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준비의 시작과 끝은 김장이다.

 

그 옛날 어린 시절 김치냉장고가 없던 시절

동생과 나는 곡쾡이와 삽을 들고 키만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김장한 김치를 보관할 장소를 만들었다.

몇 시간 걸려서 마련한 김치 저장고.

이제는 그 자리를 김치냉장고가 365일을 지켜 주고 있다.

격세지감이다.

 

 

2012년 김장 시작이다.

 

 

 

 

 

 

 

동생이 마당에 파라솔와 의자를 펼쳤다.

한 겨울에 운치가 있어 보인다.

모닥불을 피우고 소꼬리탕을 열심히 끓였다.

 

 

 

 

 

 

 

드디어 김장 시작이다.

 

 

큼직하고 속이 꽉차야 금새 김장이 빨리 되는데 올해 배추는 씨알이 별로다.

500 포기가 거의 1000포기 만큼 힘들었다.

나도 옆에서 거들며 라면도 끓여서 대접하고 청소,설거지 열심으로 도왔다.

이럴 때 눈도장 제대로 못 찍으면 두고두고 잔소리 제공을 한 것이도 하지만 고생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작은 희생 쯤 문제 없다.

 

 

 

 

 

 

김장김치와 보쌈을 맛나게 먹고

 

 

 

 

 

 

 

제수씨도 열심이셨다.

 

10시간을 넘게 하느랴 애 쓰셨어요^^

 

 

 

 

 

 

 

 

어머니께서 몇 일 전 얻어온 개가 새끼를 낳았다.

 

작은 생명 세 마리가 우리 가족이 된 것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작든 크든 생명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웬지 복이 온 느낌이다...

 

 

 

이상 2012년의 김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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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자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의 설렘이다.

일탈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세상은 남 다르다.

 

삶에 짓눌린 생각들에 날개를 달아주는 시간이다.

일단 촉박한 시간에서의 서두름이 없다.

서두름이 없으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그 여유로 바라본 세상은 어제의 세상이 아니다.

세상을 여유롭게 관조하기에 삶의 통찰력이 생겨난다.

앞으로 나아가게하는 원동력이 이유가 된다.

 

삶의 고수는 불필요한 데 힘을 쏟지 않는다.

바쁘게 여러 일들을 벌이지도 않는다.

매 순간 짧고 굵은 일들을 재빠르게 하는 사람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헛된 것에 현혹되지도 않는다.

삶의 직관력이 뛰어나 그 어떤 더듬이가 하나 더 있는 사람이다.

물론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행동이 빠르며 입이 무거운 자이다.

나는 삶의 고수가 되고 싶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300여개라고 한다.

일본은 그 100배인 300.000개라고 한다.

일본은 8만여개의 신이 있다고 한다.

젓가락에도 맛과 안전을 기리는 신이 있다고 한다.

세계에 800여개의 활화산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는 그 10%인 80여개의 화산이 있다고 한다.

(이 글을 읽고 기주사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사명이 있다고,,, 지극히 맞는 말이다. 200개에서 800개로 오사카성,쿠마모토성,히지메 성으로 수정한다.)

우리나라는 한 밥상에서 한 냄비의 찌개를 여러 수저가 달려들어 식사를 한다.

일본은 조그만 소반에 독상을 차려놓고 밥을 먹는다.

아주 인정머리 없다,밥 반찬도 아주 조금,그 것도 맵고 짠 음식은 없다.

대한민국처럼 한상가득한 밥상이 없다.

문화의 차이다.

 

 

문화의 차이가 만들어 낸 풍속도이다.

이런 것을 느끼고 체험하고자 여행을 하는 것이다.

좋고 나쁨을 배우려고 여행을 하는 게 아니다.

나와 다른 그 사람들에게서 삶과 생각을 배우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사상과 삶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순간 삶은 발전한다.

 

여행의 목적은 이런 것이다. 그 본격적인 여행으로 진입한다...

 

 

 

오사카로 향한다.

 

 

 

 

 

 

5시가 다 되어 오사카에 도착,오사카 성을 여행하게 되었다.

일본 3대 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오사카성.

구마모토 성과 오사카 성, 그리고 하나는 히지메 성.

 

 

 

 

 

 

 

일본은 까마귀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보다.

어디에서나 까마귀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흉조로 알려져있는데 말이다.

문화의 차이,참으로 문화의 차이다...

 

 

 

 

 

 

 

웅장한 오사카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누린 부귀영화의 상징으로서 알려져 있는 오사카의 심벌, 오사카성. 1583년, 히데요시는 그때까지 있었던 혼간지 절터에 축성을 시작하여, 마침내 유일무이라고 일컬어지는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곽을 완성시켯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이 오사카 지방을 거점으로 하여, 1세기 이상 이어져 온 전국시대를 종결시키고, 일본 국내를 통일하였다고 한다.
1931년, 당시 육군의 토지였던 오사카성의 중심부에 오사카시민의 기부금에 의하여 천수각이 재건되었습니다. 전투로 소실된 도요토미 시대의 천수각, 낙뢰로 소실된 도쿠가와 시대의 천수각에 이어서 3번째의 천수각이다.
오사카성은 축성 이래, 몇번이나 일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천수각도 보았으면 좋았을 걸.

 

권력의 상징,

오사카성을 바라본다.

그 무섭다는 닌자들도 이 곳을 침입하기는 힘들었겠지.

 

 

 

 

 

 

 

무료로 포퍼먼스를 하는 일본인 친구.

 

아주 열심이었다.

자신이 가진 장기로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 용기, 멋지다.

삶은 이런 배려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기체임을 느낀다.

 

작은 공으로 부리는 재주가 아주 재미났다.

오사카성을 바라보며, 즐긴 공연은 의미가 있었다.

공연을 하는 그 일본 친구의 정성이 좋았다.

뭐라고 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마음은 느껴졌다.

 

 

 

 

 

 

 

 

 

오사카성을 축성하기 시작한 사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인데 이 위인은 우리에겐 임진왜란으로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이른바 천하통일 3주자(오다 노부나가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 2번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임자인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하자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못 생기고 미천한 병졸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료들은 그를 "원숭이"라고 놀려댔고

그의 부인마저도 그를 "대머리 쥐"라고 불렀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급파된 사신 중

한 사람은 원숭이처럼 별 볼일 없이 생겼다 하였고

한 사람은 범처럼 매섭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여 전란을 준비하자고 하였다. 사람의 인상착의를 말한 것으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패권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조선침탈의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오사카성을 축성하기 시작했다.-----바람처럼 구름처럼 님 블로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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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을 여행하며,

일본 친구의 작은 공연을 관람하며 나는 어떤 재주로 사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가?

연말연시 술 마시고 흥청망청 노는 것보다 의미있게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오사카성보다 더 한  내 마음의 성을 나는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쌓고 있는 지 깊은 반성과 성찰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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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2년 12월 15~18일까지 3박 4일

장소- 일본---- 간사이,고베,교토,오사카,나라,큐슈,아소,벳부,후쿠오카

여행의 목적- 철저한 내 인생철학을 확립한다!

 

 

 

 

 

 

 

 

 

 

나만의 인생철학은 무엇인가?

 

알고 있다.

자신있게 인생철학을 세우고 실천했다고 자부도 했다.

아니었다.

나는 인생철학은 있지만 뚜렷하게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찾고 느끼고 다시 정립하고싶었다.

진정 나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지고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고 싶다.

내 식대로 상식과 기본을 지키며 가장 나답게 살고 싶다.

내 몸과 마음이 나만의 인생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문신처럼 새겨져 세상에 자존하고 싶다.

 

그 확립의 생각과 실천의 여정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가 제의한 일본여행을 떠났다.(아쉽게도 친구와 팀이 달라 공항에서만 볼 수 있었다.)

국내에서 얼마든지 생각할 공간과 시간은 있었으리라.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올해는 일본여행을 꼭 한 번 가리라.입으로 주저리 주저리 중얼거렸더니 그 말의 씨앗이 실현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올해 2012년의 꿈과 목표는 5가지였다.

 

1- 국토종단 도보여행

 

2- 백두대간 종주 시작

 

3- 도전 1인기업 프로젝트 책 출간

 

4-아내 중고 모닝차 (안되면 그에 준하는 돈이라도,그 것도 인세로)

 

5- 일본 여행

 

이 다섯 가지를 계획했는데 2012년을 10일 남기고 다 이루었다.

하면 되는구나, 역시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다시 한번 믿게 되었다.

그 만큼 내 자신이 이 2012년을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도 된다.

그 치열함에서 나는 많은 고통과 행복을 번갈아 체험했다. 그래서 내 삶에 항상 후회없다.

그런 나에게 일본여행은 나에게 주는 선물이자 치유의 순간이며 2012년을

마무리하고 2013년을 준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본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기도 했고 사람에게서 치유를 받기도 했다.

정확한 인생철학의 매서운 결단도 내리고 그 것을 실천하게 할 솔루션도 채웠다.

그 일본 여행의 따끈따끈한 현장속으로 이제 진입한다...

 

 

 

 

 

 

 

 

 

 

 

 

아시아나 항공을 출발하여 1시간40분만에 오사카 공항에 도착.

첫 여행지인 고베로 출발했다.

과연 일본은 무엇이 다를까?

이제까지 내가 생각한 일본사람과 경제,문화는 대체 얼마나 다르고 배울 것은 무엇일까?

 

 

 

 

 

 

 

효고현 고베시 츄우오구 하토바쵸에 위치해 있는 지진 메모리얼 파크는 1995년 1월 17일 진도

7.2의 강진으로 메리켄 파크의 40%가 가라앉고 바로 옆의 고가도로가 무너졌다고 한다.

5400여명 이상의 목숨을 가져간 지진 발생 직후의 모습 그대로 기우뚱하게 기운 4개의 가로등과 처참하게 파괴된 부둣가의 모습에서 옛 지진의 참상을 느낄 수 있었다.

지진의 대참변 조차도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하여 외국인에게는 그때의 참상을 보도록 하고 학생들과 일본 국민들에게는 그 당시의 모습을 통해 경각심과 교육자료로 쓰이고 있다-- 여행사 자료 인용

 

 

 

 

 

 

 

 

 

 

 

 

 

그 당시의 현장이 실제로 보존되어 있다.

그 역사의 장에서 공포와 아픔,유혈사태는 볼 수 없었지만 자연의 무서운 내면을 나는 두 눈으로 정확히 목도했다.

 

 

 

 

 

 

 

 

 

 

 

 

 

 

나기주 선생.

 

일명 기주사마로 불리우는 이 남자를 잘 봐야 한다.

미운 오리 새끼가 될 뻔한 일본여행을 아름다운 추억의 여행으로 만들어 준 고마운 인물이다.

앞으로 이 남자와 투톱으로 여행기가 진행될 것이다.

 

사람이,사람의 향기로 진실되게 다가 온 여행가이드 기주 사마.

기주사마가 있어 이 여행이 추억이 되었고 진정 행복했다.

사람이 좋았다. 가식없는 그의 말과 행동이 좋았다.

여행객과 여행가이드의 벽을 깨고 따뜻한 정과 의리를 나눈 그가 좋았다.

그의 말처럼 소통과 교감의 시간, 삶이,여행이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처음에 공항에서 봤을 때 그는 여행객들에게 여권 출국수속을 해 주느랴 정신이 없었다.

나에게 한 말은

 

"목소리가 좋았다. 그리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온 그 정성과 배려가 좋은 이미지를 줬다."

 

고 나중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첫 인상은 그가 말한 개그맨의 이미지와 비슷했다.

사람 좋아보이는 얼굴이었고 웬지 부담감을 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잘 생긴 얼굴도 아니었고 말솜씨가 뛰어나니도 않았다.명품을 걸친 화려한 사람도 아니었다.

이동하는 버스에서 말하는 그의 모습은 여행가이드의 전문성보다 시골 촌로가 옆 집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소탈함이 있었다.

진실되게 성심껏 말하는 그의 모습과 한마디 한마디 말에서 점점 따뜻함과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모습이 좋아 점점 그의 인품에 매료되게 되었다.

 

여행에 관련된 많은 말들의 조언도 주었고 일본역사를 재미나게 설명해주었다.

짧게 10여분 이야기 할 것을 그는 30여분,때론 1시간 넘게 이야기했다.

꼭 그렇게까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나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의 그런 모습이 진정 프로의 모습이다.

남들이 짧게 일정만 말하고 제 임무만 충실히하는 사람과는 다른 프로페셔날의 모습이다.

일행중에는 그런 그의 모습에 딴 청을 하고 지루한 듯한 모습과 관심없는 표정이 역력했다.

말많은 여행가이드의 주저리주저리 모습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심으로 경청했다.

 

 

 

 말만 화려하고 제 몫과 실속만 생각하는 여행가이드보다 그는 진실된 행동,희생과 배려의 따뜻한 가이드였다....

 

 

 

 

 

 

 

 

 

 

 

기주사마와 편의점에서 맥주 2개를 가져와 나누어 먹었다.

여행기간동안 내가 2번을 사면 꼭 그는 1번은 샀다.

지금 생각해보니 미안하다.

나는 여행객의 신분이고 그는 가이드의 신분이다.

쉽게 말하면 나는 놀러 간거고 그는 일하러 간 것이다.

적지 않은 돈을 쓰게 했다.

그 마음에도 감사하다.

 

 

 

 

 

 

 

 

 

 

고베시는 한국의 10월말,늦가을 날씨처럼 따뜻했다.

엄청 추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따뜻했다.

가벼운 긴팔만 입거나 잠바를 입고 토요일을 즐기는 사람들...

 

어느 중년의 남자가 비둘기들에게 빵을 주고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니 무척 한가롭게,여유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다.

 

 

 

 

 

 

 

뛰노는 아이의 모습에서 여행지의 낯선 느낌이 사라졌다.

사람 사는 게 꼭같구나...

 

 

 

 

 

 

 

ㅎㅎㅎ

이 참새를 보는 순간,

반가웠다.

국내 어느 시골 마을 전신주에 있을 법한 녀석이 이렇게 도심에 있느니....

 

 

 

 

 

 

 

 

 

 

사람 사는 게 똑 같다.

일본인 노숙자.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이 겨울에 벤취에서 누워 자고 있다.

그의 신발 주위에 담배꽁초가 가득하다.

 

그의 살아온 삶이 힘들었나 보다..

그가 살아갈 삶에 행운을 빌어본다.

 

 

 

 

 

 

 

고베 시청 전망대에서 바라 본 고베시의 모습.

 

그리고 일본 3대 파워라는 고베타워가 멀리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로 표현하면 풍물시장쯤 되겠다.

시청 주위,공원 주위에 이렇게 타고야키 등등 파는 상점이 있다.

 

여행의 즐거움은 화려함,구경거리보다 그 사람의 사람살이,

진정 보여지는 진솔한 모습이 여행객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이제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 속으로 더 깊숙이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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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도 이제 끝자락이다.

 

 

나이와 숫자를 최초로 만들어 낸 사람은 누구이며

그 것을 활용화한 사람이 누구인지 만나서 한 마디 따지고 싶다.

 

" 대체 시간의 의미란 것이 무엇이요?

왜 그토록 날짜와 년도,2012년 같은 숫자에  엿 같은 의미를  두게 만든 거요?"

라고  묻고 싶다.

내가 물어보고 따진다고 그 숫자의 의미들이 달라질 게 없을 것이라는 걸 알지만

나는 시간의 의미를 잊고 살고 싶다.

 

 

나를 키운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전생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를 키운 것은

실전적으로는 고된 삶과 어머니,아내,내 자신이었다.

간접적으로는 책과 여행,음악이었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여행을 하고 만 명의 사람을 만난다는 것.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저울을 다는 것처럼 뚜렷이 맞추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떠난다.

그 떠남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낯선곳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성찰과 더욱 큰 나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세상을 관조하고 나즈막한 눈빛으로 보고 싶다.

 

내일 아침 나는 또 다른 삶의 이정표를 위하여 굳센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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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

 

정말 오랜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이다.

어머니에 대한 글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쓰기 힘들겠지만 아버지 이야기는 쓸 수 있다.

 

 

 

 

아버지...

 

아빠라고 불러 본적이 한번도 없는 듯 하다.

지금 내 아들들이야 나를 아빠라고 부르지만 어린 그 시절 살갑게 불러본적이 없다.

 

 

아버지를 먼저 떠올리면 항상 먼저 생각나는 것이 술이다.

술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아버지, 아니 좋아하신 정도를 지나치셔서 사랑하신 것이다. ( 중독자정도는 아니셨다.1년에 몇 달은 안 드신적도 있었으니까.. 아버지에게 예의없이 글로 무례를 범하긴 정말 싫다.)  왜 그토록 술을 사랑하셨을까?

가족보다 더 술을 사랑 하셨던 것 같다.

항상 술에 취해 사셨고 어머니를 많이도 힘들게 하셨다.

 

내 어린시절 7 살이후의 집은 외딴집이었다.

마을과 1시간 떨어진 곳에 아버지가 오두막집 2칸을 지으셨다.

냇물이 흐르고 앞에는 산,그리고 논과 밭이 있는 허허 벌판에 집을 지으셨다.

항상 늦은 저녁이 되면 형제는 아버지를 배웅가고는 했다.

아버지는 초저녁에 들어오시지 않고 10시를 넘으시면 저멀리 우리 형제들을 부르셨다.

 

 

"현상아, 경상아, 승상아!" 형제들 이름을 번갈아 부르곤 하셨다.

우리들은 뛰어서 아버지를 배웅하고는 했다.

아버지는 고주망태가 되어서 오셨다. 어린 아들들이 아버지를 부축하고는 했다.

너무 엉망으로 취하셨을 때는 니어카에 태워오고는 하였다.

집에 도착하신 아버지는 주무시지 않으셨다.  그렇게 술에 취하셔서 수염을 깍으라고도 하였고 허리를 밟으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정말 무섭게 공동묘지를 지나서 그 새벽에 술을 받아 오는 횟수도 많았다. (공동묘지를 지나서 눈이나 비를 맞으면서 오는 그 길을 동생과 수없이 다녔다.정말 무서웠다.)

 

술을 드셨으면 그저 잘 주무시면 좋으려만 왜 그렇게 어머니와 자식들을 괴롭혔는지,어머니에게 욕과 억지소리를 하시고 밤새 잠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술 주정을 하셨다.

 

술 좋아하시는 아버지에게서 안타깝고 안스러운 것은 "다른 이들이 아버지를 보는 시선이었다."

아버지를 보는 시선이 때로는 아들에게까지 똑같은 시선으로 보여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와 나는 분명히 부자라는 한피로 이어진 질긴 인연이지만 분명히 각히 다른 인격의  존재이다.

하지만 어린 그시절, 분명 아버지의 영향은 컸다.

누구집 아들 하면 그 아들의 아버지를 떠오렸고 그 아버지의 직업이나 품성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동네에서 전날 제사나 그 집어른의 생일이 있는 아침이면 그집 아들들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어른들을 식사하시라고 불러오는 심부름을 매번 했었다.

"누구집 아들인데  우리집으로 식사하러 오시래요... "   큰 소리로 인사를 하고 옆집에 뒷집, 온동네를 돌고는 했다.

아침에 오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리 아버지를 불러 주시는 분들도 많지 않으셨다.

하지만 조금 산다는 집과 덕망이 있거나, 면사무소 무슨 직책에 있다는 분들의 아침상에는 사람들이 앉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들끓는 것을 종종 보곤 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고 아들을 판단한다.

어린시절 많이 느꼈다. 

아버지가  능력과 재산이 많아 여유있는 삶을 사셨어도 인정받기 힘든 세상이건만 술과 노름,베짱이의 삶의 사셨던 내 아버지,그런 아버지의 자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지금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군 시절 나를 유독히도 괴롭혔던 선임하사의 아들이 멀리서 보이면 그냥 주는 것 없이 미웠다. 

그 아들이 그냥 미웠다. 닮았고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싫었다..

나도 그랬는데 동네분들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시선이 밉지가 않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래도 좋으니까 아버지가 계시기만 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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