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4년 10월 29일
서재에 단상을 써 왔는데 이제 백 번째로 쓸 차례가 되었다. 그동안 99편의 단상을 썼다니, 그렇게 많이 썼다니 놀랍다. 처음 단상을 쓴 것이 2009년 12월 2일이었으니 만 5년이 되어 간다. 5년 동안 꾸준히 글을 써 왔다는 것, 내가 나를 칭찬하고 싶다.
나, 참 성실하네. 지구력 있네. 그런데 나에게 없는 것은 투지. (사전에 따르면) 투지란 ‘싸우고자 하는 굳센 마음’이다. 내겐 무엇과 싸워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고 굳센 마음 같은 것도 없다. 그냥 글쓰기를 즐기다 보니 여기까지 왔을 뿐이다.
2.
2014년 10월 0일
글을 잘 쓰려면 우선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분노가 있다는 건 그만큼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것을, 세상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노가 끓어오를 만큼 세상에 대해 쓸 게 많아야 하는 게 ‘작가의 기본자세’라는 것. 이것은 박완선 작가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어느 저서에서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게 만든 게 그 전쟁이었다는 것이겠다. 만약 전쟁이 나지 않아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면 글을 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한을 품지 않은 사람은 좋은 글을 쓸 수 없다고. ‘한’이라는 것 자체가 생각의 깊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한때 나는 글을 잘 쓰려면 결혼도 해 보고 이혼도 해 보고 실직도 당해 봐야 하는 건지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런 걸 경험한 사람이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 불행과 고통 속에서 얼마나 생각이 깊고 얼마나 생각이 많겠는가.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경험이 별로 없는 평범한 사람은 글을 잘 쓰기가 어려운 것 같다고 여겼다.
지금은? 지금은 아픈 경험 없이도 깊은 사유로 글을 잘 쓴 책이 있다는 걸 알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3.
2014년 10월 00일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동갑하고만 친구일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나이가 중요할까? 나보다 열 살 아래도, 나보다 열 살 위도 친구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나이에서 보면 마흔 살만 넘으면 다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십 대는 인생을 알기 시작하는 나이 대인 것 같아서다. 그렇다고 젊은 이십 대의 사람과는 친구를 할 수 없다는 건 아니다. 젊은 친구는 젊은 친구대로 좋은 것이다.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젊은이들의 글을 보면서 그들의 젊은 정신을 흡수하는 건 얼마나 좋은가.
시간은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관대해지게 만드는 마술을 부리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친구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선 관대해지지 않는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만 친구로 지내고 싶다. 요즘 편한 것만 찾다 보니 사람 만나는 일도 편한 만남만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인 듯. 이건 건강하고도 관련이 있는 듯. 체력이 점점 약해지니깐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싫어지는 듯.
4.
2014년 10월 00일
나보다 나이가 적은 알라디너를 알고 지낼 수 있는 건 알라딘이 내게 주는 선물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친구가 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알라딘이 좋다.
만약 알라딘이 책 이야기만 하는 공간이라면 내가 알라딘을 덜 좋아할 뻔했다. 다양한 정보를 담은 노 님의 글, 일상적인 이야기를 담은 구 님의 글. 이런 글들이 없고 책 이야기만 있다면 알라딘은 덜 매력적이다.
나 역시 책 이야기만 하고 싶진 않다. 물론 책 이야기가 재밌긴 하지만 가끔 딴 얘기를 하고 싶다.
5.
2014년 10월 00일
결국 인생에서 부부애만이 남는다고 본다. 나중에 부모는 다 돌아가시게 되고, 나중에 자식들은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다 분가하게 될 것이고.
지인 중 한 분이 성격 차이로 남편과 이혼하려 했는데 남편이 이상 증세가 보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이혼을 접고 말았다. 큰 병 걸릴지도 모를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어떻게 자기 혼자 편히 살 수 있느냐는 거다. 지인의 남편이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현재 그가 얼마나 남편을 그리워하는지 모른다. 그게 ‘부부’라고 본다. 버리고 싶을 만큼 열정 없고 버리고 싶을 만큼 밉다가도 병에 걸려 누워 있다고 하면 달려가게 만드는 것. 그게 ‘부부’라고 본다. 그 끈끈한 정이 부부애이다. 연애 시작할 때 느끼는 뜨거운 사랑보다 더 신뢰할 만한 사랑, 그 이름은 부부애이다.
6.
2014년 10월 29일
가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이었던가? 난 왜 그걸 이제야 알았지? 가을을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공감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왜 가을이 좋은지 알 것 같다. 요즘 길에서 본 가을 나무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한다.
바다보다 산이 더 좋다는 사람을 보면 뭔가 수준이 있어 보였는데, 그 이유는 그런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산의 매력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데 그러므로 내가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하는 사람의 수준에 못 미친다고 여겼다. 그런데...
아, 난 이제야 그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 같다. 바다보다 산이 좋다는 것을 이제 알았으니까. 나무들 때문이다.
나무들의 그 풍부한 표정을 어찌 바다에 비하랴. 여러 고운 빛깔로 물든 가을 나무들 하나하나가 다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다 한 편의 시처럼 읽혀졌다. 그 나무들을 내 눈으로 사진을 찍듯 유심히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늦여름만큼이나 멋진 건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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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백 번째라서 특별한 글을 쓰고 싶었으나(그래서 며칠 동안 고민했으나)...
맘대로 되지 않아(맘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은 법이라)...
그냥 요렇게 올립니다...
다음엔 단상(101)이 이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