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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클럽 -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온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탐정의 기억이란...
이 책이 다시 생각난 건 나도 좀 추리를 해보고 싶어서였다. 추리(推理)란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서 생각하다', 사전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말을 내식으로 바꾸어 볼까. '알고 싶은 마음'을 바탕으로 '알기 싫은 것'을 미루어 밝혀내다...알고 싶은 건 내 쪽이고 알기 싫은 건 상대편일 것이다. 알기 싫은 이유로는 아마도 그 순간이 두려울 것 같다는 직관일 게다. 대체로 끔찍한 결과보다 어이없는 그 원인을 알게 되면 인간은 더할 수 없이 실망스러울 것이기에.
십년도 더 되었다. 그날은 내 결혼식 날이었고 그때 만해도 아버진 걸어 다니셨다. 그런데 외동딸을 시집보내는 그 경사스러운 날 아버진 우리 쪽의 축의금을 자신의 가슴에 슬쩍하는 한사람을 목격하셨다. 내가 형제가 없다보니 사촌오라버니 한명과 사촌형부 한명을 부조 테이블에 나란히 앉히셨던 모양이다. 마침 없어진 봉투의 주인공은 고모편이었고 확인결과 고모는 백만원을 넣었다고 했다. 현금이라 다른 봉투에 비해 꽤 두툼했을 터이다. 아버진 이 사실을 현장에서 알았지만 집에 와서 많은 시간 고민 하셨다고 한다. 축의금을 받은 두 명의 친척중 한명이 범인일 것이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한명의 사촌오빠는 엄마쪽 외조카였고 한명의 사촌형부는 아버지쪽 조카사위였다. 한명은 어릴 적부터 엄마가 업어 키운 혈연관계의 조카인데다가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한명은 그다지 친분이 없었던 한 다리 건넌 형부에다가 마침 사업은 실패했고 딸이 희귀병에 걸린 상태였다. 굳이 그 현장에 없었다 해도 정황상 범인은 분명해보였고 아버진 엄마쪽 외조카의 명예를 위해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길 원하셨다. 탐정이 되기 자처하셨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걸 여행에서 돌아오고도 한참 뒤에 알았다. 사촌오빠는 득달같이 달려와 자신의 부주의로 생긴 일이니 돈을 물어내겠다고 엄마를 울렸고 사촌형부는 끝내 모르쇠로 일관하며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로 우리집은 작은 아버지네와 근 삼년동안 왕래를 끊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그제서야 작은 아버지는 엄마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물론 작은 아버지가 그토록 믿었던 사촌형부는 종적을 아예 감추고 난 뒤였다. 세월이 지나 엄마와 그 일을 떠올릴 때면 늘, 그 사실을 묻었어야 했다고 아버지를 말리지 못하신 당신의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시곤 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촌형부는 항공사 조종사 출신의 내가 참 좋아하던 스튜어디스 사촌언니의 남편이었고 아버진 사촌언니의 등록금을 두어 번 해주었기에 배신감이 더 크셨다 한다. 하지만 사촌언니는 아버지, 엄마 장례식 때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 이후로 우린 단 한 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다. 나는 그 일을 겪으며 모든 사건이 언제나 같은 정도로 시원하게 밝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아무리 공부하고 인물이 멀쩡하게 생겨도 사람은 한순간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파헤치고 들추어내는 것이 한사람을 추락시키고 인간관계에 영원한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진 훌륭한 탐정이었을까?
그 이후 아이를 낳고 그로인해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고 또 사회생활을 하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럭저럭 삶의 이력들이 늘어가면서 나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는 것이 복수하고 사는 것보다 훨씬 마음편한 일임을, 그냥 저절로 알게 되었다. '너를 미워하느니 내가 괴로워 안되겠다'는 노래가사도 있지 않은가. 실은 나 좋으라고 눈감아주고 가슴에 묻고 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마음이 편해진 줄 알았는데 마음은 많이 늙어 있었다. 조금 억울한 성 싶어도 웃어버리고 가해자를 위해 내가 대신 울어주었더니 어느덧 나는 혼자가 되어 있었다. 참 이상했다. 다 이해해주고 받아들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내가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은 혼자 짊어지는 모습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었다. 솔직하게 가끔 욕도 하고 미운 사람이 있으면 고자질도 하고 당한 일이 있으면 따지기도 하면서 살아야지 혼자 무슨 도닦는 것도 아니면서 왜 스님처럼 답하고 목사처럼 충고하고 수녀처럼 안아주냐는 것이었다. 눈물이 핑돌만큼 외로왔지 말이다.
그런데 이 이야길 최근에 같이 사는 사람과 딸아이에게서도 들었다. 지난 일 년간 책만 읽고 글만 써왔던 내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 것이냐는 투정도 함께였다. 이젠 좀 사람을 만나고 세상에 나가보라는 직접적인 충고도 함께였다. 꼭 책으로 마음을 삭히고 글로써 심정을 토로한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실은 최근에 온라인 상으로 교묘한 심리적 공격을 받고 있던 터라 내 측근의 한마디는 상처가 되고도 남았음이다. 너무나 서운했고 마음의 불똥이 안보이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 속은 참 알 수가 없다.
최근에 우연히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연달아 내자 이런 내가 궁금하였는지 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 생각되는 여러 정황이 포착되었다. 작년엔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알지 못하는 이의 제보로 시차를 두고 단 두 명에게 확인을 부탁했던 일은 돌고 돌아 다시 내 귀에 폭탄이 되어 떨어지기도 했다. 그로인해 내가 어떤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나를 음해하고 비방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대충 그 원인도 알 것 같아서 그것조차 껴안을 수 있었다. 내가 잘난 성인군자라서가 아니고 습관처럼 주저없이 외로움을 택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나 역시도 주어진 입이라고 지나가는 생각과 생각없는 말로 허공에서 타인들을 오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나는 그 사람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어짜피 만나 보아도 다같은 인간일 것임에 한 치의 의심이 없다. 하지만 나 역시 인간인지라 추리만은 멈추기 힘들었다. 제대로 추리하고 내 나름대로 원인을 알고 나면 그래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질 것이기에.
이 책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던 그 좁고 막막한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제 그토록 궁금한 그 길 끄트머리에 비로소 찬란한 서명이 비추어 온다던가 아름다운 별빛이 가득하리라 믿지는 않는 사람이 되었다. 모르긴 해도 부패의 악취, 사악한 배신, 탐욕의 역겨움이 진동하는 시궁창에나 도달하지 않으면 얼추 다행이라 여기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우리가 능히 기꺼이 인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모르고 살다 죽는다 한들 그다지 손해볼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알고 싶다. 살아있는 한 그 좁고 어두운 길을 끝까지 따라가 파헤쳐 보고 싶다. 나만큼 인지 나보다 더 인지, 나만 못한 것인지 언제나 궁금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같은 인간된 입장으로서 말이다. 인간이 하는 짓은 인간만이 상상할 수 있고 인간만이 예측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내가 밝혀낼 순 없었어도 내 내신 누군가 밝혀 내었다는 만족감으로 이 책을 덮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난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내가 밝혀내어야 할 인간들 보다 몇 백배는 더 지독하고 기가막혔기에 말이다.
믿어도 될까요?
히가시노 게이노를 알지 못했다. 영화 백야행의 원작자라는 정도만 들어서 생각나는 이름에 불과했다. 내 편향적인 독서취향으로 절대 손이 먼저 가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추리소설 작가라고 들었다. 다른 작품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작가를 평할 자격은 되지 않지만 엔지니어 출신인 것으로 보아 몇 가지 추측할 단서는 있었다. 작년 여름 인상깊게 읽은 <바이퍼케이션>을 출간한 이우혁이라는 작가도 이공계 출신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문학적으로 두리 뭉실하게 에두르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은유나 과장도 드물다. 그들은 주제를 향해 나선형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 우물을 파듯 미련하게 한 지점을 공략하는 경향이 있다. 인과관계를 밝혀내고 논리체계를 수립하여 마치 수학시간에 증명을 하듯 문제지를 풀어나간다. 물론 우리가 보기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들이긴 하지만. 그렇게 난해한 문제를 풀고 비로소 연필을 놓았을 때의 뿌듯함을 선사한다. 우리가 흔히들 떠올리는 '과학적 사고방식'이라는 학습태도가 아마도 삶의 태도로 체화된 작자들일 것이다. 이것은 학교다닐 때 문제집 몇 권을 풀어보듯 누구나 흉내낸다고 따라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자신이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삶의 태도가 형성되고 그것이 문학하는 방법이 된 사람들의 고집을 존경한다. 소위 믿어도 될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나 이과계통의 전공자가 문학안에서 인간을 그려낼 때 감지되는 순수, 자연의 현상에 집착하고 물리적 사건을 관찰하는 그 탐구정신을 느낄 때 이상하게도 어떤 부질없는 욕심이 사라지곤 한다. 오로지 연구자체에 몰두하는 탐구자의 열정이 전해져서 일까. 인간을 탐구하고 삶을 통찰하는 것에는 추리나 장르소설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나는 이 책에서 작가의 냉철한 두뇌속에 숨겨놓은 뜨거운 열정의 응축, 그 오롯된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온갖 욕심을 수행하는 인간들을 향한 꽤 세련된 관찰에의 결과였다.
이 책에는 다섯 편의 믿기 힘든 이야기가 다채롭게 실려 있다. 여지껏 장편이 아닌 단편들을 추리소설로 만나본 적이 없었기에 이토록 빠른 전개와 쉴 틈을 주지 않는 호흡, 확실한 결말들은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어찌보면 추리소설은 작가와 독자간의 게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매번 그 게임에서 참담한 패배를 하다가 겨우 마지막 작품에 이르러서야 힘겹게 범인을 예감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생각지 못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구성도 있었겠지만 내 평범한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결말을 예측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책에는 각 편마다 작가처럼 믿을만한 사람들이 늘 때가 되면 나타나곤 했다. 부자들이 회원제로 가입한 탐정클럽의 해결사 커플이 그들이다. 모두 언제나 검은색의 의상을 입으며 남자는 30대 중반의 큰 키에 서양인의 얼굴 윤곽을 가진 사람으로, 여자는 긴 머리의 미인이면서 일본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외모로 등장한다. 나는 그동안 일본을 뻔질나게 다녀왔지만 그때마다 정말 (아쉽게도)키가 큰 남자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여자 역시 긴자나 하라주쿠의 몇몇 모델 뺨치는 (직업이 의심스런)여성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쳐다보기 민망할 정도로 수준이하의 외모들이 많았다. 작가가 그려낸 탐정클럽의 해결사 커플은 어떤 의미에서 비일본적인 우월감과 신비감을 조성하는 이상향의 비밀조직을 암시하는 듯했다. 그들은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정의감에 불타는 성향도 아니고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으며 특별해 보이는 습관도 없었다. 이들은 숨겨야 할 비밀이 많은 특수계층에게는 일종의 종신보험과도 같은 존재들로서 비밀을 확실히 보장해주고 결과만 알려줄 뿐 처리에는 어떤 개입도 하지 않는다. 이 이상적인 회원제 조사기관을 보면서 나는 우리사회 정재계 인사들이 법적인 처리를 의지하는 유능한 변호사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른바 있는 집안에서는 애완견의 루트도 비공식적인 라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그들만의 방식 밑바탕엔 '불신'이 깊게 깔려있을 것이다. 함부로 아무나 믿지 못하는 심리, 섣불리 사건을 의뢰하기 힘든 비리, 검은색의 두 남녀는 그들의 불신과 불안을 이용해 생존하는 꽤 믿을만한 존재인 것이다. 경찰도 믿을 수 없고 언론은 더더욱 공정치 못한 그들 사회에서 이러한 유형의 조직은 왜 생명줄이 길어 보이는 걸까.
이들은 과연 안전한 걸까. 믿을만하긴 해도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들도 모태는 있었을 터인데 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사회의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는 데 음지에서 조력하는 사적단체일까. 사회정의나 진실규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상업적 단체일 뿐일까. 이들은 기존의 탐정들에 비해 인간애를 바탕으로 한다거나 절대 선을 추구하는 인물로 등장하진 않는다. 즉, 어느 편도 아닌 중립적 입장을 그 매력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살면서 믿음이란 믿을 수 있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믿어야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할까. 또 틀림없다거나 절대 변치 않는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깨달음도 이들을 더욱 긍정하게 한다. 즉, 이들에겐 그들이 믿을 만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믿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었기로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건 이들(탐정)이 생기고 그들(부자)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생기다 보니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문득 이 사회는 진실도 그것을 밝혀내는 자들의 은밀한 시스템에 좌우될 뿐이라는 착찹한 생각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 늘 같이 붙어 다니는 이들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궁금하기도 했던 두 사람이었다.
믿기 어렵네요!
노인을 위한 죽음은 없다 ..........................................................................................<위장의 밤>
첫 번째 이야기는 비교적 얌전했다고 할까. 어느 재계 유명인사의 희수 축하연회장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한 노인을 둘러싸고 죽은 첫 부인의 딸과 사위, 두 번째 부인의 아들, 노인의 세컨드, 노인의 비서등이 모여 연회를 벌이고 있는 장면은 어찌 보면 다들 속으로 저 노인은 도대체 언제 죽을 것인가를 음흉하게 상상해보는 자리와도 같았다. 이때 연회장엔 현재 부인이 갑자기 이혼을 요청하는 불청객으로 등장하고 노인은 잠시 서재로 자리를 비운 사이 목매달은 시체로 발견된다. 그의 서재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죽음을 목격한 자들이 조우한다. 이들이 노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 바로 사건의 발단이자 핵심이었던 것. 모두들 노인을 죽여할 이유도 살려야 할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피가 섞이지 않은 사위는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노인의 세컨드는 보험금을 타기 위해, 비서는 누구든 권력에 오르는 자를 추종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했던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아버지의 재산(유산)분배 문제로 형제간의 연을 끊거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때 노인은 장인이고 연인이고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딱 자신이 단물을 빨아 먹을 그 시기 까지만 생존해주면 좋았을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다.
첫 번째 작품에서는 사건 발생 시각 직후 일어나는 용의자들의 움직임을 시간단위, 장소단위로 쪼개어 나열한 후 모든 것을 종합해 범인을 추론하는 과정자체가 제일 돋보이는 이야기였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언제나 범인들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며 그것을 밝혀내는 탐정은 더욱 더 기발한 존재들이며 그러한 이야기를 완성해 내는 작가들은 천재적으로 느껴지는, 치밀한 각본의 드라마였다. 더불어 마지막에 사건의 추이상 자신에게 유리한 결말을 선택하는 노인의 비서를 보면서 마지막에 웃는 진정한 승리자는 따로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열한 자는 언제나 살인하지 않아도 이렇게 살아 남는 것을. 뛰는 놈위에 나는 놈 아니겠는가.
내 밧줄에 감기는 법 ...............................................................................................<덫의 내부>
두 번째 이야기는 의문의 세 명의 남자가 한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궁리 끝에 욕실을 생각해 낸 이 장면은 바로 범인이 덫을 꾸미는 순간이었다. 장소는 벤츠가 주차되어 있는 고급주택지. 부동산과 사채놀이로 재산을 쌓은 삼촌의 집으로 결혼할 여자친구를 인사시키러 가는 새하얀 얼굴의 금테 안경잡이가 처음부터 의심스럽긴 했다. 그렇다고 시커먼 얼굴에 뿔테 안경이라고 다를 것이 있었을까. 작가는 독자의 의심을 언제나 확인시켜주는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 저택에선 야미가마 씨의 친척들이 모여 젊은 커플의 결합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되고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불경기에도 끄덕없는 야미가마씨를 부러워한다. 시기를 가식으로 포장한 사람들...좋은 말로 매너라 칭하자. 그런데 어쩐 일인지 평소같지 않게 조카들의 시비가 이어지더니 급기야 우발적인 몸싸움으로 발전하고 야미가마씨는 자리를 비운사이 그만 목욕탕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다. 목욕탕과 시체는 언제나 특별기획세트 아니던가. 그의 아내는 그날 자리에 모인 친척들이 모두 남편에게 돈을 빌렸거나 제대로 갚지 않은 사실을 알아내고 공평한 의심을 표명하지만 우린 이미 그렇게 정상적인 죽음일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야미가마씨는 목욕탕에서 감전사 하였고 딸의 병원비 때문에 그것을 주도한 가정부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 될 즈음 작가는 야미가마씨의 불륜과 야미가미씨의 아내인 미치요와 금테 안경잡이 조카의 불륜을 혼란의 장치로 제시하는 극적인 반전을 선보인다. 맙소사 ! 야미가마씨가 죽어야 할 이유 만큼이나 그의 부인이 죽어야 할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덫에 불행히도 부인이 아닌 자신이 걸려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세상은 알 수 가 없는 것이고 사람은 끝까지 믿을 수 없는 것인가. 작가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죽음이 아닌 도저히 이해못할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자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상대가 살아있음이 내 불행이 될 때 우린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하는 인간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를 죽여야 하는 그 누군가있다면 그에게도 마찬가지일 터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행운은 곧 상대가 나를 살려준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게 본다면 혹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상대에게는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목이 조여오는 결론이 아닐 수 없었다. 아...인간은 서로의 목숨줄을 가지고 더 굵은 밧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기 줄을 더 길게 잘라먹어야 웃을 수 있는 자들일까...이번엔 그렇게 끝없이 자르다 그만 그 줄에 스스로 감겨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거짓으로 진실하기 ..............................................................................................<의뢰인의 딸>
어느날 평소같이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엄마가 침대에서 죽어있다면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런데 아빠와 언니, 이모는 무언가 알고들 있는 눈치인데다가 자신에게만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어떤 진실은 왕따를 탄생케도 하는 법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미심쩍은 엄마의 죽음을 알고 싶어 하는 여고생이 아버지가 회원인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하는 설정과 사실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탐정에게 개인적 부탁을 의뢰하는 맞대결구조가 서사의 흥미를 이끄는 참신한 구성이었다. 방송으로 보자면 역몰카의 내막을 알고있는 PD의 진실찾기정도로 이해된다. 딸이 탐정의 보고를 받을 때까진 흡사 아버지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 일으키지만 작가는 엄마의 불륜상대가 있었고 엄마가 죽은 날이 바로 그 남자와 떠나기로 한 날이었으며 아빠와 이모, 언니는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공표한다. 즉, 아빠와 이모, 언니는 엄마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남자의 살인으로 몰고 가려 함께 알리바이 자작극을 펼친 것. 그런데 이번엔 탐정이 이 진실을 차마 딸에게 알리지는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의뢰인을 향해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고 사무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그들이 아니었나. '불필요한 짓'은 안 하는 게 신조인 사람들이 딸에게 엄마는 자신과 가족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자존감을 세워주기 위해 진실을 누락할 것을 의뢰하는 아버지의 부정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 번째 이야기를 덮으며 어린아이는 시도하지 않는다는 암살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너무나 머리가 좋았다. 진실 하나도 여러 개 경우의 수로 쪼개어 증명할 수 있었던 그들은 진실을 들추기 보다 사랑을 들추어 인간을 감싸는 면모를 보여준다. 비록 의뢰자에겐 거짓보고였겠지만 어떤 진실보고보다 진실하지 않았을지. 탐정도 아버지와 딸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여겨지는 이야기였다.
탐정을 이용한 죄.................................................................................................<탐정 활용법>
네 번째는 장난이 비극이 되는 이야기였다. 후미코 부부와 아키코 부부가 여행을 가기로 한날, 호텔방에선 남편들만 변사체로 발견된다. 후미코와 아키코는 동창생이고 이들 부부는 평소 지인들의 관계인데 그날 밤 이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가장 뒷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작품이었기에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여운이 길었음이다. 후미코는 탐정에게 남편과 아키코의 불륜을 의뢰하고 뒤로는 아키코와 공모하여 남편들을 죽일 무시무시한 음모를 꾸민 자작극의 당사자였다. 후미코는 보험금이 필요했고 아키코는 진짜 불륜 상대가 있었던 것. 후미코는 아키코의 남편에게 자신의 남편과 아키코가 불륜임을 거짓폭로하여 마치 아키코의 남편이 자신의 남편을 죽인 것처럼 함정에 빠트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아...부인들이여, 그대들은 진짜 불륜을 위해 없는 불륜을 연출해 낸 이 시대 누구보다 진정한 희극인이 아니던가. 우리의 순진한 남편들은 부부 동반 여행임을 의심없이 따라나서 허탈하게 배반을 맞이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도 충분할 마무리에 그만 탐정이 들고 일어 선 것이다. 경찰조사에선 부인들이 범인이 아니라 부인들의 계획대로 아키코의 남편이 범인인 것으로 마무리 지어지자 자신들이 교묘한 범죄에 이용당한 피에로가 되었다는 상심에 반전을 일으킨 것이다. 마지막 탐정의 말은 우리 보통사람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만다. 탐정클럽의 회원수준이 너무 낮았다고 이런 일에 휘말린 자신들을 자책하는 저 짜릿함이란 대저 직업의식이 투철하다고 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래, 개나 소나 모두 탐정클럽을 이용해선 그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남편의 불륜현장만 미행하는 심부름 업소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가 탐정의 인간된 이야기였다면 이번 이야기는 그 인간들의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수만이 선수를 알아보고 1등만이 1등을 알아준다는 것일까. 내가 봐도 부인들의 수준이 좀 의심스럽긴 했지만, 어쩌겠나. 그들도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었던 것을. 탐정이여, 죽여야 하는 이유에도 그 레벨이 정해짐을 미처 몰랐다네.
피가 없으니 눈물도 없지......................................................................................<장미와 나이프>
마지막 이야기는 가장 소름끼치고 잔인한 이야기로 장식했다. 피가 난무하거나 수법이 끔찍해서가 아니라 범인들의 교활이 너무나 역겹고 미웠기 때문이다. 가장 드라마틱하기도 해 잔혹멜러를 표방하는 공포영화로 연출하여도 수작이 나오겠다 싶었다. 대학의 교수이면서 학과장인 유명인사 오하라에겐 딸이 두 명 있었다. 첫 장면부터 둘째딸의 임신소식을 들은 아버지의 이기적인 추궁이 시작되면서 아버지는 고집을 부리는 딸의 뒤로 탐정클럽에 사건을 의뢰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첫째 딸이 둘째딸의 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사건은 범인이 임신한 둘째딸을 없애려 했다는 음모로 초점이 맞추어 진다. 설상가상으로 유력한 용의자가 자살을 한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장치는 바로 아버지가 유전공학부 교수라는 설정이었다. 두 딸은 각각 어머니가 달랐고 둘째딸은 자신이 가로챈 여자의 옛 연인, 친구의 딸이었다. 평생 유전자를 연구했지만 자신의 딸이 자신의 유전자를 지니지 않았던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다가 야망많은 주치의와 깊은 관계이기까지 했다니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려나. 둘째딸과 주치의는 첫째 언니를 죽인 후 애꿎은 연구원을 위장자살시켜 그를 전범으로 몰아가는 계략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사랑을 앗아간 언니도 죽어야 했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무기로 협박을 일삼은 연구원도 죽어야 했기에 그들은 사건후 정당하게 사랑을 나눈다. 피가 섞여도 천륜을 저지르는 현실이니 하물며 전혀 유전학적으로 피가 섞이지 않은 그녀가 마땅히 시도할 수 있었던 알찬차고도 당돌한 플랜이기도 했다. 작가는 살해된 피해자가 자주 자살로 위장되어 진실을 알 수 없게 유도하는 범인을 등장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의심이라는 기제를 지속적으로 가다듬는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나는 다섯 번째 이야기를 읽고 나서 퍼뜩 몇 년전 삼성가의 막내딸의 자살이 떠오르기도 했다. 뉴욕에도 탐정클럽이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이, 입을 삐죽거렸지만 말이다. 요즘 TV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드라마를 딸아이가 퍽이나 즐겨본다. 부검의가 죽은 자의 사인을 파악해 진실을 밝혀줄 마지막 인물이라던 어느 주인공이 생각난다. 설사 부검의가 진실을 은폐했다 하더라도 이들 탐정이야말로 최후의 천사들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믿어보죠
그러고 보니 세 번째 이야기만 제외하면 범인은 모두 한집안 식구였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죽은 엄마는 도망가려는 자신을 막아보려는 가족들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이므로 엄밀히 따지면 이도 한집안 식구들로부터의 죽음인 것이다. 사위는 같은 회사의 총수인 장인을 죽여야 했고, 남편과 조카는 부인을, 부인은 남편을, 동생은 언니를 죽여야 했다.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데 그게 꼭 가족이어야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가진 탐욕을 가장 완성도 있게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므로 그들 또한 완벽주의자가 아닐까. 그들은 보다 완벽한 살인을 위해 다시 자신이 죽여야 할 대상을 죽여야 할 누군가를 함정에 빠뜨리는 치밀한 행보를 계획하는 사람들이었다. 의뢰인이 사건을 부탁한 탐정은 이 누군가를 죽여야 할 범인의 심리를 밝혀내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인간의 열등감이나 성취욕구, 보상심리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는 심리학자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그 살인의도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정상적 순로를 밟지 않는다. 작가는 말한다. 인간은 터무니 없는 이러한 개인적인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가족을 가장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존재라고, 나는 다만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였을 뿐이라고. 논리적인 단계적 풀이 덕분에 작품을 덮고 나서 어느 누구도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모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고 하나같이 인간으로서 정당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대한 인간같지 않음도 최소한 인간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은 내재된 욕망의 종류는 동일한 같은 인간된 부끄러움이었을까. 그들을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더불어 이번 작품에선 의뢰인의 사건도 중요했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탐정의 태도도 다양해 더 풍부한 이야기를 연출해 내었다는 생각이다. 탐정도 핏줄이 있었고 눈물도 있었고 화가나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꼭 장르소설의 추리 작가로서 그토록 많은 인간을 죽이고 피를 뿌리는 작업을 하지만 사회적 직업의식만은 잃어선 안된다는 스스로의 다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인간을 너무나 잘 알고 누구보다 더 연구하는 사람만이 추리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야기 속에선 어떤 치졸한 치정극이나 막장 불륜극이 등장한다해도 그것은 다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좀 더 연구한 성과이자 기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든다. 마찬가지로 그 어떤 잔인한 범인이 신종수법으로 범죄를 연출하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진 않을성 싶다. 나는 그동안 추리소설에서 새삼 삶의 교훈이나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소설보다 더 냉혹한 현실에서 추리소설을 통해 오늘을 껴안고 인간을 믿으라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거 였음 어쩜 추리소설을 집어 들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나는 다만 알고 싶었고 결국 알아졌음을 말하고 싶다. 분명한 결말, 뜨거운 범죄, 잔인한 사람, 무서운 욕심, 내안에 있었을 지 모를 그 모든 화려한 악성(惡性)을 비로소 확인한 댓가를 조심스레 어루만지고자 할 뿐이다.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시원하고 그런만큼 개운하다. 이로써 된 것이다. 내 무언가가 토해지고 다시 헹구어졌다면 나도 그들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인간인 것이다. 그들로 채워지고 걸러내진 내 욕심이 오늘따라 뿌듯한 날이다.
한 편의 추리소설 덕에 사람들을 향한 원망과 일말의 의심을 또 견디었다. 열길 물속 보다 더 깊고 복잡한 그 속을 같이 할 길동무 하나를 얻었다. 추리소설은 분명 무언가를 잊게 해주는 순간의 힘이 있다. 그런데 그 잊어야 할 무언가를 까마득하게 잊어먹는 동시에 안개가 걷히듯 그와 비슷할 지 모르는 내안의 욕망들을 소름끼치게 확인하는 서운함도 있다. 천인공노할 사람들이라며 욕을 하다가도 한편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이해한다고 해서 누가 배신감을 느낄 것인가. 혹시 만약 얼굴도 안 보이는 누군가가 미워죽겠는데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 사실을 알릴 길도 없다하면 나처럼 추리소설을 집어드시라.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확인하기도 뭐하고 한다고 해서 결코 좋은 결과를 본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 심사가 혼란스럽다면 탐정소설을 찾으시라. 십 몇년 살 맞대고 살아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속마음이다. 한순간 그 굽이치는 시커먼 길을 돌고 돌아 빠져나온들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토록 지독한 인간들을 만나고 오니 '알기 싫었던 것'들에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긴다. '알고 싶었던 마음'에 후회는 없다.
어떨 때 우린 이 시커먼 속내를 나 자신도 모를 때가 있다. 그들처럼 믿을 만한 사람들이 밝혀내는 이토록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이야기 안에선 결국 믿을 수 밖에 없는 이 시커먼 이야기야 말로 우리가 가장 몰래 떠들고 조용히 펼쳐보고 싶었던 이 시대 가장 인간된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한 번쯤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탐정이 되어 좇고 쫓기는 게임을 하고 온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기실, 그 누구도 아닌 내 속을 알아보는 일이 되버릴 줄 미처 몰랐기에 나는 가만히 책을 내려놓는다. 추리하고 싶을 때 나는 또 탐정을 찾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부자도 레벨도 되지 않으므로 히가시노 게이고란 그 이름만 기억하겠다. 그들은 늘 마지막에 오듯이, 추리의 끝에서 나는 몰래 그를 기다릴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이 알라딘에서 오래활동한 물만두님을 추모하기 위해 개최된 리뷰대회 참가글임에 죄송스런 마음이 앞선다. 평소 장르문학을 즐기지도 않았고 물만두님의 서재에 방문한 적도 없는데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이 한참 마음에 걸려 나는 글을 적어놓고도 사실 며칠 망설였다. 그런데,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그분을 애도할 기회도 또 부러 찾아가 인사드릴 염치도 안될 것 같아 나는 이 글로 내 작은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해서 책 읽고 글 쓰는 그 한가지 일, 습관적으로 참여하던 여타 리뷰대회와는 많이도 다르게 느껴졌다. 얼굴도 모르고 한 번의 스침도 없었던 분이지만 부고 소식을 듣고 목이 메어왔던 건 그저 이렇게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같은 작업을 해왔다는 연민때문이었을까. 마침표를 찍고 나니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이 오늘따라 사무친다. 하지만 오늘 내가 이렇게 그의 뜻을 그리워하듯 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으니 그가 읽어온 책들과 쌓아온 글들이 결코 헛된 작업이 아니었음을 엄숙하게 깨닫는다.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아마도 물만두님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그때마다 그 곳에서 잘 계신지 나는 이 곳에서 잘 있다고 언젠가 한번은 꼭 만나자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그의 명복을 비는 건 아마도 그가 했던 방식대로 오늘처럼 읽고 쓰는 일, 이 순간의 소중한 기억, 그리고 이토록 시린 감사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