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1. 첫눈이 쌓인 만큼 겨울을 보낸 만큼
그애와 내가 기다리던 첫눈은 바로 이런 폭설이었다.
함께 보낸 여름과 가을과 겨울 중에 겨울이 가장 길 것이라고
늘 우리는 생각했었다.
책을 덮었을 때 아직도 세상은 폭설과 강추위로 덮여 있었다. 누군가는 이 한겨울을 힘겹게 견디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파트 앞 나무에 쌓인 눈이 유난히도 버거워 보였다. 저 눈이 다 녹고 나면 봄이 올까. 아니 내게도 새봄은 도착할까. 아니다, 이번엔 겨울을 곱게 보낼 준비를 하였던가. 이 겨울이 가고 나면 얼마나 지난 계절을 아쉬워 할 것이며 그렇지만 또 염치없이 다음의 꽃을 기다릴 텐지 나는 알고 있다. 이미 눈앞에 가득한 눈을 보고도 다음의 첫눈을 기다리는 무모함으로 이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까닭에, 말이다.
이토록 확연한 겨울 속에서 그들의 소년됨을 읽어가는 일은 아주 오래전에 첫눈이 내렸다고 하늘을 보았던 순간을 천천히 떠올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리었던 여러 번의 첫눈이 많이도 쌓여버린 지난 겨울들이 지금의 내 어른됨 이었음을 깨닫는 일이었다. 첫눈이 온 만큼이 결국 내 나이였다니 왜 이리 눈물이 맺히던지... 아마도 꽁꽁 언 채로 얼음이 되었다가 또 흔적도 없이 녹았다가 그렇게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아닌 매번 첫눈이 내리곤 했을 것이다. 온몸으로 눈을 지고 있는 나무가 안스러워 보였던 건 그동안 내가 쌓아올린 첫눈의 무게때문 이었을까. ’이 무거운 것들, 좀 벗어도 되겠죠?’ 하고 내게 허락이라도 바라는 듯 나무는 내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꼭 지난 여름 폭풍이 몰아치던 어느 새벽, 나뭇가지가 베란다 창문을 세차게 때리면서 마치 몸통이 꺽어지기라도 할 듯 요동을 멈추지 못하던 그 때 그 나무였다. 가을엔 눈부신 금빛이나 화려한 붉음으로 변신치 못하고 그 후유증으로 노화마저 중단한 나무가 아니던가. 그 메말라온 가지들이 짊어지고 견뎌내는 흰 눈이었다. 해서, 나는 거울을 보듯 눈쌓인 나무를 향해 말없이 울어주었다. 그것은 곧 그대로도 괜찮다는, 너인 채로 멋지다는 그를 향한 억지이자 위로였는지 모르겠다. 이 책이 지금껏 겨울을 지나왔지만 또 겨울을 견뎌야 하는 한 명의 나이든 불혹의 소년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처럼.
#2. 소풍을 다녀오듯 소년을 찾아가듯
기척도 없이 흘러 지나가고 있는 이 시간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까.
내가 스물넷에 아이를 낳았다면 연우같은 아들을 볼 수 있었을까. 여덟 살 연하의 멋진 남자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연우와 나이가 같은 자식은 둘 수 있었겠다. ...가슴 벅차게 부러웠다. 그들 모자의 친구같은 관계, 쿨해 보이던 생활패턴, 나름 있어 보이는 그들의 직업, 하지만 그런 것들 보다 제일 가슴이 뛰었던 건 열일곱의 연우가 마흔 하나된 엄마를 청순 글래머의 여배우와 같은 이름, ’신민아씨’라고 호칭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이야기에서 엄마의 이름은 아들과 친구의 이름만큼이나 많이 불리워 졌는데 나는 연우가 그녀를 말할 때, 태수의 전화번호가 ’민아씨 남친’으로 저장될 때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내 나이가 공교롭게도 연우 엄마와 같은 나이여서 그런지 나는 작품속 그 누구보다 ’신민아씨’가 사랑스러웠고 ’신민아씨’가 되어보고 싶었음이다. 아니 이미 나는 연우였던 나와 신민아씨인 내가 그들의 도토리와 함께 티격태격 동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연우가 엄마를 어엿한 한 명의 이름으로 객관화, 동격화 하는 덕에 나는 자연스레 그들의 소년시대에 어렵지 않게 동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누구나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소년性을 등장인물 모두에게 동등하게 부여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나이와 성별, 직업에 상관없이 모두 한명의 고독하거나 불안한 소년에 다름아니었으니 말이다.
소설은 연우를 중심으로 한 열일곱의 소년들과 이미 열일곱의 生을 한번 씩 더 보낸 어른들이 자신의 소년됨과 소년이었음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신 스스로 자기라는 존재를 생각하여 알아내고 자신만의 세계를 인정하는 일은 결코 성급히 성취될 일도 아니고 마냥 기쁘기만 한 일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봄날 눈이 녹아내리듯 느리고도 소리없이 전개되면서 시종일관 애틋하고 아릿했다고 할까. 이번 글이 어느 때보다도 천천히 그리고 아주 미세하도록 초단위의 감정체계가 빠짐없이 배열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가만의 씨줄과 날줄이 만들어낸 촘촘한 감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감정들은 그 어떤 것도 없어 보였고 한번 걸린 것들은 대단히 공을 들여 표현해 내고자 한 의지를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하지만 끝내 성장을 해내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에게 그 부드러움의 힘겨움은 뼈를 깍는 고통스런 과정이었겠지, 싶었다. 이 책으로 스스로를 성장시켰을 작가에게 오히려 위로를 드리고 싶었다. 유난히도 책장을 조심스레 넘기며 행여 깨어지기라도 할 듯 소중히 책을 어루만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세상에는 어른으로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지만 어른인척 하는 소년들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권위적이며 위협적이고 강압적인 행위들을 ’남성다움’혹은 ’카리스마’로 오해하고 남성답게 자라지 않았지만 남성다운 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심리학에선 상처받은 소년의 취약성이 미성숙한 채로 성장이 멈추어 버린 현상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미성숙이 오랜기간 어른됨을 지배할 때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소년성의 원형을 드러내게 되는데 예를 들면 폭력을 일삼는 남편, 부하를 괴롭히는 상사, 경쟁을 회피하는 동료등이 성숙하지 못한 소년으로서의 어른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우리 生에 상처받은 소년性이야 말로 언제라도 어른이라는 완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끼리 서로 서로 독려해주어야 한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그 소년性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옳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봄날처럼 푸릇하고 생기넘치며 열린 마음으로 모험과 미래를 기다리는 가장 싱그러운 에너지도 있었다고, 잘 기억해보라고 말이다. 이는 꼭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여성에게도 더 여성스러운 것이 더 어른이 되는 것과 동일시되었던 가치의 일방적 지배를 벗어나 여성이기 이전의 인간으로서의 소년性을 찾아가는 일이 얼마나 반가운 재회인지 그 비밀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러니 책을 넘기는 일은 결국 이야기속의 모든 소년의 상처를 발견하며 그들의 슬픔과 고독을 위로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작가 스스로 재회하게 된 자신만의 소년을 말하는 방법이었을 것이고 그 소년을 통해 우리 자신의 소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그립지 않을 수 없는 한편의 봄소풍과도 같은 정경이었다.
#3. 달리고 노래하네 몸과 마음으로
나 지금, 나라고 하는 전 존재, 나라고 하는 전 우주를 오롯이 혼자
짊어진 채 달리고 있는 거야. 내가 팽개치는 순간 그것은 산산조각이 나고 내가 떠메고 나아가는 한 그것은 전진한다. 나는 나다.
연우를 비롯한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의 소년性을 말하고 표현하는 각자의 매체(media)가 있었다. 작가는 표면적으로 달리기와 노래를 앞세워 자신이라는 세상을 알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같다고 말이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실은 제 안에서 그를 통해 모르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같지 않을까. 이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곧 상대를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고 그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이라는 뜻과도 같았다. 달리기와 노래는 모두 육체의 기관을 이용하는 작업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비로소 실행할 수 있는 일이다. 즉, 몸과 마음을 성의껏 쓸수록 그 성과가 도드라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었기에 이야기속에서 달리기와 노래를 동시에 해나가는 인물은 연우였지만 내겐 모든 사람들이 달리고 노래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연약하고 우울해 보이는 이름을 가진 연우는 여덟살 연하의 엄마의 남친 재욱형의 권유로 달리기를 시도하게 되고 힙합매니아인 친구 태수로부터 노래를 소개받은 후엔 늘 노래를 흥얼거린다. 연우에게 달리는 행위는 자신의 몸속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가 닿는 일이었고 노래하는 시간은 말로는 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귀국청소년인 태수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힙합의 소리에만 귀기울이며 가끔 무면허 미성년자로서 자동차를 타고 내달리는 취미가 있었는데 이는 억압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충동적 반응으로서의 위험한 탈출구에 다름 아니었다. 헐렁한 흰색 후드티를 입고 마리오네트를 연상시키는 채영은 카프카의 책을 읽고 엽서를 띠우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소설로 노래하는 소녀였다. 채영의 노래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사람을 향한 꿈의 고백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태수의 쌍둥이 동생 마리는 교지편집부의 모범생으로서 ’우리세대의 정체성과 미래’라는 특집기사를 기획하고 엮어냄으로써 세상에 대한 질문을 세상을 향해 노래하는 지혜로운 소녀였다. 연우가 이사오기 전 같은 방에 살았던 채영의 선배 민기훈 역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드는 뮤지션이었다. 엄마 신민아씨는 옷 칼럼니스트로서 개성있는 에세이를 기고해왔으며 재욱형 역시 취미로 마라톤을 하면서 힙합칼럼을 연재하는 음악평론가였다. 이들 모두는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의 육체를 내달리고 심경을 노래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러한 매체를 통해 각자의 소년性은 성장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들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나를 성장하게 한 무기로서 매개체가 있었던가, 싶었다.
중학교 2학년을 앞둔 봄방학 때 친했지만 같은 반이 되지 못했던 친구 하나가 집에 전화를 걸어 아무말없이 음악을 들려준 적이 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매체가 라디오와 TV밖에 없었던 그 시절 자신이 녹음을 했다며 들어보라한 노래는 조용필의 <친구여, 1983>였고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4,5분 동안 말없이 울고 있던 친구의 눈물을 기억한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가사가 맘에 든다는 말에 그녀는 개학하고 헤어짐의 선물로 여러 가요를 녹음해 테이프를 건네 주었다. 힙합 매니아가된 태수와 연우를 보니 그 시절 공테이프에 선곡된 음악들이 먼 기적소리처럼 아련히 들려왔다. 그시절 꿈과 친구를 노래하던 음악들로 내 소년이 위로를 받았던가... 마음이 아려왔다. 이 책의 제목이 <소년을 위로해줘>이지만 특별히 남성이 되기전의 소년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마도 내 학창시절의 중성적인 캐릭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여중, 여고에서 꽤 보이쉬한 이미지의 외모와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기에 같은 여자아이들로부터 편지와 선물을 많이 받았다. 나의 소년性이 왜 남성을 지향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여성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지양하며 그들이 원하는 남성적인 제스춰, 말투, 옷차림, 행동을 내 것인양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여대에 들어가 누구보다 멋부리기에 열중하는 대학시절을 보낸 덕에 동창생들로부터 충격과 배신의 투정을 듣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지금까지도 얼굴을 모르는 온라인에서는 내가 남성인줄로 알고 지금처럼 여고라는 글을 보고서야 여성이었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원인이 떠오르지만 대체로 여성이라는 역할과 성정체성이 내게 불편을 초래한 것만은 확실하다.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겨우 마음 편해지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 생긴 일이고 나는 거의 내 생애의 8할 이상을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며 싸우고 받아들이는데 소모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연우가 메이저라는 시스템에 합승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안의 혁명을 통해 내가 나일 수 있는 세계를 발견하는 과정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인물이었다면 내 경운 여성이라는 성적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와 지고자 그동안 무수히도 많은 혁명을 치루어 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다워야 하고, 여성이니까 도와야 하고, 여성으로서 감싸 안아야 하는 모든 관행과 패턴에 나는 마이너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며 새삼 깨우쳤다. 말로서도 정리가 안될 만큼 나는 논리와 이성과 현실에 늘 방황하는 소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거의 내안의 여성이라는 만년소년을 격려하고 칭찬하는데 기꺼이 이용했다. 그냥 나 다울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괜찮다는 것을 나는 겨우 ’신민아씨’ 나이에 끄덕이고 있으니 말이다. 성장소설이고 청소년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꼭 지금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소년같은 성년들이 보아야 할 책일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작가가 실제로 달리기와 힙합으로 위로받은 개인적 경험이 소설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어떤 의미에서 주인공 모두는 작가의 1/n 만큼의 분신소년이라는 생각도 들었음이다.
#4. 날개를 펴고 꿈속을 날아가리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고 말하는 당신
나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일부
또는 나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나를 알고 있는 당신
그리고 당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는 당신
그런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 나는 대체 누구죠?
이들 작가의 분신소년들은 또 각자 꿈을 펼치는 주체로서 동화속 환타지라는 소년性을 자신만의 이야기로 완성해 나가는 동일한 입장이기도 했다. 특히 연우와 채영이 소곤거리던 첫사랑의 추억은 자꾸자꾸 반복해 설레던 편지를 펼쳐보던 그 시절이 생각나 잊었던 소중함을 아주 세심하게 확인하는 시간도 되었음이다. 이들이 만들어가던 동화속에 바로 그리핀이라는 상상(想像)과 날개라는 이상(理想), 그리고 자신을 투영하는 거울로서의 자화상(自畫像) 이 있었다. 동물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인간 자신이 갈등하는 본능을 상징한다. 뮤지션 G-그리핀의 그리핀은 독수리의 부리와 날개, 발톱에 사자의 몸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었다. 힙합이라는 음악이 ’뒤집고 무너뜨리고 바꾸고 부정하고 고치고 버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 만들어 감으로써, 내가 그냥 나일 수 있는 세계’라고 한다면 그리핀은 힙합의 혁명성이 소년의 이상임을 상징하는 이상적 자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연우에겐 그리핀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또 하나의 세상도 있었다. 바로 초등학교 입학날 선물받은 자신의 키보다 큰 전신거울은 연우를 더욱 성장시켜 주는 일등공신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거울을 볼 때 상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보다 더 예쁘고 잘생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다고 한다. 거울을 통해 자신만의 단점도 알고있듯 남들이 보지 못하는 자신의 장점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춘기 시절엔 내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이 남들에겐 어떻게 비춰질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신을 객관화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반사심리일 것이다. 연우는 자신의 방 전 주인이 거울의 맞은편에 그려놓은 새의 펼쳐친 날개가 자신의 등 뒤에서 완성되는 날 거울을 깨고 날아 올라가 낯선 별을 통과해 그 너머 우주까지 날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거울이라는 물체(物體)와 자신이라는 육체(肉體)와 새라는 모조체(模造體)의 낙서는 각기 분리된 개별적 존재들이지만 활짝 펼쳐친 날개가 달린 자신의 환상이 거울에 투사될 때 그것은 성장을 유도하는 일종의 최면효과로서 실재(實在)하는 생명체(生命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우는 이 새의 날개를 완성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그리핀을 탄생시키고자 했다. 그 결과 채영을 만나기 전에도 거울을 보며 날개를 확인하고 만나고 들어와서도 똑같이 거울을 본다. 상상속의 날개지만 채영을 통해 조금씩 자라난 자신의 마음이 곧 날개의 성장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미지로서만 그려지던 날개는 실제로 채영이 가진 새가 새겨진 은색 메달을 선물받게 되면서 그 환타지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즉, 연우와 채영이 똑같은 목걸이를 옷속에 숨김으로써 비밀로서의 같은 꿈을 간직했다고 할까. 더 드라마틱한 것은 채영에게 날개는 백조가 되어 산호섬을 날아가는 꿈이었다는 것이다. 백조의 날개를 펴고 날아가 만나는 단 한사람은 그리핀의 날개를 펴고 별을 통과해 날아온 연우일 것이고 이 둘만의 환타지가 채영이 고백하는 노래이자, 소설이 된 것이 아닐까. 이 모든 환타지의 성과는 곧 연우와 채영의 동반 성장일 것이며 그 축복의 선물은 3년후 <거울의 반대편, 꿈의 반대편>, <보석의 파수꾼>이라는 노래가사로 재탄생하게 된다. 둘만의 환타지로부터 얻어낸 현실의 창조는 늘 우리가 꿈꾸던 지나간 첫사랑이자 이루지 못할 마지막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작가는 이 아름다운 동화를 과도하게 부풀리지 않고 대단히 현실적으로 담담하게 읊조리는 성숙함을 선사하며 청소년이 아닌 이렇게 나이 들어 버린 늙은 소년들을 조곤조곤 위로하고 있었다.
#5. 별을 보며 약속하자 또 다른 나와 함께
온 생애를 걸고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한 순간.
바로, 지금.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시간.
그것이 우리, 낯선 우주의 떠돌이 아이들의 내일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 까마득한 소년을 위로해주었던 건 역시 연우와 채영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친해지는 과정, 그 아스라한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이 운명처럼 조우해 소꿉장난처럼 하나씩 해보는 것들은 결국 우리 나누었던 사랑을 뒤돌아 세세히 다시 느껴보는 일이었기에. 무엇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은 추억이고 잊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 ’One Piece’라는 퍼즐카페에서 처음 본 깡마르고 희고 차가운 채영의 손가락과 그 손가락 끝부분이 빨갛게 벗겨진 기억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이 자신의 가족과 어린 시절, 꿈을 이야기 하며 하나씩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광경은 꼭 아주 오래전 내 소년들이 추억이라는 원피스를 입고서 한 조각(one piece)의 선물을 들고 한자리에 모여드는 일만 같았다. 여름에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서 같이 본 분수쇼는 그 옛날 언젠가 밤하늘에 터지던 불꽃놀이와도 같았다. 여자친구가 농구를 할 땐 공을 넣게끔 번쩍 들어 올릴 줄도 알았던 연우. 세상 끝에 있는 우주정거장을 가본다며 강풍주의보를 헤치고 도착한 공항은 둘만의 우주였으리. 처음으로 손을 잡았을 때 놓아버리면 다시 잡기 힘들어 질까봐 놓지 않으려던 마음, 내 손 안에 잡아든 상대의 손에 힘을 주던 시절이 나도 있었던지. 밤에 이륙하는 비행기는 우주가 쏘아 올린 별이었고 별을 바라보며 한 약속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순간이겠지. 첫눈 오면 늘 만나기로 굳게 약속한 그 시절 가녀린 새끼손가락이여. 비가 쏟아지던 날 우산속 차갑고 부드럽던 첫 키스, 땀이 차오르던 깍지 낀 손... 그들의 몸짓 하나 걸음 하나에 나도 모르게 빙긋 미소가 지어졌고 가슴이 두근거리다가 끝내 이슬이 맺혀지는 건 너무 아름다웠음도 너무 선명함도 아닌 이제 너무 멀어졌다는 아득함때문 이었을까. 지금보다 한 번의 열일곱을 더 보낸다면 나는 그때도 이렇게 울 수 있을까.
하지만 연우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봉착할 수 밖에 없는 상대를 의심하는 단계에 이르고 만다. 교지편집실에 민기훈 선배가 그려놓은 그리핀을 보고 채영에게 자신은 선배의 그림자로서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한다. 잘못배달되어 온 카프카의 엽서부터 모든 것은 퍼즐을 맞추듯이 불신의 시나리오를 완성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소년의 아픔이란 나만의 바보같은 것이 아니었구나, 싶어진다. 그리고 우린 아직도 소년이구나 입술을 깨문다. 이러한 오해를 우리는 첫사랑뿐이 아닌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에서도 반복하며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얼마나 내 자신을 괴롭혀왔던가. 우린 어쩜 사랑에 있어서는 영원한 소년인 채로 성장이 멈추어 버리는 바보 연인들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연우가 감정을 극렬하게 부정하지도 쉽게 인정하지도 않은 채 소년인 자신을 가만히 느끼도록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으로 느껴졌다. 같은 시간동안 연우는 카프카의 <성>을 읽고 재욱형의 ’아버지, 힙합 좀 듣자니까요’시리즈와 신민아씨의 ’옷에 대한 유쾌한 편견’들을 일상이 아닌 지면으로 만나면서 자신과의 조용한 대화시간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이 집에서 만나는 가족이 아닌 사회인으로서 음악과 옷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말하는 방식은 각자 자신들의 상처를 바로보고 사람과 세상을 끌어안는 치유기제 였던 것. 이렇게 불안하고 외로워도 자기다운 당당함이야말로 가장 자신일 수 있는 해답임을 가만히 알아간다. 겉으로는 잘생기고 잘난 체하는 재욱형이 엄마와 틀어져서 하는 고백을 듣고는 상대방의 내면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방법도 알게 된 것이다. 늘 시한폭탄 같던 태수가 자판기 동전배출구를 순회하는 떠돌이 아이를 돕기 위해 몇 대 맞아 눈위가 찢어진 것을 보고 비로소 폭력은 나에게서 나를 빼앗아가는 일임을 깨닫게도 되는 것이다.(거짓말처럼 이 책을 덮었을 때 자판기 동전을 상습적으로 훔쳐가는 십대 청소년들에 관한 9시 뉴스를 접했다. 하필 이 소설을 보고 따라한 것은 아닐까 얼마나 씁쓸했던지.)
유일하게, 짙은 눈썹에 반듯한 이마, 늘 꼿꼿한 걸음으로 활기차 보이던 마리에게만은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던 연우를 보면 감정컨트롤에선 마이너가 아닌 메이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연우가 그다지 야속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마리가 너무 완벽해보였기 때문일까. 마리는 오빠를 걱정하는 엄마의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연우의 한마디로 머리스타일도 바꾸고 노래방에서 채영에게 고백하는 연우 때문에 음주사건의 당사자가 되지만 채영과 소원해진 연우에게 먼저 다가가라는 멋진 충고도 할 줄 아는 어찌 보면 가장 소년답지 않은 인물이었다. 마리의 특집 기사 제목은 ’I-My, Me, Mine’인 온통 나였는데 스스로 이미 공정하고 정의로운 범생이로서 어른과 친구들에게 인정받는 마리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상대와 세상을 이해하는 소년이었기에 일찌감치 소년을 잃어버린 아이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빠가 사고를 당해도 여전히 엄마를 챙기고 아빠를 위로할 소년 아닌 소년으로 등장했기에 우리로부터 큰 위로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안하다는 생각, 그것이 나머지 아쉬움으로 남았다. 무엇이 마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마리를 위로해주지? 혹시 마리처럼 소년을 보내고 있는 소년이 있다면 그건 분명, 어른인척 하는 대다수의 소년들 그들 때문은 아닐까.
#6. 축제는 끝이 나고 슬픔은 간직하고
빨강과 노랑과 파랑, 어지러운 원색의 스프레이 페인트 자국일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울려퍼지는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저건 어쩌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리고 나의 노래.
또 하나 작가는 소년의 성장 촉진제로 축제라는 유도분만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축제의 양상은 연우의 내부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축적인 변화와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얻어지는 타의적인 깨달음의 형태로 나타났다. 연우는 태수의 불참에도 혼자서 하프 마라톤에 참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마라톤을 완주해 내면서 ’나라고 하는 존재, 나라고 하는 전 우주를 오롯이 혼자 짊어진 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 몸속의 미지, 자신 속으로 들어가 고통과 맞붙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계라는 점에서 소년이 맛보는 자신만의 최고의 축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달리기로만 세상을 통과한 것이니 말이다. 허나 실제 규모적이고 외향적인 학교축제에서는 엄마가 발표자로 참석한다해도 참여하지 않고 태수와 함께 자신들만의 화려한 불꽃놀이를 벌이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의 축제방식을 따르게 된다. 육교아래 공공의 벽에 원색의 스프레이 페인트를 마음껏 분사해 자신만의 날개를 그리며 처음 느껴보는 전율과 충만한 행복은 메이저 축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거울 속에서만 날아가던 상상의 날개가 뛰쳐나와 현실의 두터운 벽에 그려짐으로써 명확하게 자신을 증명하고 상징하는 하나의 인증식의 장면으로까지 이해되었다. 이 장면은 연우로선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작가는 연우의 그리핀, 채영의 백조에 이어 그 연장선상에서 서사에 극적인 심미성을 부여함으로써 행여 비행이나 일탈, 범죄행위로 그려지지 않았던 명장면이기도 했다. 그리곤 실제 메이저의 축제는 신민아씨와 마리, 재욱형으로부터 소식만 전해 듣는 당당하고 편한 길을 선택한다. 시스템안에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선택한 라이프 스타일이었고 마이너의 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한 소년의 추억이었다. 마라톤이 자신만의 내면의 축제였고 그래피티가 바깥 세계의 축제에 반항한 마이너로서의 축제였다면, 이들 행사의 마지막 뒷풀이는 더욱 중요해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연우는 재욱형의 고향 바다로 가족이 화해여행을 떠난 곳에서 채영이 건네준 소설, ’바다 오르간과 백조들의 섬’을 읽고는 모든 오해를 풀게 되지만 가장 기뻐야 할 그 순간 날아든 뜻밖의 비보를 듣고 축제의 막이 내렸음을 깨닫게 된다. 태수의 반성문은 유언이 되어 채영의 소설은 만가(輓歌)가 되어 연우와 상처를 분담했고 그들은 태수와의 소년시대를 향한 헌정식을 치루어 낸다. 축제는 끝이 났고 소년은 죽어야 했기에.
축제의 폐막을 알리는 종소리가 고요했기 때문일까. 이 소설에서 가장 충격적이어야 할 태수의 죽음은 이상하게도 가장 납득할만 했다. 그렇기에 어떤 모르는 사람의 소식처럼 멀게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쩐지 아주 성인이 되고 난 후에 간신히 기억하는, 그러나 지금은 씩씩해진 이후라 그저 회상할 수 있는 누구나의 상처쯤으로 생각되었다. 나만의 상처가 아니라는 생각이 슬픔의 연대를 이루어내면서 오히려 서로간의 위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 우리가 성장하기위해 시련으로써 필수적인 상처재 였다고 말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위태위태하던 행보를 보이던 태수의 죽음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으며 비록 태수에겐 잔인한 결과였지만 모두의 성장을 위해 소설에서 묻혀지는 아니 우리 가슴에 묻어야 할 이야기라 생각된, 그러므로 작가가 짊어지는 스스로의 희생은 아니었을지. 슬프지만 소년시절에 이겨내지 못한 단 한번의 충동과 잘못된 판단으로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사례 중 하나로 여기라고 그래서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고 담담히 말하는 작가의 눈물이 태수의 이집트 십자가의 문신처럼 푸르게 새겨지던 죽음이었다. 笑年이 되지 못하고 끝내 消年이 되어버린 상처 역시 우리네 少年의 훈장이 아니겠는가.
#7. 영원히 동행하네 나란히 걸어가자
소수는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진다.
그건 결국 1과 평행선을 그으며 영원히 동행한다는 뜻이 아닐까.
1에 의해서만 자기를 나눌 수 있고
1에게만 같이 가도록 허락해주는 것이다.
문득 연우의 방에서 보이던 두 개의 길이 떠오른다. 메타세쿼이아 나무의 바깥쪽 길은 보통의 등교 풍경이지만 안쪽 길은 담배를 피우고 규범을 거부한 등굣길이었다. 연우와 채영은 스스로 나무 바깥 길의 포장도로가 아닌 안쪽의 흙길을 택하였다. 하지만 포장도로가 흙길보다 더 편하고 멋지고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처음엔 담장처럼 나무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진 두 갈래 길은 시스템속을 거니는 사람과 그 바깥을 걷는 사람들로 나뉘어 지는 우리 사회 이분법의 잣대를 표상한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하나는 직선, 하나는 곡선이라는 재욱형의 시선과 소수는 1과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므로 1과 평행선을 그으면서 영원히 동행한다는 연우의 색다른 시각을 보면서 갸우뚱했다. 나는 내안에 들어있을 모든 두 가지 양상에 이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창시절 어느 한쪽을 거부하며 늘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나의 성향과 겉모습은 여성이지만 남성적 사고방식과 업무체계를 강요하던 내 사회생활과 누구보다도 시스템안에서 보호받으며 살아왔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 바깥으로 밀려난 지금의 마이너 시절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처음에 연우의 두 갈래 길은 은연중에 내게 묻고 있었다.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갈 것이냐고. 아니 어느 쪽으로 걸어왔느냐고.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냐고. 그 선택이 행복을 가져다 주었냐고. 매번 멈칫거리다 결국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한방향을 향해 같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서 소위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성인들은 대체로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이었지만 시스템안에 안착한 사람들은 메이저 리거의 시선으로 자신들과 그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였다. 동성연애자이면서 퍼즐카페의 주인아저씨는 마이너측의 대표격이었지만 아이들의 성향과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손님 이상의 배려를 베푸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오는 날 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을 따라가 우산을 빌려주고 온다. 상처와 패배를 위로하는 마이너였다. 하지만 메이저측의 전형적인 규칙맘 마리의 엄마는 마리의 음주사건 후 연우의 집에서 연우의 신발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시비가 붙었음을 신민아씨에게 굳이 부연함으로써 자신들과 경계를 분명히 하고자 했다. 대개 시비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메이저의 태도였다. 메이저 측의 훌륭한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채영의 부모역시 한번 잡은 중산층의 기득권을 대물림하려는 우리사회 전형적인 잘난 학부모들이다. 채영의 아빠는 은행지점장 답게 형식적인 대화와 식사시간, 여행의 횟수가 가족행복의 척도라 생각하며 엄마는 의사인 자신의 바람대로 딸의 거부의사와 상관없이 영재스쿨을 강요한다. 그 결과 주어진 틀안에 끼워 맞추어야 하는 채영의 외형은 헐렁한 교복과 마른 종아리, 뜯겨진 손톱, 덮어쓰는 후드티, 담담한 목소리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언뜻 보기엔 메이저측의 시스템은 결속력이 강하여 쉽게 비집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고 되려 메이저는 위선과 이기심속에서 불행한 것이며 마이너야 말로 진솔하고 따스한 길이라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이분법의 논리, 판단법의 관행이야말로 메이저식의 매너리즘이라 주장하는 듯하다. 이미 어른이된 재욱형과 신민아씨의 경우 더 조직적이고 대우가 좋은 직업세계를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음악평론가와 칼럼니스트라는 전문영역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외모는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꽤 세련된 트렌드 세터로 등장하고 있다. 비록 글로 다루는 소재는 힙합이나 옷과 같은 비주류의 테마일지 몰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만큼은 상, 중, 하의 단계를 부여할 수 없는 메이저급의 파워를 지닌 대중지향적 확산경로를 따르고 있다. 신민아씨는 연우에게 담배는 피우되 니코틴은 적은 걸로, 야동은 보되 사후 삭제할 것을 말하는 센스를 발휘하지만 그러한 마이너의 세계로 진입하려 한다면 그 선택에의 책임역시 감수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도 메이저의 논리를 부정만 하는 기성세대로 이해되진 않았다. 메이저는 아니지만 마이너로서 더 세심함이 요구되는 분야의 풍부한 감수성을 자신의 무기로 개발했다고나 할까. 양측의 장단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 이들 성인의 생각과 대사들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비청소년에게도 상당부분 어필하는 정서였는데, 이는 공감대를 은유적으로 확장하는 작가의 내공이자 우리 세대가 만족할만한 융통성이라는 결론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우의 두 갈래 길은 어둠속을 서로 등진 채로 걸어가는 적대적 반감의 길이 아니고 위에서 훤히 내려다 보이는 조화로운 하모니의 동행, 그로인한 공감의 길로 생각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 길은 같은 노래지만 한명은 힙합을 한명은 발라드를 부르는 친구들이 걸어가는 길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엄마지만 홀로 아들을 키우며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신민아씨와 자신이 읽은 책만을 다시 골라주는 마리 엄마가 병행하는 길 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책이지만 도박 묵시록 카이지에 심취한 태수와 이제 막 카프카를 읽기 시작한 연우가 동행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글이지만 백조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채영과 특집기사를 기획하던 마리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조직이지만 아버지와 힙합을 듣겠다는 재욱형과 아버지로서 역할만은 충실히 하겠다는 채영아빠가 걸어가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성년이 된 나와 소년이었던 내가 함께 가는 길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성으로 외모를 꾸미는 나와 남성으로 글을 쓰는 내가 동행하는 길, 그 길이 메이저이든 마이너이든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내 스스로 만족을 느낀다면 남들에게 당당하다면 그것은 포장도로이든 흙길이든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향기만큼은 어느 쪽이든 공평할 것이기 때문이다.
#8. 새봄이 오면 다시 또 행복이
새로운 나다움을 내가 만들어 가는 거겠지.
매일 모습이 변해가는 달과 매일 새로 떠올랐다가
지는 해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잖아.
움직임 속에 삶이 있어.
내가 매순간 새롭게 써나가는 노래가사들처럼.
이 책을 읽고 몸으로 내가 실천한 것들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거울을 본 것, 또 하나는 힙합을 들어 본 것. 변한 것이 있다면 아주 오래전 그토록 매순간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 거울을 본 소년이었다면 지금은 그러한 나를 확인하고 싶지 않아 거울을 보지 않는 중년이 되버린 것. 내 자신을 꾸미는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지금 내가 어떠한 모습인지 제대로 확인한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다. 언제부턴가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일도 없어졌으며 나 또한 렌즈에 포착되기를 격심히 거부해왔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이 심리엔 노화되는 스스로를 부러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제 남들이 어떻게 보든 크게 상관않는다는 배짱(?)도 들어있음이다. 굳어질 대로 굳어진 인상과 성격에 구태여 변화를 추구하고 싶지 않다는 의욕상실도 함께였다. 그러니 대단한 사건이 아니면 충격도 받지 않고 감동도 느끼지 않는 무심, 무정, 무감의 원인인 것이다. 거울을 안본다는 것이 말이다. 소년을 잃어버린 다는 건, 이렇게 자기 생에 무책임한 일임을 이 책을 통해 통감하는 바이다.
또 힙합도 마찬가지. 노출빈도가 높은 MC몽이나 쌈디, 리쌍정도나 되어야 저들이 힙합을 하는 구나 겨우 연결지을뿐 가사도 안들리고 들어봐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우리 시절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처럼 시적인 가사가 아니면 노랫말도 뭣도 아니라 생각했던 나였다.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서도 장르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내 세대 대부분이 요즘 아이돌 그룹의 가요가 노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성 싶은데, 이 사실이 어디로 숨고 싶을 만큼 미칠 것만 같은 이유가 바로 <소년을 위로해줘>를 만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욱 울컥해진다. 그렇게 되고 싶었던 어른이었고 마흔이 되면 진정한 성인이 되는 줄로 알았다. 사랑은 서른살까지만 하는 일로 생각했다. 어느 정도 돈도 있고 매너는 물론이요 나이에 어울리는 학식과 교양, 그에 걸맞는 지인들과 서로 교감가능한 대화가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 믿었다. 나이가 들면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아직도 그렇게 믿으면서 나는 나이들어 버렸다. 그동안엔 ’그때 까지만’이라는 시간이 있었지만 이제 그 제한시간을 다 써버리고 난 나는 과연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었을까, 생각하니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거울을 보는 일은 공포에 가까워 결단이 필요한 행위이리라. 어떤 면에서 소년보다 더한 유년의 습관과 무책임을 여지껏 숨기고 살아온 내 모습, 나이만 먹었지 이 사실을 들킬까봐 어른스러운 척, 인격높은 척, 공부한 척, 선배인 척 해온 내 소년이 오늘 보기좋게 울고 있지 말이다. 그 소년에게 슬그머니 말해볼까. 다시 성장하면 된다고 지금부터라도 늦은 건 아니라고 자라는 건 소년이후에도 얼마든지 계속되어야 한다고, 내 중년이 내 소년에게 염치없게도 말이지. 울면서 이 책을 가슴에 안아본다.
이번엔 봄이 기다려지는 책이었다. 아직 봄을 기다려도 되는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다가오는 봄을 우주삼아 날개 없이도 바람을 내달리고 소리질러 노래하고 싶었다. 소년은 갔지만 봄은 다시 오지 않는가. 그것도 매번 새봄인 채로 말이다. 기다리지 않는 자는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는 법. 맞이해야 할 봄이 없다는 건 소년을 버리는 일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봄을 맞이하려면 반드시 함께 되살아나는 소년의 순수. 이번엔 꼭 아픈 겨울 뒤에 비로소 찾아드는 새봄이어야 할 것이다. 작가는 그 봄을 기다리는 힘으로 지금 아픔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토닥여 주었다. 누구나 결심을 하고 자신만의 신년계획을 세우는 요즘 나는 예전처럼 어떠한 결심도 하지 못한 채 불쑥 닥쳐온 새해를 보내고 있었다.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시작도 필요없으니 그보다 안전한 계획이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영원히 정지된 시간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책을 덮으며 결심도 다짐도 더 어른이 되고자함의 의무성 일환이었음을 깨우친다. 이번 봄엔 너무 많은 결심을 하지 않으련다. 실천을 위한 다짐도 줄이련다. 그냥, 이만큼 소년인채로 기다려 볼 테다.
3년 뒤 공연장을 찾은 연우가 3년 전 자신의 꿈과 우주야 말로 가장 소중했던 자신의 소년이었음을 깨닫듯이. 아주 오래전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마당에 나가 미소짓던 그 얼굴이, 고사리 같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아카시아 이파리도 내 소년이었음을 깨닫는다. 그 소년은 누구보다 아름다웠고 나는 나다웠을 것이다. 시간은 흘렀고 다행히 내가 소년이었던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 얼마나 고마운가. 여전히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건 아마도 내가 소년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 한명의 소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혹시 내가 가끔 소년을 잊고 나다움을 잃어버린다 한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괜찮다 하는 소년이 나를 위로해 주었던 폭설의 어느 겨울날이 사무치게 그리울지 모르겠다. 그 소중한 그리움만으로도 나는 다시 소년일 것이기에. 다시 소년인 나는 곧 행복해 질 것이기에. 내 생애 눈부신 첫눈처럼, 곧 다가올 나만의 새봄만큼.
<덧붙임>
이미지는 노후에 달표면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는
몽환과 동심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본의 일러스트 작가 J.Kagaya 의 작품들입니다.
첫눈이 쌓인만큼 겨울을 보낸만큼
소풍을 다녀오듯 소년을 찾아가듯
달리고 노래하네 몸과 마음으로
날개를 펴고 꿈속을 날아가리
별을 보며 약속하자 또 다른 나와 함께
축제는 끝이 나고 슬픔은 간직하고
영원히 동행하네 나란히 걸어가자
새봄이 오면 다시 또 행복이
- 신춘연가新春戀歌, 소년시대 -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그러모았더니 가사가 되네요.
한 때 소년이었고 지금 소년이며 앞으로 소년일 세상의 모든 소년들에게
<신춘연가新春戀歌>를 바칩니다.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소년들이 결성해 만든 소년시대가
불러본다면 어떨까요.
소녀시대는 가고 소년시대가 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