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현대 사회는 낙인의 존재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낙인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122쪽.
정상인은 낙인을 포용하는 듯한 몸짓을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낙인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임을 믿지 않는다. 미디어에 종종 나오는, 낙인자를 대상으로 한 사회 통합 의례―고아들에게 키스하는 연예인, 장애인을 목욕시키는 정치인 등등―가 이를 잘 보여준다. ‘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같은 책, 123쪽.
⇨ 낙인자들의 몸은 함부로 만져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이득을 얻기 위해 낙인자들을 이용해도 되는 것인가?
낙인자의 편에서, 이러한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다. 낙인자는 정상인들이 변덕스럽게 베푸는,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친절을 받아들여야 한다.
- 같은 책, 123쪽.
⇨ 낙인자에게는 남의 친절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단 말인가? 남의 친절을 황송하게 받아야만 하는가?
소아마비를 앓은 어떤 작가는 눈이 오는 날 이웃이 찾아와 가게에서 사다 줄 물건이 없는지 물어보면, 필요한 게 없더라도 부탁할 물건을 생각해낸다. 상대방에게 베풀 기회를 주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 같은 책, 124쪽.
⇨ 낙인자가 오히려 정상인을 배려해 주는 셈이다. 이것은 낙인자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2.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김현경 님의 글을 읽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글이 있었다. 정희진 님의 글이다. 그 글을 옮겨 본다.
2022년 한국의 대통령 윤석열 부부가 동아시아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캄보디아를 방문한 때 일이다. 김건희 여사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선천성 심장질환을 앓고 있는 14살 소년의 집을 직접 찾아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정상 배우자들의 앙코르와트 방문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대신 비공개로 개별 일정을 진행한 것이었다. ‘캄보디아(의 이미지)’에 동일시하는 지구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제 캄보디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분노했다. 동시에 이는 평범한 시민의 고달픈 일상이기도 하다. 타인이나 집단이 나를 마음대로 재현(묘사, 평가, 규정)할 때는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야 할까.
- 정희진,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43쪽.
캄보디아에서 대통령 부인의 성녀(聖女) 코스프레는 윤석열 정권의 성격을 압축한다. 더 놀랄 일이 무엇이겠냐마는, 그래도 놀랐다. 나는 윤 대통령 부부가 ‘나쁜 사람’이거나 ‘극우 보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이상한 경우라고 본다. ‘이승만부터 문재인까지’ 이런 커플은 없었다. 만일 미국의 영부인 질 바이든이 한국을 방문해서 환경이 좋지 않은 보육원을 방문해 사진을 찍어 널리 알린다면? (중략) 이는 의전이고 국격이고 운운할 것도 없는, 정신 나간 권력자의 기이한 행동이다.
- 같은 책, 44~45쪽.
⇨ 만약 미국의 영부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환경이 좋지 않은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 널리 알린다면, 한국 국민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3.
김지우,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위의 두 권의 책은 김지우 님의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라는 책을 떠올리게 했다. 이 책에는 여성 장애인인 저자가 비장애인 남성을 사귀는 것을 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당연히 내가 끈질기게 구애했을 거라는 사람부터, 우리의 관계가 그의 일방적인 희생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나와 사귀는 것은 굉장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며, 그걸 이겨내(?)고도 내 곁에 있는 그는 너무나도 뛰어난 인품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 김지우,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154쪽.
카페에서 모르는 사람이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우리의 음료 값을 대신 내겠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을 만류하며 내 카드로 계산을 마친 뒤 카페를 나오면서 전혀 상관없는 우주에 애인을 초대한 기분이 들었다. 비장애인 남성인 애인은 내가 아니면 아마 평생 이런 일을 겪지 않고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 순간 나는 애인을 굉장히 힘든 길로 이끈 사람이 되었고, 그는 자동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위험한 우주에 뛰어든 착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와 내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으면 모두가 우리를 돌아보는 일상에서 그런 시선을 견뎌‘주는’ 것이 가끔 ‘고마웠’다. 나는 우리 사이에 위계를 짓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했다.
- 같은 책, 156쪽.
⇨ 이럴 땐 주위 사람들이 모른 척하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장애인도 연애합니다.” 이런 당연한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 같은 책, 157쪽.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먼 것 같다. 낙인자든 장애인이든 그 누구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 때는 그것이 오히려 상대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헤아려 봐야 한다. 이때 본인이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예의나 배려를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 때문에 어느 누구도 상처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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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사항 : 장애인이 아닌 사람을 지칭하기 위해 쓰는 ‘정상인’이라는 말은 삼가야 한다. 장애인이 비정상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반대 의미로 ‘비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 여기서는 책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정상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