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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오늘 아침

아내를 울리고 말았습니다.
돈이 많아 물질적으로 잘 해주거나 여행 한번 제대로 가본 적은 없지만 아내 마음편하게 해주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1년에 큰 싸움 한번 안하고 말 다툼이나 몇번 할 정도 밖에 안되는 저희 부부가 아침의 일은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저와 아내가 가정을 이루고 산지 어느덧 15년이 되었지만 저는 항상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돈 없고 열심히 살기만 한 나를 믿고 시집와서 알뜰 살뜰하게 살림 잘 해주었습니다.

음식 솜씨가 좋아서 항상 맛있는 음식 해주고 아들 둘 낳아주고 잘 키워주고 모든 집안일에 꼼꼼하게  착하고 사랑스런 사람에게 제가 울리면안되는 데요...
평생 눈에서 눈물 안나게 살게 해준다고 다짐하고 약속했는데 그렇게 쉽게 안되네요.

발단은 이랬습니다.
아내는 항상 아침이면 바쁩니다.
중학교 2학년,초등학교 4학년  두 아들 챙겨야지, 밥 먹여야지, 준비물 준비 해주어야지, 아침의 아내는 전쟁터를 누비는 장군처럼 항상 바쁩니다.

오늘도 그런 전쟁을 치루고 저도 출근 준비를 한 후에 추워진 날씨에 가을 외투를  아내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오늘 나 굉장히 바쁜 날인데 저녁에 해주면 안될까?  " 하는 아내의 말에 나는 어디있느냐는 말을 했고

창고 저쪽에 있다는 아내의말에 "여기냐? 저기냐? " 를 반복했고 찾다가 선반 위에서 털어진 삼겹살 굽는 뚜겅에  제 발을 맞았습니다. "아이구 아파~~ 아니 찾아주면 어디 덧나나...에이 성질나서 살수가 있나..."
저의 이런 저런 궁시렁 끝에 아내가 그 것도 못찾냐고 잔소리를 하면서 저에게 다가와 자기가 하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집은 애가 셋이라면서 ....이거 하나 못찾냐면서"   이런 저런 잔소리를 하기에 저도 모르게 벌컥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항상  뭔 잔소리가 그리 많냐고.  그 잔소리 때문에 더 찾을 것도 못 찾는다"
성질을 부렸습니다. 굽는 불판에 떨어진 발도 아프고 도와주지는 못 할 망정 잔소리만 해대는 아내가 야속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내는 기가 막히다는 듯이 나를 보다가 세탁기 쪽으로 가더니 빨래를 만지다가 털썩 주저앉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서럽고 슬프게 울던지 ...

"내가 표도 안나는 집안일 하면서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 줄 아냐고..."
"애들 학원보내고 남들처럼 돈이나 벌면 되는 데 그걸 못해서 그런줄 아냐고..."
"돈이 많아서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고 하루내내 집안일에 아이들 뒤치닥거리하면 하루가 금방 가는대 좋아서 하는 줄 아냐고..". 아기처럼  펑펑 우는 아내의 말은 계속이어 졌습니다.

없는 형편에 무료로 복지회관에서 배우는 컴퓨터학원 좀 가려고 이렇게 서두르는데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서럽게 하냐는 그 말에 제 가슴에서 무언가 꽉 막히는 아픔이 세겨들어 왔습니다.
"아!  오늘이 아내 복지관 컴퓨터 무료 습하는 날이구나...."


알고 나니 너무도 미안햇습니다.

 나이들기 전에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서 정말 바쁜 시간을 쪼개서 가는 것이라고...


"그나마 가까운 곳에서 무료로 배우는 컴퓨터, 비즈  이외에는 자기 시간이 없다는 아내의 말과 요즘 엄마들 아들들 얼마나 학교에서 일이 많은 줄 아느냐...자식들 잘 보이려고 하루가 멀다하고 청소며 학교일에 자식들보다 더 늦을 때도 있는데 누가 알아주냐고 ...  교회 봉사도 가야하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 모르는 내 자신에게 이렇게라도 내 시간을 만들고 배우지 않으면 나는 무어냐고..."

당신이야  추운날씨에 남자라 돈만 벌어오면 그만이지만 아내로써 엄마로써  주부로써  일인 3역을 한다는 아내의 그 말에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정말 틀린 말이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그 잘난 밖에서 일하고 돈 벌어다 준다는 그 한가지에 어쩌면 아내 홀로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한국남자들 누구 돈 안벌어다는 사람 어디 없지 않습니까...
아침에 그 바쁜 시간에도 점심, 저녁 도시락을 싸주고 항상 도시락 반찬 걱정하는 아내를 보면서 제가 불쑷 "  대충 싸...   그냥 그럭저럭 먹으면 되지...  "
하면  아내가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쉽게 말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줄 알아...    항상 내일 되면 뭐 해먹을까   고민하는 일이 아줌마들이야...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꼭  껴안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 당신 마음 내가 다 알아.  내가 홧김에 그랬어. 다시는 안 그럴게" 하면서 따뜻한 녹차를 한잔 타주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잔소리 하지 말라는 말이 가장 서럽다고 했습니다.

"누가 잔소리를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있어. 자기들 할 일들만 잘 해놓으면 누가 잔소리를 할 것이며, 사용한 물건 제자리, 입은 옷만 바구니에 갔다놓으면  되는 것을 그 것 나 못 도와줘?"
" 누가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래. 바쁠 때 서로 조금만 도와주면 되잖아...

"당신이 힘들게 안 해도 나 힘들일 많아.  말 안해서 그렇지...
하옇튼 여자에게 잔소리 하지 말라는 말은 가장 서운한 말이라는 것을 명심해.  잔소리 말 하니까 또 눈물이 나오려 하네.."  


하면서 아내는 웃는 얼굴로 풀어졌습니다.

 저는 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이 싫습니다. 어떻게 싸우면서 정이 듭니까?
사랑하고 아끼고 살기도 바쁜 세상인데.  상처주고 아픈 말이나 행동은 다시는 아내에게 안하렵니다.
힘차게 웃는 얼굴로 배웅해주는 아내에게 차안에서 고맙고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내에게 온 답장은 이렇습니다.

[제목 : 고마운 꿀물에게]

"좀전에 속이 후련했는데 (울어서 그런 거 겠죠.) 출근하는 당신에게 그래서 미안하고 내 넋두리 다 받아줘서 고마워.  추운데 밖에서 가족 위해 열심히 생활해줘서 고맙고 사랑해요^^"

 

이 문자를 받고 정말 기뻤습니다.
오늘은 일찍 끝내고 저녁에 들어가서 아기처럼 우는 아내를 위하여 동네 가까운 삼겹살 집에서 소주한잔 하면서 아내에게 애교를 많이 피울겁니다. 

자기야!  설빈,찬빈이 엄마!  
진심으로 오늘 미안하고 사랑해요.  항상 내가 당신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앞으로 내가 더 열심히 할께.사랑해요..................^^
가족은 저에게 가장 귀한 둥지입니다

아내와 두아들이 있어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됩니다.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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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잔잔히 오는 것 같아. 소나기도 아니고 이슬비도 아닌 비가 오고 있어.

아침부터 바쁜 당신을 보고 있으면 생기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플 때가 참 많아. 항상 표시도 나지 않는 집안일에 돌덩이같은 아들 두놈 키울랴. 살림할랴. 매장 관리 할랴.  아무리봐도 당신은 슈퍼맨인 것 같아.

오늘은 학교수업 가는 날이라 당신이 더 바빴지. 당연히 일이 두배로 많아지니 짜증도 날거야. 성격이 뽐뽐해서 우리 삼부자에게 맡기지도 못하고 혼자 다 하려 하니 더 힘이 들지.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언제든지 참을 수 있어.
근명여중으로 당신을 바래다 주는 데 나는 항상 기분이 좋더라. 운전기사이기도 하지만 당신에게 웬지 힘이 되는 그 느낌이 나를 기분좋게해. 당신 열심히 사는 모습보면 나는 힘들었던 순간이 다 잊혀지곤 해.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려. 내 소중한 아내를 주심을 항상 감사드려. 내 소중한 아내가 있기에 나는 이 순간도 다가올 힘든 어떤 순간도 이겨낼 수 있어. 두 아들 합한 것보다 당신을 더 사랑해.  한결같은 내 사랑으로 당신을 더 사랑할거야.
당신이라는 꽃을 키우고 가꾸고 관리하고 사랑하는 나는 당신의 정원사.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우리 오늘도 웃음으로 하루를 잘 지내요.
당신을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게 사랑하는 단 한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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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는 고참들의 시선에 반가움의 표현이나 웃음짓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얼어있는 표정,멋적어보이는 엉성한 이등병 계급장과 군복, 새까맣게 탄 피부, 평소의 쾌활한 성격과는 완전 다른 저의 행동에 그녀가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약간은 재미가 있었던지 웃음을 지었습니다.

 

" 응, 고참들이 근처에 있어서 반갑게 맞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깜짝 놀랐어. 어떻게 여기를 찾아온거야?"
저는 조용하게 물어 보았습니다.
"응...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주소하나 달랑들고 찾아왔어!" 하면서 편지 봉투를 꺼냈습니다.
[파주시 금촌읍 야동2리 서서함2호 전차중대 이병 이경상]
제가 냄새나는 그 화장실에서 썼던 그 편지 봉투 하나 들고 이 먼곳을 왔다는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눈빛이 흐려지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편지 주소 하나들고 무작정 서울역까지 왔다고 합니다.

대합실과 매표소에 여러번 물어서 서울역에서 문산행 비둘기호를 탔다고 합니다. 금촌역에 내린뒤 또 물어서 택시타고 여단으로 가면 된다길래 여단 위병소까지 갔다고 합니다. 여단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독립중대니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또 택시를 타고 이곳까지 와서 저를 만났다 합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슬프게 눈물 방울이 맺혔습니다. 정말 이상하리만큼 무슨 일이 있는 사람처럼 슬퍼보였습니다. 웬지 행동이나 표정이 무슨일이 있는 사람처럼... 그때는 그저 힘들게 찾아와 만남에 그랬겠지 하면서  아무말도 못하고 저도 눈시울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진정을 하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너무도 안스럽고 너무도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비록 이등병이고 정말 제대라는 것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먼 이야기일지라도 그녀와 함께 한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외출과 외박이 될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 있음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소대고참들이 몇번을 찾아 왔습니다. 애인얼굴도 볼겸 어떻게든 한시간 외출이라도 보내줘야 한다고 일직사관실에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즈음 소대 최고참이 하는 말이  

" 너 운좋았다. 오늘 일직사관이 우리 소대장인데 이제까지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소대장이 책임지고 외박증 끊어 줬다. 애인하고 시간 잘 보내고 와라."

저는 제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신고를 하고 어떻게 고참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는지 정신 하나도 없이 외박증을 들고 부대를 나오니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입대 한지 5개월만에 처음 나온 사회. 그것도 제가 사랑하는 그녀와 함께 나온 외박은 제 일생에 가장 큰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금촌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좌석이 매진이어서 입석으로 기차와 기차사이의 공간에서 두손을 마주 잡아도 행복했습니다.
그저 같이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그녀도 기쁨의 얼굴이었지만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머뭇거렸습니다. 제가 몇번을 물어보았습니다.
" 혹시 무슨일 있는 거 아니야? 걱정하지말고 이야기 해 봐."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직감이 무슨 일이 분명하다고 느끼고 계속 말하자 그녀는 절대 말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왔는데... 하며 말을 꺼냈습니다.

 
" 아빠가 몇일 전에 돌아가셨어. 힘들게 아프게 돌아가셨어. 어제 3,5제 지내고 왔어. 너무 힘들어서 너무 힘들어서 내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무작정 편지 봉투에 있는 주소만 가지고 오늘 아침에 나선 거야. 미안해  이등병이고 힘들텐대... 지금이 자기도 가장 힘든 때인데... 절대 아무 말 안하고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힘들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온게 아닌데.... 미안해..." 

 

저는 제 귀를 의심해야 했습니다. 아니 거짓말이길 바랬습니다.

순간 저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워 미칠 것 같았습니다.미안한 사람은 바로 난데.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그렇게도 무기력한 사람인가에 화가 났습니다. 왜 사람들이 군대를 탈영하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그렇게 울어보고 그녀의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를 모릅니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위병소에서도 그렇게 슬픈 눈빛이었구나. 일병휴가때 보자던 그 약속을 뒤로하고 이렇게 먼길을 찾아왔구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저는 그녀를 꼭 껴앉아 주었습니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또 껴앉아 주었습니다. 제 자신부터 진정하고 위로와 사랑의 말들로 힘을 내주었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이등병 군생활이지만 내 당신을 생각하면서 다른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군생활하마. 당신도 사회에서 굳세게 힘내서 잘 이겨내길 부탁할께...   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그래. 얼마나 감사한가. 이렇게 감사하게도 외박을 나와 그녀를 위로할 수 있다는 데 정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외박이후
이등병과 그녀는 500여통의 편지가 오고 갔습니다. 그녀와 저를 이어준 끈은 편지 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녀는 그녀라는 이름대신에 제게 아내라는 이름으로 한층 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중학생,초등학생 두 차돌같은 아들 둘을 키우며 저를 지금도 지켜주고 있습니다.( 제대하자 마자 바로 첫째를 가졌습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제 아내의 소중함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세상 그 어떤 어려움과 힘겨움이 와도 아내가 있기에 힘겨움이 없습니다.
제 평생의 소원은 제 그 어려웠던 이등병의 그 면회 할 때의 마음으로 아내를 지켜주며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제 아내를 이어준 그 편지쓰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소중히 정말 감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소중하고 소중한 제 아내 김지영님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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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2월23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두고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했습니다.

 

군대가 힘들다고는 들었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각오는 했지만 민간인의 옷을 벗고 훈련복을 입은 제 모습은 참 어울리지 않았습니다.제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창밖의 내리는 저 첫눈을 보노라니 정말 감옥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곳에서 나가는 날이 있을까? 다시 세상을 볼 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몸서리는 치는 입소의 첫날 밤에 그녀를 생각하며 이겨냈습니다.

 저에게 희망의 등불이자 마음 따스한 난로같은 그녀의 편지가 있으매 그 힘든 훈련병 생활을 이겨냈나 봅니다.

1월의 매서운 칼바람과 혹독한 훈련들, 추위와 싸우는 하루 하루는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누구나 다하는 군생활이지만 한가지 더 식당배식과 청소보직을 맡은 지라 남들 쉬는 그 작은 틈을 한 번 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손과 입술은 항상 텄지만 저에게는 누구에게나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녁8시면 편지를 나누어주는 그 시간이 저에게 단 하나의 살아가는 이유와 견디는 저만의 무기였습니다.

그녀는 2틀에 꼭 한통씩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고 군복 상의에 접고 접어서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웃기도 참 많이 웃고,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느날은 그녀가 너무 보고싶어 가슴이 터져버릴 것도 같았습니다.
편지는 그녀와 저를 이어주는 끈이었습니다. 사회와 군대라는 곳의 거대한 벽을 뚫는 따스함이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인간난로였습니다. 훈훈함과 살아가는 분명한 목표를 주는 사랑의 난로 말입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녀와 내가 같은 하늘아래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 힘들었던 훈련을 마친 후 이등병계급장을 달고 논산훈련소를 퇴소하고 광주에서 후반기교육을 3개월 받았습니다.
훈련소와 다른 여러 힘겨움과 제재들이 많음속에서도 이겨내는 힘은 그녀의 편지였습니다.
그녀의 편지는 항상 꾸준합니다.
어느날은 기쁨의 편지이고 어떤 날은 힘겨움과 아픔의 눈물의 편지이고 어떤날은 그리움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담은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어떤 편지라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아프고 힘들고 눈물나면 저는 몇배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간절히 잘 지켜주시라고 말입니다.
입대후 5개월간의 모든 훈련이 끝난후 드디어 파주금촌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훈련소와 다른 그 엄청난 고참과 후임의 상하관계의 기운과 낯선 곳에서의 자대생활은 긴장과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사람을 계급으로 이렇게 무섭게도 힘들게도 할 수가 있음에 놀랐습니다.
거대한 산이 제 앞에 서있는 그 기분, 참 낯설고 견디기 힘든 또 하나의 사회에 힘들었습니다.
항상 이병 이경상를 고래고래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녔습니다. 새벽 경계근무, 훈련, 작업, 부대 막내로써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정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바쁜 시간을 쪼개서 정말 한 글자라도 쓰고 싶은데 그 시간마저 없었습니다. 훈련소 때가 정말 그리워졌습니다. 그때는 정말 편지라도 실컷 썼는데...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법은 구막사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단 몇줄이라도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어떻게든 써서 그녀에게 편지를 부쳤습니다.
그렇게 1통을 보냈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자대배치를 받고 그녀에게 받은 첫 편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고참들 눈을 피해서 역시 구막사 화장실에서 읽었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와서 한참을 울어야 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매맞은 아픔을 엄마가 위로해줘 서러움에 눈물이 나듯 자대배치후 힘들었던 순간의 힘겨움이 그녀의 편지 한통으로 봇물터지듯 흘렀습니다. 기쁨과 힘겨움의 눈물이었겠지요...

 
자대배치후 20여일이 지난 어느날,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1993년 5월23일 토요일 늦은 오후 5시를 넘어선 시각이었습니다.

역시나 힘든 이등병인 저는 이리 저리 아직도 부대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소대 고참에게 호출이 왔습니다. 지금 위병소에 면회가 왔으니 복장 갖추고 위병소로 가라고 합니다.
솔직히 면회 올 사람도 없지만 면회왔다는 자체도 웬지 너무 큰 부담이었고 눈치가 보였습니다. 통상 일병휴가를 다녀온 후 면회나 외박이 되는 걸로 알아 왔습니다.
 먼 지방 고참들이 많아서 주말에도 몇명 면회도 오지 않는데 이제 갓 자대배치온 이등병이 면회라는 말에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복장을 갖추고 위병소에 도착했습니다.
위병근무를 서고 있는 고참에게 경례를 하니 "면회소에 네 애인 왔다. 야! 겁나게 이쁘다야! "  사투리로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웬지 마음이 편하지않은 목소리였습니다. 이등병이 무슨 면회냐는 말 같았습니다.
면회소에 들어간 순간 저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꿈에서도 그렇게 보기힘들었던 그녀였습니다.
제가 꿈에도 그리던 그녀. 제가 2년을 넘게 단 하루처럼 사랑해온 사랑하는 그녀였습니다.

입대하는 날 논산훈련소까지 마중온다던 그녀를 전주터미널에서 버스 창문사이로 얼굴을 마주한채 떠나온 그녀.사랑하고 사랑한 가슴아프도록 사랑한 저의 그녀.
(논산훈련소까지따라오면 고무신 거꾸러 신는 다는 말에 논산훈련소에 못오게 했습니다.) 그날 입대한 날 첫눈이 오던 그 밤에 그렇게 후회를 했는데 그녀가 지금 제앞에 서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감동적으로 사람을 보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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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말은 이러했다.

결혼 생활 15년이 다 되어가는 데 나의 현재위치가 무언지 모르겠다. 두아이 곧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아침부터 밥 해먹이고 준비물 챙겨주고 전쟁같이 아침을 보내고 나면 쌓이는 것은 설겆이 거리요. 보이는 것은 거실과 방의 치울 것들 뿐이라. (어느집인들 안그럴까 마는) 커피 한잔 마실 시간없이 오전에 빨래며 집안청소에 보내다 애들 학교에서는 무언 청소며 오라는 것은 많은지. 학교 다녀온 아이들 뒷치닥거리하랴. 내 강사 시간 보내랴. 오후는 어떻게 가는 지 또 저녁은 어떻게 뭘 먹어야 하는 지 하는 일 없이 또 소중한 하루가 또 간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는 것이다. (반박을 하고 싶었다. 어느 집이나 그렇지 않은 집들이 어디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들어 주었다.)  하루가 너무 빨리가고 난 표시나지도 않은 이 집안일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지친다는 말이었다. 아니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한 일인데 그런것도 못참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살려한다는 말이냐. 여자의 역활이라는 것이 그런게 아니면 무어라는 말이냐?    아내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당신이 요즘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참된 웃음이 아니고 힘든 몸부림이었다는 것에 정말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 당신에게 아내와 엄마라는 큰 짐을 지게 하고 같이 나누지를 못했네. 내 입장만 생각하고 내 방식으로만 당신을 이해하려 했어. 알량한 그 생활비 벌어다 준다는 핑계로 당신의 힘듬과 고통을 나누지 못함을 내 진정 사과할게. 내 오늘 당신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앞으로 어떻게 당신에게 해야 할지를 알았어."

나는 비로소 느꼈다. 가족이라는 게 무엇인가? 남편과 아빠의 자리를 어떻게 해 왔는가? 내가 잘 했다고 자부하고 해온 지난일들 중 다시금 반성과 해나갈 날에 맑은 공기가 뇌리를 스쳐갔다. 아내와 2시간 가까이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거의 듣기만 했다.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 말들에 때로는 긍정을 해주고 때로는 반론과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도 전문의를 알아볼 몇일을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몇일후 아내에게서 변화가 일어났다.

" 나  이제 다 낳은 것 같아. 우울증이네. 여러 머리 아팠던 일들이 하나도 아프지 않아! 당신하고 그 날 몇시간 이야기 한 이후로 아무렇지도 않아! "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말이었다. 내심 나는 얼마나 근심하고 마음이 안좋았는데. 얼마나 반성하고 자책도 했는데..   그랬다. 아내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진정 필료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길 바랬다. 아내는 진정으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과  내모습 그대로 봐주는 사람을 진심으로 원했던 거다. 나는 그 사람이 되어준 것이고 그리하여 아내의 힘들었던 마음의 병이 경청과 배려의 대화로 치유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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