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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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은 불운  

적어도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울분에 쌓일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공부를 잘 해놓는 것이 학교생활을 편하게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편임을 일찍부터 알아챈 꽤 눈치빠른 학생이었다. 나는 그 시절 흔치 않았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고 부모님이 늦은 나이에 어렵게 본 자식이었기에 그야말로 과보호의 울타리에서 성장기를 보낼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행동을 통제, 간섭하는 일상의 모든 잔소리들에 유난히 거부반응을 보이는 성향이 있어 부모님은 여느 외동딸처럼 나를 키우진 못하셨다. 학교에서도 선생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일단 공부를 잘하는 것이 지름길이었기에 나는 편하게 살고자 공부를 한 경우였다. 백점의 시험지를 들고 가면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게 가장 극도의 반응을 불러 일으키던 '공부하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공부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 공부를 잘 해 버렸으니까. 공부를 잘 해버리면 사실 많은 시간 공부 말고 다른 짓(?)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으니까. 처음부터 공부 안하려고 공부한 나였기에 나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그다지 부럽지 않았고 내가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지도 않았고, 공부를 잘하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는 친구들을 한마디로 맞갖잖게 여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나는 매일 혼나고 지겨운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계속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불편한 학교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부분 우등생은 열등생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러 일을 거쳐 온 결과 공부를 잘하는 능력은 비교적 쉬운 분야의 기술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타고난 재능과 특별한 기술 없이도 반복해 시간을 투자하고 집중을 발휘하면 그래도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 내기 쉬운 쪽에 속했다. 내 경우도 투자한 시간과 시험성적은 비례했던 편이라 대저 '열심히 하면 대학간다'는 이치를 의심없이 믿어왔다. 우리시절 성적표와 우등상의 심리적 폭력은 막강했는데 이 성적 트라우마는 공부를 잘한 친구들이 결국 결혼도 사회생활도 성공할 것 같은 후광효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성적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시기는 공부 잘했던 친구의 불행과 몰락을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게 되는 시점과 일치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매번 일등을 놓치지 않고 선생님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친구, 일류대학에 합격해 같은 독서실 플랭카드에 합격자로 이름을 떨친 그였지만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보험영업사원이 되어 나타난 경우, 얼굴도 예쁘고 집안도 좋아 그 시절 자타공인 엄친아였지만 불의의 사고로 튼실한 중견기업의 후계자인 남편을 잃게 된 전교회장... 모종의 울분같은 게 형성되어 쌓이기 시작한 건 많은 부분 인생의 결정적 순간들을 보내면서 였던 것 같다.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실패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도 인생은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비교적 예측가능한 학창생활을 유지해온 나로서는 인정하기 힘든 生의 울분이었다. 특히 모범생으로 학생시절을 마친 나 같은 체제 순응자는 공부한 시간만큼 점수가 올라가고 그 점수대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예측불허의 상황을 견디기 어렵고 뜻밖의 결과에 극심한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주어진 모든 숙제를 제 시간에 제출했으며 한 번도 규칙이나 시간을 어기지 않은 내 경우 변칙적인 편법을 사용하거나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내심 적대시 하며 적당히 넘어가는 세상의 융통성에 울컥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행여라도 내가 의도하지 않은 상황으로부터 피해라도 당했다면 얼마나 원통하고 분개했을 텐가. 

바로 그 원통과 분개가 내 전부였던 시간들, 최근까지 나는 '사업실패'와 '어머니의 교통사고'로 그 시간들에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나는 보기좋게 망했고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어도 어머닌 그 어떤 실수도 없었지만 현장에서 즉사했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함에서 벗어나 生의 울분에서 자유로와 지는 것만이 내 살길이라 여기며 지난 몇 년을 보냈다 할 수 있다. 이 두가지에 있어 내가 투자한 생의 노력들은 그 결과와 비례하지 않았다. 아니, 정반대였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나는 열심히 살지 말고 대충살았어야 했을까. 왜 인생은 잘못하지 않아도 벌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왜 그 많던 선생님들은 열심히 한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실수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넋두리가 길었다. 내 인생의 울분을 생각하자니 잠시 이 책의 울분을 잊게 된 탓이다. 이 책은 채 스무 살도 채우지 못한 청춘의 죽음을 적나라하게도 클로즈 업하여 그것을 확인하는 독자로 하여금 그 상황자체를 울분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절대로 동의할 수 없음이 울분의 연대를 선동한다. 하여 작품속 젊음이 움켜 쥐고 있던 울분은 작품 밖 독자의 울분으로 완벽하게 전이되며 급기야 내 안의 울분과 정면에서 마주치도록 한다. 내 울분을 생각하자니 이 책의 울분을 공감하자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지금의 나는 그래도 운이 좋았던 것일까, 싶어진다. 책을 덮고 나는 '울분'이 순간적으로 '불운'으로 읽혀지기도 했다. 내 울분을 알아달라 하기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너무나 미안하도록 불운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죽음을 비극이라 칭한다면 기실 비극의 인생을 살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비극의 내용이 천차만별인 것만이 우리를 희극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참 서러워지는 독서였다. 

울분은 인연

이 책은 이미 죽은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까지를 회상하는 글이다. 즉, 화자는 이미 죽고 난 후, 자신이 죽은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일정시기 죽음의 열차를 타고 온 여정의 풍경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화자의 시점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화자는 비극의 당사자로서 절대 자신이 이렇게 될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핀을 맞아 삶과 죽음의 중간상태인 림보상황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동시에 조율하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고, 결국 죽었기 때문에 가능해보인 이 서사의 구조가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한다는 작가로서 미국현대史를 기록하는 일종의 문학의 예지夢으로 느껴졌달까. 앞날을 예견한 꿈이라 하기엔 시리도록 차갑고 처연했다. 어찌 보면 마커스는 자기 예언효과를 정확하게 이루어낸 성공의 인생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악몽일지라도 지겹도록 미리 꾼 꿈을 실현한 것이니 말이다. 작가는 한 청년의 회상을 통해 철저하게 개인의 영역인 꿈속에서도 1950년대 미국사회의 무의식이 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상기시켰다. 마커스에겐 사회가 예상하는 죽음의 시나리오가 있었고 그는 거짓말처럼 똑같이 죽어버린 청춘이었다. 그런데 죽어지는 방법 또한 반항, 퇴학, 징집, 전사로 이어지는 부정적 시나리오의 극대치를 마치 자신이 수행해야 할 최대 목표치라도 되는 것처럼 빈번하게 되새기던 그였기에 그의 죽음은 오히려 그가 가졌던 울분만큼이나 화가 나지 않기도 했다. 차라리 작가가 의도한 화자의 의식적 강박증(자신은 전사할 것이라는)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 더 무섭고 불안했으며 행여 그렇게 예고를 하였음에도 주인공이 죽지 않았다면 그것이야 말로 반전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그렇게 죽어버린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가 집필했다는 것이 안도의 한숨으로 남을 정도였다.

이렇듯 끝내 자신이 죽어진 광경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고백을 멈춘 화자는 한국전에서 중공군의 총검을 맞아 모르핀이 투여된 상태에서의 기억을 한 번의 호흡으로 쉬지않고 내달렸다. 숨가쁜 회상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책을 덮을 수 없도록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게 한 작가의 집중력이 대단했다. 특이했던 건 이 작품의 시작이 한국전쟁이며 마지막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어떤 책을 읽고 나면 꼭 그와 관련된 뉴스를 확인하게 되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번에도 책을 덮고 나니 거짓말같이 신문 일면에 등장한 기사가 있었다. 바로 중공군에 맞써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군인들의 유해 몇 십구를 강원도 산골 어느 참호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신문에서 확인한, 수적으로 압도적이었던 중공군을 맞아 온몸으로 투항한 그들의 결과는 잠시 내게 모르핀이 생각날 정도의 숙연한 고통에 머무르게 했다. 하필이면 왜 미국 뉴어크 지방의 유대인 촌뜨기 대학생이 한국전쟁이 시작될 무렵 대학에 입학하고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죽었고 죽고 난 후 휴전협정이 되었을까. 소설속 미래, 작가의 과거, 나의 오늘이 겹쳐지며 지구를 몇바퀴 돌고 난 별똥별 하나에 깊숙이 관통된 기분이었달까. 어쩌면 그 별똥별이 오늘 사는 모르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마커스가 대학에 입학한 첫날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죽을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하였고 아들이 죽고 나서 아버지는 '내 눈에는 죽음이 오는 것이 보였다'며 자신도 죽을 것이라 외친다. 한국전쟁의 기간동안 바다건너 미국의 노동자 집안, 유대인 부자에게 일어난 일은 나와는 다른 시대를 살아온 미국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는 나로 하여금 역사야말로 개인의 비극이 펼쳐지는 피할 수 없는 '무대'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리고 현재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무대'가 엮어내는 그 어떠한 '공연'과도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모든 것이, 모두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이라는 인생의 바다에 내던져진 우리네 모두의 '울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울분'은 이미 연대하고 있었던 인간들의 필연적인 우연의 총합은 아니었을까. 그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슬픔의 다른 말은 아니었을까.  

미 중동부의 조그만 이류대학에 다니던 한 젊은이의 죽음이 60년 후 한국의 한 독자와 어떤 우연을 발생시킨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필연적으로 자꾸 발생하는 우연들이 인연이라 본다면 사람은 그 인연 때문에 태어나고 죽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인연이라고 해서 연분처럼 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거기엔 악연도 추연도 있다. 어느 날 발생하는 뜬금없는 우연도 나와 전혀 무관한 인연은 아닌 것이며 내 인생안에서 생겨나는 그 어떤 일에도 무고한 시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인간관계, 그것으로 이루어진 사회와 국가, 그 국가의 역사가 지금의 나와 어떻게든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는 말과도 같다. 다만 모든 우연이 밝혀지고 드러나고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늘 비극의 무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스토리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에 살아간다면 누구나 어떤 방법으로든 마주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기실 비극이 가지는 가능성은 인간인 이유로 백프로일 것이지만 비극의 다양성은 결국 인연의 차별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행운이냐 불운이냐의 운명에 기인한다 할 것이다. 해서 나는 이 책을, 이 작품의 '울분'을 '불운이 되는 인연으로 인한 슬픔'으로 보았으며 그러한 울분을 쌓게 한 조건으로 작가는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와 '미국'이라는 학교를 그 배경으로 내세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본다면 참 잘 짜여진 치밀한 계획의 인연이었고, 완벽한 슬픔이었다.  

울분은 무의식

마커스는 유대인 출신 노동자 집안에서 정육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자신의 영웅으로 삼은 아들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도살장에서 닭을 죽이는 방법을 목격하고 역겨워도 닭의 내장을 꺼내는 일을 배웠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집 앞의 쓰레기통을 치워야 했다. 칼을 쓰는 아버지와 피가 튀긴 어머니 밑에서 그는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책임성, 근면, 성실, 정직함을 배웠지만 그러한 정육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A학점을 받으려던 우등생이었다. 마커스가 내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땐 주로 '칼'과 '피'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를 떠올렸다는 점에서 이는 훗날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막연하게 두려워하게 되는 첫 번째 무의식으로 자리잡았다는 생각이다. 마커스는 칼과 피를 보는 아버지의 일을 살인행위가 아닌 누구보다 '정결한 고기'를 얻기 위한 직업적 행위로서 합리화, 정당화 하지만  생계를 위해 윤리를 저버려야 하는 도덕적 양심은 그의 무의식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가족의 무의식은 어머니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칼을 씀으로써 피를 씻으면서 먹이를 만드셨지만 그러한 칼에 흉터가 난 올리비아는 강경하게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몸에 칼을 댄 행위에 도덕적 잣대를 적용한 것이다. 또한 무의식 바깥의 표면적인 의식으로는 자신들과 신분이 다른 올리비아를 '허턴 양'이라 존칭하며 경계심을 계급화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작업할 때 '칼로 네 손만 자르지 마라, 그럼 다 잘되게 돼 있어' 라 말하며 칼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칼이 가진 위험성을 생명의 안위와 동일하게 여긴 아버지의 무의식이었다. 이런 아버지가 대학에 입학한 다 큰 아들의 신변과 안전에 집착하며 강박증을 보인 것은 비단 먼저 전사한 두 명의 조카들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며 '아주 작은 것으로 부숴질 수 있는' 미래의 비극적 결과를 항상 염두해 두라는 잔소리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능숙하게 동물의 생명을 취하던 아버지의 죄의식이자 뿌리깊은 무의식은 아니었을까. 마커스가 이런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비합리적 태도에 좌절하며 느낀 감정은 늘 모범생이었던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에 대한 첫 번째 울분이었다. 이 책은 무의식에서 시작된 울분이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을 다시 지배하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 첫 번째 울분을 해결하던 방식, 즉 첫 번째 대학을 나와 집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두 번째 대학으로 도망쳐버린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와인스버그 대학의 학생과장이 '자네가 모든 곤경에 대처하는 방식'이라고 판단한 마커스의 대처방법이었다. 그는 두 달간 룸메이트 두 명과 헤어지며 혼자만 지낼 수 있는 방을 택하게 되는데 문제를 지니고 있던 버트럼 플러서와 앨윈 아이어스와 한방을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단지 '공부에 집중하여 A를 받고 싶다'는 주장을 한다. 지난시절을 돌이켜보면 인생의 목표에 방해되는 것을 즉각적으로 제거하거나 인간 관계를 중단하는 방법은 최후에 시도되어야 할 카드였다. 일을 하다가 갈등이 생기면 관계를 단절시키고 새로운 사람을 찾거나 한번 생각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겨지면 끝까지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를 설득하고자 과도한 논리를 제시하는 성향은 지난 시절 독단으로 독녀생활을 해온 내게 있어 참 친숙한 방법들 이었다. 마커스는 면담을 요청한 학생과장에게 이러한 독선적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그와 열띤 논쟁을 벌였는데 나는 이 장면이 작품을 통털어 가장 화가 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논쟁에서 그는 흡사 지식을 무기로 전쟁터에 출격한 전투요원으로 보였기 때문에, 자신의 목표에 위배되는 상황엔 유독 전투적으로 방어를 하는 성향이 결국 죽음을 이르게 한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날의 논쟁은 '공격수' 출신인 학생과장과 '수비수' 출신인 마커스의 대결이기도 했는데 어쩐 일인지 학생과장은 방어적인 공격을, 마커스는 공격적인 방어를 최선의 전술로 삼는 차별화 전략을 펼쳐보였다. 서로 상대를 몰랐기 때문일까. 내가 알기로 학교라는 곳은 어느 조직보다도 한 번의 실수, 한 번의 잘못을 통해 그것과 연관된 가정환경 및 특이사항이 없는지 따져들어 기어이 연계논리를 답안으로 작성하는 조직이다. 마커스는 두 달간 두 번이나 룸메이트를 바꾼 것 외에도 아버지의 직업란에 코셔 정육점이 아닌 그냥 정육점으로 표기한 것, 유대인이면서 선호하는 종교에 유대교라고 적지 않은 것을 지적당하며 한순간에 타인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집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학생으로 분류된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판단에 방어하는 심리로 채플참석에 대한 못마땅함을 신의 존재여부로 까지 확대, 거론하며 버트런드 러셀의 서적을 예로들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그는 채플의 부당성을 누구보다 주장했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것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했다. 소수 유대인 신분으로 실은 부모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했던 콤플렉스가 학생관리에 능숙한 학생과정의 덫에 걸려 표면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나는 모두 A를 받는 학생이었다'는 그의 속외침이 공허해 보였던 건 '나는 모두를 점수 매기는 학생과장이다'라는 학생과정의 무언의 질시와 겹쳐졌기 때문일까. 마커스의 상한 자존심은 전쟁기사를 강박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불통이 튀게되는데 이는 결국 무의식에서 시작된 불안증세임이 명백해 보였다.

마커스는 왜 융통성이 없었을까. 나도 대학교 1학년에 채플 수강시간이 그렇게 부당할 수가 없었는데 우리 땐 세 번 불참하게 되면 재수강을 해야 했었다. 조교 선배가 한명씩 얼굴을 확인해가며 출석을 체크하는 바람에 우린 감히 대리출석 같은 건 꿈도 못꾸었고 기왕 출석한 거 좋은 자장가나 듣는 것으로 생각하자 여기며 시간을 때웠던 기억이 선하다. 채플이 월요일 아침이었기 때문에 더욱 싫었지만 가끔 유익한 세상 잔소리들도 없지 않았던 기억, 한주를 빠르게 시작한다는 보람과 만족, 간혹 만나게 되는 선배나 동창생들...돌이켜보니 대강당의 문이 닫혀지는 순간 헐레벌떡 골인하던 그 순간도 나중에 추억이 되는 시간이었다. 마커스도 그냥 신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한 시간 정도 마음의 명상을 가지는 시간으로 받아들이면 안되었을까. 마커스가 스스로 저질렀다고 하는 실수들 중에 채플 대리출석은 제일 아쉽고 짧은 생각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A학점이라는 게 꼭 자신이 미련스럽게 투자한 시간과 비례하는 공부의 양만이 아니고 살다보면 어느 날 문득 귓전에 들려오는 노래 한 소절에서도 비롯될 수 있음을 그 나이에 알 수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울분이 차오를 때 모든 동포의 가슴에도 울분이 가득했던 중공군의 노래는 따라할 줄 알았기에 나는 그의 고지식함이 터질듯 안타까웠다.  그가 정작 그 노래를 불러댄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 건 신을 믿지 않아 채플을 거부했던 그라도 만약 채플을 들었다면 종교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우연과 다를 게 무엇인가. 그래서, 나약한 사람도 상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고 상대의 약한 곳도 강한 곳과 똑같이 나를 파괴할 수 있으며 상대의 약점이 바로 그 사람의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더욱 뼈아프게 들렸다. 청춘은 그때까지 아는 만큼 전부의 지식이 무신론자인 자신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지나고나니 이 책을 넘겨가며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땐 나조차도 그랬으면서 지금  어른된 심정으로 자꾸만 마커스의 잘못을 찾으려 하고 그것을 따지려는 내 자신이 왜 이리도 염증이 나던지.

또 하나 채플과 함께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찾으라 한다면 사람들은 올리비아와의 만남이라 답할 듯하다. 마커스가 정육점의 주검의 냄새, 앞치마의 핏자국으로부터 벗어나 법률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의 한 시기에 올리비아는 어떤 필연성을 가진 악연이었을까. 마커스와의 첫 데이트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성애행위를 보여준 올리비아는 정육점 경영자의 시각으로 가늠하자면 '정결한 고기'가 아닌 '버려진 고기'였다. 죽어서 싱싱한 피를 뽑지 못하고 면도날의 흉터만 간직한 채 실패와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올리비아는 흡사 부모님이 미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동물을 표상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동물의 육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생명을 깔끔하게 빼앗지 못한 것은 사업의 실패이자, 직업의 수치이며, 가정의 불운이고, 대상인 동물에게도 죄스런 일이다. 마커스가 서점에서 최초로 균등하게 양쪽으로 머리를 가른 가르마와 쉬지 않고 아래위로 움직이는 올리비아의 다리에 끌렸던 것은 흡사 잔인하게도 머리가 잘린 채로 죽지 않고 마구 뛰어다니는 한 마리의 닭을 연상시킨다. 외양적으로는 클리블랜드 교외 부자출신으로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부모의 이혼으로부터 상처가 시작된 올리비아는 머리가 잘린 짐승, 영혼없이 육체만 남겨진 청춘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리비아가 마커스에게 시도한 행위는 상대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을까. 병문안을 와서도 육체로 상대를 기쁘게 하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진실한 사랑의 증거였을지 모른다. 그녀는 남겨진 자신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상처를 가진 그녀가 충수염 수술로 입원한 마커스를 찾아가 건낸 꽃다발과 육체적 호의는 어렵게 내민 진심이었으며 그러했기에 마커스 어머니로부터의 의식적인 경계는 다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계기가 된 것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무의식적 공포로부터 자식을 구속했다면 어머니는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평화를 유지하고자 자식으로부터 주체성을 빼앗고 만 것이다. 마커스 어머니는 자신의 이혼과 올리비아와의 결별을 물물교환하며 상처를 공평하게 나누길 원했다. 지긋지긋한 정육점의 생활을 탈출할 방편으로 자식을 공부시켰지만 결국 자신들이 생각하고 행동해온 관습은 바꾸지 않음으로써 기존 가정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식들은 이 부모의 무의식에서 억압된 자아를 탈출시키고 독립된 자아로 향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반드시 부모의 무의식이 완강하게 거부하는 배우자에 이끌리게 되어 있다. 이는 콤플렉스와 한계상황을 많이 보유한 가정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비극의 공식이 아니던가. 그런데 작가는 이 인연으로 발생된 울분의 시작을 한 가정에서 학교로, 나아가 미국사회와 다른 나라의 전쟁터에서 어떻게 결말지어 졌는지 발전시킴으로써 당시 미국사회의 부조리했던 전통관습을 예리하게 들추어 내고 있었다.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보다 더 사악하고 견딜 수 없는 건 결과적으로 그러한 전쟁터로 청춘을 내몰게 한 그들의 무책임, 억압된 가치, 강요된 윤리는 아니었을지 당시의 시기를 지나온 작가로서 그 예각적 시각은 참 통쾌하기 까지 했다.

이러한 미국사회 보수관료층의 생각을 단적으로 전파해 준 렌츠 학장의 일장연설은 그야말로 어느 시기 우리 나라 어느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그대로 그곳으로 날아가 미국을 한국으로 한국을 미국으로 바꾸어 말하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시골출신 순진한 학생들의 눈싸움에서 시작된 우발적 단순집회는 광란의 분노 궐기 대회로 변모하고 급기야 팬티습격사건으로 확대되어 언론에 대서특필된다. 여기까지는 한순간 청춘의 치기어린 해프닝, 광란의 열정이 빚은 보편적 비극으로 여길 수 있었다. 그날밤 자동차 모험을 나간 앨윈이 사고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다수의 공모자, 참가자들이 퇴학 처리 된 것도 이해할 만했다. 당시 미국사회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던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마커스는 적어도 학교대표로 고별사를 읽고 수송부대에서 정보부대로 옮겨갈 수 있는 반절의 기회를 확보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울분은 끈질긴 무의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마커스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유대인 남학생, 클럽의 회장이면서 농구스타 우등생 서니 코틀러의 천연덕스러운 제안에 압도되어 그만 채플 대리출석을 감행하고 만 것. 이 역시 평소 우월해 보이는 코틀러로부터 굴욕감을 느끼던 마커스가 그 앞에서 대범해 보이려 제안을 받아 들인 것이었다. 애초에 채플 수업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거부의사를 굽히지 않았고,그  해결책으로 정직을 버렸고, 결국 의식적인 오늘을 택하지 않고 무의식적인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퇴학과 한국전 참전으로 이어졌으며 그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그 방법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분명한 건 컴플렉스의 불똥이 왜 한반도로 튀게 되었는지 그도 작가도 우리도 알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튀게 된다면 그시절 그 곳은 다른 곳이 아닌 한반도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미간 오래된 무의식이 한 순간 방향을 정한 것이라면 이제 우리 울분의 방향은 삶의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울분은 치유 

이 책은 결국 무의식을 여행한 한 청춘의 기행기에 다름아니었다.  무의식으로 비롯된 울분을 찾아 그로인해 죽음으로 치유를 얻은 슬프지만 교훈적인 이야기였다. 그가 여행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은 무엇일까. 책에서 모르핀은 고통을 감소시키는 약물이 아니라 죽어가는 화자의 기억을 돕는 연료로 묘사되며 비록 잘려나간 육체의 고통은 줄여 주었지만 정신만은 굴복당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어떤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모르핀을 맞고' 에 해당하는 분량에선 모르핀을 맞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점점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과정을 그려나가고 있다. 마커스는 바로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의식화 한 것이다. 나는 이 회상의 시간이 '모르핀을 맞고' 난 후의 시간인 것이 이 작품에서 반전이라면 반전이라 믿고 싶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발견하지 못할 수 있었던 깊고 깊은 무의식을 찾아내 그것을 정면으로 인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인간의식이 억압한 사연을 담고 있는 거대한 지하창고가 아니던가. 이 무의식을 의식화 한 것이 바로 마커스의 회상이자 고백이라 본다면 죽음은 무의식의 바다에서 비로소 '벗어나' 무사히 자신의 의식으로 귀환한 상태이므로 조금은 덜 서럽다 말하고 싶다. 마커스는 자신의 무의식에서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자아를 찾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두 번 살지 못하는 마커스의 한 번 인생은 끝이 났지만 마커스의 무의식은 그로 인해 의식화되었기로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남겨진 그의 무의식, 아니 끝내 의식화된 그의 무의식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가 남긴 청춘의 고백들은 혹시 우리가 의식화하지 못한 무의식이자, 꺼내지 못한 갈등의 편린들은 아닐까. 마커스야말로 자신의 문제를 의식화할 기회를 가진 운좋은 청춘은 아니었을까. 그 순간이 불운하게도 죽음의 순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작가는 이 무의식은 스스로 억지로 끄집어 낼 수가 없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영리하게도 죽지도 살지도 않은 중간상태에서 모르핀을 안전장치로 사용하는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이 책을 통해 무의식은 반드시 갈등의 상황, 외부적인 장애에 부딪힐 때라야만 드러나는 것임을 다시금 깨우친다.

우리는 살면서 내안의 심리적 갈등이 타자와 맺고 있는 관계속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갈등을 발견했다 해도 외면하거나 해결하려 할 때 내 무의식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도 알지 못한다. 외동딸로 자란 내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사람과의 갈등 국면을 헤쳐 나오는 일이었다. 형제들간의 크고 작은 갈등을 겪어보지 못한 내가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거짓말처럼 마커스의 방식과 일치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 순간엔 장애된 것을 제거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매순간 열심이었고 내 잘못이 없었지만, 방해가 되는 것은 다 돌아보지 않고 살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내게 닥쳐온 피해나 불행은 억울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점점 커지는 배신감으로 억울한 마음을 쌓는 일, 그로인한 울분을 차곡차곡 저장하는 일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사실도 이 책을 덮으며 착찹하게 인정한 부분이다. 물론, 마커스가 꼭 갈등에 대처하는 독선적인 방식 때문에 죽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갈등을 헤쳐 나오는 태도는 분명 삶의 우연까지도 지배하는 원칙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에 가만히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면 갈등은 나쁘기만 한 것일까. 살면서 사회적 책무와 무의식적 욕망, 도덕적 관습과 죄의식이 충돌하여 선택을 고민하게 되는 순간은 헤아릴 수가 없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경우 역시 불가능하다. 갈등은 삶의 진행만큼이나 등가의 원리로 중단되지 않는 법칙이라는 생각,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실은 건강하게 삶을 살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표가 된다는 생각을 한다. 울분은 그러한 갈등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 않았을 때 생겨나는 리비도의 반증일 터이다. 그렇게 본다면 갈등을 외면하고 그것에 부딪치지 않고 그 긴장으로 에너지를 폭발시키지 않는 사람에게 남겨진 잔여물, 그 에너지의 나머지가 울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울분이 쌓인 다는 것은 분출되지 못한 에너지가 증가한다는 것이고 억압된 나머지 에너지가 그 사람의 인생전부를 갉아 먹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우린 남은 生 동안 울분의 에너지를 열심히 변환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인연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면 각자 내면의 숨겨진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서로간에 발생한 그 긴장을 외면하지 않아 거기서 생겨난 에너지를 다시 生의 기운으로 흡수하는 일, 어렵지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작가는 혹시 한평생 이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을 쓰게된 것은 아닐까. 혹 틀리지 않았다면 내가 얻은 오늘의 결론은 어쩌면 내 울분을 달래준 감사의 선물이었다.

사실, 너무나 허탈한 청춘의 날벼락에 내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아 스스로 내 자신을 다독거리며 글로써 울분을 달래고자 이 서평을 쓰게 되었다.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아 책을 통해 내 울분의 자기탐색 시간을 가져본 것은 이 책으로 얻은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끝내 울분의 에너지를 배출하고자 하는 내 자신의 잉여 에너지를 여실히 느낀다. 칼 융은 '진정한 치유란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 했다. 내 자신이 되는 길은 자신의 울분을 바로 보고 그 시작을 바로 알며 그 에너지가 자신을 파괴치 않도록 에너지 관리를 제대로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나 이제, 울분으로 울분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은 또 다른 누군가의 처절한 울분이 될 것이기에. 나는 울분으로 다시 살고 싶다. 울분으로 희망을 만들고 싶다. 비록 내일 당장 전쟁과 같은 '불운'에 휘말리며 안 보이던 '인연'에 희생양이 될 지라도, 내 안에 '무의식'에 지배되어 잘못된 선택을 할지라도 나는 오늘 울분을 '치유'삼아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 언젠가 내 울분이 당신의 울분도 보듬고 안아줄 수 있게 된 날, 그 대견한 치유가 비로소 실현된 그날 나는 그 '울분'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오늘도 남겨진 여분의 그것을 어루만진다. 이로써 된 것이다. 당신의 울분도 오늘만은 내게 기대어 내 손을 잡으시라. 이렇듯 죽지 않고 살아남은 행운의 기쁨을 함께 공유하자. 큰 목소리로 울분도 함께이면 눈물어린 감사나 가슴시린 행복일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린 그렇게 서로 인간된 본분으로 다가올 삶에 흔쾌히 격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 만이 제법 내 자신이 되는 방법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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