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씨가 변했다. 갑자기 추워졌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겠지. 공기의 뜨거움이 차가움으로 변했다는 것은.
곧 연말이 오고 해가 바뀌고 나는 나이 한 살 더 먹겠지. 시간과 나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에 초연하고 싶은데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가장 싸우기 어려운 상대는 시간.
시간 앞에선 무력하다. 앞으로 점점 더 무력해짐을 느낄 것이다.
2.
가끔 과거의 시간을 더듬으며 아이들이 어릴 때를 생각하곤 한다. 언젠가 찍은 사진 속의 두 딸을 보니 조그만 게 귀엽다. 저런 때가 있었구나.
몸만 조그만 게 아니라 생각도 조그마하던 그 시간이 그리울 때가 있다.
큰애는 어릴 때 아빠하고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되지?”라고 묻는 아이에게 “내가 먼저 아빠랑 결혼했는데?”라고 했더니 잠자코 있었다. 그때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때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결혼은 형제끼리 하는 걸로 알았던 것. 아버지가 어머니의 오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오빠가 없는 애는 나중에 커서 누구랑 결혼하느냐, 하는 게 내 고민이었다. 어떤 친구는 오빠가 둘, 여동생이 둘이라서 짝이 맞았는데, 어떤 친구는 오빠 한 명에 여동생이 셋이어서 오빠의 수가 모자라 의문이 났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혼자서 궁리했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3.
작은애는 이제 나보다 키가 더 큰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 눈엔 어린애 같다. 얼굴이 작아서인지 아직도 귀여운 초등학생의 얼굴 같다. 유모차를 탔던 어릴 때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작은애가 중학교 일 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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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엄마) : 아침에 너처럼 불고기를 먹고 학교에 가는 애가 어딨니? 엄마를 잘 만난 거지. 친구들이 알면 부러워하겠다.
작은애 : 불고기 갖고 뭘 그래. 내 친구 중엔 정말 부러운 애가 있어.
나(엄마) : 걔는 뭘 먹고 오는데?
(나는 불고기보다 더 좋은 것, 이를 테면 갈비찜 같은 걸 먹고 학교 오는 친구가 있는 줄 알았다.)
작은애 : 아침에 라면 먹고 와. 걔를 애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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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룩~~.
잠시 잊었다. 아이가 중학생이라는 것을. 어른의 잣대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중학생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불고기보다 더 좋은 건 라면. 그러니 라면을 먹는 건 환상적인 아침 식사가 되겠다.
내가 졌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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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무한한 아름다움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그것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
토머스 트러헌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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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없는 건 ‘(시간적으로) 지금, (공간적으로) 여기에’ 우리가 있기 때문일 듯. 만약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면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갖게 될 듯. 그래서 지나간 추억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4.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을까?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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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는 그 사실을 발견하고 자신이 실제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일이다.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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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은 타인에게서도 알 수 있고 나에게서도 알 수 있다. 상대의 어떤 말에서, 상대의 어떤 행동에서 놀라곤 한다. 상대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면서. 나의 어떤 말에서, 나의 어떤 행동에서 놀라곤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면서.
5.
이런 친구가 있었다. 자기 블로그에 누군가가 악성 댓글을 썼는데, 그 악성 댓글을 쓴 사람이 자기 친구 누구 같다는 것이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낱말이 그 댓글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꼭 그가 쓴 댓글처럼 여겨지더란다. 그의 댓글인지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그런 의심이 생겼다면 친구 관계는 끝장이 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관계를 유지하는 게 과연 좋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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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난하는 자는 실로 나의 좋은 벗이다.
비방을 당할 때, 나는 미움도 좋음도 간직하지 않는다.
내 안에서는 태어난 적 없는 곳에서 나온
사랑과 겸손의 힘이 자란다.
영가 현각 <증도가>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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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란 소중한 존재이니 스트레스를 받아도 친구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있다면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시간이 아깝다는 말을 하겠다. 바쁘게 살다 보면 내가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시간도 부족한데 굳이 그런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시간을 할애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런데 조금만 수틀리면 인간관계를 끊어 버리는 태도도 문제라고 보는 시각이 있을 수 있겠다.
‘밟으시오. 나를 밟으시오. 나는 밟힐수록 더 잘 자라는 잡초가 되리라.’ 하는 정신을 갖는다면 자신을 비난하는 친구도 포용할 수 있으려나.
6.
사랑에 대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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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확실하다. 거기에는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오류는 사랑의 부족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윌리엄 로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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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오류가 생기는 게 사랑의 부족 때문만은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자식이 하고 싶어 하는 결혼을 반대해서 자식을 불행에 빠지게 만드는 부모가 있다. 이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자식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부모라고 해서 자식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랑에는 지혜로운 사랑만 있는 게 아니라 어리석은 사랑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 앞에선 오히려 판단이 흐려지고 어리석어지는 게 인간이다, 라고.
중요한 건 사랑과 지혜의 적절한 조화가 아닐까. 지혜를 놓치지 않아야 좋은 사랑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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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르나르는 말했다. “사랑 없는 배움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것은 우쭐해질 것이다. 그리고 배움 없는 사랑이란? 길을 잃을 것이다.”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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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자신만만하지 않다. 이것 다행인가?
출근할 땐 차가 막히는 일이 없는 지하철을 이용한다. 그런데 월요일에 출근하는 곳과 화요일에 출근하는 곳이 서로 정반대의 방향이라서 헷갈린다. 만약 월요일에, 화요일에 출근하는 방향으로 탔다간 큰일이다. ‘나, 제대로 탄 것 맞나?’ 나는 수첩을 들춰 보고 확인하곤 한다. 워낙 바보 같은 짓을 잘해서 나는 나를 믿을 수가 없다.
친구들을 만나면 느끼는 건데, 사람들 참 똑똑하다. 아는 게 어떻게 그리 많은가? 내가 모르는 걸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만나면서 많이 배운다. 난 그들에 비해 정보도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하고 판단력도 부족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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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현재 깨어있다고 느낀다. 그들의 이해는 매우 개인적인 것이다. 왕자이든 목동이든 간에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만만해한다.
<장자>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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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 대해 자신만만해 하지 않으니 나는 아주 어리석은 건 아니네.
8.
누군가와 삼십 분만 얘기 나누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완전한 그림이 그려지진 않겠지만 스케치 정도는 할 수 있을 듯하다. 얘기하면서 알게 되는 ‘그가 무엇을 보는 시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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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
플라톤주의자 존 스미스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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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한 시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준다. 종교에 대한 시각만 그렇겠는가. ‘행복에 대한 시각’, ‘직업에 대한 시각’ 등 무엇을 보는 시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준다.
알라디너들의 글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내 글을 보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보는 시각이 글에서 다 드러나므로.
무엇을 보는 시각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준다. - 페크
9.
종교마다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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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꽃에서 꿀을 모으는 벌처럼, 현명한 사람은 다양한 경전의 본질을 수용하고 모든 종교에서 좋은 점만을 본다.
<스리마드 바가바탐>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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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남의 종교를 무시하고 자기의 종교만을 최고로 치는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남의 종교를 존중할 줄 알고 남의 종교에서 좋은 점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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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종파의 영광을 높일 목적으로 자신의 종파에 전적으로 집착함으로써 자신의 종파만을 공경하고 다른 종파를 비방하는 사람은 사실상 그런 행위로 인해 자신의 종파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경건함의 법칙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훌륭하다.
아소카의 칙령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334~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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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래전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 그런데 멀다 보니 자주 가 보게 되질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절을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 검색으로 절을 찾아 몇 군데 가 보았다. 내 눈이 까다로운 것인지, 문제는 가는 절마다 맘에 들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 드디어 맘에 드는 절을 찾았다. 푸른 나무들과 단풍이 든 나무들이 있는 숲속에 절이 있었다. 그 절을 보며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읽은 듯 감탄했다. 내가 찾으려는 절이 바로 이런 절이야,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절다운 면모를 갖춘 절이어서 좋았다. 나무가 많고 산책로가 있어서 좋았다. 운치가 있어 보여 좋았다. 한적해서 좋았다. 무엇보다 집에서 멀지 않아서 좋았다. 앞으로 자주 가서 몸의 건강을 위해 산책로를 걷고, 마음의 건강을 위해 마음을 닦아야겠다.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그렇다고 내가 종교심이 강한 사람이라든지 열심히 절하며 기도하는 사람인 건 아니다. 절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절을 찾을 뿐이다. 밖에서 벤치에 앉아 절을 바라보다가 오기만 해도 좋다. 욕심을 버리고 근심을 덜 수 있는 곳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절에서 오면서 다음의 글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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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한 척이 강을 지나가고 있는데 사람이 없는 빈 배가 와서 충돌하려 한다고 가정해보라. 아무리 성마른 사람이라도 버럭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에 누군가 타고 있다면, 다가오지 말하고 소리칠 것이다. 만일 소리쳐도 듣지 못하고 여러 번 고함을 지르게 만든다면 결국 욕설을 퍼붓게 될 것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화를 내지 않았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화를 내게 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경우 그 배가 비어있었지만, 두 번째 경우에는 누군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채로 삶을 살아간다면 누가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장자>
- 올더스 헉슬리 저, <영원의 철학>,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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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는 채로 삶을 살아간다면 누가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있겠는가?
내가 비어 있는 채로 삶을 살아가기를 감히 바랄 순 없다. 하지만 절에 다니면 최소한 욕심으로 인해 불행해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수 있을 것 같다.
11.
어떤 책을 괜히 읽었다고 후회한 적이 있다. 오래전에 읽은 시몬 드 보부아르 저, <제2의 성>이란 책이다. 두 권으로 되어 있고 두 권을 합해 천 쪽이 넘는 분량이니 그때 읽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겠다. 그런데 내가 그 책에서 배운 것이라곤 다음과 같은 결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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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
남녀 차이는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사회적ㆍ문화적 영향의 결과에 불과하다.
미국의 흑인문제가 따지고 보면 백인문제이듯이, 여성문제도 실상은 남성문제이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저, <제2의 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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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이것도 정리해 놓은 노트가 있어서 알았고, 이것 이외엔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천 쪽 이상의 글을 읽었는데도 말이다. 헛수고를 했단 생각이 들어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냥 요약해 놓은 책을 보는 게 현명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두꺼운 책을 읽느라 소비한 시간이 아깝다는 얘기다. 그 시간에 차라리 영양가 있는 다른 책을 읽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얘기다. (이 책이 훌륭한 저작이라는 건 인정한다.)
그런데 요즘도 나는 바보처럼 영양가가 없을지도 모를 책을 들여다본다. 왜냐하면 이것저것 많은 책을 읽어 봐야 영양가 있는 책 하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젠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용이 생각나지 않더라도 내 머릿속의 저장고 어딘가에 그 내용이 보관되어 있을 거라는 것을 이젠 깨달았기 때문이다. 책을 고를 때 현명하기보단 차라리 어리석은 게 나을 수 있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다. 적은 시간을 들여 많이 배울 수 있는 책을 찾자는 자세는 좋은 자세가 아니라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다.
기대가 컸는데 실망하게 되는 책이 있고, 시시할 줄 알았는데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책이 있다. 그러니 읽기 전에 책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책 열 권을 읽고 단 한 권만이 좋을 수 있다. 책 한 권에서 단 한 문장만이 좋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다. 원래 독서란 모래알에서 보석을 찾는 일이지 보석에서 모래알을 걸러 내는 일이 아니므로.
(<영원의 철학>이란 책도 모래알에서 보석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들여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