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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내 입 밖으로 말하였을 때 그는 한 개의 심장에 치명적인 무리가 오는 일이라 답하였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에 백 만가지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말할 수 없이 슬픈 일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기쁜 일이라고 하였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아직도 그 대답을 심장에 고이 간직한 질문자로서 소위 심장에 무리가 간다는 말의 뜻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 소설의 제목이 <나라의 심장부에서>임에 반응하는 자연스런 연상효과였다. 급격히 흥분된다거나 가슴이 터질듯이 기쁘다거나 반대로 찢겨지듯 가슴이 아픈 상태가 아니라 극심한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는 상태야 말로 심장에 가장 확실한 무리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무게라는 것이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때 보다는 양쪽 다 팽팽하게 물러서지 않을 때 그 긴장감의 피로도가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다. 즉, 너무나 미운데도 결국 좋아할 수밖에 없다거나, 더없이 고독하지만 그것으로도 전부 타버릴 것 같이 완전할 때, 그럴 때야 말로 심장은 버티기가 힘들어 무리가 가는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의 원제는 <In the Heart of the country> 로서 '나라'와 '심장'이라는 단어의 직역을 그대로 제목으로 앞세운 소설이다. 표면적으로는 남아프리카의 어느 황량한 시골마을이 그 중심무대가 된다고 볼 수 있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점점 그곳, 'the country'는 무인도와 같이 외딴섬처럼 정박해있는 관념상의 고독지대 혹은 그 정점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시각으로 본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일은 곧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주인공은 너무나 여러 곳의 나라를 표류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먼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식민지로 둔 네덜란드계 백인(아프리카너)이 부모였던 존 쿠시의 언어적 배경과(존 쿠시는 모국어인 아프리칸스를 사용하지 않고 덜 억압적이었던 영어로 글을 썼다는)소설 속 인물들이 남아프리카의 시골에 사는 아프리카너와 그들의 하인이었다는 설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식민주의자와 피식민주의자들 간의 이념적 충돌이나 그로 발생하는 내적 갈등을 그린 소설로 이해하진 않았다. 오히려 사상과 관념적 세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상상력을 과시한 마력의 주인공 마그다의 이야기는 특수한 가족간의 관계에서 성역할과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이 어떻게 지배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보편적인 소재로 받아들여졌다.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자극이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식민지가 되어본 경력이 있는 우리로서는 일종의 참신한 기획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이렇게 철저히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성찰하는 존재론적 담론이 소설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문제인지 신기에 가깝다 할 것이다.
여기에는 아마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라는 단순 역학적 문제뿐만이 아닌 피부색이 다른 인종적 문제가 추가개입 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우리의 경우 우리를 지배한 일본나라의 국민이 우리와 피부색이 달라서 생기는 갈등은 애초부터 상상할 수 없기에 우리처럼 국가의 독립, 나라사랑에 대한 애국적 문제보다는 주인과 노예, 성적역할과 지위등이 보다 상처깊게 팽배해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 작품에서 백인이라는 지주 아버지와 흑인 딸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딸의 입장은 갈색인종으로서의 혼혈이라는 꼬리표에 노예라는 하위계층적 지위, 여성으로서의 성적대상이라는 악조건을 삼중고로 짊어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불행한 신분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가정과 사회에 드러나는 외적인 사건과 갈등을 그린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무한대로 펼쳐보였다는 점에서 기실 식민지국가를 배경으로한 소설의 차별화에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 소설은 아버지와 딸, 몇 명의 하인은 실재하지만 그들 간의 사건이나 사실은 부재함으로써 이야기의 존재를 점진적으로 구축해나가고 있다. 먼저, 이야기속의 화자인 마그다라는 노처녀는 처음엔 경미한듯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증상이 심해지는 일종의 정신분열증 환자와도 같았다. 이 증상은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겨우 진정되는 국면을 취하고 있는데 때문에 이야기를 끊어서 전달하는 단문형식은 특정 병리현상을 낱낱이 기록하는 의료용 차트 이거나 상담을 정리한 환자노트로 받아들여졌다. 굳이 이러한 형식이 구성상 중요하여 총 266개의 번호가 필요했는지는 작가만이 아는 비밀이겠지만 번호가 없더라도 서사를 이해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구성인 점을 감안하면 일련의 번호들은 주인공이 말하고 전달하는 수많은 상상의 파편을 조각조각 이어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느낌은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더 분명했다. 절대 방대한 장편의 이야기를 읽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단락 단락 생각의 편린들을 마치 길거리의 휴지를 줍듯 하나씩 그러모아 보았다는 콜렉션의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전개되고 서사가 분명해지면서 무언가 쌓여간다는 느낌보다는 이야기를 할수록 공중에 유영하는 공허한 말들의 조각들이 떠돈다는 느낌, 결국 마음이 어지러워지는 파국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 서사의 균열은 곧 화자의 정신상태를 의미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 소설은 굉장히 아픈 소설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화자 마그다의 아버진 농장의 주인이며 어머니는 죽었고 표면적으로는 하인들을 관리하는 지배인격이지만 실상은 그들과 같이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하녀의 일상이 그녀의 전부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와 일절의 연애및 성적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노처녀로서 아버지가 데려온 둘째부인과 하인 헨드릭의 아내 안나를 같은 여성으로서 부러워하면서도 경쟁적으로 시기, 질투하는 여심의 주인공이었다. 아버지와의 무미건조한 식사나 하인과 다를 바 없는 대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자신이 느끼는 인간적 감정에 대한 연민이나 섬세함으로 표현하지 않고 대부분 자연이나 벌레에 대한 사랑의 서사시로 자주 그려진다. 그리고 하인들이 주인에게 경외감을 느끼는 동시에 복수심을 느끼는 분노의 이중적 감정을 자신 역시 아버지에게 똑같이 느끼는 존재로 동격화되곤 한다.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를 꾸미고 늘리는데서 유일한 위로를 받는 것이다.
- 나는 나를 창조하는 말들로 나 자신을 창조한다. 18p
그녀는 주로 방안에서 바깥으로 부터의 미세한 인기척이나 하인들의 발걸음, 그들이 반복하는 노동의 종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상상의 여행을 시작하고 그곳에서 자신을 학대, 파멸시킨 후 자신은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의 여부를 질문하는 것으로 여정을 마무리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때문에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상상인지 그 경계는 그녀가 이야기를 진행할수록 더 모호해지며 그녀역시도 그 이야기 속에서 현실로 회귀할 의지를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극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보여지는 아버지 살해및 사체유기, 하인으로부터의 강간및 구걸의 서사도 시작과 끝이 뚜렷하지 않아 진실과 허구의 영역구분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죽음이나 배신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 그로인한 내 심리, 감정의 상태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무리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도 그녀에게 큰일로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상황이 자신의 이야기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인지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번민하는 것으로 보였다. 방안에 틀어박혀 노파가 되어가는 자신의 고독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 것인지 모든 것은 고독이라는 완성을 향해 투입되는 불량의 재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쳇바퀴와도 같은 정신병의 단면을 거의 나노단위로 쪼개어 관념의 인수분해를 해내었다는 생각이다. 실로, 말하여 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찬란한 향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도저히 생성 될 수도 답할 수 없는 것들로만 이루어진 질문이었다. 흡사 지하 몇 십미터의 갱도를 추적해 들어가는 탐사기의 추진력으로 작가의 에너지는 충만해보였다.
-나는, 말을 넘어선 진정한 나는, 하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바닥을 닦게 만든 폭력이 미지의 곳에서 미지의 곳으로 우당탕탕 지나가는 시간의 한 순간에, 공간의 한 지점에 그저 존재한다는 것 이상으로 더 깊이 이 현상에 관여했는가? 34p
이처럼 마그다가 쏟아내는 독백은 구원받지 못한 말들의 '미로'요, 그러한 말들과 함께 떠도는 자신은 '행성'이나 '사막'에 내버려진 '귀신'과도 같은 존재라 말한다. 그녀는 '고통'에 의존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그 고통의 한 복판에는 '증오'와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이 어린아이였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과 인간한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기존재의 부정만이 유일한 존재근거가 되는 전형적인 정신질환이다. 이 블랙홀과도 같은 현상으로 그녀는 자신 스스로가 '구멍'난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은 소용돌이의 '구멍'으로 인식하지만 실은 그 '구멍'을 메울 수 있는 단하나의 방법은 사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구멍'으로 아버지를 밀어 넣음으로써 어떠한 희망도 차단하는 파행을 결단한다. 그것만이 영원히 '구멍'날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인생을 고독하게 채우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구멍'난 여자로서 헨드릭과의 일말의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도 사실이긴 하나 그 역시 아버지의 부재로 등장한 새로운 부재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 페이지를 넘기면서 결국 혼자 남아 고독한 외딴섬에서 울고 있을 그녀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은 이야기의 완성을 향한 그녀의 집착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어떠한 비명이나, 비탄, 신음소리 하나 없이 처절하게 자유로운 고독의 상태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만이 완성한 '나라'의 '심장'부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비로소 생명성을 가지는 것. 그것은 암녹색 원피스를 입은 갈색피부의 나이든 한 여인의 건강한 심장이 아니었을까. 오로지 혼자서 만이 이룩해내는 말들의 교감에서 얻어지는 황홀한 에너지, 그래서 고독은 황홀할 수 있으며 그로써 위안이 되는 그녀의 인생은 누구보다 활기찬 펌프질을 할 것이기에. 이 무절제한 펌프질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가 생산될 수 없는 상황, 타자나 주변요인이 자신을 억압하지 않는 환경으로 인식되었다.
그녀가 생산해 내는 이야기 '나라'에서 그녀는 종종 회색나방이나 흰색유충, 갈색개미, 검은 거미등의 곤충으로 꿈틀거린다. 나는 이것이 자학의 코드라기 보다는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나름의 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대부분 아버지의 명령어에 길들여진 반항심리에서 비롯된 언어였다는 점에서 그녀가 제창한 위계질서의 언어, 간격과 원근의 언어로서의 父국어는 소름끼치도록 창의적인 개념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이 말하고 싶은 母국어가 아닌 모든 것에 일정한 거리를 둔 패러디, 즉 가면과 가식의 언어라는 것. 그러므로 그녀가 자신을 말하는 언어는 식민지 시대에 강대국의 위선과 폭압에 대응하는 방어기제로서의 언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문학이나 예술의 힘 못지 않게 이 언어의 힘을 믿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가 흑인차별의 중심이 된 母국어로서의 아파르헤이트의 언어 아프리칸스를 사용치 않고 영어로 글을 썼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가지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문학하는 방식을 이 작품에 그대로 실천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의 母국어는 곧 마그다의 父국어이기도 했는데 마그다는 지배계급의 자녀였으면서도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는 父국어에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으로 등장한다. 식민지 정책중 가장 지배적인 정신적 폭력은 아마도 모국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만행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마그다에게 父국어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제공한 일등공신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후반부에 마그다는 자신이 생산해낸 이야기로서의 말들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들이 멈추었다면 자신은 어디에 있었을지 자문하는 대목이 있다. 마그다는 父국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혹시 자신만의 착각일지 모르는 이 모든 것의 사유가 자신 내부에서 이성적인 목소리가 되어 자신을 일깨우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지막 목소리는 사실 가장 마그다 답지 않은 제정신인 목소리이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이는 다분 작가의 설득으로도 들려왔다. 미래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없는 삶의 무료함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마그다를 옹호하는 변론은 흡사 법정에서 피고를 변호하는 변호사와도 같았다. 규칙에 갇힌 사람이 모험을 선택하며 결백한 피해자로선 범죄보다 고통이 중요하며 노예가 되면 옳고 그름을 종속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변론이 그것이었다.
모든 변론을 마친 뒤 마그다가 돌아선 행위는 말로써 이야기를 짓는 것이 아닌 쓰는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그리는 것이었다. 父국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한 단계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그녀가 가상의 스페인어로 노래한 시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의 서정시였다. 모국어와 부국어도 아닌 주인도 노예도 아닌 그 둘을 이어주는 가교로서의 매개체, 중선(中線)으로서의 언어였다. 언어라는 것이 관계의 부조리와 역할의 억압을 초래하는 시스템이지만 결국 그 모순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시 언어라는 조화가 아니겠냐는 작가의 신념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이해되었다. 제 3의 언어로 시를 짓다. 정신병자의 통렬한 반전이 아닐까.
이 작품은 인간 존재의 고독의 기원을 곧 욕망이 집결되는 장소라 보고 그 '심장'을 향해 이야기라는 '나라'를 건립한 이야기였다. 그 고독한 '나라'에서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간 마그다는 '언어'라는 매개체를 사용해 스스로 내적인 균형을 이룰 수 박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언어'의 힘을 믿는 마그다는 마지막에 자신들의 모든 질문에 답해주는 문학작품이 있으리라는 믿음을 피력한다. 세상 누구보다 고독하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자신을 향해 용기를 선사하는 선언이었다. 정신분열이 이루어낸 쾌거이자 승리였다.
언어와 문학의 힘을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작품으로 보여준 작가의 집요함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단일민족으로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우리들은 사실 몇 개 국어를 공용으로 배우고 사용하는 유럽측의 정서와는 다른 획일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어떠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정치적, 역사적, 문화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상이하다는 현실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과거 식민지 국가로서 우리 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언어에 있어서는 늘 수동적인 태도로 다양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 존 쿠시의 작품을 처음 읽으면서 식민지국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이러한 주제로 형상화 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랐고 가식적인 父국어와 고집스런 母국어에 대응해 혼란스런 정체성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언어라는 매개체라는 결론을 보고 그 참신한 해석에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제 3의 언어같은 것은 생각지도 못한 크리에이티브였다. 솔직히 이런 류의 소설은 우리나라에선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감도 들었음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는 것 못지 않게 세상의 것을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 더 넓은 시야와 열린 마음이 아니고선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신년부터 혁명적인 소설을 접했다. 독자든 작가든 이런 작품이 이 '나라'의 문학에, 소설이라는 '심장'에 부디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문득 내 '나라'의 '심장'은 어디일까 싶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고 예외없이 욕망한다. 우주의 배꼽에 욕망의 발현지가 있다하면 그 배꼽에서 뻗어 나와 한시절 유영하다 다시 귀환할 곳은 어디인가. 진정한 사랑만이 해답이라 그 낭만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마그다의 선택이 퍽 마음에 든다. 자신만이 만들 수 있고 떠돌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을 더욱 성장시키는 이야기, 그 고독의 절정지에서 규칙적으로 뛰고 있을 단 하나의 심장이 그리운 밤이다. 그곳은 아마도 완전한 자유로 실현된 가장 아름답고 비밀스런 유일한 아지트가 아닐까. 나는 오늘도 그곳을 향해 이 뼛속시린 외로움을 벗삼는다. 가장 고독하면서도 가장 기쁠 그 치명적 순간을 기다린다. 하트파탈(Heart Fatale), 그 순간을 위해 내 고독의 무게와 내 환희의 무게를 공평하게 조율하겠다. 내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리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