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이란 : 연애를 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란 그 사람이 행복하길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시몬 베이유 : “인간의 사랑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달콤한 쾌락들 중 하나 :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모르는 가운데 봉사하는 것.”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72쪽.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가 모르는 가운데 봉사하는 것.
그 차원에까지 오르려면 얼마나 성숙한 정신을 가져야 할까?
인간의 감정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이가 나빴던 젊은 부부가 노년엔 서로를 아끼며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인간에겐 감정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니.
2. 말로 갚는 빚 : 이사로 인해 속상한 일이 있다. 내가 가장 아끼던, 내 재산 목록 1위라고 할 수 있는 ‘책장’에 흠집이 생겼던 것. 그 책장은 같은 걸로 세 개를 이어서 붙여 놓아 긴 책장의 모양으로 우리 집 거실에서 벽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 세탁기나 화장대에 흠집이 생겼다면 그렇게까지 속상하지 않았을 텐데, 하필 책장에 흠집이 생겨 속상했다. 과장해서 말하면 며칠 동안 가슴이 찢어졌다.
속상한 마음으로 열흘 넘게 보내다가 이삿짐 센터에 전화를 해서 책장에 흠집이 생겨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이삿짐 센터 사장이 이런 말을 한다.
“미안합니다. 정말 속상하시겠어요. 제가 똑같은 걸로 사 드려야지요.”
그러면서 웃는다. 이 한마디에 내 기분이 풀려서 나도 함께 웃었다. 만약 그 사장이 내게 짜증을 냈다면 더 속상할 뻔했다.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책장과 똑같은 색으로 칠해 드릴게요.”
페인트인가? 책장과 똑같은 색으로 칠하는 방법이 있었구나. 그런데 칠하고 나면 더 흉해질 것 같아 괜찮다고 말하고 끊었다. 평소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고 살자고 생각하던 터라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내 마음속은 편해졌다.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 사장은 말로 천 냥 빚을 갚았다.
버나드 쇼 :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라. 그들의 취향이 당신과 똑같은 것이라는 증거는 없으니까.”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46쪽.
‘남이 네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라.’라는 말은 알고 있어도 버나드 쇼의 이런 말은 처음 본다.
인간은 각자 다르니까 내가 바라는 것과 상대가 바라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도 난 상대에게 상대가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하겠다. 이것이 확률적으로 볼 때 기분 좋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으니까. 말 한마디를 친절하게 하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나을 것 같으니까.
책장의 흠집은 내 삶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그건 그것대로 놔두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건 그 사장의 친절한 말 때문이었다.
3. 원칙만 중요할까 :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일수록 원칙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자식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다.
“학교를 갔다 오면 반드시 숙제부터 하고 놀아.”
꼭 그래야 할까? 숙제는 하고 싶은 시간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티브이 드라마를 보지 마. 쓸데없어.”
꼭 그래야 할까? 티브이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즐거움 하나를 잃고 사는 게 아닐까?
“건강에 좋지 않으니 커피를 마시지마.”
꼭 그래야 할까?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참느라고 스트레스가 생기는 게 건강에 더 나쁜 게 아닐까?
결국 전 시장이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원칙을 갖고 있다는 것도 좋고 그걸 고집한다는 것도 좋아. 그렇지만 따지고보면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아이들에게 즐거운 일도 해줄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109쪽.
무엇이 옳다는 고정 관념이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융통성이 필요하다.
4.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 같은 생각을 하는 여러 작가들을 본다.
혹독하게 추웠던 금년 겨울 동안의 우리 마을 정육점 주인 생각이 난다. 그는 그의 ‘냉방’, 즉 거대한 냉장고 속으로 피신한 결과 견딜 만한 기온(영상 5도)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185쪽.
큰 추위(고통이나 불행)를 겪고 나면 웬만한 추위(고통이나 불행)쯤은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게 된다는 말 같다.
그 기사에 따르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가장 강한 성인들은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니체가 한 말이 그대로 증명되었다고 하겠다. “나를 죽이지 않는 모든 공격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그는 말했었다. 면역학의 원리가 그러하다. 즉 백신은 나에게 죽지 않을 정도의 공격을 가함으로써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81쪽.
니체도 투르니에도 ‘불행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는 걸 읽는다. 프루스트도 알랭 드 보통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읽는다.
“행복은 몸에 좋지만, 정신의 강인함을 발달시켜주는 것은 바로 슬픔이다.” 이 슬픔은 우리가 더 행복한 시절이라면 회피했을 일종의 정신적 체육 활동을 거치도록 해준다. 실제로 그의 말에 담긴 암시란, 우리가 정신 능력의 발달에 진정한 우선순위를 둔다면, 우리는 만족보다는 오히려 불행한 채로 있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그리고 플라톤이나 스피노자를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괴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편이 더 나으리라는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95쪽.
우리의 정신을 성장시켜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불행은 왜 정신을 성장시켜 줄까? 다음의 글이 답이 될 수 있겠다.
가령 자동차가 잘 움직인다면, 무슨 이득을 바라고 우리가 굳이 그 기계의 복잡한 내부 작동에 관해서 배워야 할까? 연인이 충성을 맹세한다면, 우리가 왜 굳이 인간의 배신행위의 역학에 관해서 숙고해야 할까?
- 알랭 드 보통 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 95~96쪽.
일이 바라던 대로 풀린다면 고민(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일이 바라던 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고민(생각)하게 될 것이다. 생각을 많이 할수록 생각이 깊어지니 정신이 성장한 사람이 되겠다.
그러고 보면 나쁜 일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이다. 나쁜 일이 꼭 나쁜 일이기만 하다면 불행에 처했을 때 우리를 위로해 줄 생각 하나를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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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 페이지 넘기기 :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쓴 글이 있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자신이 의식적으로 전혀 개입하지 않은 채로, 삶이란 ‘여러 시기들’의 연속이다. 규칙적으로 하나의 시기가 끝나면 또 하나의 시기가 시작된다.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심각한 병, 직업의 변화, 이사, 절교 등등. 흔히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는 것을,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170쪽.
내 삶을 돌아보니 늘 걱정을 달고 산 것 같다. 이 걱정이 끝나고 나면 저 걱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던 것 같다. 지금도 걱정이 있는데 하나가 아니고 둘이 아니고 셋이나 된다. 이 세 가지의 걱정이 끝나는 날이 오겠지. 좋게 끝나든 나쁘게 끝나든 언젠가 매듭이 지어질 것이니.
6. 그냥 좋아서 하는 것 :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쓴 글이 또 있네.
이처럼 뒤늦게 아껴가며 알을 품는다고 해서 과연 무슨 결과가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하지만 누가 알랴? 아마도 이 어미새는 과묵한 자 기욤의 글을 읽은 바 있는지도 모른다. : “꼭 희망이 있어야 무슨 일을 기획하는 것은 아니며 꼭 성공을 할 수 있어야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171쪽.
“꼭 희망이 있어야 글쓰기를 기획하는 것은 아니며 꼭 성공을 할 수 있어야 글쓰기를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 페크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글쓰기이다. 즐거운 취미 생활이 딱히 없어서 하는 일이 글쓰기이다. 그러므로 희망을 운운할 필요가 없다. 성공을 운운할 필요도 없다. 재능이 있느냐 없느냐를 운운할 필요도 없다.
내게 이런 걸 운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다.
7. 여름을 느끼며 : 저녁 7시 전후. 해가 지고 나서도 어둠이 내리지 않아 낮처럼 밝지만 햇볕이 없어서 서늘함의 환상을 주는 게 좋고 실제로 한 줄기의 바람이 서늘함을 싣고 와서 좋다. 나처럼 여름의 매력을 아는 사람의 글을 읽는다.
일 년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인 이 7월이 끝나가는 것을 보는 슬픔. 당당하면서도 젊음 가득한 이 달은 백합꽃으로 절정에 이르고 보리수 향기가 풍기는, 여름 중에서 으뜸가는 달이다. 8월은 꼼짝도 하지 않는 여름. 서서히 가을의 부패를 향해 기울기 시작한다.
- 미셸 투르니에 저, <외면일기>, 183쪽.
일 년 중 가고 나면 가장 섭섭한 달이 내겐 8월이다. 마치 나를 버리고 떠난 연인 같은 여름. 매년 9월이 오면, 떠나 버린 여름과의 작별에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아쉬움의 증상이 심해지면 가을을 탄다.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여름을 느끼기 위해 저녁마다 산책을 한다. 저녁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을 스칠 때마다 여름을 만끽한다.
어느 제과점 앞 벤치에 다정하게 앉아 담소하는 연인들의 모습.
젊어서 예쁘고 행복해 보인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생각에 잠겨 걷는다.
어제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