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Question Business ................................................................................. 비즈니스, 물어보다

이 소설을 정초에 읽었다. 나는 친척과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비즈니스에 관한 인터뷰를 한 것이다. 비즈니스하면 떠오르는 것을 말하시오, 에 그들은 답했다. 내 세대들은 로비, 영업, 계약, 거래, 협상, 지분등을 언급했고 청춘들은 호텔, 정장, 서류라고 말했다. 아줌마들 중엔 룸살롱이라 답한 사람도 있었다. 아주 어르신들은 비즈니스맨이라 하면 곧 브로커나 사기꾼과 동일하다고도 하셨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건 원래 뜻인 사업(事業)을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 내 주변 인물들이 표본샘플로서 일반성을 획득할 순 없을지 몰라도 가까운 사람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의외로 흥미로운 대화시간을 가졌다. 그러다가 우리는 비즈니스가 성性을 구분해 비즈니스맨과 비즈니스 우먼으로 나뉠 때는 또 그 의미가 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비즈니스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 직업으로 남성은 무역, 여성은 자동차 세일즈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요업무로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고객을 설득하고 계약을 성사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끼리 웃고 말 이야기였지만 나는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졌다. 남자는 교환을 하고 여자는 판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비즈니스 행위의 목적에 해당되는 소정의 결과, 즉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행해지는 부도덕한 방법(금품및 뇌물, 접대등)이 사회전체에 만연되면서 비즈니스라는 단어는 자연스레 부정적인 뉘앙스를 획득했다는 점에 있었다. 또 하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야"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 "It's not my business"라는 보다 시크한 생활영어를 농담반 진담반 배운대로 활용해왔다. 여기서 비즈니스는 사업이 아닌 책임이나 소관을 뜻하는 바이지만 이것은 사적인 나의 일이니 별로 알리고 싶지 않다, 혹은 알려고 하지 말라는 복선의 의미가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가 봐도 무역이나 세일즈를 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비즈니스 때문에', '비즈니스가 있어서'하고 말한다면 우린 그다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 뒤에서 은밀히 수행할 것이라는 상상은 곧 의심의 영역이었기에.

앞선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비즈니스라는 단어에 대한 고착화된 이미지와 그것을 실제 사용하는 사회, 일상에서의 습관적 행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여간해선 반전이나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언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해당사회의 발전과 그 생명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90년대 후반 벤쳐붐이 일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마케팅 용어가 모든 제안서를 장식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를 넘어오면서 그러한 다양한 비즈니스를 통해 우리사회는 초고속 통신을 기반으로 한 IT정보강국을 이룩했고 비즈니스 이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할 것은 너무나 무궁무진했다. 중요한 건 비즈니스 자체보다는 제품의 디자인이 가지는 유틸리티, 소프트웨어의 어플리케이션,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더 부각된 것이다. 그러니 2000년대 중반을 넘어오면서 비즈니스란 단어는 더 이상 창의성을 창출하지 못하고 사양화되는 추세를 맞이했고 오히려 추상적인 영역으로 고전화되거나 은어나 속어로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바로 비즈니스라는 단어의 자의적인 특수성이 문학적으로 거래된 소설이다. 아이디어는 컴퓨터로 구상하고 프로젝트는 테이블에서 회의하고 프리젠테이션은 영상으로 발표하지만 비즈니스는 밀실에서 거래할 것같은 우리들간 암묵적 동의는 이제 더 이상 저 높은 빌딩안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즈니스가 지체 높으신 분들의 자부동에서 샐러리맨의 책상을 거쳐 우리들 밥상머리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는 역으로 비즈니스(business)라는 공적인 개념의 단어가 개인의 비밀을 암시하는 秘즈니스가 되기까지 우리사회는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왔는지 생각해보자는 뜻으로 전해졌다. 적잖이 당황했다. 『은교』에서 쓸쓸히 죽어가던 한 시인이 보여준 존재론적 고민의 절정을 맛본 까닭인지 철저히 현장밑바닥으로 침투하신 이 르포형 세태소설이 나는, 급작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환골탈태로 자신을 깨부순 자의 냉철하고도 의로운 시선이었을까. 골방에서『은교』를 탈고한 후 욕망의 정점에 서있던 자기애를 처절하게 문학으로 말살하였기 때문에 작가는 다시 시장바닥으로 뛰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담, 그는 돌아온 것이었다.

2. Come back Business .........................................................................비즈니스, 돌아오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나는 꼭 이십년 전인 내가 피도 마르지 않은 청춘일 때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미 세간에 이름을 떨친 대중소설가였지만 그가 빚어낸 비극의 이야기는 내 청춘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주인공들은 모두 근대화, 도시화의 희생양이었으며 아무리 살아보려 발버둥쳐도 도시는 그들을 차갑게 외면했다. 거리는 절망과 패배로 얼룩진 황량한 황야일 뿐이었다. 야망도 성공하지 못하고 사랑도 이루지 못하고 죽어버린 청춘은 도시에서 철저히 재배된 스무살 아가씨가 끄덕이고 눈물짓기엔 너무나 화가 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래서, 날더러 어떡하란 말인가 정도가 내 결론이었다. 앞으로 도시에서 일과 사랑을 시작하고 뿌리 내려야 하는 내게 비극은 잔인했다.

하지만 삶의 밑바닥에서도 그들 청춘이 죽기직전까지 주고받던 사랑의 서사시는 참 오래도 기억에 남았다. 이 기시감은 박범신 소설에서 남녀가 사랑을 한다하면 끈적한 관능도 시적감성으로 격상되는 매력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다. 가령, 『풀잎처럼 눕다』에서 도엽으로 인해 자신의 성감대가 뜻밖에도 무릎인지 난생처음 알게 되는 은지는 어느날 층계를 올라가다 접질린 발목의 옴씬 들어간 부분을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주던 老시인 이적요로부터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첫발을 들여놓는 『은교』와 꼭 일치했다. 그것은 마치 문학으로, 글만으로 온몸의 피가 허리를 타고 머리까지 감전되는 소스라친 전율의 경험이라 할 수 있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그의 문학으로 일종의 성인식을 치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박범신은 내 문학의 관능적 감성을 새롭게 발견해준 소설의 콜럼버스라해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적어도 이적요가 은교의 손을 사랑했듯이 하얀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만년필을 집어든 작가의 관능적인 손가락만큼은 언제나 그리워했다, 고 말할 수 있으니 말이다. 첫정이 무섭다고 결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 시절 풋풋하던 문학의 처녀성을 일깨운 작가의 대중소설과 다시 재회한 느낌이 늘었다. 그는 원래 이런 소설을 아주 잘 쓰고 그래서 사람들을 울리던 작가였다. 뭐랄까. 『비즈니스』는 지난 이십년간 풀잎처럼 누워버린 내 문학적 감수성이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슬며시 일어나서 다시 부활하는 기분이었달까. 뉴스였다. 작가도 나도, 무언가 다시 태어난 이 느낌, 되려 신선했다.

그런데 모처럼 환기된 감수성만큼이나 소설도 감미롭지는 않았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흡사 이십년 전의 은지와 도엽이 그럭저럭 살아와 지금의 불혹을 맞은 것처럼 보였다. 아직도 거짓말 같은 내 나이처럼 말이다. 이들은 모두 두어 번의 연애와 결혼을 통해 자식을 얻고 남들처럼 일하고 돈을 벌어 서울강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디 근교에 서른 두 평 아파트정도는 소유하고 아이들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제 밥벌이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야말로 평범한 꿈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마치 내속을 들여다보는 것같아 얼굴이 달아오르는 꿈이지 말이다. 그런데 서울에 삼십년을 살고 마흔을 넘기고 보니 이 평범해 보이는 꿈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렇게 변함없이 평범하게 살아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달성고지가 너무나 먼 그들만의 이야기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이제 그다지 슬프지가 않다. 우리가 불감해진 탓일까 싶다가도 아무리 생각해도 고개가 흔들린다. 불감증에 자청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변명하련다. 내가 슬픈 건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이제는 그 옛날처럼 화가 나고 슬프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그것이 은지와 도엽 이후 살아온 내 이력이자 현주소요 일상이었다. 불감에 통감하는 나를 향해 작가는 이 불감증을 앞으로도 계속 자극하겠노라 선언한다. 좀 유치해보일 지라도 직접적으로 삿대질 하시겠다 한다. 나는 정말이지, 많이많이 우울했다. 은지와 도엽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치더라도 결국 이 책의 '칼라'와 '옐로'밖에 더 되었겠나 싶었기 때문에.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에 꿈을 두긴 마찬가지였고 그렇기에 이루지 못한 것도 똑같았기에. 도시는 더 거대해졌고 더 발전했지만 나는 더 작아졌고 더 차가워졌기에. 오히려 그땐 그래도 애절한 사랑만이라도 간직할 수 있었지만 오늘 남겨진 그들의 사랑엔 휑하니 뼈가 다 시려운 것이기에.

3. Naming Business ....................................................................................비즈니스, 이름하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곳은 흡사 새만금을 연상시키는 서해안의 도시로서 수십㎞의 방조제 공사로 매립지가 조성된 ㅁ시이다. 개발의 수혜로 공항이 들어서고 테마파크가 조성되는 광경은 자고나면 발표되는 신도시 계획안의 요약판쯤으로 여겨졌고 만灣의 안쪽에 자리잡았으니 ㅁ시가 마땅해보였다. 하지만 첫인상은 네모난 구멍이 난 공허한 사각형쯤 되보였다. ㅁ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며 그사이엔 이름조차 황폐한 황강(荒江)이 흐르고 있다. 개발논리에 따라 공업지구가 들어서고 인구가 유입되자 자연스레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구획이 나누어 지는 것은 이제 병적인 신도시개발의 후유증으로 만성감기처럼 앓아오던 지병의 하나쯤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구시가지의 다세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신시가지의 주상복합에 사는 젊은 애기엄마 집에 파출부로 출근하는 광경은 어찌보면 진부하기까지 하다. 실제로 내가 얼마 전까지 살았던 동네에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십년 이상된 아파트와 새로 지어진 주상복합주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가시화되기도 했다. 학부모들 사이에선 옛날 아파트 엄마들은 몸으로 때우는 청소를 하고 주상복합 엄마들은 돈으로 때운다는 불문율이 팽배했었고 아침 출근 시간엔 주상복합측의 경비원들이 일찍 나와 교묘하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나온 차량을 먼저 큰 도로에 진입하도록 교통정리를 하기도 했다. 일분이 아까운 아침시간에 고급의 외제차들은 떡하니 하나의 전용차선을 미리 확보해놓는 것과 같았다. 그뿐인가. 아파트 평수에 따라 배달하는 피자의 브랜드도 달라진다. 22평에서 먹는 피자와 55평에서 먹는 피자 한판의 가격은 약 이만원이 차이가 난다. 그것은 1500cc 준준형 세단과 2000cc이상의 중형세단에 투입되는 휘발유의 양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11번가의 만원 짜리 청바지를 입을 것이냐 백화점에서 십만원 이상의 리바이스를 고를 것이냐 명품브랜드의 디젤을 택할 것이냐의 차이와 같은 사안인 것이다. 고로 모든 것은 돈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린 그 문제에 가장 민감하면서도 가장 둔감한 사람들이 되어왔다. 잘 훈련된 둔감을 미덕삼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이십년 전 보다 돈은 더 많아졌는데도 왜 가난한 사람은 더 많아진 느낌일까.

우리 사회가 어느덧 빈부의 격차나 자본의 편중, 그로인한 신분의 파생, 교육의 편차, 다시 대물림되는 현상들에 체념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저마다 생존전략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거나 충격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9시뉴스에 소개될만한 선정성과 사회적 이슈를 가지고 있다 해도 놀랄만한 기사가 되지는 않아 보인다. 실은 놀라지 않고 있는 그 사실이 너무도 슬펐는데 말이다. 드라마틱한 상투성이 더 이상 소설로서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 우리 현실이야 말로 이보다 더한 엄마도 많고 그보다 더한 도둑도 많은 듯했다. 읽는 내내 너무 평범해서 그들은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우리보다 더 불행한 것도 아니고 그저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무겁도록 의식을 지배했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천천히 조금씩 스며들던 빗방울에 온몸이 젖어 버린 것일까, 책을 덮고 나는 눈이 많이 쌓인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연말부터 불어 닥친 한파와 폭설의 무게가 더욱 갑갑하게 느껴지던 독서였다. 이 책은 통속의 서사로 우리를 저 쌓인 눈밭에 내동댕이 치고마는 매정한 구석이 있었다. 어쩔 것인가. 누군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던가. 나는 눈밭에 구르고 돌아온 심정으로 다시 마음을 잡아야 했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비즈니스를 한다. 시장은 신시가지 조성을 위해 여자는 아들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남자는 부잣집을 털기 위해 여자의 친구는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각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분야에서 그만큼의 능력으로 비즈니스를 수행해간다. 그런데 가만보면 남자는 자신의 요구조건과 보상을 교환하고자 하고 여자는 자신의 미모나 육체를 팔아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즈니스를 사업이라 보았을 때 비즈니스는 이와같이 경제행위를 전제로 하며 비즈니스의 주체에는 갑과 을의 관계가 발생한다. 갑과 을은 서로 대등할 수도 종속적일 수도 경쟁적일 수도 있다. 어떻든 갑이 이익을 제공하면 을은 그 댓가를 지불하는 거래관계가 비즈니스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제행위에 중요한 것은 사업자의 능력인 것이지 공익성이나 도덕 및 윤리성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그것은 곧 자본주의의 속성에 해당하기에 비즈니스는 태생자체가 윤리의 의무가 없는 공익에 자유로운 행위일 수 밖에 없는 활동인 것이다. 그러니 빌딩내부 전략용어였던 비즈니스가 타락한 삶의 현장용어로 추락해 보이는 현상은 어쩌면 예정된 사회문제가 비로소 가시화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작가는 비즈니스를 사회에 건설적인 행위로서 복제되는 모델이 아니라 질병처럼 퍼져나가는 바이러스와도 같다고 말한다. 이는 사업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더욱 많은 비즈니스가 등장하면 그만큼 바이러스가 퍼져가는 영역이 넓어지고 변종이나 악성바이러스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말씀이다.

작가는 대형 프로젝트의 수주에 앞서 해당 심사위원에게 뇌물을 건네고 입찰후 리베이트를 관행처럼 지켜온 우리사회 윗선의 비즈니스가 남편의 한달 월급으로는 도저히 사교육비를 마련할 수 없는 중학생 엄마가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마련하는 아랫목 비즈니스와 무엇이 다른가 질문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의 화자는 ㅁ시의 시장 때문에 너나없이 자신을 '비즈니스맨'이라고 부르는 게 대유행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제는 모두들 철저하게 그 비즈니스의 속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이행하는 인물들이 된 것이 동일할 뿐 오가는 금액과 가시화된 성과에서 비즈니스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지 않을까. 양심을 더럽히건 육체를 더럽히건 얻어지는 이득을 위해 수행되는 제반과정을 비즈니스라 통칭한다면, 이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내야 할 것이 오히려 비즈니스가 아닌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해서 등장인물의 이름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비즈니스 전략으로 브랜드화된 느낌이 들었다. 화자이면서 지혜롭지 못했던 정우의 엄마는 그중에 가장 인위적인 이름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비즈니스를 수행하러 고객을 만나러 갈 때엔 흰 칼라 한송이를 들고 나타나며 꽃과 같은 순결한 닉네임 '칼라(calla)'를 사용했다. 하지만 보통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녀를 찾던 고객들이 주로 하이 '칼라(collar)'의 남성들이었기에 이름지어지는 종속적 개념에 불과하기도 했다. 이는 순결처럼 다른 개인의 정체성이 크게 의미없는, 즉 자신의 '칼라(color)'가 생성될 수 없는 무개성, 무색, 무빛깔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비즈니스 전략은 '자신을 없애는 것'이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칼라'엔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떤 '칼라'도 없는 것이다. 이 정체성이 반영된 그녀의 비즈니스는 그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 로서 非즈니스가 아니었을까. 공허한 그녀의 닉네임이 유난히도 남의 이름처럼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화자의 친구인 주리는 언뜻보기에 여성스럽고 다정해 보이는 뉘앙스이긴 했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도 양면적인 의미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생때 부터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으로 미모와 재능을 십분 이용해 스폰서를 심사하고 평가하는 '주리(jury)'로서 철저하게 이득이 생기는 쪽으로만 움직이던 '주리(走利)'였다. 그러나 그 결과 자신이 행해온 비즈니스와 똑같은 방법으로 파멸하는 가여운 영혼으로 '주리'를 트는 형벌과도 같은 죄값을 치루게 된다. 비즈니스감각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던 그녀는 사회의 '주리(jury)'로부터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점에서 누구보다도 서늘해지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마음껏 소비하는 費즈니스의 전문가였지만 자신처럼 미래를 준비하는 더 감각적인 備즈니스 전문가를 이길 수는 없었나 보다.

작품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남자, '타잔'의 경우는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네이밍이었다. 비즈니스 전략과 활동, 사후 추진방향(?)과도 적절하게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타잔'에게는 강력계 형사 출신의 정준하라는 실명이 있었지만 부자들이 숨겨놓은 잉여재산으로서의 '타잔(他盞, 남긴돈)'을 훔치는 사람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그의 최후는 '타잔(Tarzan)'처럼 길게 늘어진 넝쿨식물의 끝을 잡고 외롭게 황해바다를 넘어가는 뒷모습이었지만 그가 주로 고위층이 뇌물로 받은 금품과 보석을 훔쳐왔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숨겨둔 비즈니스 모델이 되기도 했다. 짝퉁의 타잔들은 타잔의 용맹을 그리워하고 타잔의 범죄에 대리만족하는 '타잔(垛䝳, 탐내고 쌓다)'의 심리상태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의 얼굴과 신분을 드러낼 땐 '옐로'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며 노랑색 넥타이를 하고 나타났다. 노랑색은 동양에선 부와 권력, 수확등을 상징하나 서양에선 질투나 원한을 상징하는 이중적 의미의 색이다. 그는 아내를 잃고 직업에 낙오된 신분으로서 사회에 원한을 가지기도 했지만 욕망의 궁극엔 다시 돈을 벌고 바다를 살리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바다오염으로 희생된 게 한 마리를 보고도 눈물지으며 다른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고는 절정의 순간에 아내를 부르던 순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계를 이어주는 횟칼로 사람을 위협해 협박도 할 줄 아는 적개심을 동시에 가진 인물이었다. 사랑을 원하고 바라면서도 원망하고 증오하던 '옐로'가 속마음이었다면 부자들의 남은 돈을 훔쳤지만 자신의 남은 행복은 끝내 지키지 못한 '타잔'은 겉모습의 브랜드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대도로서 하늘로 비상하는 飛즈니스를 꿈꾸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구보다 슬픈 悲즈니스맨이 되고 말았다.

그 외 비즈니스와 큰 상관이 없었던 화자의 남편 이름은 민첩할 '민', 길 '영'의 서민영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민첩한 길을 가는 지혜로운 인물이 아닌 서민(庶民)으로서 영원히(永) 남게 될 이름으로 들렸다. 유일하게 싱그러운 이름을 가진 '타잔'의 아들 '여름'이가 이 작품에서 그래도 희망을 암시하는 인물이었다고나 할까. '여름'이는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 꽃이 피기에 입하목이라 불리는 이팝나무에 맺힌 '여름(열매)'이 아니었을까, 해서이다. 이 책에서 이팝나무는 화자가 남편과 사랑의 맹세를 하던 소중한 장소이며 여름이 엄마를 묻은 그리움의 장소로서 화자와 타잔간의 상처의 접점지대, 추억의 공동구역이라 할 수 있다. 화자도 여름이 엄마도 모두 '이팝나무 흰꽃 같은 아내'라 불리우는 정서적 공통점이 있었다. 책의 후반부에선 이미 '여름'이의 모성을 이팝나무에서 잉태했다고 볼 수 있는 화자가 '여름'이가 마음을 '여름(열음)'으로써 지난날의 상처도 자신에겐 '여름(열매)'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인생의 반전을 깨닫는다. 비록 다른 사연의 이팝나무였지만 그로 비롯된 그들의 '여름(夏)'은 훗날 사발에 소복히 얹은 쌀밥처럼 포근해 지리라는 기대를 하게했던 이름이었다.

4. Explain Business .....................................................................................비즈니스, 해명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러한 비즈니스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모든 사람들이 부모가 능력이 없고, 사업이 망하고, 남편의 월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하여 도둑질과 매춘을 비즈니스로 일삼진 않지 않은가. 죽을만큼 힘들다 하여 모두가 진짜 자살을 하는 것은 아니듯 그래도 내일 떠오르는 해를 떠올리며 개미처럼 일하고 매순간 거짓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런 작품을 대할 때만 우리는 윤리선생님이 되고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하게 된 배경으로 한번 실패한 경험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를 꼬집고 있다. 폭력과도 같은 자본주의적 경쟁구조, 그로 대물림되는 빈부의 격차, 그것으로 파생되는 인간성 상실, 타자의 불행에 무감해지는 사회를 향해 상당히 직접적인 논조를 펼치셨다. 최근 조정래 작가의『허수아비춤』에서 시민단체와 불매운동을 통한 경제민주화를 외치던 어느 경제학 교수의 목소리가 슬몃 중첩되는 기분도 들었음이다. 작가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알면서도 나는 솔직히 옥에 티만큼만 아쉬웠던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이번 작품이 전작과 분위기가 상이해 갸우뚱거린 점도 있었지만 사회를 향한 직접적인 어투가 어쩐지 급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작가는 워낙 세태소설로 대중적 인기를 누리던 분인지라 남녀간의 사랑을 엮어내는 서사의 추진력, 파멸로 치닫는 이야기의 속도감에선 여전한 내공을 보여주었지만 독자를 훈계하는 듯한 어조는 사뭇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런 면에서 조금 더 분노하던 조정래 작가의 어조보다는 아예 아주 통속적이고 더 기가 막히고 청승맞은 사연들이 어쩔 수 없게 펼쳐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속절없이 구멍난 매립지구를 채워 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처절함이 제격 아니었을까. 분량면에서 타잔과 화자의 남편, 친구 주리의 과거 사연이 설명식이 아닌 드라마틱한 전개가 동반되었다면 더 감동적이었을 거라는 생각, 물론 마흔이 넘은 옛날 그시절 팬으로서 지극히 주부스러운 발상임을 먼저 밝혀두는 바이다.

우선 화자의 남편은 다리를 저는 무기력한 사십대 중반의 가장이 되어 희미한 골목길에서 나타난 듯 보였다. 그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친 결과로 무릎은 10도가 구부러진 채 영영 펴지지 않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이후에도 끝내 고시를 패스하지 못해 '인권변호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패배자의 길을 걷게 된다. 화자 남편이 한 번의 산재로 무릎이 꺽이는 현실은 한 번의 실패로 다시는 희망을 펼칠 수 없는 우리네 보통 서민의 신세를 표상한다고 느껴졌다. 나는 어느날 밤 화자가 무엇에 홀린 듯 검은 그림자를 쫓아갔던 매립지구에 홀연히 나타나 다리를 절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으로 등장한 남편의 잔영이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그때 화자의 상에 맺힌 피사체로서의 한명의 장애인은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아내조차도 공포스럽고 낯설기만 한 것이다. 알고 보면 그 모습은 실패와 좌절의 그림자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어둠을 표류하는 우리들 자화상에 다름 아닐 것이기에 애써 확인하고 싶지 않은 남편이기도 한 것 아닐까.

무엇보다 타잔의 경우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는 독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강력계 형사생활을 시작했지만 공무원과 유흥업주들 간의 유착된 비리를 눈감아주지 못한 죄로 좌천되는 이력을 얻게 된다. 공적사회에서 소수정의 몰락의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우여곡절 끝에 타잔은 ㅁ시의 매립지에서 '동백횟집'의 사장이 되지만 쓰레기소각장과 해안도로 개발등의 신시가지 개발계획으로 인해 꿈을 사장(死藏)시키는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후 아내의 죽음과 연이은 아들의 자폐는 마치 타잔의 몰락에 예정된 수순처럼 피어나고 그는 넝쿨 하나에 인생을 의지해 부자들의 담벼락을 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처음부터 정의를 외면하고 적당히 양심을 처분했다면 그는 어쩜 횟집사장이 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화자의 경우는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잇단 투신으로 온가족이 사글세 지하방으로 내몰리게 되면서 학업을 중단하게 되는 불우한 가정환경의 대표케이스였다. 비록 기득권층에 탑승하진 못했지만 남편과는 대파와 쪽파시절 소박한 사랑과 꿈이 있었다. 처음부터 과외비를 명목으로 매춘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구청의 요가강사 자리도 비굴이 필요함을 깨달은 시기에 우연히 친구의 논리에 휘말리게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신념으로 자라난 것은 당연 인권변호사의 꿈을 가졌으나 고시를 패스하지 못한 남편의 실패가 버팀목처럼 자리잡고 있었음이다. 이렇듯 지금, 비즈니스를 한다고 말하는 두 사람의 과거 실패에는 최초 자신들의 선택과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선택을 하게한 사회구조와 가정환경이 그들을 비즈니스의 세계로 내몰았거나 이끌었다고 보여진다. 결국 공적인 개념의 비즈니스가 가장 사적인 개념의 비즈니스로 변질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이들이 행한 비즈니스야말로 뿌리깊은 사회적 비즈니스가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들의 선택으로 실패를 자초한 화자의 남편과 화자의 친구는 별도의 사적인 비즈니스를 진행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려졌다. 남편은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아내의 전략을 알고도 있었으면서 눈감아 주었고 친구는 비즈니스 자체가 삶이긴 했지만 결혼 후엔 비즈니스로 경제적 이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남편과 친구는 좋지 못한 환경요인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실패자체가 불합리한 사회구조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가 아닌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는 개인적인 상처를 얻게 되지만 화자와 타잔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 아닐까. 혹시 화자와 타잔의 비즈니스는 어쩌면 가정과 사회로부터 추락한 자신들을 수렁속에서 탈출시키고자 한 전략적 몸부림인 동시에 다시 가정과 사회에 돌려주고자 한 자포자기성 복수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어떠한 충고도 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나 역시 자영업에 크게 손을 댔다 참담한 실패를 겪어 본 입장으로서 이들의 추락이 얼마나 억울하고 뼈아픈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대충대충 열심히 하지 않고 망한 사람들은 또 어떻게든 그 염치없음으로 곧잘 재생의 기회를 얻어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전 재산을 다 바쳐 신앙처럼 사업한 사람들은 좌절을 쉽게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 분노와 배신으로 괴로워하며 차마 타인을 볼 수 없어 자신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경우 보편적인 윤리를 중시하다간 자신들의 생존을 버려야 하는 자본주의의 슬픔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조용히 묻고 있었다. 뼈빠지게 마트에서 일한 돈으로 사교육비를 마련하고 그렇게 해서 특목고에 진학하고 운좋게도 일류대학에 들어간들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뼛속부터 성골인 자식들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그들의 재산을 늘려주는 일에 다시 뼈아프게 봉사해야 하는 우리네 사회뼈대 속에서 그럼 어떻게 무슨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느냐, 말이다.

엄마를 잃고 온종일 방바닥을 두들기던 여름이의 손바닥과 담벼락을 발로 차던 발길질이 못견디게 사무친다. 마치 어린 것이 내 손바닥이라도 되어 애꿎은 가슴을 사정없이 치고 마는 장면이었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이 아닐까. 그래봤자 내 손과 내 발만 다치게 되는 이 억울한 광경이 우리 사는 오늘의 현장임을 비로소 확인한다. 우리네 가족모두 무국적자가 되어 조국이 없는 아이들이 내일도 방바닥을 담벼락을 두드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울분이 차오른다. 이대로 살다가 죽기는 싫다는 하소연을 하고 싶어진다.

돈을 이상의 조국삼지 않고 비즈니스를 삶의 전략으로 세우지 않고 윤리를 잃지 말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물론 답인 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지 말라. 타잔과 화자는 그들이 칼라이고 옐로인 이름을 버린 후엔 오히려 육체관계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윤리성을 지키려고 했다. 비즈니스를 버리자 윤리를 되찾은 것이다.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닌 유일한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화자는 '당신 뜻대로 해'라고만 하는 끄덕없는 남편과 '엄마때메 정말 돌겠다'고 꿈쩍않는 아들과 달리 자신을 조국으로 여기고 마음을 여는 여름이를 변화시켰다는 것에 살맛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비록 친구는 평생 장충동 족발집에서 몸에 밴 어머니의 돼지기름 냄새를 벗어나고자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그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이제 자신은 돼지갈비집에서 온종일 뒤집어쓴 돼지기름 냄새가 언짢은 냄새가 아니라 오히려 향긋하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돼지기름 냄새가 꽃향기로 느껴지는 것이 희망과 사랑의 힘인 것을 우리가 모를 것이라 여기지 말라. 하지만 돼지우리 같은 방구석에서도 이팝나무의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정녕 몰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5. Sympathy Business ..............................................................................비즈니스, 용서하다

이 책을 읽고 살면서 그동안 내가 행해온 비즈니스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가 대학교 2학년일 때 아버지가 쓰러진 후였다. 하필 그때 내가 다니던 디자인 학원의 실장이 비즈니스를 제안해왔다. 학원수업 끝나고 바로 앞 카페에서 점잖으신 분들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알바가 있는데 그분들이 꼭 여대생을 원한다며 월수입은 한 달에 오백이라고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돌이켜보니 딱 이십년 전이다. 한 학기 내 등록금이 백 만원이 조금 넘었으니 엄청난 액수였고 상상하기 어려워 가슴이 쿵쿵 뛰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그때 확인차 카페를 들러 어떤 손님들이 오는 곳이며 여대생들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정장을 입고 화장을 곱게한 아가씨들과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아저씨들이 테이블을 하나 놓고 그야말로 열심히 진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순간, 저정도라면 괜찮치 않을까 하는 꽤 합리적인 설레임이 내게도 찾아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우연히 그녀들의 기가막힌 대화를 엿듣곤 결국 그 학원을 그만두었던 그때 이후로 돈이 아쉬울 때마다 그 제안이 그리워지기도 했다는 사실, 나만이 알고 있는 추억이 되었다. 그때 그녀들은 겉으로는 순결한 한송이의 '칼라'와 다를 바 없었는데 말이다. 나는 친척의 소개로 다른 중소기업의 일자리를 얻어 방학이면 등록금을 벌기위해 온몸을 다 바쳤고 운좋게도 무사히 졸업을 했다. 결국 그 회사에 취직해 근 십년간을 거기서 오를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갔던 것 같다. 사장은 밤샘을 밥먹듯이 하던 내게 대학원 첫학기 등록금을 건네며 공부를 계속하라 했고 그런 나를 질시하는 직원들의 눈총을 견뎌가며 나는 또 석사과정을 진행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나는 여전히 사회가 윤리적으로 용인하는 비즈니스만을 수행하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공부를 마치고 돈을 벌고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나자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때마침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남겨주신 재산과 모든 인력을 동원해 충동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참 이상적인 술집이었고 윤리적인 자영업이었다. 나는 여자를 좌석에 앉히지 않았고 이윤을 부풀리지 않았고 손님에게 비굴하지 않았고 직원을 인간적으로 대했지만 그랬기에, 보기 좋게 망했다. 지난 일 년이 아니 내 인생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드는 건 生의 레일에서 추락한자의 억울함일 게다. 어떻게들 알고 지금의 내게 이러저러한 비즈니스의 유혹이 꼭 이십년 전의 디자인 학원에서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 책의 주인공 격인 화자의 마흔에 꼭 비법을 전수하겠다는 비전(祕傳)의 秘즈니스에 나도 얼마든지 뛰어들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화자처럼 남의 자식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따스한 가슴을 가진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나보다. 내가 믿는 건 그 옛날 앤틱풍의 거실장에 오롯이 놓여진 체코제 크리스탈 컵처럼 소중한 사랑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집었다 던져버릴 수 있는 걸레나 빗자루 같이 질기디 질긴 일상의 힘이었다.

한 해가 바뀌고 무엇이든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싶을 때지만 나는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는 요즘을 살고 있다. 이제보니 'ㅁ시'는 네모난 구멍이 난 '口市'라는 공간이기도 했지만 우리 생에 비전없는 비즈니스로 공백이 생겨버린 구멍난 시간으로서의 '口時'이기도 한 듯하다. 우연찮게 집어든 한권의 책이 내 구멍난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집요하게 되묻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시절 그길로 빠져들지 않은 것을 내심 자랑스러워 하며 막다른 길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우린 그렇게 우묵해진 우리 생의 시간과 공간을 돌이나 흙이 아닌 땀이나 눈물로 매립하며 다시 '메움'의 'ㅁ시'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만이 희망이고 사랑만이 살길이라 그 연대의 힘만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오늘의 슬픔을 달래줄 뿐이라, 당신께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다 해도 다른 희망은 알지 못한다 해도 나는 오늘 무엇인가 되찾아 내고 싶다. 그때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내 자존심으로 다만 말하지 않고 나는 오늘도 등돌린 그의 뒷모습에서 서글프게 굽어진 세월의 등뼈를 바라보겠다. 지난해보다 가늘어진 그의 허벅지와 더 시큰해진 무릎팍에 고개숙이겠다. 막다른 길이라고 나를 저버리는 비즈니스만이 살길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미국 어느 레스토랑에서 全 웨이터가 멕시칸인 것을 보고 저것이 우리의 미래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도 그들은 웃는 얼굴이었고 그 안에서 행복해보였다. 당신이 비즈니스를 수행하건 비즈니스를 택하지 않건 우리는 그와 상관없이도 행복하고 싶다. 성공한 비즈니스맨도 화려한 비즈니스우먼도 행복하지 않다하면 돈과 명예도 권력도 우리에게 자랑할 게재가 아닌 것이다. 이팝나무 푸른 그늘아래 삼겹살에 소주 한잔으로도 더 행복해진 우리야 말로 生의 비즈니스 감각이 탁월한 자본주의 시민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를 빠르게 흡수해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을 향해 이러한 작품을 한중 교류작품으로 꺼내드신 작가의 효율적이고도 감각적인 비즈니스 역량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돈에 종이 되거나 주인이 되지 말고 한발 물러앉은 구경꾼이 되고 싶은 밤이다. 우리 오늘 잠이든 옆지기의 어깨를 살포시 안아주자. 어느 여름날 칼라보다 예쁜 꽃다발 한아름을 건네려 내앞에 나타난 그 장면을 기억하자. 우리에게도 대파와 쪽파쯤의 추억이 왜 없겠는가. 특목고와 외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그것이 살길이라 오늘도 학원을 돌고 온 아이의 잠든 이마에 조용히 입맞춤하자. 우리네 남편들이야 말로 밀림을 해치는 문명인들을 응징하며 밀림의 평화를 지켜낸 자랑스런 가장으로서의 '타잔'일 것이다. 우리네 아이들이야말로 여름만이 아닌 사계절을 앞둔 기다림의 계절에 태어나 온몸으로 희망을 깨워준 '여름'일 것이다. 당신과 나야말로 한맺힌 며느리의 영혼이 쌀밥같은 흰눈으로 환생하듯 피어난 순결의 나무일 것이다. 나는 이제 세상의 주인을 우리로 삼고 삶의 유일한 전략을 행복으로 삼아 일상을 살아가는 아주 변함없는 '칼라'를 가지고 싶다. 우리네 서민의 서글프고 고달픈 그 색깔이야말로 우리를 지켜주는 개성일 것이다. 우리의 '여름'은 그렇게 서로 지친 어깨를 보듬어 주는 작은 마음 하나에서 개화할 것임을, 믿는다. 그렇게 다시 일어날 비즈니스를 바보처럼 기다린다. 그 믿음과 기다림의 힘으로 나는 일상을 견디리라.

아니고도(非) 슬프면서(悲) 고달프고도(憊) 낮으면서(卑) 날아갈듯(飛) 숨기어진(秘)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여, 이제 그만 우릴 용서하시라. 알고 있었지만 행복하고 싶었던 어리석음을 눈감아 주시라. 사는 건 거래가 아닐 테다. 죽는 건 협상이 아닐 테다. 사랑은 계약이 아니고 아이는 지분이 아닌 게다.

'지금 참 좋다'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살자,
우리 이번 생까지만.


댓글(7)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1-09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8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8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09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0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