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여러 권 돌려 가며 읽어서 그렇겠다. 반 이상 읽었으되 끝까지 읽지 않은 책이 열 권이 넘는다. 한 권을 완전히 읽고 나서 다른 책을 읽는 습관이 내겐 없기 때문이다. 왜 한 권을 끝까지 읽지 않은 채 다른 책을 읽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내 대답은 이렇게 되겠다. “어떻게 책 한 권에만 집중해 읽을 수가 있나요? 매력적인 책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라고. 이것은 마치 바람둥이가 “어떻게 연인으로 한 사람에게만 집중해 만날 수가 있나요? 매력적인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라고 말하는 것과 같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반 이상 읽은 책을 언제까지나 마저 읽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럴 리가 있겠나. 마저 읽고 나서 독서 노트에 그 책의 제목과 간략한 내용을 기록해야 되는데 말이다. 이 독서 노트에 책 한 권을 추가할 때마다 느껴지는 달콤한 뿌듯함이 있는데 말이다. 만약 내게 독서 노트가 없었다면 미완성의 독서에 그칠 책이 많았으리라. 내게 독서 노트가 필요한 이유다. 때로는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될 수 있겠다.
지난 3월부터 새로운 형식을 추가했다. 내 책상 위에는 탁상 달력이 세 개 있는데 그중 하나에 책을 읽은 분량을 적어 넣는 일이다. 각각의 날짜에 그날 내가 읽은 책의 분량을 적어 놓고 한 달에 몇 쪽이나 읽었는지 합산해 놓는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 형식을 추가한 다음부터 독서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역시 내용만큼이나 형식이 중요하다는 얘기가 될 수 있겠다.
2.
언제부턴가 사진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생각만 할 뿐 실천하지 못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사진을 잘 찍는 법을 가르치는 강의가 있긴 했다. 강사 님과 수강생들이 오전에 야외에서 만나 각자 사진을 찍고 나서 점심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다고 한다. 물론 함께 있는 시간에 강사가 사진을 잘 찍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고 수강생이 궁금한 것을 강사에게 질문하기도 하겠지.
문제는 시간이었다. 어떻게 하루를 빼내느냐 하는 것이다. 하루를 빼기가 어려워서 사진 배우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했다. 글쓰기만으로도 바쁜데 사진에까지 신경 쓰면 안 될 거야, 라고. 사진에까지 시간을 빼앗기면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횟수가 줄어들 거야, 라고.
그런데 반전! 오히려 글을 짧게 쓰고 사진으로 채우면 되니 페이퍼를 글로 다 채울 필요가 없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횟수가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4월에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고 나서 알았다.
예상은 원래 빗나갈 때가 많은 법이지.
그러니 실제로 해 보기 전에 속단하지 말 것.
일단 부딪혀 볼 것.
경험은 생각을 바꿔 주기도 하므로.
(사진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는 대신에 <좋은 사진을 만드는 정승익의 사진 구도>를 구입해 공부하고 있다.)
3.
어느 날 이메일함에 들어갔더니 알라딘에서 이메일 한 통을 보내온 게 있었다. 열어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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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아래 추첨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아래 당첨 정보를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경품 수령은 아래 발송 예정일로 부터 5일 이내입니다.(단, 평일 기준)
당첨 이벤트명 책의 날 10개의 질문
이벤트 페이지 바로가기 ▶
당첨 경품명 알라딘적립금 5만원
발송예정일 06월 16일
경품발송처 알라딘직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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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메일을 보자 미소가 지어졌다. 천 원의 적립금을 준다고 해서 또 흥미를 느껴서 ‘책의 날 10개의 질문’에 답을 써서 페이퍼로 올렸던 것인데 5만 원어치 책을 살 수 있는 적립금을 준다니... 내가 2016-04-23에 올린 <책에 대한 10개의 질문과 답>이라는 페이퍼로 5만 원을 벌었다는 얘기다.
이 이벤트의 당첨자 발표일이 언제인지 알지도 못했고 어디서 발표하는지도 몰랐다. 이메일을 보지 못했다면 내가 그 이벤트에서 5위 안에 뽑혔음을 몰랐을 뻔했다.
찰나적으로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다. 내가 얼마 전 40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손해 본, 속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5만 원으로 퉁치라는 하늘의 뜻인가 하는 생각이. 위로금이라는 생각이.
그러니까 5만 원어치 책을 사고 40만 원을 잊으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어떤 책을 5만 원어치 살 것인지 즐거운 고민에 들어가야겠지?
사고 싶은 책은 늘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책은 꼭 사려고 한다. 열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앤드루 포터 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란 소설집이다. 이 책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란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김영하 작가가 읽어 준 것은 열 편의 단편 중 표제로 사용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다. 고매한 인품을 가진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어 이 이야기를 열 번도 더 들은 것 같다.
그래서 내용은 잘 알지만 이 이야기를 종이 책으로 읽고 싶기 때문에,
이렇게 잘 쓴 작가의 나머지 아홉 편의 단편이 궁금하기 때문에,
앤드루 포터의 좋은 문체를 감상하는 재미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구입하고 싶은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품절되어 구입할 수 없어서 알라딘에 알림 메일을 신청해 두었는데 며칠 전에 알라딘에서 이런 제목으로 이메일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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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신청하신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가) 재출간/입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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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되어 구입할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제 구입할 수 있다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40만 원어치 책을 산다면 더 좋았겠지만 5만 원에 만족해야겠지?’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책 주문을 앞두고 있는
이 시간에
이 글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