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대한 나의 생각>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나에게 이제는 몸의 한부분이다.

공기를 마셔야 살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 책읽기는 하루를 살아가는 소중한 부분이다. 중독되었다.  그렇다.  중독되기를 바랬는 데 이제 정말 중독이 된 듯 하다.




독서를 함으로써 내 자신이 커가는 것을 느낀다.

항상 걷기만 하는 사람이 뛰는 듯한 느낌이, 내 몸 어느 곳에서 날개가 달린 듯 이 가끔은 이유없는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요즘 서재의 책들을 보면 흐뭇하다.

거실에 있는 서재의 책장을 보노라면 2천권 가까이 되는 듯 한데 한권한권의 사연이 있기에 어린 자식들 보는 착각이 든다.

내가 직접 서점에 들려서 구입한 책들, 알라딘 서점에서 주문한 책들, 어느 병원이나 남의 집에서 한권 빌리거나 위치이동한 책들,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 주워온 책들...

어느 한권 소중하지 않은 책들이 없다.




내 급하고 다혈질 성격에 책을 좋아하는 내 성격이 정말 좋다.

요즘은 “ 이청준” “ 안정효” " 이문열“  이런 문학 작품들을 같이 읽고 있다.

책도 편식하면 안 되는데 내가 너무 제테크, 성공학 책들만 읽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책은 나에게 길을 알려주는 지도와 망망대해를 떠도는 바다에서의 등대와 같은 존재이다.

왜 사냐고 묻는 다면 책읽는 재미가 솔찬하오... 나는 말 할 수 있다...

세상을 사는 힘,  이것은 나의 힘이요, 열정이요, 꿈이다.

진정한 나의 꿈은 한 장의 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책 읽는 독서를 게을리 할 수가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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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의 책       2008년 2월 3일







<카네기 인생철학>   <자조론/인격론>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향연>

오늘 아침 대동서림에서 이 책을 3권 구입하였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 지 모른다.

분명 내 돈으로 샀고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좋다. 내 안에서 재산이 하나 둘 셋 쌓인 느낌이다. 책을 쌓은 놓은 기분과 읽어야 할 설렘과 읽을 때의 기분과 읽고 난 후의 여러기분이 한데다 모인 기분이다.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의 작가 이지성씨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나는 이런 문학류, 철학책은 정말이지 이제까지 관심밖의 책들이었다.

현실적이고 살아가는 데 실화적인 이야기와 책들을 선호했었다.

그것만이 내 성공의 밑거름이라고 생각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고전 철학의 중요성을 이작가는 너무 일목요연하게 잘 표현해 놓았다.

몇 백년전의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살아가는 데 분명 철학책이 길잡이를 해 줄것이라는 데에 중점을 둔 마음을 내가 믿기로 했다.




하여 대동서림에 가서 플라톤의 책부터 여러 책들을 찾다가 동서문화사의 여러 책들을 보는순간 노다지 금광을 찾은 듯 기뻐 소리치고 싶었다.

세상에 월드북 100권 시리즈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양장본에 깔금한 책표지부터 두꺼운 내용들에 비해 가격이 정말 거저다. 특히 데일카네기의 <카네기의 철학> 같은 책은 543page에 9800원 밖에 안한다.   다른 어설픈 책 2권 분량인데 가격이 이정도면 정말 거저로 책을 판매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책은 823면인데 15000원 밖에 안한다.

이 가격이면 정말 거저다.  그것도 양장본에 전문서적아닌가?

최소 3~4만원이라도 살 책인데 말이다.  

그순간 동서문화사 대표 사장님께 꼭 감사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진정한 출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집에 2000권이 넘는 책이 있지만 이 세권의 책을 사는 순간처럼 기뻤던 적도 없고 남은 월드북 100권을 한권한권 살 생각을 하니 너무 기분이 좋고 설렌다.

시중에 떠도는 대필작가들의 쓰레기같은 책들도 12000원에서 15000원하는 책들이 그리 많은데 이렇게 알차게 디자인에 내용에 양장본까지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내 자신에게 정말 감사한 선물이다.




자 어서 한권 한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고 깨우치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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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왜 벌어야 하는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보았기 때문에, 얼마나 힘듦을 알기에, 그렇게 다시 살고 싶지 않기에 돈을 벌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다시 힘들게도 살 수가 있다.

고통을 당해보았기 때문에 다시는 그것이 싫은 것이다.

 

우리는 지인의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하여 병문안을 간다.

링거를 꼳고 누워서 있는 그를 보면서 일순 안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속으로 내가 저 자림에 있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라고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누어있는 당사자가 나라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세상은 넓고 깊고 무궁무진하다.경기도의 몇곳을 들러보고 대한민국을 다 돌아 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국이나 중국을 여행해보고 세계를 다 여행했다고도 하지 못한다.

세상은 단순하다.  아니 어려우면서도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해보면 되는 것이다.

내가 모든 일을 해보면 시간이라는 자유를 얻어야하겠지...

삶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시간을 지배하는 자이다.똑같은 자유인일터인데 누구는 왜 힘이들고 누구는 왜 콧노래를 부를까?

 

시간은 돈으로른 살 수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의 자유를 얻은 이는 일과 목표를 이루었기에 더 오래 살고 건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운동할 시간도 많고 휴식할 시간도 많으면서 좋은 음식만을 먹는다.

또한 좋은 경치속에서 좋은 공기만을 먹고 살기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좋은 조건속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 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항상 최고급 병원에서 최고의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

 

못된 병이 몸을 힘들어 있는데 돈이 없어 수술을 못 할 상황이라면 여기저기 융통할 곳이 없어 내 가족이 힘들어 한다면....그래도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기가 쉬을 것인가?

누군가 " 돈을 많이 번 후에도 불행했고 돈이 없었을 때에도 불행했다. 하지만 돈 많고 불행한 것이 낫다."  라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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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있습니다.

비라는 것이 참으로 사람마음을 상념의 시간으로 젖게만듭니다.

 

어린시절.. 국민학교 4학년때로 기억이 됩니다.

학교를 마친후 비가 엄청 온날이었답니다.

어쩌면 하루내내 왔다고 보아야 되겠죠.

우산을 안가지고 왔었답니다.

어쩌나....   고민이 많이 되었답니다.

가까운 곳에 외할머니가 사셨는데  할머니에게 부탁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홀로이 걸었답니다.

이러다가 그치겠지 ..어린마음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리 크지는 않았기에

홀로이 걸었답니다.

 

당시 집은 외딴집 이었습니다.

걸어서 50여분정도 한시간이 채안걸리는 외딴집...

출발한지 10분도 채 되지않아 몸이 젖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싫지도 않았습니다.

지금같은 여름이가는 늦여름이었기에 춥지도 않았답니다.

그렇게 걷다보니 비의 양을 책가방이나 혹은 어떻게든 줄일수 있었을 텐데

저는 더욱 비를 맞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예 젖은몸  홀닥 다 젖어버리자 그리고 비에 맞은 새앙쥐 꼴이 되자...

 

그랬습니다.

어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들이 이렇게 비를 맞고 왔습니다.

이비를 한방울도 피하지 아니하고 쫄닥 맞고 왔습니다.

어머니!

저 대견하죠...  아님 이렇게 비를 맞았으니까 맛있는 것좀 해주세요..

아님  위로의 말씀좀 해주세요...

아님 이놈아  왜 우산쓰고 오지 이비를 다 맞고 왔냐...

혼이라도 내주세요..."

 

머리속에는 이런상상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걷는 순간이 왜그리 좋았는지요..

지금도 뚜렷이 느낄수 있답니다.

무언가에 기대를 하고 있고, 잠시후면 다가올 희망과 따스함이 나를 들뜨게 만들었답니다.

감상일수도 있고 자그마한 서정의 작은 테두리를 홀로이 즐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순간만큼은 앞으로 다가올 행복의 시간들을 상상하면서 마냥 즐거웠답니다.

 

그렇게 한시간을 비에 젖어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 께서는 사랑과정성으로  아들을 살갑게 맞아 주셨답니다.

책가방도 받아주시고, 옷도 갈아 입혀주시고 밥도 주시고, 따뜻한 말씀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시 그렇게 좋아하는 부침개도 해주셨답니다.

정말 행복했습니다.

가슴이 뿌듯해지며 울컥하는 무언가가 올라왔습니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야...

어머니는 결코 자식을 실망시키지 않아..

이비를 한시간 맞고 온 보람이 있었어.

결코 기대이상이지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셨어...

진정으로 따뜻하고 행복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때 오늘보다 비가 더욱 많이 오던 여름 이었답니다.

청춘의 가장 큰 바다의 시간이었었고 하루하루가 무어가 그리도 좋은지

무어가 그리도 고민도 많은지, 하루하루의  변화의 시간들에 푹 빠져있던 내 젊은날의

아까워 부여잡고 싶었던 순간들중...

이렇게 비가 많이 오던 그어느날..

학교를 파한후 비가 쏟아 지는데, 얼마나 많이 쏟아 지는지 멍하니 비만 바라보던 그순간...

 

빗속을 뚫고 뛰고 싶었습니다.

몇십분 비좀 맞는다고 큰일 생기냐..

달리고 싶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곳으로 전력질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친구 2명과 야---- 소리를 지르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뛰었습니다.

앞만보고 거칠게 없이 뛰었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뺨을 가르고, 눈을 때리지만 게으치않고 뛰었습니다.

주위에선 사람들이 저런 미친놈들 봤나  하는 시선이었습니다.

심장이 터져라.. 호흡이 끊어져라  뛰었습니다.

골목과 골목사이를 가로 지르면서 친구와 번갈아 가면서 뛰었습니다.

숨이 턱까지 몰아 쳤지만  그 고통을 즐기면서 내달였습니다.

 나는 청춘의 열차 였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해 만들어준 레일 이었습니다.

마지막 한방울의 땀까지도 밷어낸 것은  내 자취방 ...

그곳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여전히 비가 내리는 하늘...

쏟아지는 저 빗방울...

눈가 옆에 흐르는 땀과 빗방울...

후련하구나.... 그리고 너무도 행복하구나..

 

친구와 두부를 송송 썬 빨간 김치찌개를 끓여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지금도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살아가며 속고 속이고, 사람이 사람을 힘들게하는, 정이 없어져가는 냉정한 세상속에서

어쩌면 나는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여린마음으로 어쩌면 세상사람들도 나처럼 가슴으로 따듯하게 살아가길 바라면서

착각의 그늘에서 위선을 떨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이해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내 마음처럼 되어 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정을 주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롭고 지혜로운 눈빛을 가진,  정을 듬뿍 나눌수 있는

몇몇 사람들과 세상을 같이 하고저 합니다.

가끔은 나를 실망시켜도, 나를 웃음 짖지 못하게하는 상황이와도

그래도 좋은 밉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제 곁에 많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저에게는 저 내리는 비처럼...

한방울의 비처럼, 한방울의 희망이 다가오는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비...

나에게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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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

어느덧 내가 군입대를 한지도 20개월 가까이 흐른 것이다.

상병6호봉 까지 오르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 그리고 밤이슬을 맞으며 아내을  얼마나 그리워 했던가.  거꾸로 돌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했는데 나에게도 그런  똑같은 시간 이었지만 왜 그리도 더디게 갔던 시간들 이었던가...

병장이 그리 멀리 있지도 않았다.  고참들에게도 인정 받고 나름데로 나의 위치도 굳건히 다져진 그런 시간이었었고 군생활도 이제는 꽃을 조금씩 피울때가 된것이다.

아직 제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예전 이병, 일병 때에 비하면, 갓 상병일때에 비하면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군대활 이라는 것이 훈련 아니면 교육, 경계근무, 것도 아니면 남는것은 작업 아니던가.

저 산을 떠서 이 산으로 옮겨라 하면 하는것이 군대아닌가?

유난히 그 즈음  작업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후임 몇명과 굵기가 큰 나무를 몇그루 캐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 심으라는 명을 받고 작업을 하는 날이 있었다.

5명이 작업을 하였는데 그 당시 이병은 두명이었다.

이제 자대배치 받아 온지 2달은 넘긴 신병인 것이다.

군대라는 것이 잘 못해도 열심히 하려는 의욕과 목소리가  우렁차야 되는 곳 아니던가?

누구는 태어나면서 부터 삽질 잘하고, 쾡이질 잘하고 낫질 잘하는가?

그런데 유독 의욕도 없고 신병이 신병 답지 않고 작업에 성의가 없는 이병이 있었다.

(이제부터  이름과 성을 따지지 않고 이 이병을 "공이병"이라 부르자.  나에게 공부를 가르쳤으니, 아주 중요한 공부를 가르 쳤으니..)

 

작업에 나도 고참이라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열외를 하지는 않았다.

어릴때 부터 해온 삽질이고 일이었으니 체질 이었다.  서투른 후임에게는 가르쳤다.

곱게 자라서 군대 올때까지 삽 자루 한번 , 이런 작업 한번 못해본 후임도 많았다.

그런데 오늘 이 작업에 너무도 서투르고 성의가 없는 공이병...

" 야  그렇게 해 가지고 날 새겠다.

임마!  삽질은 이렇게 하는거야 .  잘 보아라."

내가 시범을 보였다. 이런 저런 설명을 해가며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살짝 얼굴에 미소를 띄는 것이 아닌가?

신병이 낼 모래면 상병 선임 될 고참 앞에서 살짝 웃는다.

하도 기가 막히고 가소로워서 웃으면서 내가 그랬다.

 

" 이놈 봐라 . 고참이 직접 가르쳐 주는데 쪼개냐? "

하면서 삽자루로 장난스럽게 이마를 툭 쳤다.

그런데 이마위에 머리에 삽 자루 중간인 나무가 아닌 쇠에 맞은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살짝 긁였다.

나는 장난 이었지만 쇠로 친 것이 미안해서

" 야 고의가 아니었다.  미안하구나.  그러게 어디 고참앞에서 까부냐. "

내가 고참이고 상대는 이병이었지만 명분도 없이 함부로 구타를 하지는 않을 때였다.

군 체계상 냉정하게 서열을 따지고 계급상의 상하 체계는 엄격했지만 작업을 하거나 같이

일을 할때면 고향 형처럼 편안하고 인간적으로 대해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도 똑같이 겪어온 시간들 아니었던가?

작업을 하던중 빵과 음료를 px 에서 사가지고 왔고 같이 나누어 먹던중

공이병의 머리를 보니 아까는 쾐찮았던 부분이 피가 약간 묻어 있었다.

나는 장갑으로 닦아 주었고 또 한번의 사과를 했었다.

그런 "공이병도 쾐찮습니다.  뭐 이런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

그렇게 아무일도 아닌것처럼 지나갔고 그 보다 더한 일들도 많이도 지나갔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아무일도 아닌것 같은 그일이, 참으로 남들이 보기에 장난이었다 보였던 그일이,

 

나를 그 숨쉬기도 힘들게 할만큼 고통을 주는 일이 될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후 십여일이 흘렀고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이병은 첫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저 휴가를 가려니 했었다...

 

공이병이 휴가를 다녀온 다음날 바로 부대는 발칵 뒤집어 지게 되었다.

 

헌병대에서 짚차가 우리 중대에 도착해 구타사고가 일어났으니 상황보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구타 사건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구타금지를 완전히 뿌리 뽑고 가혹행위를 근절 한다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심하진 않았지만하루아침에 이루어 진다는 말인가?     그리고 대체 누가 연루가 되었다는 말인가.

그런데 다름 아닌 나와 김상병이 상황실로 호출을 받게 된것이다.

 (김상병은 나의 한달 바로밑 후임이라 굉장히 친했고 아끼는 후임이었다, 너무 친하여 나중에는 둘이 있을때는 형, 동생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아니 자다가 홍두깨도 아니고 나와 김상병이 누구를, 대체 무슨일로 구타를 했다는 말인가?

 

사건 전말은 이러했다.

공이병이  휴가를 나가서 집에서 모든 이야기를  말했단다.

그리고 집 에서는 아주 끝발있는 그 누군가에게 말했단다.

 

" 김상병은 아주 집합을 너무 자주시키고, 차마 말할수 없을 정도로 가혹행위와 언행에

군생활을 감당할수 없을정도로 정신 적인 피해를 주고 후임들을 갈군다는 것이다.

그 강도가 지나쳐 도저히 군생활을 할수가 없더란다. 그리고 귀뺨을 한차례 맞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 나는 항상 욕을 살벌하게 하여 사람 기를 죽이고, 상습적으로 후임들을 집합시키고 후임들에게 공포의대상 이기에 후임들이 군생활을 하기에 사사로이 괴롭게 한다는 가혹행위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십여일 전 작업때 삽으로 머리를 고의로 내려쳐서 엄청난 피를 흘렸고

머리가 아파서 몇일을 생활하기 힘들게한 고참이다. 그때 맞았던 충격으로 군생활이 무섭고 힘들어 같이 군생활을 못하겠다는 것이다."

 

김상병과 나는 아주 사람도 아닌 인간백정에 흉악범이 되어 있었다.

너무도 어이가 없고 한심해서 우리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우리는 피의자가 되게금 만들어져 있었다.

우선 공이병은 대학때 데모 가담 또는 학생운동을 참여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그러니 이런 일들에 대하여 논리가 정연하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겠지.

사전에 벌써 이를 갈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든 등뒤로 비수를 꼽으려고 준비를 철저히

각오를 한것이었다.  아주 나와 김상병을  벼랑으로 떨어 뜨리려 작심을 한듯하다.

사람이 이토록 앙심을 품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알수가 없으니..

그리고 아주 잘맞아 떨어지는 것이 집안친척이 국방부 고급장교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우리 두사람 정도는 엿 먹이기에는 힘이 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밤을 세우듯 진술서를 몇백장을 쓰고 찟고 다시 쓰고 반복 하기를 이틀여..

그 당시 작업 하였던 후임들까지 다 불여들어 확인대조에 같이 진술서를 쓰기를 또 하루..

탈렌트도 아니건만 그 많은 간부들 앞에서  그 현장과 같은 재현 하기를 수십번...

징계위원회는 사람을 아주 범죄자로 만들었고  정신을 너무도 힘들게 하는 고문이었다.

말이 생각도 나지 않건만 그 당시 했던 말을 똑같이 하라는 주문, 삽을 어느 각도로 쳐서 어떻게 맞았고  어떻게 피가 났는지, 심지어 욕은 어떤 욕을 어떻게 했는지 까지 ..

거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나는 중죄인이 되어 갔다.

그렇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7일이 흘러갔다.

말이 7일이지 잠은 제데로 자지도 못했지, 신경은 머리끝까지 곤두서  머리 속은 폭발 할것만 같아 사는 것이 사는게 아니었다.

 

그래.  좋다.

내가 심했다 치자,  아무리 군대라지만 내가 욕도 심하고 후임들을 집합시키고 많이도 힘들게 했다고 치자.  거친 행동을 했다고 하자, 내 자신을 합리화 시켜 내기준으로 판단하고 생각하여 후임들을 힘들게 했다고 하자.

하지만 이 군대라는 곳이 뭐하는 곳인가?

양촌리 청년들  회관에 모여 친목다짐 하는 곳인가?

아니면 중고생들 보이스카우트 주말 체험 현장인가?

왜 좋은 말로 하고 잘 동생 처럼 해주지, 때리고 욕 하냐고?

나도 묻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

 

대체 시원하게 때려나 보고 주먹질 이나 해보았음 억울 하지나 않지..

저기 김상병은 또 뭐람, 나는 삽으로 때려서  그랬다고나 하자 ..

저 친구는 얼마나 더욱 억울 하겠나....?

(공이병 정도면 죠수아님의 저서 "33세 14억 " 에 사격장 사건에서 처럼 가까이에 있었다면 나 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사람이다.)

 

그렇게 시간이 몇일 가면서 가장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일부러 공이병을 우리 가까이에 오게도,같이 있게도 하지 않았지만  저멀리 보이는

공이병에게 달려가  내안에 또다른 내가 법으로 금지된 그 어떠한 행위라고 할것같은, 폭발할것 같은  그 어떤 충동을 자제하는 것이 참으로 정말 참으로 크게  두려웠다...

그렇게 10일 가까이 흐르니 연병장을 돌던지, 군기 교육대를 가던지, 군대영창을 가던지

그래 무엇이라도 좋으니 빨리 결말이 나기를 고대 했다.

어차피 사람 죽으로 가는 곳도 아니고 어떻게든, 어느 곳에 가든 이 힘든 시간을 탈출 하고 싶었다. 이것은 사느니 사는 것이 아니었고 어데든 이순간 보다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리고 몇일후 결말이 났다.

군대영창 15일!

15일이라..  그래 이제야 마음이 홀가분 하구나.  이제까지 이겨온 시간이 13일 이었다.

그 15일 못견디랴.   그 곳도 사람사는 곳이 아니 겠는가?

그래 이제야 숨을 제대로 쉴수 있겠구나..

무심코 던진 돌맹이 하나에 개구리가 배터져 죽었고 나는 그 댓가를 정말 무참히도 치루는 구나,  내가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 돌맹이 였는데...

 

그 밤에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일주일에 2~3 통씩 편지를 보냈는데 15일을 보내지 않으면 걱정을 하겠지.

적당한 분량으로 훈련중이고 바빠서 그런다고 군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나는 아주 잘 지내는 것처럼 편지 3통을 썼다.

후임에게 5일 간격으로 부치라는 당부를 꼭 전했다.

그리고 날짜는 다르게 썼고,   보고싶다,, 그리고 사랑한다 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그 순간 만큼은 이제 까지의 모든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고

너무도 행복했다.  몇일간을 쓸수 없다는 것이 굉장이도 아쉬었지만 나는 그 순간만은

모든 두려움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이 밤이 제발 서서히 가기를 바랬고   그렇게 나는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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