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오늘은 봄이 오시려는지 날씨가 친절하다. 그날도 그랬다. 완연한 봄은 아직이었지만 겨울외투를 입고도 봄이라 우기고 싶을 날씨였다. 봄을 유난히도 못 견디던 두 여자, 어머니와 이모는 예전처럼 여행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세상엔 교통사고로 가족이 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된다고 편을 가르기 시작했다. 의외로 내 편은 별로 없었다. 뉴스엔 하루가 멀다 하고 교통사고 희생자가 발생하건만 그 희생자의 가족들은 나처럼 사고 후 숨어버리기라도 하는 걸까. 그날을 생각하자니 봄날 아침 그 몽글한 안개가 떠오르고 전화너머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목소리도 들려온다. 참, 꿈만 같다. 잔인한 현실은 때때로 한낮의 낮잠과도 같지 않을까. 이 책을 덮고 나서도 한나절 아련한 꿈을 꾼듯 나는 자꾸만 애꿎은 시계를 보게 된다. 얼마나 흘렀을까. 책을 읽고 처음으로, 이 소설도 꿈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나는 이미 그렇게 믿어 버렸는지 모른다.

나는 엄마를 교통사고로 잃고 꽤 방황한 사람이었기에 이 책을 쉽게 손에 들진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책에 끌렸다. 이젠 좀 이런 이야기에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울지 않고도 그리워만 할 수 있다면 좀 덜 힘들 것 같았기에. 억지로 거리를 두고 소설을 읽어내자니 마음을 많이 쓰게 되었다. 거리감을 둔다는 것이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사랑에 빠질려면 ‘완전히’ 라야 아름다운 것이지 ‘적당히’는 사랑도 뭣도 아닌 게다. 이러다 어쩌면 리뷰를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 작품에서 소설적 구성과 독특한 서사, 인물의 배치등에 전혀 분석, 혹은 비평을 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날 이후 내가 지내온 시간들에 묵묵히 격려를 보낼 수 밖에 없었고 그날 이전에 엄마가 살아오신 시간들에 묵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소설을 따라가는 일은 그날 깊게 패여진 내 가슴구덕을 더듬어 당시 맞은 총탄의 경위와 탄흔을 추적해 나가는 일이었다. 사람에게 어떤 기억은 이 소설의 시간단위처럼 단락별로 자세하고 오래도록 분명하다. 그나마 다행인건 소설의 주인공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 그건 불행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그날 딱 하루 불행했다고 그 사람의 인생이 불행한 삶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보다 눈부시던 주인공의 행복이 죽었기 때문에 비극이요, 소용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해서, 나는 이 소설을 굳이 ‘행복한 삶을 살다간 사람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 길이 그들 인생의 마지막 가는 길이 된 사람들의 가족은 대체로 그들이 죽었다고 여기질 못한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인데 이미 떠날 줄 알았고 떠나는 걸 확인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였다고 그들이 꼭 죽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 어머니와 이모는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바로 장기 미국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아주 오랜기간 미국으로 동반여행을 간 것이라 여기고 살고 있다. 헌데 아무래도 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돌아오지 못할 확률이 많은 가보다. 이 책에서도 주인공의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하나같이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으며 미아의 엄마는 여행사 직원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느 눈이 많이 오는 날 아침 눈길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학교와 회사일정을 포기하고 일상의 일탈이라는 가족여행을 떠난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 인생의 이탈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미아가 죽은 것만 아니라면, 이야기는 마치 유학이나 졸업, 아니면 이사를 앞두고 그곳에서 지난 소녀시절을 회상해보는 자기추억의 여행과도 같았다. 죽은 것만 아니라면.

이 작품을 덮으면서 소설은 아무리 길고 아무리 짧아도 결국 어느 시점에서 어느 시점 까지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다만 이번 이야기는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게 되는 날 아침에서 부터 사고 후 사경을 헤매다가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시간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이 만 하루라는 주어진 시간을 시간단위, 분단위로 쪼개어 참 알차게 이용, 배분하셨다. 소설은 7:09 a.m.에서 시작해 7:16 a.m에 막을 내린다. 날짜도 연도도 없고 오로지 오전인지 오후인지만 표시된 채 거의 한 시간 단위로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데, 과연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하게도 숫자가 변했다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긴 어려웠고 오히려 시간은 정지한 듯 느껴졌다. 내게는 단락이 구분되던 이 숫자가 생명이 위중해 촌각을 다투는 시각(時刻)의 의미라기 보다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신(sene)번호의 시각(視角)장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도 작가는 생각이 전개되는 곳이 미아가 입원한 병원의 중환자실임을 인식시키려 의도적인 시각(視角)장치로서 시계를 상징하는 시각(時刻)을 사용한 듯하다. 그곳, 중환자실은 정말 숫자만 바뀌어질 뿐 시간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없지 않은가. 미아의 시간표는 내게 있어 일시정지의 계획표에 다름아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거리를 두고 싶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미아가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은 눈길 운행시 마주 오는 트럭과의 충돌로 인한 교통사고였지만 대부분의 시간, 미아는 중환자실에서 혼자만이 시간을 의식하며 자신의 의식을 유지하려 한다. 그 곳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꼼짝을 않고 흐르지 않는 것 같으면서 또 신기하게도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마법의 장소이다. 같은 숫자인데 오전인지 오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가족만 하루에 두 번(내 기억으로 오후 2시와 8시) 면회가 되는 그곳에서 나 역시 삼일 동안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아이를 낳으면서 분만 유도 촉진제를 세통이나 맞았는데 그 과정에서 폐에 물이 찬 채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 직후 깨어난 나는 ‘숨이 안쉬어 진다’는 말을 하고 다시 의식을 잃었고, 죽지 않고 살아난 걸 깨달았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무마하려 오히려 자신들이 나를 살려내었다고 생색을 내었다. 나는 당시 아이를 낳은 여자이기도 했는데 폐에 남아있는 물을 빼내는 것이 더 시급했기에 아이를 일주일 후에나 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내가 중환자실에서 보고 들은 것은 대부분이 간호사의 발걸음과 기도에 삽관된 장치에 석션(suction)을 시도하는 기계소리, 그로 인해 고통받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각종 의료기기들의 규칙적인 전자음이 다였다. 그때 난 삽관된 입에 석션장치를 넣으면 배에 있는 힘껏 힘을 주고 가래를 자력으로 뱉어내라는 간호사가 죽도록 미웠는데 그녀는 내가 방금 배를 째고 아이를 낳다가 죽을 뻔 한 환자인지는 알 바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가끔 의식이 돌아올 때 내 귀에 간호사들끼리의 의학용어가 섞인 몇 마디를 스쳐들었고 면회하러 들어온 가족들의 목소리와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숨소리로부터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언제쯤 중환자실을 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죽지는 않겠다는 걸,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수술 직후 깨어나 숨이 안 쉬어진다 말하고 다시 의식을 잃던 그 순간, 짧지만 ‘내가 이대로 다시 안깨어나면 그게 죽는 것 이겠구나’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설마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것은 아닐거라고 그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느끼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서 한참 후 나는 죽는 다면 그렇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죽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고 그만 마음이 바뀌려한다.

만약, 내가 의식을 잃고 하루 혹은 몇 시간이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다 끝내 생을 마친 것이라면 나는 미아처럼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아니 미아처럼 아름다운 기억들을 다시 찾아가 아름답게 인사 할 수 있었을까. 내가 죽을지 알았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죽어야 했다면 꼭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이제 죽는 다면 미아처럼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삼일 동안의 중환자실에서도 의식이 있건 없건 무조건 그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하루 반이 지났을 때라야 나는 사람을 알아보았는데 병석에 계신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오진 못하고 대기실에 계신다고 간호사들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실질적인 육체적 아픔이 찾아왔다. 정신이 든 것이다. 아버지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니 어린 시절 해수욕장에서 같이 물놀이를 하던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얕은 물이었는데 발이 닿지 않아 놀란 나는 순간 겁을 먹고 물에 빠지게 되었고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던 기억, 왜 하필 그 생각이 떠올랐는지. 우리식군 그 이후로 물놀이를 가지 않았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라 모든 건 어렴풋했지만 어쩐지 밖에 아버지가 든든하게 앉아 계신다는 느낌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볼펜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시점에 삽관한 장치 때문에 목이 너무 아파 제발 기계를 제거해 달라 애원했다. 같은 날 아버진 그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 병원측에 거세게 항의하여 드디어 삽관장치를 떼어내게 하셨고 일반병실로 가도록 압력을 넣으셨다. 아버진 그 병원의 오래된 투석환자셨다. 책을 읽으며 내내 미아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바로 미아에겐 그런 부모님이 곁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진 내가 일반 병실로 옮겨졌을 땐 정작 나타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난 그때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느꼈는지 말로 다 할 수는 없다. 중환자실에선 들어와 나를 보고 있는 그들을 통해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로부터 나를 보게 된다. 아마도 미아를 보게 된 많은 사람들은 미아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한 채 였을 터이다. 그건 미아가 삶을 죽음으로 택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시점부터 간호사들은 미아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누워있는 환자가 생명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라면 '꼭 살아야 한다', '죽으면 안된다'고 말할 이유가 없다.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그말은 어쩌면 내가 곧 죽게 될 거라는 말과도 같다. 가만 미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넌 살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격려때문에 '난 살 수가 없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 경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는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죽다가 살아온 내 이야기기도 했다. 그녀가 죽지만 않았다면.

어짜피 죽게 될 거 그럼 현장에서 바로 즉사할 것이지 왜 죽지 않고 살아나 다시 죽은 것인지 처음엔 작가를 원망하였다. 겨우 하루 더 살려고 그렇게 사투를 벌인 것인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책을 모두 읽어낸 후 나는 바로 그 시간을 가지려고 미아는 마지막을 견뎌낸 것이고 그것을 시시각각 기록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이 작품의 존재이유이자 내가 이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는 사실, 참 다행이었다. 미아에겐, 우리에겐, 그리고 미아의 남은 가족, 친구들에게 그 시간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사실, 소설 때문에 나는 목숨이 연장된 시간이 미아에게 불운이 아닌 행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머리를 다친 것이기 때문에 살아나는 것이 더 불행이라고. 반신불수나 의식불명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느니 깨끗하게 가시는 게 가족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 하신 거라고. 그때 난 그말을 흘려들었고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 동의를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하루만이라도 아니 몇 시간만이라도 살아서 나와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면 나는 지금보다는 덜 억울하게 엄마를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엄마도 미아처럼 자신의 인생과 잘 이별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대부분 엄마를 편안하게 가시도록 어른스럽게 굴지 못하였겠지만 엄마와 나에게 그 시간은 우리가 같이 한 평생 중 가장 소중하고 따스한 추억이 될 수 있었을 것이기에.

그랬다. 미아는 자신의 짧은 인생을 되돌아보며 그 소중한 사진들을 앨범에 담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 작품은 이제 미아가 다시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기 보다 그동안 해왔던 일을 말하는 책이었다. 이제 친구들과 가족을 다시 못보고, 꿈에 그리던 줄리아드에 입학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근사한 미래를 약속하지 못한다고 절망에 빠져 슬픈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족들에게 사랑받았고 친구와 우정을 쌓았고 남자친구를 사귀기까지, 첼로가 자신의 꿈이 되기까지 자신이 지녔던 모든 사랑과 희망을 떠올려보는 거꾸로 쓰는 일기장이었던 것이다.

첼로를 시작하고 첫 연주회 때 못하겠다고 울먹이는 미아에게 아빠는 자신도 드럼칠 때 똑같았다며 '이겨내기 어려우면 그냥 떨면서 버티라' 말한다. 세상에...나는 미아 아빠의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너는 잘 할 수 있다. 용기를 내라’같이 은근 부담을 주는 진부한 말이 아니고 누구나 그러하니 떨리면 떨리는 대로 그 순간을 견뎌내면 된다는 참신하고 솔직한 대답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나는 꼭 그 말을 내 아이에게 해주고 싶어졌다. 평소에 늘 가족과 닮은 점이 없다고 의기소침해 있던 미아에게 엄마는 할로윈 날 빨갛게 화장을 해주었다. 그날 미아는 청바지와 스웨터를 벗고 나시옷에 금발의 가발을 쓰고 가장무도회에 나타났다. 미아는 거울을 보고 처음으로 가족과 닮은 자신의 얼굴을 느껴본다. 줄리아드 입학과 애덤과의 사랑으로 열일곱의 고민에 힘겨워 할 때 엄마는 ‘어떤 선택을 해도 이기는 거고 어떤 선택을 해도 지는 것’이라고 어느 쪽이든 미아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조언을 한다. 부모란 자신의 답을 말하지 않고 세상의 답을 말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을 보며 나는 과연 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어 미아의 엄마가 얼마나 멋져보이던지.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테디는 미아가 첼로로 자장가를 연주하면 울음을 그치던 동생이었다. 미아는 엄마가 테디를 출산할 때에도 곁을 지켰는데 마침 테디가 제일먼저 본 얼굴은 미아였고 미아는 테디의 탯줄을 잘랐다. 아빠는 이런 가족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을 그냥 취미로 남겨두고 교사가 되는 길을 택하였고 음악을 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미아에게 ‘살다보면 때로는 내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선택이 나를 만들기도’ 한다며 그 선택으로 얻은 가족의 안녕에 누구보다 행복함을 강조했다. 어떻게 이보다 더 단란한 가족이 있을 수 있을까. 미아의 회상이 가족에 머무를 때면 난 그날 아침 그들이 같이 탄 자동차와 음악을 들으며 눈길을 달리던 여행길이 꼭 중간에 한사람이라도 이탈하면 안되는 길이었다고 여겨진다. 설사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할 여행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 어머닌 어떤 형제들보다 같이 떠난 이모와 제일 친하셨고 실제로 농담으로 우리 실컷 달리다가 차 사고로 죽는게 어떨까 하며, 피곤하게 병으로 죽지 말고 깨끗하게 죽자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사람은 자신이 죽는 시점을 모르므로 자신이 제일 자주하던, 제일 잘하던 일을 할 때 죽을 확률이 높다는 걸 이 책을 보며 다시 상기하게 된다. 내 어머니나 미아네 가족이나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하던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그것은 서로간의 이별이 아닌 것이 아닐까. 미아는 음악으로 연결된 부모와 生 에 특별한 추억을 나눈 동생과 죽음으로 영영 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가슴속에 그것을 간직한 채로 죽음마저도 추억의 마침표로 찍은 것은 아닐까.

미아에겐 가족뿐 아니라 친구와 음악도 있었다. 착한 소녀의 가면을 벗고 둘도 없는 단짝이 된 킴은 끝까지 애덤을 도와 중환자실의 미아를 만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미아는 자신의 일부와도 같았던 첼로를 통해서도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나는 이 과정이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음악의 꿈을 가진 열일곱 소녀가 다시는 첼로 연주를 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첼로를 통해 첼로 때문에 자신을, 세상을 알게 된 것에 이 작품은 더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미아는 음악캠프에서 독주가 아닌 오케스트라에 참여하여 처음으로 그룹의 일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고 음악이 고독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에 감사를 느낀다. 바비큐 파티에서 아빠와 애덤은 노래하고 테디는 춤추고 자신은 연주하며 보내었던 오후 한때, 그 눈부신 시간이야 말로 행복이었다고 회상한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경험, 애덤과 헨리 아저씨의 기타와 함께 첼로를 연주하며 세상은 어울려야 어울림을 느낄 수 있음도 알아간다. 펑크록의 세계에서 첼로의 자리는 없다고 믿은 미아였지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텅 빈 남의 자리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열린 마음이었음을. 미아에게 첼로를 연주한다는 것은 사람을 알아가고 세상을 배우는 生의 全 연습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미아는 실전을 펼치지 못했을 뿐인 것이었다. 아니, 실전은 그곳, 가족들과 함께인 거기에서 가능할 터였다.

그래도 역시 가장 슬펐던 건 애덤의 마지막 인사였다. 대학밴드의 슈퍼스타인 남자친구 애덤은 ‘너처럼 음악에 몰입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고 미아의 음악에 대한 집중력, 열정과 태도에 반했다. 이주일 동안 피자배달을 해서 요요마 음악회에 데려간 애덤은 미아의 마지막 순간에 요요마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려주며 기어이 이별을 실감나도록 하였다. 나는 임종을 맞는 사람이 가장 나중에 닫히는 감각이 청각이라 들었다. '좋은 곳에 가시라'는 귓속말을 끝까지 챙겨 듣는 것이 이승에서 행하는 마지막 감각이며 남겨진 사람들과의 약속이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라고. 미아는 애덤과 사랑을 이어준 요요마의 음악을 들으며 마지막 순간 남은 힘을 다해 그의 손을 쥔 채로 ‘너무도 푸근하고 따스하고 곤한 끝없는 낮잠’속으로 빠져 들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남아준다면, 널 보내’ 줄 거라는 애덤의 간절한 부탁을 뒤로 끝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살아 돌아온다면 나는 무슨 짓이든 다 하겠다는 말, 네 대신 죽기라도 하겠다는 그말 때문에 우린 편히 눈감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이만큼 사랑받았으면 된 거라고, 내가 떠나더라도 우리 사랑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 사랑만 간직한 채라면 그곳도 나쁘진 않을 거라고 모두가 기다리는 거기도 다음의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신기하게도 이 작품은 애덤이 ‘미아’를 부르며 막을 내리고, 나는 그만 그 호명에 정신이 버쩍 들었다. 꼭 내가 미아가 되어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그것은 또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그렇게 낮잠에 빠진 나를 다시 현실로 소환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혹시 미아는 그 호명을 듣고 나처럼 다시 깨어나진 않을까, 나는 그렇게 기대를 하는 것이다. 내 눈앞에서 죽음을 확인하고 내 손으로 뼈를 묻었다 해도 사람의 죽음을 믿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제와 믿는다 해도 그것이 결코 존재의 부재에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상대를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대답을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그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 믿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식한다고 해서 바로 부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죽음을 수용한다고 해서 부재를 수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건 자신이 자각하는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상실감의 원인이 죽음이라면 부재의 고통과 마주하는 것, 그것은 부재한 사람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지 않을까. 사실, 존재의 ‘상실’은 존재의 ‘부재’가 아니라 사랑이나 희망의 부재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행히도 사랑과 희망의 부재는 이미 죽은 자의 책임이 아니고 살아있는 나의 문제, 나의 의지인 것이다. 상실을 견뎌내는 사랑의 의지는 기꺼이 존재의 부재를 다시 희망의 존재로 전복시키는 生의 지혜였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읽었다 말하며 얻어버린 가장 큰 교훈이었다. 상실을 부정하는 것은 곧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상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과 나누었던 사랑과 삶을 외면하는 일인 것이다.

리뷰를 쓰기를 잘했다. 나는 이 책을 제대로 몰입하지 못해 더 슬펐고, 슬픔을 좀 줄여보려고 하다가 계획에 실패 한 것이었다. 좀 덤덤해지자고 했지만 실은 애초에 덤덤치 못할 책을 집어든 것이었다. 내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슬픔은 상실의 고통에 대한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반응이다. 이제서야 오늘 슬퍼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치유할 수 있고 내일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또 기억해 낸다. 몇 년 전 <인생수업>으로 유명해진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상실수업>이라는 후속책에서 ‘상실’은 모두 끝났다의 의미가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는 삶’의 증거라 하였다. 모두 끝이면 잃을 것도 없고 아플 것도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엄마가 가시고 얼마되지 않아 서점에서 이 책을 무의식 중에 집어들고 집에 들어왔었다. 책을 넘기다 보니 유일하게 줄이 쳐진 문장이 있었는데 그 문장은 오늘 내가 떠올린 느낌의 문장과 거의 흡사했다. ‘지금의 고통은 그 당시의 행복의 일부이다. 결국 거래인 셈이다.’ ‘나니아 연대기’로 잘 알려진 영국의 작가 C.S. 루이스가 이렇게 멋진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으로 꽤 고통스런 나만의 ‘상실수업’을 비로소 치루어 낸 듯하다. 이 책과 거래한 내가 온당한 보상을 받은 것이다. 나는 아직 지독한 상실로 가슴팍에 가슴만한 구멍이 생긴 채로 그안에서 길을 헤매는 '미아(迷兒)'이면서 아직도 엄마를 찾아 生을 떠나고 싶은 '미아(未兒)'이지만 오늘 치루어 낸 상실의 고통은 결국 내 자신을 '미아(美我)'가 되게 할 보약이리라. 언젠가 지금의 고통이 반드시 나중의 행복의 일부가 되는 날이 나는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그때쯤이면 아마도 오늘의 ‘상실수업’을 알차게 받게 해준 ‘네가 있어 준다면’, 이 책의 미아를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내 고통은 지금도 행복의 한 조각으로 여길 수 있을 듯 하다. 미움의 한 조각이 있어도 여전히 전부는 사랑인 것처럼. 나는 고통 한 조각에도 여전히 전부는 행복한 사람, 그 행복의 조각 전부가 고통이어도 결국은 다시 행복해 질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그때도 마찬가지이길 바라본다. 그건 아마도 먼저 가신 내 어머니가 미처 못다한 말씀이며, 어쩌면 내가 먼저 꼭 해야했을 약속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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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3-03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충격이 크셨겠습니다.
이 책 참 많은 사람이 읽던데 한사람님에겐 또 나름 큰 의미로 와닿았겠네요.
이 책이나 언급하신 책들이 참 많은 힘과 위로가 되죠?
C.S루이스가 참 근사한 말을 했군요.
정말 리뷰 쓰시길 잘하셨어요. 축하드려요.ㅎ
이책 저도 언젠가 꼭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사람 2011-03-03 14:36   좋아요 0 | URL

가볍게 읽을수 있는 책인데
저는 괜스레 가볍게 읽으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도 했던거 같아요^^
그리고, 리뷰는 더할수 없이 무겁게 표현된 거 같아
쓰고나서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했답니다
하지만 남들에게 보인다는 생각만 버리면
스스로 시원해지는 아이러니 ㅋ

언젠가 언제라도 꼭 읽어보세요^^

저는 좋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