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개를 숙이다

최근에 친척의 결혼식이 있어 삼성동의 인터콘티넨탈 호텔을 간 적이 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주변에 백화점이 있어 주말엔 늘 차량이 붐비는 곳이었다. 오후가 되어 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달리 차가 빠지지 않자 사람들은 차량밖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호텔입구에서 부터 검은색 외제 승용차 십 여대가 일렬로 장관을 이루며 한 개의 차선을 독점하고 있었고 그 차량을 엄호하고 다른 차량을 막아서는 깔끔한 양복차림의 경호원들이 차량댓수만큼 당당하게 주변교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는 약속이나 한 듯이 암묵적 합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다시 차안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확인해보니 같은 호텔에서 모그룹의 행사가 있었다고 차량은 회장과 임원들의 차였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그 광경은 영화속의 한 장면처럼 참 멋지기도 했는데 아무도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은 없어보였기로 새까만 썬팅으로 전혀 차량내부를 식별할 수 없는 외제차의 외관이, 그들이 무사히 빠져 나갈 때까지 두말없이 꼼짝을 않고 있던 우리들의 인내가 오늘 새삼 신기하게 생각된다. 책을 덮고는 그때 일반차량의 행렬에 끼여 위압적으로 보이던 그 양반들의 차를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내 모습이 떠올라 씁쓸히도 한숨지었다. 과연 춤으로 본다면 어느 쪽이 더 허수아비를 연상케 하였을까. 가을벌판에 소매자락을 나부끼며 너울춤을 추고 있는 텅빈 헛개비들...혹시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랬다. 한국의 도시에서 제 정신인 시민으로 살아가기 그럭저럭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제대로 된 시민으로 의무와 권력을 행사하며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기엔 우리 늘 바쁘고 피곤하다. 왜 기다려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보다 기다림을 잊게 해주는 근사함에 눈이 번쩍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재벌비리를 통렬하게 손가락질 하고 있는 것 같아도 손가락의 향방은 결국 우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을 비웃고 비난하다 갸우뚱 해보니 영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것이다. 나는 올 한해 젊은 작가들의 더 없이 모호하고 불안한 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만나왔기에 이러한 화법이 낯설기까지 하다. 이미 올해의 현실은 소설을 너머 충분히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현실보다 더한 상상력이라고 한들 간혹 '불안'과 '우울'의 미덕으로 포장되는 듯 보였을 뿐이다. 차라리 소설속의 불안에 오늘사는 내 불안을 기대고 있었다는 헛헛함이 더욱 자명해진다. 그런데 이 책을 덮고 마지막이 이토록 긴장감으로 신경이 곤두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니 안보이던 두어 개의 주름과 처진 볼살을 새삼 확인이라도 하듯 가슴이 조여오는 위기감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이 섬칫하고 마음이 편치 않은 건 아마도 소설이 전혀 소설같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설마하는 거짓말이 모두 확실한 진실로 들리는 이유가 아닐까. 또한 진실에 전혀 한마디의 반문을 제기할 수 없는 까닭은 아닐까.

지난 가을 반가운 마음에 황급히 책을 덮고 다시 두어 달 만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거짓말처럼 '하늘의 별따기'라는 재벌그룹의 임원인사에 그룹총수의 자녀들이 나란히 승진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연말을 앞두고 이제 바야흐로 재벌 3세의 경영의 닻이 오른 것이며 본격적인 한국식 세습경영체제가 개막된 것이다. 해외언론에선 북한의 세습체제는 안되는 것이고 한국의 재벌세습체제는 되는 것이냐는 식의 비판의 목소리가 다분하지만 어쩐지 우리 언론과 국민은 이미 알고 있었던 일에 대한 자포자기적 심경으로 오히려 국제적 안목과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그들에게 이 나라의 미래를 슬며시 기대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기에 재벌 3세와 같은 세대인 나는 이 소설을 덮으면서 더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내가 과연 작가가 콕 집어 가르쳐준 '불매운동'과 '시민단체'라는 모법단안을 작성할 수 있을지에 회의감이 들고 만다. 아니 그러한 의식있는 시민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점검해보기 이전에 과연 의식을 가질 필요조차 있는 것인지, 혹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나와 생각이 같기는 할 지에 대해 허탈한 의구심만 가득해진다. 일개 독자에 불과한 소시민인 내가 책을 덮자마자 보란 듯이 TV에 화려하게 등장하는 저들의 나라에서 저들이 만들어낸 제품에 하루를 의지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이다. 연평도 폭격이후 이 나라의 젊은이는 해병대 지원이 늘었다고 하는데 나는 전에 없이 9시 뉴스가 부담스러워 드라마로 채널을 돌리고 마는 매정한 시청자가 아니던가.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똑바로 질문하는 것만 같다. 언제나 우리 민족의 역사와 당면한 현실앞에서 국민으로서의 진지한 성찰을 요구해온 대작가의 저력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번엔 더 날카롭고 더 직접적이어서 한번 꺽이고만 고개는 여간 다시 들어 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회초리를 들다

이 책은 그가 언급했듯이 'history'가 'his story'의 줄임말이 되는 이유를 말하는 소설이다. 즉, 역사라는 이야기가 실은 수컷이 만든 이야기임을 강조하는 철저히 수컷본능, 수컷중심, 수컷역할의 이야기를 수컷답게(?) 펼치신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만 보아도 이름과 직위, 업무중심의 수직적 서사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여성이라고 해봤자 이름과 얼굴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그들의 아내 두어 명에 불과하다. 대기업의 비리와 탐욕을 서사의 근간으로 하는 작품에 여성이 개입되는 모종의 음모나 일말의 희미한 로맨스조차 기대할 수 없는 지극히 건조하기 짝이 없는 남성소설인 것이다. 작품의 재미나 서사의 긴박감, 자극적 사건의 개연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소설구성상 한계가 따르는 배경은 물론이고 소설의 주요 독자인 이삼십대 여성들이 결코 호감을 가질 리 만무한 그야말로 '그들(남성)만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렇다고 어찌 보면 고집스러울 정도로 수컷을 비난하는 격조의 이 소설을 젊고 나이듦에 상관없이 남성들이 반길 것인가에도 그다지 자신은 없다. 여성인 내가 서운하듯 같은 이유로 서운한 남성들이 존재하는 다시 말하면 이 시대의 소설읽는 독자들이라면 썩 집어들고 싶지 않은 류의 작품이라 말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역으로 조정래 작가가 한국문단에서 상징하는 존재이유를 방증하는 훌륭한 근거가 되지 않을까. 이토록 직접적인 삿대질을 할 만한 작가도 없지만 또 당했다고 의아해 할 국민도 없는 이 역학적 관계는 적어도 독서하는 순간만큼은 그의 이야기에 '자발적 복종'을 행사하게 되는 우리만의 예정된 룰이기도 하다. 정치인이 잘못하면 국민이 회초리를 들어야 하듯 독자가 우매할 땐 작가도 회초리를 들 수 있는 것. 나는 오늘 그의 회초리가 조금은 아팠다고 엄살을 떨고 싶다. 당신도 나처럼 아팠는 지 묻고 싶어진다.

소설은 내가 지긋이 바라본 6억이 넘는다는 그 외제차가 어느 후미진 야산길을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재계 2위인 일광그룹의 강기준이 자신의 선배이면서 태봉그룹의 1급첩보원인 박재우를 스카우트하라는 지시를 받고 의전용 차량을 과시한 것이었다. 박재우를 시작으로 장소를 바꾸어가며 이루어지는 스카우트 릴레이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진진했다. 지목된 스카우트 대상자는 한결같이 처음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엔 돈앞에 무너지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일광그룹이 선망하는 태봉그룹의 박재우도 그랬고 수사관 출신의 정보담당 김동석 실장도 신태하 검사도 정민용 서기관도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감히 누가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은 모두 현재의 위치가 불만족스러웠다기 보다는 한 단계 더 높은 신분상승을 원했기에 어떤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제의를 수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더 많은 금전이나 향후의 출세가 보장되는 경력, 대외적인 과시로 충분한 위치를 계산하여 길게 보아 남는 장사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이 모여 하는 일은 자신들의 태생이 상징하듯 재벌의 재산권과 경영상속권을 강화하는 업무였다. 이들이 분에 넘치는 돈을 받고 혹하여 조직에 몸담았듯 똑같이 도를 넘기는 돈을 주며 사람과 권력을 매수하는 일, 돈으로 놀고 돈으로 놀아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일이었다. 작가는 마지막에 이 조직의 핵심이 된 강기준이 늘 스카우트 하는 입장에서 마침내 다른 경쟁그룹으로 스카우트 된 것을 암시하며 붓을 내려놓았다. 소설은 막을 내렸지만 스카우트 릴레이는 계속됨을 잊지 말라는 마지막 한마디였다. 그가 바통을 이어 명함을 바꾸듯 우린 앉아서 주인공이 바뀐 다른 그룹의 비리 이야기를 계속 관람할 수 있다는 안내로 느껴졌다. 당신들의 관람의 자격이야 늘 충분하지만 계속 구경하고 싶느냐는 질문으로도 들렸다. 아마 혹시 구경하기 싫더라도 연극 무대는 당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친절히 경고하는 것으로도 들렸다. 안녕히 가시라는 그의 인사가 왜 자꾸만 뒷덜미를 잡는 것일까.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컷들은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속물적이었다. 살아있는 황제 일광그룹의 남회장은 비록 얼굴은 맹꽁이상이지만 꿈틀거리는 구룡이 아로새겨진 금박소파와 구각의 안경테를 쓰고 앉아 황금빛 용상을 연출해 낸다. 고급임원을 깔보고 직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놀이를 즐기고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더 할 수 없이 억울해 하며 노조나 분배같은 단어에는 천불이 나는 우리 사회 기업총수로서 전형적인 탐욕의 화신을 표상한다. 하지만 신문사의 광고줄을 쥐고서 숨통을 흔들고 비자금을 은닉하기 위해 차명계좌를 개설하고 세뱃돈 주듯 임원에게 스톡옵션을 하사하는 대기업의 총수에 사실 우린 무감한 지 오래되었다. 그들의 그 어떤 사회환원과 기부에 감동하지도 않듯 어떤 비리에도 덤덤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하급 공무원의 이삿짐을 날라주고 마당에 꽃심고 애들 말태워 주고 신발장 청소해주며 회장의 특급충견자리에 오른 총본부장 윤실장이 애틋하고 눈물겹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온 공채 1등 강기준, 그런 윤실장을 늘 경멸하면서도 그의 권력에서 오는 위세당당함을 부러워하고 그가 선물한 넥타이에 감동받는 그래도 인간됨이 짠하면서 씁쓸하다. 남편이 벼락승진을 하니 첫키스 이후 최고의 열도로 키스세례를 퍼붓던 그의 아내가 부럽기만 하다. 몸으로 무한감동로비를 펼친 상사를 조롱하며 미국에서 받은 박사학위를 미끼로 7급 공무원의 자식에게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그의 비열함이 목메인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며 까짓 사람쯤이야를 강조하는 박재우 기획총장의 목소리가 더 교훈같고 정신이 버쩍 든다. 휴가한철 아내몰래 비자금을 타러오는 신문사 기자들이 딱하고 가엾다. 강기준, 윤실장, 박재우 이들 세 명이 절대 서로를 신뢰하지 않으면서 회장으로부터 인정받고 보상을 받기 위해 보여주는 짓거리들에 전혀 놀라지 않는 우리들은 과연 다이아가 송송 박힌 1억원짜리 시계는 어느 브랜드일까가 더 궁금한 속세의 중생들인 것이다.

이들 세 명은 극 초반부에 '문화개척센터'라는 우스꽝스런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한자리에서 학연, 지연, 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로비의 원칙을 이야기하고 극 후반부에 똑같이 모여 그 성과에 자축하며 자신들의 과업을 합리화하는 수미쌍관의 행보를 보여준다. 작가는 주로 이들간의 역겨운 대화를 전면에 배치하고 그들의 구린 속내를 방백으로 처리하며 배경을 부연설명하는 방식의 문체를 적절히 믹스하고 있는데 마치 걸쭉한 한 편의 마당극을 보는 듯 이야기꾼으로서의 풍자와 재치가 읽는 재미에 가속을 더하고 있었다. 그렇게 바람에 춤을 추는 허수아비의 춤사위처럼 출렁이다가도 건설업체의 공기 단축효과나 비자금 조성방법, 검사의 상명하복과 검사동일체 정신등의 비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시선을 돌려 회초리를 든 훈장님처럼 똑바로 우리를 향해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킬킬 대다가 흠칫하며 허리를 세우고 정신을 차리기도 했으니 소설의 영향력이 문학의 힘이 새삼 여느 교육보다 낫구나 싶어지기도 했다.


삿대질이 아프다

이 작품은 그렇게 사람에 대한 실망을 강요하는 부담이 있었지만 그 실망이 아직 절망스러운 건 아니라 말하는 뼈아픈 조언도 있었다. 바로 작가의 대리인으로 인식되는 양심검사 전인욱과 양심교수 허민이 그들일 것이다. 이들의 모습이 극중에서 다소 패배적으로 느껴지며 부질없어 보이는 경향은 있었지만 이미 그들에게서 우릴 대신해 어떤 영웅적인 행보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위선이며 그릇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오히려 연민의 슬픔이 더했던 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라면 그들만큼도 못하지 싶은 못난 죄송이며 그들을 앞세울 수 없는 송구함이다. 특히 운동권 출신의 전인욱 검사가 태봉그룹의 1조원 비자금 사건이 터진 후 검사회식자리에서 사건처리향방을 놓고 의견통일을 다짐하는 그들과는 다르게 철저한 수사를 대답하는 모습에선 오히려 그러한 정의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같은 시절 학보사 기자였지만 위로와 응원으로 변호사를 권유한 아내의 미덕을 이해하기 보다는 상명하복의 부당함에 굴복을 충고하던 선배검사를 더 이해하고 싶은 우리는 이 세계의 살아있는 생물, 돈의 논리에 너무나 길들여진 그래서 자발적 복종이 제살처럼 익숙해진 시민은 아닐까. 시민단체와 불매운동을 조언하며 경제민주화를 외치던 경제학 교수 허민의 재임용 탈락 소식이 당연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동안 큰 기업이 잘되어야 우리도 잘산다는 논리에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착하디 착한 신봉자들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재벌 총수를 우상화하는 것에 불감하고 그들의 세습체제에 무심하고 그들로 인해 좌천된 검사와 교수에 무정한 우리가 정말 돈의 노예가 아닌 그들의 노예가 되버린 탓은 아닐까.

현실은 자본주의고 자본주의는 돈이 왕이고 돈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일까. 불행히도 나는 없다거나 있다는 대답이 아닌 굳이 이길 필요가 있느냐에 의문을 둔 무정한 독자임을 고백한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내 의문을 가장 잘 설명하는 장면은 곧 내 얼굴이 가장 화끈거리기도 한 순간이었다. 나는 남회장이 세 명의 충신들에게 그동안 수고한 대가라며 스톡옵션의 금액을 30억, 40억, 50억이라고 쓴 종이를 유치원생 쪽지 건네듯 넘겨줄 때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곤 곧 사나운 동물의 쓸개즙이라도 마신 듯 목이 아프도록 씁쓸한 비린내로 소름이 끼치었다. 우스워도 부러운 종이라도 만져 보고픈 웃지 못할 심정임에 틀림없었다. 종이에 금액을 적어가며 현찰을 발행하는 그 뿌듯한 놀이를 어린 시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일치감치 돈의 실제 위력을 알아버린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실명이 '이백원'인지라 평생 모멸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어떤 사람이 개명한 이름은 '이백억'이었다는 웃지 못할 유머도 떠올랐고 평생 내가 가늠하고 세어보는 돈의 단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하는 자괴감 때문에 가슴 한켠이 저릿했고 또 한편 알면서도 순간 부럽기도 한 내 자신을 참을 수 없기도 했던 남회장의 쪽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던 故 이청준 작가의 중편 <조만득>의 한 장면도 오버랩 되었다. 훗날 '배꼽춤 추는 허수아비'라는 연극으로도 공연된 변두리 이발소 조만득씨는 자신이 재벌회사 회장이라며 백지에다 종이수표를 마구 발행하는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여기서도 등장하는 허수아비...그때 그냥 춤도 아니고 배꼽춤으로 그려진 허수아비의 정체성은 소시민의 슬픈 망상이었다. 남회장의 쪽지는 우리같은 보통의 시민들에겐 영원한 망상의 카드가 아니겠는가. 망상의 절정부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은 불행히도 장난에 그치지 않고 망상 건너 이쪽 편의 현실을 정확하게 조준하면서 깔깔대는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망상은 그곳에 푹신하게 빠져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자기 현실로부터 훨훨 탈출하여 자유로운 망상과 해방감에 도취되어 현실에선 평생 이루지 못할 꿈을 마음껏 펼쳐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허수아비춤의 근사한 공연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혹시 세 명의 충신들을 통해 환상을 좇아 몽상을 꾸다가 급기야는 망상에 걸려버린 우리들을 마음껏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작품속의 주인공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 것이 실은 망상을 지향하고 오늘을 달려가는 수많은 허수아비들을 향해 당신들도 이에 다름없다고 이것은 당신들의 모습이니 웃을 것 하나 없다고 두눈 부릅뜨고 말해주는 것 같아 내심 허를 찔린 기분이었던 것은 나만의 일인 것일까.


배우를 마치다

조정래 작가는 이제 자신이 걸어온 인생과 한평생 바쳐온 문학의 대장정 길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가야 할 것인지, 자신이 정해놓은 마지막 일감을 차근차근 수행해 나가는 그 첫걸음을 시작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가 지금까지 집필해온 작품들만 해도 그 문학사적 가치와 후대를 위한 진심만큼은 충분해보이고 되려 넘치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난 원죄와 문학인이라는 숙명적 책임을 단 한순간도 외면하거나 방기, 중단하지 않고 가장 조정래적으로 수행하려는 대가의 지속적인 면모를 질기게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 역시 소설을 쓸 때에는 소설에 집중하기 위해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으며 일요일에도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매일 원고지에 글을 적었다는 작가의 엄숙함과 순고한 정신세계에 조용히 고개숙인다. 언젠가 태백산맥 문학관에 전시된 사람키보다 더 높은 그의 육필원고 앞에서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던 그 순간이 환기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문학이라는 예술적 산물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성불가침의 종교적 성채라는 느낌을 받는다. 소명을 다하려는 작가의 태도와 정갈한 자세까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작가의 대단한 능력이고 독자를 향한 강직한 염원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것은 곧 불의와 반사회적인 부정을 보고도 좀처럼 분노와 증오가 느껴지지 않는 이 시대 무심한 독자들을 향한 소리없는 꾸짖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 꾸짖음으로 우리 부모님 세대가 더 큰 기업 더 강한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열심히 일해서 우리 세대를 편하게 해주었듯 우리 역시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케 한다.

눈을 감고 노란 가을들판에 세워진 허수아비를 떠올리며 그가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허수아비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왜 춤을 추었던가. 원래 인간에 대한 희생을 목적으로 거기 서있던 허수아비를 바라보며 정작 허수아비는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아...나는 비로소 허수아비보다 못한 허수아비아닌 허수아비들을 딱하게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결과적으로 인간이면서 인간의 춤이 아닌 허수아비의 춤을 추고 있는 우리의 슬프고도 우스꽝스런 자화상을 풍경화로 발견하고 말았다. 지난 가을그가 그려놓은 우리 하늘은 야속하게 높고도 푸르렀다.

그렇다. 허수아비는 원래부터 춤을 출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허수아비라는 역할때문에 춤을 출 수 밖에 없었고 춤을 추는 것으로 보여진 것이다. 더불어 허수아비라는 타고난 외양적 특성 때문에 춤을 추는 행위는 그 몰골을 더욱 허수아비스럽게 만들어 가장 허수아비다운 외모를 극대화 하는 자신의 특기이자 치명적 약점이었던 것이다. 허수아비가 자신을 가장 허수아비답게 하는 행위가 가장 큰 약점이 되는 허수아비의 슬픈 정체성은 허수아비가 최초 탄생될 때 인간도 아니면서 실은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낸 자체 생산목적에 기인한다. 즉, 허수아비의 부가가치는 가장 인간을 잘 흉내낼 때 있는 것이며 정작 허수아비 자신 같을 땐 그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 허수아비의 이율배반적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허수아비의 춤은 허수아비로서 자신을 가학함으로써 자신을 되찾는 가장 자기파괴적 행위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가장 자신을 파괴해야 가장 자신으로 분명할 수 있는 허수아비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애석하게도 허수아비가 아닌 인간이었기에 허수아비된 죄가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서로가 허수아비가 되었는지 알아 채지 못하는 특별한 가중죄도 있었다.

진짜 허수아비가 춤을 춘 것은 허수아비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허수아비를 바라보고 이용하는 인간이라는 타자의 입장에서 관망된 결과일 뿐이었다. 허수아비는 자신이 한 일이 춤을 춘 것인지 춤을 추었다면 그것이 어떠한 광경으로 보인 것인지 그리고 그 광경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과 다를 수 없음이다. 그러니 허수아비춤을 추고 있던 허수아비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허수아비는 열심히 살수록 기껏해야 인간들에게는 허망한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충분했다는 것이다. 이는 허수아비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허수아비가 아닌 인간이었기에 혹시 훗날 허수아비의 자화상을 발견할 날이 오더라도 그때 가서 울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억울함이 아닌 허수아비의 춤사위가 결국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비로소 잘 알게 된 인간들로서 고개들 수 없는 창피함이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허수아비춤이라는 마당놀이의 대본이었다. 그리고 그 춤사위를 그려내던 많은 주인공들은 저들이기도 했지만 또 우리들 자신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소설을 통해 앞으로 관객이 될 것인지 배우가 될 것인지 질문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허수아비의 자식이름은 허수라는 우스개 소리에 더 이상 웃지 못할 시간이 도래 한 것이었다. 허수아비의 자식도, 허수아비의 친구도 허수아비와 다름없는 똑같은 허수아비 였음을 그리고 그것은 돈에 승복하였다고 정신마저 굴복당한 정신이 빠져버린 진정한 허수아비꼴을 하고 다니는 오늘날의 많은 우리들의 리얼하고도 충격적인 실상이었음을 알아야 하겠다. 세상의 모든 영화와 연극은 모두 일어 날수 있는 일이며 현실 역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허수아비의 춤사위를 서로서로 구경하고 나온 관객들의 지친 기색은 아마도 자신들이 가장 극적인 배우였음을 통렬하게 인지하는 클라이막스에 기인했을 것이다. 막을 내린 후 다행히 배우와 관객이 일심동체가 된 것만이 공평하게 남았다. 무대를 내려와 우리가 내딛어야 할 다음 걸음 역시 지극히 달라진 것 하나 없는 공평한 한국땅일 것이다. 그땐, 진정으로 허수아비가 아닌 인간이기로 하자. 놀아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어야 하지 않겠나. 그땐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들판의 진짜 허수아비가 그리울 지 모르겠다.

우린 그렇게 영원한 관객으로 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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