

좀 연루된 일이 있었어요 ㅠ.ㅠ
직접적인 가해자, 피해자 그런성질이 아니라 그냥 단순언급되는 건데도
저는 몹시 견디기 힘들더라구요..

고립되었기에 함께 할수 있는 역설, 이 말 참 멋지네요
그렇담 같이 있는다고 같이 함께 하는게 아니라는 뜻과도 상통할까요..
물리적인 형태의 동행이 꼭 동반자의 조건은 아닐지도 모르죠..

여긴 좀 비가 덜한데..그쪽은 어떤까요?

가연 2011-08-02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이 진짜 되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안고는 있지만.. 한사람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요. 리뷰쓰기가 참..ㅎㅎ 개인적으로는 신간평가단에 선정되어서 노출이 많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만ㅠㅠ 저도 구입하고는 찬찬히 읽고 있어요ㅎ

한사람 2011-08-02 18:11   좋아요 0 | URL

얼마나 좋았을까요?
리뷰쓰기 전까진요 ㅋㅋ

선물하기도 좋고 그냥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책이던데...

안타깝네요..
 

 


#1. 고만고만하게

   이번 주는 이렇게 더위는 시작되는 거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하루건너 빨래 돌리고 널고 걷었더니 또 주말이다. 주부들에겐 반갑지 않은 아이들 방학도 시작되었다. 지난주부터 여기저기 캠프를 알아보고 방학특강 소식에 귀를 쫑긋거렸다. 언제부턴가 캠프도 다양해져서 영어, 체험학습, 역사탐방은 진부해진지 오래고 요즘은 멘토들과 함께하는 자기주도 학습이나 리더쉽, 선행학습, 논술캠프 같은 애매모호한 자아성취형 캠프가 유행이다. 들어가는 돈만해도 두세 밤 잤다하면 기본이 오십이고 일주일 넘겼다 하면 칠팔십이다. 아이들이 방학이라고 학원을 다니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학원방학인 7월말에서 8월초가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물놀이라도 한번 다녀올 것 같으면 또 그때를 넘기면 시간에 좇긴다. 이런 복잡한 상황 때문에 그렇게들 같은 시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전국의 고속도로가 미친듯이 막히는 것이다. 그 기간엔 유치원도 방학을 한다. 그래서 백화점이나 할인마트, 영화관, 동네 은행마저도 엄마를 대동한 아이들로 북적거린다. 물론, 사는 게 고만고만한 우리들 이야기다.

   돈 좀 있는 집은 당연히 해외로 애들을 빼돌리고(?) 자기들은 휴가를 가거나 아니면 아이들과 럭셔리한 리조트형 여름휴가를 떠난다. 우린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시간이 맞으면 동네가 멀고 동네가 근처면 시간이 안되고 다 되면 너무 비싸고, 돈도 적당하면 과목이 맘에 안들고...이런 관계로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다니던 영어학원외엔 암것도 하지 않기로. 그대신 집 앞에(정확히는 집 뒤에)있는 도서관에 출근하기로. 별스런 대안이 아니다 싶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로선 큰 결정이었다.

   도서관에 가선 보고 싶은 책을 읽고, 일정시간 선행학습을 하기로 했다.

   몇 가지 확인할 책도 있고 아이 문제집도 사줄겸 서점엘 갔다. 방학 때 풀겠다고 두 권이나 샀는데 다 풀 수 있을까. 그래도 문제집 살땐 기분이 좋다. 서점에 가면 온라인 서점과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는 걸 실감한다. 눈에 띄는 건 한 달 사이 김제동의 책이 많이 팔린 모양인지 여기저기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 휴가철 권장도서코너에 황석영, 박범신, 최인호의 소설이 나란히 전시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2. 편안편안하게

    어제 박범신 작가님이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내 리뷰를 읽어주셨다. 트윗에 끙끙거리며 힘들게 리뷰올렸다고 앙탈(?)을 부렸더니 확인 차 그렇게 해주신 것이다. 내가 무거운 소설, 힘겨운 소설을 홀로 저항하듯 읽는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말씀하셨다. 상처받고 떠나와 있는 내 심정을 들킨 것 같다는 말씀도 하셨다. (혼자서 한잔 해야겠다는 넋두리도 ㅠ.ㅠ) 소설 읽고 리뷰를 많이 써왔지만 그 소설을 쓴 작가가 내 리뷰를 읽고 직접 답을 해준 건 처음이었다.(읽어주실 줄 알았으면 더 공을 들일 껄 그랬나 싶기도 했다 ㅋ) 누가 쓰라고 해서 누가 보겠다고 해서 혹은 어떤 마감이 있어서 쓴 리뷰가 아니라 그냥 사람들은 이런 소설을 잘 읽을 것 같지 않아서 오기부리듯 작성한 리뷰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그 소설을 쓴 작가가 내 글을 읽고서 답을 해주셔서 눈물이 핑 돌았더랬다. 시인은 자기 시를 외우는 독자가 평생 한명이라도 행복하다더니 어젯밤은 내가 리뷰로 얻어낸 그 어떤 성과보다 기쁘고 가슴이 벅찼다. 바보같이 누구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웃겨 보일 것 같아서 꾹 참고 있다가 결국 이렇게 여기서 떠들게 된다.

   그래서.

   오늘 이런 책이 눈에 띄었는지 모르겠다. 서점가면 제값내고 꼭 한두권 씩 책을 사게 되는데 오늘은 이 책이 걸렸다.


 1.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박진, 김남혁, 장성규 / 자음과 모음


이 책에는 문학이 문화산업의 일부가 되고 독서에 미치는 마케팅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져가는 상황에 대한 걱정과 비판도 담겨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떤 소설을 선택해야 하는지, 바로 지금 좋은 소설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매번 다시 묻고 고민해야만 했다. 문학을 둘러싼 지금의 상황들은 이렇듯 별로 낙관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소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 소설이 이끌어 내는 다양한 생각들과 진지한 고민들이 여전히 우리에겐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그래도’와 ‘그래서’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처음이 1Q84에 대한 토론인데 평론가들은 이런 평가를 내리는구나를 엿보면서 선채로 열페이지 정도 빠져들었다. 대놓고 문학동네의 상업주의 마케팅을 거론해서 흥미로왔다. 그러니까 평론가들끼리의 좀 자유로운 방식의 수다(그러나 기록을 전제로한)로 느껴졌다. 다른 소설을 말하는 방식도 솔깃하다. 주말을 견디는 확실한 준비 하나.  

    이웃분 중 한분이 내게 서평쓸 때 평론가의 글을 많이 읽으시냐 물어보았다. 난 평론가의 글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편에 속한다. 도통 내가 뭔 말하는지 모르기만 하라는 식의 현학적인 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그들(세계)의 차별화된 특권이거나 공부많이 한 자 특유의 습관인 것 같다. (그렇게 배워왔고 써왔으니) 하지만 독자로서 가장 맘에 안드는 건 빈번한 수동태형 문장과 이중 삼중 부정형의 문장들이다. 조지 오웰이 (같은 서평자로서) 대놓고 아주 잘못된 글쓰기 방식이라고 지적한 방법들에 속한다. 특히 평론가로서 등단한지 얼마 안되는 분들의 글이 더욱 그렇다. 가끔 계간지에도 그런 평론이 많은데 무슨 자기들 박사논문 읽는 기분이 들어서 사정없이 덮어버린다. 대신 좀 오래된 평론가의 글들은 자기문체가 확립되어 있어 산문으로서도 유려한 미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되어 부러 외면하지는 않는다.(물론 부러 택하지도 않지만 ㅋ) 지난주에 평론가 김주연의 <문학, 영상을 만나다>라는 책을 우연히 접했는데 이분 글이 쉬우면서 현학적인 내공을 편안하게 전달하는 것 같아 맘에 들었던 문장을 옮겨본다.



 2. <문학, 영상을 만나다>, 김주연/ 돌베게


로고스 중심주의란 로고스를 진리로 삼는 태도인데, 언어, 이성을 의미하는 로고스를 중시하는 하이데거의 담론에 데리다가 근접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데리다는 이의를 나타냄으로써 경계의 초월/위반문제에서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 견해란 우리가 보통 ‘지금’이라고 부르는 ‘현존’presence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우리의 ‘앎’, 곧 지식의 기반을 흔듦으로써 실증주의의 견고함은 물론, 현상학의 섬세함에 모두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언어라는 질서는 극도로 불안해지며, 언어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하는 문학의 문체가 지닌 고유성도 흔들린다. 의미와 문체가 모두 동요한다. 언어의 역할과 기능에 관심을 가진 데리다였으니 결과적으로 언어의 내부를 교란시킨 것이다. 이러한 태도와 방법은 서술을 통해 서술할수 없는 것을 암시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그것과 바로 상통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그 연원으로서 계몽주의를 극복한다는 역사적 당위와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이성의 맞은 편에 그 와해 이외의 뚜렷한 표상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상황에서 파악한다.

  
   데리다의 ‘해체적 글쓰기’를 비평한 글인데, 한숨을 쉬며 궁극적으로 나는 이렇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지난달 평가단 미션이 <데리다 평전>이었는데 이 글을 보고 이와 어렴풋하게 비스무리한 생각을 하긴 했으나 이상한 방향으로 결론을 낸 내 자신이 퍽이나 한심스러웠다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설득을 한다는 것. 모든 걸 다 알고 모든 걸 말할 수 있어야 가능한.

   그런가하면 중견 평론가들 중에 편안한(하다고 생각하는) 글을 쓰는 남진우의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같은 수준(?)이면 소설가의 산문읽듯 부담안가지고 페이지를 넘길 수 있다. 이 책이 나를 이끄는 이유는 결론을 내는 방식인데 대부분 객관적인 이론이나 철학자, 혹은 누구의 무엇을 잣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주관으로 주관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렇게 하기까지 물론 엄청난 공부를 했을 터이지만.



3.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남진우 / 문학동네


우파가 됐든 좌파가 됐든 이 나라에선 사적인 것을 희생하고 공적인 대의를 위해 이바지 하는 것을 높이 평가해왔고 소속원들에게 그것을 강요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이 행진하는 방향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고종석의 소설은 우리에게 길들어진 사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사물이나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준다. 느슨하고 평이한 듯하면서도 읽어나가다 보면 묵직한 감동과 함께 자신을 돌이켜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고종석의 이번 소설집은 최근 우리 문학이 거둔 중요한 수확이라 말한다.


고종석의 <제망매>에 대한 결론을 내는 방식이다. 역시 어려운 단어, 이해 안가는 합성어, 부담스런 수동태는 찾아 볼수가 없다. 고종석 작가는 현재 연재소설을 쓰고 있는데 가끔 발상의 전환을 자극하는 문장들을 (늘 그래왔듯이) 올려주신다. 그걸 '발상의 전환'이라고 정의내린 남진우 평론가도 근사하고.

 


#3. 시원시원하게



 

 

 

 

 

 

 

 

 

 

 <퀵> - 출연  이민기, 강예원, 김인권, 고창석 / 감독  조범구

    별 생각없이 별 기대없이 본 영화가 역시 대박이다.  

   화끈, 시원, 쾌속, 폭발 !!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입을 벌린 채로 영화를 보고 나왔다. 두 명의 주연배우들을 어디서 보았나 했더니 <해운대>의 바캉스 커플이었다. 강예원은 <하모니>의 슬픈 역보다 코미디가 몸에 맞는 배우같았고 형사로 분한 고창석은 날로 비중이 높아지는 듯하다. 거의 주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김인권도 매번 웃겨서 죽을뻔 하는 배우중 한명이다. 두어 번 박장대소를 책임져 준다.

 




 

 

 

 

 

 

 

 

 

 

    난 책의 경우엔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데 영화는 대충 넘어간다. 재밌게 봤으면 몇군데 의아해도 그러려니 한다. 연기력, 연출력, 시나리오 등등 분석해가며 별점 주는 건 내 몫은 아닌 것 같다.(그럴 실력도 안되고 ㅋ) 이 영화도 흠잡고 싶지 않다. 이 정도면 대만족 케이스에 속한다. 왕추천 이올시다, 라 할 수 있다. 요즘 세상에 돈 만원도 안들이고 두어 시간 이처럼 스트레스 날려버릴 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해리포터 안보길 정말 잘했고 딸아이와 하이파이브를 몇 번 했는지 모른다. 예전엔 자주색 세피아같은 한물간 자동차만 폭파하더니 우리도 사정이 많이 좋아졌는지 불타는 자동차 종류도 다양해졌다. 스턴트맨들 고생이 많았겠다. 예고편으로 7광구를 보여주던데 분위기가 괴물분위기였다. 8월이 기다려진다(너무 기대하면 실망인데 ㅋ)  

 

이번 주말도 꽤 알찬 마음으로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이야 휴가를 가건 캠프를 보내건 우리는 이렇게 그럭저럭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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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22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어디다 올리면 박범신님이 직접 보실 수 있나요?
부럽삼. 근데 소설 읽기의 자세는 또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왠지 끌리는군요.
퀵이 그렇게 재밌다구요? 나두 그런 빨려들어갈 듯한 영화 한편 보고 싶군요.
주말 잘 보내요.^^

한사람 2011-07-22 20:06   좋아요 0 | URL

트윗에 떠들었는데 박범신 작가님이 어디서 볼 수 있냐고 물어봐주셨어요..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면서요 흐흐흑...
(황송하게도 저를 팔로 해주셨거든요)
그렇더라도 뭐 저 같이 널리고 널린 독자중 한 사람에게까지 답해주실까 싶었죠..

사이트 갈켜드리면서 이 잡문들을 어떻게 하나..얼굴이 확 달아올랐어요
(그리곤 벌받는 심정으로 회신을 기다렸어요)

<그래서,,,> 이 책 재미나요. 솔직하고 새롭고..

<퀵>은 진짜 대박 !!!!!
전 요즘 이런 영화가 좋아요. 보고나서 생각나는건 별로 없지만
한여름에 딱인 영화여요^^

스텔라님도 주말 잘 보내시고..무릎도 관리 잘하시구요~

stella.K 2011-07-22 20:12   좋아요 0 | URL
방금 문발리 그 동네에서 왔어요.
축하해요.
저는 잘 못 썼는데 그런 줄 알면 그쪽에 올리지 말걸 괜히 올렸다는 생각이 들어요.ㅠ
모처에서 백가흠 서평 이벤트도 미끄러지고, 기타 등등...
이래저래 이번 주말은 별로일 것 같아요. 흐흑~

2011-07-22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7-22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댁은 해리 포터에 빠져있는 집은 아니신가봐요.
저는 해리 포터 전권을 두번 읽고, 해리 포터 dvd를 몽땅 가지고 있으면서 딸아이와 세번 이상 보고
이번 마지막 편 보기 전에, 전체를 한번 더 훑었더랍니다. 거기다 해리 포터 마지막 편 출판되었을 때
스네이프 교수로 인해 울고, 끝이 났다는 사실에 또 울고. 이번에 해리포터 영화 마지막 편을 보고나서
딸아이와 10년간 같이했던 무엇이 끝났다는 아쉬움에 또다시 서운해하고..... ^^, 아주 오버에 오버죠? ㅎㅎ

하지만 아무리 외국 것이라도, 저희와 오랜 세월을 했던 추억이 남아 서운해요.. 아주~ ㅠㅠ
한사람님 댁은 따님과 '퀵'을 즐겁게 보셨다니, 그것도 좋긴 하네요. ^^

한사람 2011-07-22 21:18   좋아요 0 | URL

추억이 깃든 소중한 영화네요..
영화이상의 인생이구요^^

저는 아이따라서 본 해리포터 영화중 두어편은 기억조차 나지가 않아요 ㅠ.ㅠ
참.. 그럴 수도 있더라구요

<퀵>은 기대를 안하고 시간때우기용으로 본 것이었는데
진짜 시간을 알차게 잘 때웠답니다.
집에서 예능보듯이 너무 크게 웃어버려서 창피했어요 ㅋㅋ


루쉰P 2011-07-22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님 축하드려요. ㅋㅋ 박범신 작가님이 직접 댓글도 남겨주시다니 말이죠. 작가가 리뷰에 글을 달아준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일까요. 생각만 해도 즐거운데요. 작품을 쓰는 필자도 머리가 부서져라 쓰겠지만 제가 볼 때는 한사람님의 리뷰도 그에 필적한 노력을 하며 쓰시는 거라 느껴져, 거기에 대한 댓가(?)를 받으신 듯해 무척이나 흡족하네요.

평론가의 글들을 싫어하신다는 말에 저도 대공감합니다. 조지오웰의 말처럼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위해 쓰는 듯한 진짜 뭔소리인지도 모를 소리를 지저분하게 늘어놓는 평론가들의 책은 정말 저는 싫어요. 물론 저보고 이해를 못하는 지식이 짧은 사람이라고 욕을 평론가들이 해도 뭐! 내가 이해 못해서 기분 나쁜 건데요. ㅋㅋ

하여튼 저는 한사람님의 리뷰가 참 좋은 것이 누가 봐도 그리고 배우지 못해도 이해를 하며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아요. ^^ 전 그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기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말이죠. 나중에 한사람님이 책을 내시면 제가 리뷰를 쓰고 작가가 되신 한사람님이 제 리뷰를 보고 칭찬을 해 줄지 일도 있지 않을까요? 희망은 사람이 살아갈 힘인 것 같아요. 화이팅! 한사람 작가님!!

한사람 2011-07-22 23:49   좋아요 0 | URL

가끔 제가 작가가 아니더라도 작가가 된듯한, 작가만큼 기쁜글을 남겨주시는 루쉰님^^

'그에 필적한 노력'이라는 부분에서 울컥증이 도지네요..
머리터져라 쓰신 작품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나름 머리터지면서 쓴 글..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괜찮다 생각했는데
누가 알아주니 더 좋은 것이네요

루쉰님은 사람에게 희망을 갖게 하는 힘이 있어요
희망이라는 것도 결국 절망의 허상이지 싶다가도 다시 발걸음을 돌리게 되는.

고마운 마음으로 잘 간직할께요^^

cyrus 2011-07-23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작가분께서 직접 서평을 읽으셨다니, 대단하세요 ^^
저는 이상하게 평론을 잘 안 읽혀지더라고요. 평소에도 안 읽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요 ^^;;
아직 평론의 묘미를 알기에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가요? ㅎㅎ

한사람 2011-07-23 22:3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우연이 운좋게 진행되었어요

평론가들의 글이 대체로 어렵긴 하죠^^

그런데 그런 생각도 들긴해요.
철학자의 글은 어려워도 기분나쁘지 않은데 평론가의 글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어떤 작품을 평가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고요
평가를 하려면 그렇게 될수 밖에 없지 않을까..싶기도 하구요

그래도 제가 위에 언급한 분들은
베베 꼬지 않고 그래도 페이지 넘어가게는 할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소설을 견디기

    이 작품은 손바닥에 말굽이 자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자라 마침내 말굽이 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된 말굽이 다음 생의 부활을 기다리는 이야기이다. 책을 읽는 동안 유독 몸과 마음에 힘을 주며 읽었는지 책 덮고 몇 시간이나 누워있기까지 했다. 이번 글은 <은교>와 <비즈니스>에 비해 상당히 폭력적이다. 실제로 글에도 마치 말굽이 달려있어 어떤 페이지에선 무자비하게 내 정수리를 찍어 누르는 듯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손을 꼭 쥐고 발에 힘도 주고 우습지도 않은 경직된 자세를 취하곤 했다. 책 앞에 두고 이삼 일 간 누가 때리지 않을까 불안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 이 책은 때마침 찾아온 폭염이라도 되는 듯 한여름 오후의 낮잠이 꼭 필요할 만큼의 피로도를 지녔달까.

    올해 들어 나를 좀 편하게 하는 소설들을 영 구경할 수가 없다. 뭐 맘 편하자고 재미 보자고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나 작년하고 양상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실감한다.(최근에 읽은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정도가 가장 밝다고 해야 할 형국이다.) 그건 아무래도 우리가 처한 사회정치 분위기, 나아가서는 지구적 현상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올 초 터진 일본발 원전폭발과 쓰나미같은 연쇄적 아프리카, 중동 혁명은 이제 자본주의의 세기말적 경종을 울리는 지구적 현상으로 자리잡은 듯하다. 문학은 스펀지 같이 이러한 위기와 불안의 에너지를 그대로 흡수했고 독자는 그런 소설을 자기부정하듯 외면하고 있다. 내 주변에만 봐도 요즘 소설 읽는다는 지인들은 눈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아예(?) 시집을 읽었으면 읽었지 한국 소설은 어렵고 화나고 우울하다 증언한다.(가져가라 해도 싫다고 한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한권 겨우 집어 들더라는) 세상이 이토록 불편한데 문학에서의 불편을 더 이상 원치 않는 것이다. 이십대는 아프니까 청춘을 위로받고 삼십대는 성공에의 생각을 버리려하고 사십대는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이 순수문학은 나같이 한때 작가되기를 꿈꾸었거나, 혹은 더 이상은 작가되기 어려워 보이는 문학 향수주의자들만이 근근이 집어 드는 비현실적 독서현상으로 전락했다. 책도 (드라마처럼)주변에 읽은 사람들이 많으면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 지적인(?) 공감대가 형성되는 생활의 일탈 에너지를 갖고 있다.(현빈 이후 문학은 더 이상 대화소재로 실종되었다) 그런데 오프라인에선 도통 소설 읽었다는 사람을 볼 수 없으니 나는 무슨 홀로 저항하는 심정으로 이런(?) 소설을 읽게 된다.(그래서 더 외롭다) 학습지 선생님이 거실에 쌓인 소설들을 보고 어머니 예전에 문학도이셨냐고 묻길래 답하기 귀찮아서 그냥 그렇다고 대답했다.(아니라하면 자꾸 물어볼 것 같아서) 다른 집에 가면 방학을 맞아 아이들 자기주도 학습을 어떻게 시킬 것인지에 대한 책들이 주를 이룬다고 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려 나도 모르게 저도 읽어봐야겠네요, 맘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살면서 소설을 읽는 것이 단 일초라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는데 며칠 전 나는 그랬다. 소설같은 비현실보다는 아이들 교육같은 현실에 좀 더 신경을 쓰라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에.(책은 그날만 쌓여있던 것은 아니었다) 선생님이 가고 나서 더욱 기분이 나빠졌고 그래서 더욱 내가 소설 읽는 것은 시대적 저항이 맞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건 일종의 오기같은 것이기도 한데 책 한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를 생각하면서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그 책 읽었다고 그 책 읽어보라고 이렇게 글로 떠드는 것. 이것 말고는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또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다. 그렇게 여름을, 소설을 견디고 있다.


심장을 견디기

    견디는 게 좀 즐거움이 될 수도 있었는데 이번 소설은 유난히 외롭다. 작가들은 쓰면서 더 그랬을까. 작가는 이 글을 쓰고 나니 손바닥 한가운데 말굽처럼 딱딱한 굳은살이 생겼다고 했는데 나는 손바닥이 전보다 현저하게 얇아진 느낌이다. 자세히 보니 거짓말처럼 손가락도 짧아진 것 같고 전체적으로 외양상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다. 원래 내가 알던 내 손보다 축소되고 못나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소설 읽고 새삼 내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손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이상하게도 손끝의 예민한 감각이 피가 돌듯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어렴풋하게 발도) 머리로 에너지를 쏟으니 신체기관 중 맨 끝에 매달린 것들이 감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햇빛에 반사되어 빗금처럼 새겨진 손금들이 순간 어떤 (예술적)스크래치로 인식되었다. 예를 들면 면도날에서부터 커터칼, 조각도, 과도, 식칼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흔적이 아닐까 싶도록. 공교롭게도 (주로)왼손은 수평 오른손은 수직으로 기묘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인류가 처음으로 삶의 형태를 새김으로써 패턴을 만든 것은 빗살무늬였다. 고미술가들은 빗살무늬의 직선이 생선뼈를 상징하고 생선뼈는 정복의 의미로서 사냥과 주식의 풍요로움을 소원하는 의미라 말한다. 그런데 그 심플해 보이는 빗살무늬 하나만 해도 약 삼 천 년 정도 변하지 않았던 양식으로 상상할 수 없도록 오랜 세월의 결과물이었다. 미술사가들은 '삶은 형태이고 형태는 삶의 방식'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겹도록 반복되어온 일상적인 삶의 양식이 결국 훗날 빗살같은 무늬 하나로 남게 되는 것이다. 기껏해야 백년도 살지 못하는 내 삶의 무늬는 무엇일까. 고생을 많이 하면 잔주름이 많아진다는데 내가 만들 수 있는 무늬는 혹시 내가 새겨온 손금의 총합인 것은 아닐까. 스크래치난 그것들이 결국 지금까지 내 모든 인생의 결과인 것만 같아 울컥 주먹을 쥐게 되더라. 주먹을 쥐고 손에 힘을 주게 되면 자연 가운데 손가락이 손바닥의 가장 중앙을 자극하게 되는데 작가는 그 ‘노궁혈’이라는 곳이 ‘말굽이 들어와 집을 짓고 제방으로 삼은 곳’이라 하였다. 그곳은 심장을 향하는 촛점, 심장과 연결되는 마음의 자리였다. 즉, 우리가 주먹을 손에 쥐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심장을 겨냥하는 일이며 그것은 심장을 무언가에 장전하는 행위인 것이다.

    신기한건 얼마 있다가 손바닥을 펴보면 그곳에 또 하나의 손금(표식)이 추가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다시 주먹을 쥐지 않는 한 그때까지 그 손금은 서서히 사라지는 운명이 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주먹을 쥘 때만 선명한 일시적 손금은 유효하다는 것. 살면서 어떨 때 주먹을 쥐게 되는가. 무엇 때문에 주먹 쥔 손을 펴게 되는가. 작가는 왜 그곳에 말굽이라는 영구손금을 박아 넣은 것일까. 손금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도 누구를 따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만이 만들어온 독창적 무늬가 아닌가. 그렇지만 자신조차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이기에 다른 곳에 잊혀지지 않을 무늬로 새겨두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왜 다른 곳이 아닌 자신의 손바닥에 말굽의 흉인을 새기고 그것을 입체화하였는가. 그것은 손금의 진화인가 운명의 퇴화인가. 우리네 한 점 한 줄의 삶이 말굽으로 조각되어 누군가의 인생을 숨가쁘게 달리게 하는 것이라면 그 인생은 누가 멈출 수 있는 것인가. 멈출 수 있기는 한 것인가. 만약 멈출 수 없다면 그것은 혹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살아가는 일은 아닐까.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향해 심장을 달리는 존재들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한 멈춰질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심장을 견녀낸 만큼이 곧 그 사람의 일생인 것이기에.


슬픔을 견디기

   
 
생명선이 사라지면 죽는 걸까. 아니면 영원히 사는 걸까.
손바닥에 쇠말굽을 숨겨 지니고 영원히 사는 것은, 아무래도 슬픈 느낌이다.
    -18p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기 힘들 때 나는 슬프다는 말로 대신할 때가 있다. 이 작품이 꼭 그 대답이 어울리는 경우인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치욕과 복수심, 두려움과 유사희망, 공황과 불안 등의 모든 감정들은 결국 슬픔의 감정들이라 말한다. 단순분류일지 모르지만 기쁨과 슬픔에 일가견이 있었던 철학자이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여본다. 그리곤 그 분류안에 폭력이라는 감정도 추가해본다. 내 생각에 슬픔은 슬픈 결말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시작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죽음같은 것도 처음부터 슬픈 것은 아니지만 그를 향해 다가가다 보면 나도 모를 슬픔의 종착역에 다다르게 되고 그 역에 대한 기억은 나중에 새로운 슬픔의 시작이 되는 것처럼. 이 작품은 손에 피어난 말굽을 통해 인간 폭력의 근원적 모태를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폭력이 그리움이면서 노스탤지어면서 희망이나 종교가 될 수 있는 건 결국 폭력이 인간의 가장 슬픈 감정을 자극하는 막강한 호소력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폭력은 누구로부터 어디를 향하든 그 종착역은 언제나 미치도록 슬픈 역사(驛舍)가 되는 건 아닐까. 은폐된 욕망이나 거짓된 본능을 자극하는 박범신 작품들은 하나같이 슬픔의 결론을 촉발한다. 서사가 비극으로 종결되어서가 아니라 원래 비극의 시원지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손바닥안에 성공이나 건강, 행복, 기쁨의 감정을 움켜쥔 것이 아니라 (그토록 숨겨온)폭력이라는 말굽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그건 불행이기 이전에 누구보다 슬픈 일임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말굽이라는 폭력의 표식을 통해 인간의 슬픔을 집요하게 자극하는 소설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그 슬픔이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선) 무엇보다 아름답게 체화된다. 가만 보면 문학에서 더러운 기쁨은 있어도 더러운 슬픔은 드물지 않은가. 이때 폭력은 비인간적 미화로 체화되기에 가장 안전한 알레고리로 기능한다. 인간적인 것은 추하고 비인간적인 것은 아름답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군가를 때리고 또 누군가에게 맞았던 인간적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폭력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성장시켜온 비인간적 존재들이니까. 그건 설사 한평생 누구를 때리거나 맞은 사실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탄생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오래된 기억인데 작가가 전하는 ‘탄생 이전으로부터 온 슬픔’에 해당하는 기억이기도 할 터이다. 이 책에서 폭력의 주체로 폭력을 행사하던 말굽은 작품 후반부에 스스로 쟁취한 인격을 통해 아무리 사람이 죽거나 마음이 변해도 그가 지니고 있던 폭력만은 변종바이러스처럼 타자와 세상에 끈질기게 전이되어 불사조의 운명을 살아갈 것임을 스스로 확신하며 그 깨달음을 우리에게 유언처럼 설파하고 있다. 말굽의 유언이 섬뜩했던 건 서글픈 말굽의 운명때문이 아니다. 말굽이 누군가에게 들러붙어 그를 좌지우지하게 될 우리네 불특정 다수의 연약한 운명인 것이다. 두려움은 곧 슬픔이요 불안은 두려움의 예감에 불과하다.

    흡사 말굽의 유언은 죽지 않음으로 전승되는 영혼의 선언이자 작가의 예언같다. 비슷한 의미로 모리스 메를로 퐁티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 우리는 순수함과 폭력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종류의 폭력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육화된 존재인 한 폭력은 우리의 운명이다."
 
(『휴머니즘과 폭력』, 2008, 문학과 지성사)


    우리는 이미 폭력자이기 때문에 비폭력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폭력의 유무,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출발선이 된 폭력의 체제하에서의 폭력의 종류 즉, 폭력의 미래라 주장한다. 이를 성찰하고 쉽게 풀이해준 강신주 교수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 2011>을 통해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말한다. 임재범의 노래에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 상호폭력에의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서의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인 것이다.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타자를 죽이고 타자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 폭력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겐 누구나 생존전략이자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은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존재한다는 메를로 퐁티의 주장은 이 소설의 슬픈 고통을 더욱 슬프게 기정 사실화한다.

   
 
슬픔이란, 어떤 슬픔이 없었다.
내겐 탄생 이전부터 전해져온 슬픔뿐이었다
.  -341p
 
   

    인간은 폭력을 피할 순 없지만 그나마 폭력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최후의 희망이라고 본다면 슬픔이 줄어들 수 있을까. 외려 슬픔이 더 구체화, 시각화되는 일은 아닐까. 이 책에서 말굽을 자기 폭력의 종류로 선택한 남자는 개장수 아버지를 둔 개백정의 새끼로서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을 살다나온 전과범이자 노숙자로 등장한다. 이 사람의 이력은 자신에게 말굽이라는 생명체를 전이해준 이사장 운영집단의 경비원이 되기 충분한 것이었다. 이사장은 말굽이 된 이 남자와 조우하기 위해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던 말굽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말굽남자가 통과한 생의 이력은 곧 폭력의 이력과 동일해 보였다. 말굽남자의 기억속에 가장 폭력적인 그리움으로 자리잡은 이력은 열네 살 여린과의 추억이다. 암수 은행나무로 상징되던 이들 소년 소녀의 집터는 권력과 개발이라는 폭력에 의해 전소되고 그 결과 각자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폭력을 잃게 된다. 소년과 소녀에겐 실명증과 화상이라는 치명적 상처가 남겨지고 이들은 ‘죽을 때까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은행나무의 운명처럼 그리움이라는 폭력을 견디며 살아가게 된다. 소녀가 유전으로 자신이 실명할 것을 알게 된 날 이들은 마침내 그 폭력을 주체적으로 행사하고자 했다.

   
 
우리는 그날 함께 죽고 싶었으며, 또 함께 죽음을 이겨내고 싶었다.   -409p
 
   

    각자의 죽음을 소유하는 경험을 서로 공유함으로서 사랑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폭력을 이기는 사람들일까, 폭력에 지는 사람들일까. 책에서 만난 이들을 보며 사람은 자기가 겪은 폭력의 기억을 지우고 실현하는데 평생을 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기든 지든 폭력의 과거, 현재, 미래를 극복하는 것이 인생의 전 과정 아닐까 싶었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의 집터를 불태워버리고 불멸의 성소가 된 샹그리라에서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한명은 프랑켄슈타인이 되어 한명은 맹인 안마사가 되어 여전히 폭력의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눈먼 그녀의 말(言語)과 들려줄 수 없는 자신의 말(馬)이 하나가 되려면 자신의 말굽으로 그녀의 말을 막는 것 밖에는 없었을 터이다. 이들의 비극은 박범신 소설에서 어느 정도 예정된 서사이기도 한데 이 통속이 자극하는 슬픔은 대개 폭력의 명백한 주체인 말굽보다는 그것을 전이토록 한 이사장 혹은 이사장을 권력자로 받드는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 폭력으로 시스템을 유지하는 사회 메카니즘을 향한 진한 원망으로 남게 된다. 폭력보다 더할 수 없이 폭력적인 원망이 되어 독자를 고통스럽게 하곤 한다. 이 책에서 말굽이 된 자신과 자신을 만든 말굽이 서로 내면의 진솔한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폭력을 지지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우리로선 자신들의 폭력의 정당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변론에 뚜렷한 반기를 들 수는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든 가해자든 더 이상 원망해야할 대상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린 근원적인 질문에 가닿게 된다.


욕망을 견디기

    작가는 인간사 오욕칠정을 나른한 봄날 잠결에 다가온 아지랑이와 같다고 말한다. 그건 ‘세 번째 갈빗대와 네 번째 갈빗대 사이에서 모락모락’ 솟아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때의 ‘아지랑이는 기쁘고喜, 노엽고努, 애달프고哀, 즐겁고樂, 뜨겁고愛, 어둡고惡, 욕심도 많았다’고 증언한다. 그때의 ‘봄철의 숲에서 솟아나는 힘은 사람에게 도덕상의 악과 선에 대하여 어떤 현자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고 읊조린다. 작가는 오욕칠정을 거세하는 것이 아름다운 봄날을 아름답게만 느끼는 전제라 말하는 듯했다. 어찌 보면 문맥상으로는 틀린 말이라 생각되지 않았던 이중적 악의 화신, 특수부대 훈련장 부대장 출신, 명안진종의 창시자 이사장의 논리를 통해 작가는 ‘몸과 영혼을 합치는 것’, ‘자연의식 치유법’등의 허상을 일갈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인간사의 폭력이라는 메카니즘을 통해 자본주의의 비정한 시스템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인간 내면의 근원적 욕망을 성찰하는 가운데 자본주의를 폭력과 중첩되게 하는 시적수사를 연출했다. 배경이 되는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리하여 폭력이 발생, 유지, 전이되는 운영체계를 다채롭게 제시하기도 했다. ‘샹그리라’는 모두가 폭력을 은폐하고 협동으로 그것을 지켜낸 결과 일상으로서의 쾌락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장소로서 관음적, 쾌락적 아지트로 그려졌다. ‘명안진사’는 폭력을 종교처럼 떠받들고 강제적으로 전도, 강화되는 장소로서 ‘제석궁’은 폭력이라는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 죽음을 대기하는 장소로서 ‘문화궁’은 같은 종류의 폭력이 복제되어 안착하게 될 새로운 영토로서 모두 우리 사회의 연계된 폭력을 수행하는 장소의 표상들로 느껴졌다. 좀 낭만적인 곳이 있었다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만 기어 올라가 샹그리라의 모든 방안을 파노라마 영상처럼 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암벽이었는데 그곳이 가장 고독하게 보여졌던 건 어쩐지 문학하는 작가들의 최종 번뇌장소로 느껴져서 였달까. 그곳은 실컷 구경하고 난후 반드시 폭력이 돌아가는 운영체제를 꿰뚫어보고 그것의 대책을 세워야 할 장소가 아니었을까. 대책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고민하자고 손내밀어야할 장소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에서 폭력이라는 욕망이 다소 위로와 용서의 기운으로 전복되던 희망의 인물은 예상했듯이 애기보살이었다. 애기보살은 이 책에서의 유일한 생존자였고 다시 속세로 돌아가는 마지막 여행자였다. 애기보살이 살아남은 것은 그녀가 단순히 누군가의 애기를 잉태한 상태였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이 작품의 논리대로라면 애기보살이 잉태한 것은 결국 폭력의 유전자를 지닌 이차적 폭력의 생명체임이 자명한데 그렇게 보자면 애기보살이 낳게 될 애기는 누군가로부터 전이된 말굽의 새로운 주인공이 될 운명적 객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 생각에 그러한 폭력의 생명을 지닌 채로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면 그건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의 공감능력이 더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라 믿는다. 남성이 태어날 때부터 폭력적 장치로서의 성적 무기를 가지고 태어난다면 여성은 자기 안에 타자라는 생명이 자라도록 도와주는 자궁이라는 비폭력 장소를 지니고 태어난다.

    내가 임신한 열 달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고통은 바로 내 몸속에 내가 아닌 이물질 같은 생명체가 계속하여 자라나고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이 비록 내 자식이지만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가 버젓이 숨을 쉬고 커가고 있다는 동물적 느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기쁘거나 만족스럽지가 않다. 말하자면 여성들은 열 달 동안은 꼼짝없이 그 생명체를 키워내면서 꼬박 그 불쾌한 시간을 혼자서 견뎌내야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 시간은 산모에게 폭력적인 경험이 된다. 이물질과의 싸움, (태아라는)타자의 성장, 불쾌감으로 유발되는 죄책감들이 믹스되어 여성은 타자를 견디고 용서하며 공감하는 감수성이 진화되온 것은 아닐까. 출산이 태아에게 폭력이라고 보았을 때 이는 (여성이)폭력을 거부행사할 수는 없으나 폭력의 종류는 택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성은 출산이라는 폭력을 택함으로써 폭력의 미래를 구원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좀처럼 밝은 성격을 가졌던 애기보살은 미소보살의 남편이 제발 구출해달라던 평범한 소녀였다. 서사속에서 다른 여성들에 비해 실질적인 폭력의 기억을 잉태하지 않은 소녀이기도 했다. 폭력의 에너지를 가장 적게 발휘하면서 폭력을 행사할 가장 대안적 인물인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구원하겠다는 막연한 희망이라기 보다는 폭력을 최소화하겠다는 차선의 선택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폭력을 (제거하지 않고)견디는 여성들의 몫인 것이다. 사람이 생명을 가진 것은 특별한 능력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결국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결실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복제물로서의 생명은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타자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욕망을 견딤으로써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가장 폭력적인 존재인 것이다.


기억을 견디기

    이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 중에 남자가 말굽을 사용할수록 차츰 기억이 회복되던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남자는 누군가가 자신을 가해하려는 악마의 힘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때 그 방어기제로 말굽이 방패막처럼 솟아오르곤 했다. 남자의 말굽이 입체화되는 순간은 곧 남자의 기억이 한 곳에 집결되는 순간이기도 했는데 말굽의 입체정도는 폭력의 체화정도와 비례하는 것으로 보였다.

   
 
몸의 반절은 멧돼지나 말인 것 같고 나머지 반절은 사람인 것 같았다. 발버둥치는 개를 은행나무에 목매다는 특수부대 장교들의 얼굴이 갑자기 보였다. 무표정하게 개의 배를 가르는 아버지의 얼굴도 보였고, 삿대질을 하는 소녀의 눈먼 아버지, 야구 방망이로 내 갈비뼈들을 부러뜨리는 어린 학생, 마구 발길질을 하는 횟집 남자, 생니를 아예 뽑겠다며 펜치를 들고 설치던 간수장, 그리고 칼을 든 이사장의 얼굴도 보였다.
      -104p
 
   

    남자는 기억이 총집결된 마지막 순간 가해자를 멧돼지 때려잡듯 처리하곤 하는데 폭력에 대한 기억이 말굽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느껴져 내심 섬뜻하게 느껴졌다. 저 정도 맞아온 사람이라면 이 정도 폭력쯤이야 당연하다는 보상심리를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복수를 부르는 폭력은 결코 희망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또 다른 희망의 기회를 짓밟는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말굽의 처사에 남몰래 응원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폭력에 투사되는 내 심리 이면에 다른 것은 없었는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는 언제든지 자신만의 은밀한 상처를 타자에게 투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만히 있다가도 누군가 유명인이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마치 이때를 기다려온 것처럼 그 사람에게 집단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우리가 은폐해온 개인 폭력의 한 종류가 아닐까. 사람이 때리고 맞은 기억을 평생 극복하기 위해 인격을 성장시키는 존재라면 모두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자괴감에 다다른다. 폭력이 두려운 기억인 것은 그것이 꼭 순성장을 유도하지 않고 폭력의 중독자가 된 이사장처럼 역성장의 길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폭력은 순성장이 가능하긴 한 것일까.

    작년이 한국전쟁 발발 60주년 이었는데 광복 전후에 태어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작가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최근에 비슷한 시기에 작품을 내놓게 된 작가들을 보면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사람의 욕망은 죽는 날까지 바람직한 소멸이 아닌 바람직하지 않은 파멸이라는 지속적 성장을 향한다 말씀하신다. 이들은 이 지긋지긋하고 무시무시한 욕망의 뿌리를 어떻게든 발본하여 살아있는 한 그것들과 대치하는 것으로 모든 에너지를 쓸 것으로 느껴진다. 이들이 이렇듯 세상과 인간에 대치하여 자본주의의 폐허를 말하는 방식은 우리네 근원적 욕망이 모두 쓰레기라는 잿더미였음을 말하거나(『낯익은 세상』, 황석영) 오랜 세월 인간을 지배해온 자본의 가치는 배역과 역할에 충실한 로버트 인간을 생산했다고 말한다.(『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박범신 작가는 이번 작품으로 자본주의의 생체시스템이 폭력의 진화구조와 같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이들은 모두 현실의 균열 속에서도 자신을 찾고 쓰레기 더미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폭력의 낭떠러지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불태우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을 가해해 가면서 자신을 돌아본다.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이들이 우리사회와 자기 인생을 투쟁적으로 기억하고 고통스런 문학으로 기록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문학은 기억매체라고 하는데 우리가 외면해온 것은 어쩌면 문학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기억, 우리 사회와 타자에 대한 기억, 그리하여 탄생 이전부터 시작된 무수한 생의 폭력에 대한 엄연한 기억들은 아니었을까. 폭력을 기억하는 것은 고통스런 상처가 아니라 그 상처를 이겨내는 시간임을 가만히 깨닫는다. 기억을 견디는 것이 자기 생을 견디는 것임을, 그리하여 자신이라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알 것 같다. 이 책은 말한다. 폭력은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라고. 그것은 어쩌면 폭력보다 훨씬 폭력적이어서 필히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이지만 모두가 같이 견디고 말함으로써 이겨내야 하는 것이라고. 그래야 이겨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덧붙임> 

이 책을 넘기는 재미중에 하나가 김영진님의 삽화도 한몫을 했다.
중앙일보에 연재할 땐 120회 매회마다 삽화가 있는 것을 확인했다.  

책에는 약 1/3가량 추려서 실은 듯하다.  

그들중 기억에 남는 그림을 덧붙여본다.  

 

 

이런식의 충격적인 삽화가 더 대중일 것 같아도 이상하게 이번엔 
관념상의 폭력을 더 구체화 시켜주는 역할을 한 듯하다. 

썩 괜찮은 전략이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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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21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처음 나왔을 때 정말 사고 싶었는데 안 샀어요.
읽어야 할 책이 한 두 권이라야 말이죠.
김애란 소설에 실망하고 문득 읽고 싶었던 게 이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한사람님 리뷰 읽으니 또 읽고 싶네요.
전 박범신을 알고 나서 오히려 김훈 소설 보다 더 낫다 싶어었요.

정말 소설 읽는 사람이 그리도 없던가요?
소설 쓰겠다는 사람은 어찌 살라구요...쩝.
요즘 소설이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게 별로 없긴하죠?
그래도 낯익은 세상 정도면 괜찮은 것도 같은데 그것도 결말이 쓸쓸하긴 해요.ㅠ
 

 

 

형.

내일이면 이십년이네요.
세월의 힘은 이런 걸까요.
언제나 숫자를 말하고 나면 갑자기,
웃으면서 눈물이 나죠.
그제서야 시간의 단위를 통과해 무언가 쌓아왔음을, 아니
무언갈 버려왔음을 깨닫는 순간이니까요.

 

기억나나요.
1991년 7월 19일.

휴가를 먼저 다녀오는 편이 좋겠다고 한건 형이었어요.
형이 내 사수였으니 쫄병도 휴가를 보내라 한 것도 형이였죠.
그때 나는 남아서 형의 자릴 지키려했습니다.
형이 쓴 육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형이 앉던 자리에 엉덩이를 겹쳐가며
형의 의자에 내 등을 슬며시 기대고 싶었었죠. 

나는 형이 쉬러간다는 면도날을 그 시간으로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게,

옳은 것이잖아요?

우린 옳지 않았었고 그래서
연대할 수 있었어요.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어린 나도
그쯤은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어요.

내가 몰랐던 건
살면서 그런 기억은 그 사람의 일생을 평생 못 견디게 하는 시간이거나
혹은
그걸 견디게 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다는 거여요.

인생이, 그렇잖아요?
못 견딘다 죽겠다 하면서 실은 그 때문에 산다는거.

그때 나는,
형이 사는 동안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요
아마도 형은,
그 믿음 때문에 나를 떠날 수, 아니
떠나지 않고도 헤어질 수, 아니
헤어지지도 않고도 안 만날 수, 아니
안 만나고도 잊지 않을 수...
어쩌면 이렇게 같이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니 우린,
지난 이십 년간 한 번도 헤어진 적은 없는거지요.
그렇게 믿고들 사는 것이죠.
그래서 연락도,
만남도 필요없는 것이죠.

그러나 가끔은 나도
형이 한 남자의 육체로서,
회색빛 감성의 실체로서
오늘을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여름이고 휴가가 시작되는 오늘 같은 날. 
 

그때 우리가 2호선 무슨 역에서 헤어졌었나요.
다음 내리실 역이 오른쪽이었나요, 왼쪽이었나요.
 


아,

우린 아무 역에서도 못내리고 
그래서 아무 역에서나 내릴려고 했던가요.

너한테 오늘이 상처가 되지 않길 바란다, 그런 말을
혹시 그날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니? 그런 질문을 내게 한 것은 기억하지 말아요.
그 순간 이후의 형과의 모든 일들이 내 상처가 되란 법은 없잖아요, 안그래요?

그래서 난,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말아요 이런말을 하지 않아요.
그건 이를테면 상대가 이미 상처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는 확인사살과 마찬가지니까요.

만약 내가 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훗.
그런 유치한 가정법을 이십 년동안 해왔다 말하진 않을께요. 나도,
콧대는 좀 높았잖아요?

아니죠. 나도
모질고 독한 여자가 될 수 있었는데 형은.
아닙니다. 이건 아니에요. 이런 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죠. 그렇죠?

그러니 우리 사는 동안은 절대로
만나지 말아요. 누가 알아요?
간절히 원하면,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늘 그래왔듯이 반대로 이루어질지요.

그때라면 이렇게 말하겠죠.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아니 우린 꼭 이렇게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누가? 
 

 

형이 그래줘요.
그땐 그렇게 말해줘요.
그런 말은,
내 몫이 아니야.
내 몫은 처음부터 기다리는 것이었고
그러다 돌아서는 것이었어. 

우린 옳지 않았으니까.


, 형이
늘 떠나고 있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가만히 있는 나를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우린 올해도 휴가는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오늘을 나 말고 떠올려줄 단 한사람.
그게 형이라는 걸
그걸 알고 있어서 나는 오늘도 내일을 견딜 수 있다는거 

알리고 싶었어요

다행이죠.


그렇죠?






이십년후 여름,
내가 가장 오랫동안 사랑한 형에게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를 기억하는 형에게

형을 가장 오래 기억할 한사람이.






아침에 삼십대 후반의 미혼여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그들 중 반은 1인 가정으로 남게 되며, 그렇게 혼자 살다가 죽을 확률이 많다는 결론이었어요. 뭐, 인생의 목표가 결혼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치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서 자식을 낳는 것이 여성의 표준행복이다 말하는 것 같아 화가 나더라구요. 결혼해봤죠. (다른 것도 해봤지만 ㅋ) 아이도 낳아봤구요.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았으면서 결혼하지 말고 애 낳지 말고 능력있으면 혼자 편하게 살아라, 이렇게 떠들어도 봤죠. 그게 실은 능력이 없어서 능력이 안될 것 같아서, 계속 능력을 알아 줄 것 같지는 않아서 결혼한 거 맞거든요.

남은 생(?)을 누구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해봤어요(?)

은희경 작가는 소설쓰기 전에 꼭 손톱을 깍는다고 해요. 손톱이 길면 자판을 잘 못친다구요. 습관 하나 같다는 게 이렇게 반가울수가 있나요? (실은 습작강의 노트 준다고 해서, 적립금 3천원이라고 해서 예판구매했지만 ㅋ)  책이 달려오는게 꼭 그걸 쓴 작가라도 달려오는 것 마냥 설레잖아요

 

이거이거 예판중독 아닐까요??
암튼, 저는 이 책이 달려온다는 문자를 손꼽아 기다려요.

이번주 일욜은 이 책으로 생각좀 할겁니다.
다른 생각을 할까봐 마음을 붙들기 위해서랍니다.  

(아 오늘이 월욜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미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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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7-18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어도 목요일 날 오지 않을까요?
전 와도 당장은 못 읽을 것 같기도 해요.
결혼은 남들이 다 할 때 못하고, 안해서 비슷한 말들을 하게되는 것 같아요.
꼭 남들할 때 따라서 할 필요는 없는데,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사람과 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는 결코 없는 거죠.
아, 혼자 살다가 죽은 거 정말 끔찍할 것 같아요.
누구라도 옆에 있어야지.ㅜ

한사람 2011-07-19 08:48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았는데,
사람들은 남들 할때 무얼 해놓고, 남들처럼, 남들과 같이 비슷하게 살았기 때문에
남들도 싫어하고 그런 자신도 싫어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남들처럼 살아온 인생은 특색없고
내세울게 없는 것 같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이 가장 남들이야기를 많이 하고
남들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결혼이나 육아, 아이들 교육은 나 혼자 하는게 아니다 보니
바로 그런 남들의 영향에 가장 치명적인 지배력을 갖게 한 것이구요.
그런데 여성들이 육아에 많은 결정권을 가지고 있으니
인구가 줄어드는 이 시점에 보수언론은 여성들이 결혼해야 한다며 종용하는 것이죠
권력은 남성의 기득권에 맞춰져있으니까요

흐름은 대충,
일본에 독거노인 증가 - 고독사 증가 - 한국도 고독사 증가 - 출산율 감소 -
여성의 결혼기피 - 골드미스가 평생미스된다 - 혼자죽기 싫으면 결혼권장-

이런식인 것이죠 ~

니들이 애를 낳아야 인구가 느는데 늙어서 혼자 죽기 싫으면 지금 결혼하시오,
이런 결론이라는 말이죠.

대부분의 직장맘들이 아이가 초등생이 되면 포기 하고 마는데
그걸 두눈 뜨고 확인한 동생들이 미쳤다고 결혼을 하겠냐구요 ~

이 나라는 여성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다 잘되는 길이라는 정서를 아직 못버린 나랍니다
(아침부터 흥분 ^^)

stella.K 2011-07-19 10:2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군요.
아침부터 흥분하지 말아요.
뭐 그 말도 일리는 있네요.
하지만 사회적인 측면을 떠나서
난 본능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혼 언젠가 한번쯤 해 보고 싶고,
아이도 낳아봤으면 어땠을까 이제와 하게 되는데
그걸 못해봤다는 게 아쉽기도 하거든요.
지난 거 후회하고 아쉬워 해봤자지만.
중요한 건 앞으로겠죠.
독신 좋다 이거죠. 만족하고 행복할 수만 있다면.
죽을 때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꼭 독신이 고독하고 불행하다. 이것도 편견 아니겠습니까?^^

2011-07-19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9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5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5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