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 제83회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2011)-나탈리 포트만>


드디어 받을 사람이 받았다. 베니스와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까지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니 그랜드슬럼을 이루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지라 그녀의 수상소식이 놀랍진 않았다. 막 어제까지 이런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 생각하여 나라도 어떻게든 리뷰를 써볼까 하던 차였다. 아직도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만 언제쯤 끄적여 볼까 살짝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날아든 수상소식이 조금은 일찍 내 발목을 잡아 당겼달까. 이 영화는 말로 다하기 아까운 아름다움이다. 순간 느꼈던 모든 것을 고이 빚어 나만의 소중한 케이스에 영구 밀봉하고 싶은, 가지고도 기리고 싶은 아름다움이었다. 영화가 막을 내리고도 나는 한참을 넋을 놓아 버렸다.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生의 비밀 답안지라도 몰래 훔쳐본 기분, 그것이 혹 예술이라는 장르에 해당된다면 그것의 속성에 관통상이라도 입은 기분, 어떻게 더 이상 완벽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완벽이라는 마취에 압도당한 나는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이 영화의 마지막은 예리하게도 아려왔고 차마 리뷰는 그 자상을 확인하는 절차가 될듯하다.

영화는 ‘백조의 호수’의 프리 마돈나를 연기하게 된 한 발레리나의 ‘예술적 성공’과 그와 동시에 이루어진 ‘자기파멸’의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이다. 발레라는 전문적 분야를 완벽하게 수행해낸 나탈리 포트만은 실제 열 세 살의 나이에 발레의 꿈을 접기도 한 인물이었기에 이토록 훌륭할 수 있었던 것일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 때문에 만나게 된 발레리노(뉴욕 발레단 수석안무가)와 약혼, 현재 임신의 몸으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다는 것. 어찌 보면 그녀를 좌절케 했을 발레가 그녀의 꿈과 사랑을 다시 실현시켜준 결과가 되었으니 그녀에게 있어 발레는 영화(映畫)이상의 영화(榮華)가 된 셈이다. 그녀가 ‘레옹’의 마틸다로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1994), 그때 난 불같은 청춘이었는데 어른들 흔히 하시는 말씀처럼 ‘애가 애를 낳게 된’ 주인공이 바로 그녀이니 그간의 흐른 세월일랑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을까. 지난주 <언노운>에 출연한 다이앤 크루거에 반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번엔 나탈리 포트만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몇 년 전에 ‘브이 포 밴데타(V For Vendetta, 2005)’라는 영화에서 삭발한 그녀의 완벽한 두상을 보고 인상깊었던 기억(영화는 별로였지만 그녀의 연기는 훌륭)도 떠올랐고 ‘천일의 스캔들(2008)’에서 스칼렛 요한슨(동생분)을 질투하며 동생을 밀어내던 초록색 드레스의 카리스마도 다시금 겹쳐졌다. 그녀는 대체로 연기 앞에선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 소위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이미지로 뇌리에 각인된 배우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번 영화에서도 강인한 캐릭터를 기대하며 그녀의 성공을 바랐던 것 같다.




< 레옹, 1994 >



<브이 포 밴테타, 2005>
 


< 천일의 스캔들, 2008 >


다행히도, 그녀는 성공했고 불행히도 그녀는 실패했다. 완벽한 성공이었지만 그럼으로써 완벽하게 파멸했다. 성공했기 때문에 파멸한 것일까 파멸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일까. 성공과 파멸이 인과관계로 형성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아무래도 이번 영화를 보고나서 ‘천재는 자기를 파괴하면서 예술을 창조한다’는 논리에 가장 아름답게 설득당해 버린 것이 아닐까. 완벽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끊임없는 열정은 바로 완전하게 자아를 상실해야만 비로소 환희의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비극적 진실을 이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누구보다 완벽함을 소원해 온 니나(나탈리 포트만)는 ‘난 정말 완벽했다’고 ‘나는 그것을 느꼈다’고 말하며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완벽하고 싶었으면 자신과도 바꾸면서 기어이 얻어야 했던 것일까. 가끔, 자신을 소진시키는 궁극의 가치, 자신의 죽음이라는 막다른 결과에 이르면서 자기창작의 완성을 이루어낸 예술가를 접할 때면 예술은 결코 ‘생산’과 ‘건축’의 장르가 아니고 ‘소모’와 ‘파괴’의 장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나 이번 영화처럼 ‘블랙스완’이라는 어둠과 악의 힘, 그 압도적이고 파괴적인 에너지가 예술로서 대중에게 감동을 전달해야 할 땐 그 매개체가 되는 배우는 ‘흑’과 ‘악’의 광기에 반드시 치명적 관통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에서 ‘블랙스완’을 연기하던 니나는 마침내 등에서 깃털이 생겨나 ‘검은 날개’가 완성되는 합체의 장면에서 가장 큰 감동을 전달한다. 관객은 소름끼치듯 그녀의 연기에 넋을 잃게 되지만 그녀는 그토록 신비한 ‘검은 날개’를 제 몸에서 잉태해내기 위해 무엇을 버린 것일까. 아니 무엇을 만든 것일까. 혹시 그녀 자신이 창조해낸 ‘검은 날개’는 또 다른 니나의 자아로서 현실에 드러나 생명력을 갖게 되면 정작 니나의 생명이 위태로와지는 죽음의 날개는 아니었을까. 니나의 삶과는 공존할 수 없는 ‘검은 날개’는 과연 니나 자신이 원한 것이었을까. 설사 니나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예술은 왜 그녀가 ‘검은 날개’를 달아주길 바란 것일까. 혹시 누구보다 ‘블랙 스완’을 고대하고 찬양하는 그들(관객),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메이커들(감독) 자신은 스스로 ‘검은 날개’를 달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그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사람은 명백히도 두 사람이었다. 모두 인상깊었던 조연들이었다. 한 명은 니나의 어머니(전직 발레리나), 또 한 명은 니나의 스승(현직 발레 감독)이었다. 어머니는 순수하고 순종적인 ‘백조’로서의 니나를 강요해왔고 감독은 니나의 내부 깊숙이 잠재해 있는 관능적이고 공격적인 ‘흑조’를 찾아내고자 했다. 동시에 다른 곳에서 니나를 컨트롤하고 억압하는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에서도 확연히 다른 컬러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발레연습장으로 대변되던 감독의 주변엔 철저하게 흑과 백으로만 구성된 콘트라스트로 니나가 시종일관 긴장하도록 만들었고 엄마와 단둘이 사는 니나의 소형아파트에서는 핑크빛과 인형으로 연출된 공주님의 방을 연출하여 과보호된 니나의 가정환경을 더욱 대비시켰다. 니나는 주로 이 두 공간만을 지하철로 이동하고 연습실의 복도를 통과하며 하루를 보내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니나가 자신을 인지하는 방식은 어디서건 존재하는 ‘거울’과 ‘창문’을 통해서 였는데 영화를 통털어 나는 니나가 거울을 볼 때 가장 무서웠고 가장 슬펐다. 니나는 거울속에서 완전한 분열증세를 보였고 거울이 많아질수록 증세는 심각해져 갔다. 어머니의 억압, 감독의 질책, 동료와의 경쟁, 왕년의 스타에 대한 죄책감등이 거울엔 고스란히 투사되어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났다. 이 작품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만들고 확인하고 끝내 깨부수는 영화였다.


 

나탈리 포트만이 그다지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역할이 아닌 발레리나 역을 하면서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바로 이 ‘거울’을 보고 ‘자신’을 깨닫고 알아가는 내면연기에 있었던 것 같다. ‘백조의 호수’를 공연하는 발레리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배경음악과 기술적인 효과들이 함께 이루어낸 종합연출의 결과였다고 본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거울을 보며 심리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거울신은 어찌 보면 약속처럼 빈번하고도 계획적으로 반복되었다. 그런데 이 반복의 공포는 관객에게 점진적인 두려움을 제공해야 했고 비극의 결말을 예상케 할 수도 있었다. 하여 그녀는 과도하게 미쳐서는 안되었고 연기하듯 두려워해서는 서로가 부담스러워질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많이 인내하고 절제했다. 시종일관 기쁜 웃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녀가 단 한번 마지막에 울면서 희미하게 미소짓는 슬픈 환희는 그래서 더 극적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강인하게 뇌리에 남아 예술이 가진 고통의 미학을 끈질기게 기억하라고 부탁한다. 그녀의 발레복에 퍼지던 빨간 핏빛이 그대로 붉은 꽃으로 피어나길 기원하라고 그녀의 마지막 눈은 오랫동안 응시한다. 사라진 건 그녀일까 그녀의 예술일까 아니면 우리의 댄서일까. 둘 중 하나가 소멸되어야 한다면 우린 그 순간을 외면하고 싶다. 영화는 그래서 막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 수상소식에 힘입어 이 영화가 탄력을 받게 되리라 믿는다. 이미 상을 받았으니 알려진대로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에 찬사도 쏟아 질 것으로 예상된다. 나는 이번 그녀의 연기에서는 완벽함도 만족했지만 배우로서 어떤 행복감을 엿보았다고 느껴진다. 그건 그렇게 발레리나로서 완벽한 연기를 해낸 후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예술가의 극적인 운명처럼 그녀 자신도 그와 같이 살다가 죽는다면 더 좋을 건 없겠다는, 자신이 자신을 최대한 부러워하는 마지막 얼굴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슬픈 얼굴이었다. 배우라는 직업, 광대의 숙명, 예술가의 욕망, 인간의 탐욕, 이 모든 것들이 짧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조명되며 한 마리의 백조와 또 한 마리의 흑조가 비로소 한 몸이 되는, 그래서 엄숙하고도 치명적인 生의 한 순간 그것은 죽음이어야 가능한 절대공연이었다. 끝내 니나의 ‘검은 날개’는 ‘하얀 바닥’으로 추락하며 분열된 정신이 하나가 된다. 완벽한 아름다움은 이렇게 더 완벽한 슬픔으로 파도치게 된다. ‘백조’는 떠나갔고 이제 ‘호수’마저 잔잔해진 지금, 그녀가 지나간 당신의 가슴엔 어떠한 파문이 얼마나한 무늬가 그려졌는가. 당신도 나처럼 손톱이 할퀴고 간 마냥 선연한 아픔으로 아름다운 물결을 새기었는가.

이 영화를 보고 사람 속엔 누구나 ‘백조’ 한 마리와 ‘흑조’ 한 마리가 나란히 등을 대고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는 흑조를 숨기고 백조의 모습대로, 누군가는 백조를 잊고 흑조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결국 두 가지 다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예술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니나와 그의 숨겨진 본능을 도출해 내려는 속세의 감독을 보면서 나는 한명의 유명가수를 떠올렸다. 아주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 전교회장으로서 엄친딸이었던 보아, 그녀도 지금은 이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백조’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지금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상이 어쩐지 훈련된 ‘흑조’의 모습은 아닐까 염려가 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내가 너무 멀리간 것인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니 우리 연예 산업의 거대 상업적 메카니즘하에서 지독히도 훈련된 아이돌 가수들의 이미지가 불현듯 중첩된다. 한류가수를 내세우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계엔 니나의 발레감독처럼 그들에게서 ‘흑조’라는 상업적 가능성을 발견해내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원래 ‘백조’를 잊어버리도록 유도하는 지도자들이 많은 건 아닌지. 우린 어쩌면 깨끗한 ‘백조’가 없다고 그들을 비난하면서 속으론 내심 ‘흑조’가 제공하는 쾌락만을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대중은 재능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 많은 것이기에.

예술가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 오래 살길 바란다. 물론, 이것도 예술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향유할 우리를 위해서라는 걸 고백한다. 또 물론, 예술가라고 그들 모두가 완벽에 집착한다고 믿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건네 본다. 나 역시 완벽에 집착하는 성향을 오래도록 가져본 사람이지만 그 완성도의 종착지가 죽음인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축복받은 예술가임을 이미 알고 있을 터이다. 축복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 완벽에 집착하여 정신질환으로 발전하는 것은 삶의 불공평한 코미디요 비극적 멜로일뿐인 것이다. 예술가라고 다 완벽하란 법 없고 그랬다고 다 죽어서도 안된다. 그들은 어쩌면 예외의 인생을 살다갔을 뿐, 예술에 대한 미화나 찬양이 곧 모방이나 롤모델로 동격화 되어선 안될 것이다. 비예술가인 난 그래서 이렇게 마음대로 말할 수 있고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부럽고 신기한 건 그들의 슬픈 운명이 아니라 그 운명으로 남겨진 그들의 창작물이요, 그로인해 맛본 진하고 오래된 감동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그들이 만들어 준 그것을 낼름 받아 먹으면 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예술가가 아닌 것이 미안하다.

어제, 봄비가 내렸다. 비는 꼭 을씨년스러워 가을비같았지만 봄이 오는 길목에 내렸으니 너를 ‘봄비’라 불러본다. 이름을 부르고 나니 봄을 손짓하는 모든 생명짓이 그리워진다. 바람이 아직 차다. 그래도 온다하면 조금은 설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 그만 이 변덕이 부끄럽다. 그러고보니 예술하지 않아도 예술가가 아니어도 이 영화, 다시 시작하기 두려운 춘삼월에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우린 예술을 못해도 그것으로 울고 웃을 수 있으니, 봄이 되지 않아도 꽃피고 지는 것을 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 아니던가. 그래, 얼마든지 영화로 거울을 깨고 내안에 본성을 확인해도 좋을 영화이다. 그렇게 깨부수고 발견한 나만의 그것, 당신도 나도 그건 꼭꼭 숨었던 ‘흑조’가 아니라 한 송이 ‘흑초’ 이었음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비록 애타는 가슴으로 까맣게 타버린 꽃이라도 그을린 재를 모아 다시 부활하는 만개의 봄날이면 어떨까 싶다. 완전히 연소해진 잿더미 속에서도 꿋꿋이 불사하여 날아오르는 한 마리의 새. 어느 바람부는 봄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런 날 우린 ‘백조’도 아닌 ‘흑조’도 아닌 한 마리의 ‘불사조’로 다시 피는 꽃이 되자. 비록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더라도. 예술가는 적고 대중은 많더라도. 봄은 느끼고 시작하는 대중들의 것이므로. 우리는 그렇게 인생이라는 예술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완벽이란 건 통제를 통해 이루어 지는 게 아니야.
해방을 통해 얻어내는 것이지.
스스로 놀래킴으로써 관객을 놀래키는 거야.
탁월함, 그건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3-0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1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