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한 해인 1988년에 시어머니는 55세였다. 그해 시어머니의 생일날이 되었을 때, 나는 백화점에서 미리 사 놓은 옷을 생일 선물로 드렸다. 할머니가 입을 법한 디자인의 흰 스웨터였다. 시어머니는 그 옷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시누이가 옆에서, 이건 할머니들이 입는 옷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시어머니는 할머니가 아니니 옷을 잘못 샀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어머님이 할머니시잖아요"라고 말해 버렸다. 해선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어린 외손자가 있어서인지 내 눈엔 영락없이 노인이었다. 아니 20대 며느리였던 나의 눈에는 50대들이 다 늙어 보였으리라. 시어머니는 노인 옷이라며 흰 스웨터를 장롱 깊숙이 넣어 두셨다.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죄송할 따름이다. 50대라도 마음은 젊다는 것을 몰랐다. 노인 취급을 받는 게 기분 나쁘다는 것도 몰랐다. 난 철부지 새색시였다.



그로부터 35년이 흘렀다. 35년 전의 시어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은 나는 나를 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외모가 젊어진 것도 이유이지만, 그것보다 예전의 시어머니처럼 마음이 젊은 것이 더 큰 이유겠다. 난 청바지를 즐겨 입고 운동화를 즐겨 신고 발레를 배우러 다니며 젊게 산다.



몇 년째 발레 학원에서 발레를 즐겁게 배우고 있다. 발레를 하면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 건강에 이롭고 몸매 관리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발레를 하는 동안 내 나이를 잊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몸이 따라 주지 않아 발레를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발레를 하는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발레 선생이 나에게 스트레칭 자세가 많이 좋아졌다며 칭찬해 준 날이 있었다. 집에 와서 20대 작은딸에게 발레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하니 "그건 엄마가 발레 학원을 오래 다니게 하기 위한 립서비스야"라고 말을 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잘해서 칭찬을 받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럴 땐 내가 딸의 보호자가 아니라 딸이 나의 보호자 같다. 상황의 반전이다.



길을 가다가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손을 잡고 가는 여성을 보면 부럽다. 귀여운 아이와 함께 있는 아이 엄마가 부러운 것이다. '저럴 때가 행복한 건데 본인은 모르겠지'하고 짐작한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울 땐 행복한 줄 몰랐으니까. 육아로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딸만 둘인 나는 두 애가 어렸을 때 놀이터에서 놀고 땀을 흘리며 들어오면,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긴 머리를 드라이어로 말려 주었다. 육아와 집안일을 하면서 과외 교사로 일하느라 바쁠 때여서, 난 아이들 키우는 재미를 몰랐고 하루하루가 힘들게 느껴졌다. 그 시절로 단 하루만이라도 돌아가서 아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던가.



당시 밤 11시가 넘어 아이들과 남편이 다 잠들고 나면 조용한 시간이 너무 좋아 30분쯤 거실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기도 했다. 잠이 와서 하품이 나왔지만 그 조용하고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이 아까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느 해 남편이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집에 나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 달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남편이 쉬는 날 남편에게 애들을 맡기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려면 따라나서는 애들 때문에 애를 먹었다. 난 '오늘 하루만이라도 애들 없이 자유롭고 싶다'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현재 나는 어떠한가? 내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같이 보자고 하면 애들은 스마트폰을 보느라 각자 자기 방에 박혀 거실로 나오질 않는다. 과거엔 내가 혼자 있고 싶어 했고 애들은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했는데, 이젠 정반대로 애들이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나는 애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상황의 반전이다. 요즘 내가 연로한 친정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있는데, 언젠가는 내가 아이들의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다. 인생길에 상황의 반전이 있음은 겸손을 배우게 한다.




.......................................

경인일보의 오피니언 지면에 실린 글입니다.

종이 신문에는 내일 날짜로 게재됩니다. 

아래의 ‘바로 가기’ 링크를 한 번씩 클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문 ⇨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231116010003502




인용한 책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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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3-11-16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공감했다가,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했다가 그러고 있네요.
진짜 예측불허의 인생길 입니다. 저도 페크님처럼 멋지게 세월을 맞이할래요^^
어느덧 다음 달이 마지막 칼럼 기고군요.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서재에 좀 더 자주 오시기를 ㅎㅎ

페크pek0501 2023-11-17 13:00   좋아요 1 | URL
인생은 예측불허에다가 반전이 있으니 누구의 흉도 보면 안 될 같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맞이할 수 있거든요.
저처럼 멋지게 세월을 맞이하시겠다고요? 무슨 말쌈을...ㅋㅋ 건강을 위해 처음엔 헬스클럽을 다녔는데 어찌나 시간이 안 가던지 그만두었죠. 어느 날 동네 산책을 하는데 무용 학원이 눈에 띄는 거예요. 아, 무용을 해 보자, 그랬지요. 그래서 현대무용을 배우다가 발레를 배우게 됐어요. 발레를 하면 시간도 잘 가고 땀도 많이 흘려 좋습니다.
연재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내년부터는 물감 님처럼 이달의 당선작,에 뽑히기 위해 노력하며 살꼬예요ㅋ

꼬마요정 2023-11-17 0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크 님 역시 멋진 글을 쓰실 줄 알았습니다!! 걱정하시더니 반전이네요 ㅎㅎㅎ
발레 선생님이 하신 말씀 립서비스만은 아닐 거예요. 꾸준히 발레 하셨으니 당연히 자세가 좋아지시지 않았을까요? 발레 선생님도 뿌듯하고, 페크 님도 뿌듯하고 너무 좋아요^^ 페크 님 글이 우아하다고 느꼈는데 발레를 하셔서 그런가 싶네요.
시간이 정처없이 흐릅니다. 벌써 다음 달이 마지막이시군요. 고생많으셨어요^^

페크pek0501 2023-11-17 13:02   좋아요 2 | URL
반전!, 이라니 그 표현이 반전이십니다.
립서비스도 약간 있고 격려의 뜻도 있지 않을까요.
하하~~ 우아함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래서 발레가 재밌어요. 이색적이라고나 할까요..ㅋㅋ
벌써 새해 달력이 나왔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11-17 0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너무 좋아요....

흰 스웨터에 그런 깊은 사연이.

페크pek0501 2023-11-17 13:04   좋아요 1 | URL
하필 발레 이야기를 넣은 이유는, 55세밖에 안 된 시어머니에게는 노인 취급을 하고는 정작 자신은 더 나이가 많으면서 젊은 여성들이 많이 배우는 발레를 하잖아요. 발레는 이 글에서 젊음의 상징, 인 셈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상황의 반전으로 배우는 겸손, 이 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호시우행 2023-11-17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들면 늙어지는 대로..... 너무 애쓰지 마세요.ㅎㅎ

페크pek0501 2023-11-17 13:05   좋아요 0 | URL
오! 애쓰는 걸로 보이셨군요. 오해십니다. 발레를 하면서 저 나름 즐기는 겁니다.
외모가 젊어지려면 얼굴 마사지 받으러 다녀야 하는 건데 그건 귀찮아서 딸이 쿠폰 끊어 주겠다고 해도 사양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새파랑 2023-11-17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그때 그때의 재미가 있는거 같아요. 지나고 보면 다 아쉽고. 언제나 반전의 반전이고~ 겸손을 배우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3-11-17 13:07   좋아요 2 | URL
저도 상황의 반전으로 배우는 겸손, 을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발레 하고 나오다 보니 눈이 조금 아주 코딱지만큼 내리더라고요, 가족 톡에 첫눈 온다, 고 보냈는데
마트 들렀다가 나오니 안 오네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감사합니다.^^

호시우행 2023-11-17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저도 88년 3월초에 늦장가간 칠십대노인이거든요.

페크pek0501 2023-11-17 14:39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그 행운의 88년도의 동기생이네요. 반갑습니당~~.
블로그의 좋은 점은 나이와 상관 없이 동료처럼 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호시우행 님도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자주 뵙기를...^^

2023-11-17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17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11-17 2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오늘 글 정말 좋은데요? 이 글이야 말로 반전입니다. ㅎㅎ
역시 밤이 주는 매력이 있죠.
저도 하루를 마치고 자리 펴 놓고 TV 보는 시간이 젤 좋더라구요.
하루 중 혼자 누리는 30분. 아마도 그것이 언니를 건강하게 살게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페크pek0501 2023-11-18 10:34   좋아요 2 | URL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저 글을 쓰기 전에 글감을 못 찾아 긴 시간을 헤맸었기 때문에 글감이 떠오르자마자 단숨에 초고를 썼어요. 그리고 휴~ 살았다, 그랬죠. 펑크 낼까 봐 걱정이었거든요. 저는 프로가 되려면 한참 멀었어요. 공부가 많이 필요함을 절감해요.
스텔라 님의 말이 맞아요. 힐링 시간인 셈이죠. 하루를 마치고 누워 있는 시간이 저도 제일 좋아요!!!

2023-11-19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09: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19 1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1-20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3-11-19 2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시간이 지나면서 체감하는 것들은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이전의 세대와 지금 세대의 나이에 대한 생각도 건강이나 외모도 많이 다를 것 같고요. 하루에 약간의 시간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은 꼭 필요해요. 아무 생각하지 않는 시간도요. 전에는 그런 게 필요하다는 걸 몰랐는데, 요즘엔 그렇지 않네요.
이번주 많이 춥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3-11-20 09:54   좋아요 2 | URL
시간에 따라 많이 달라져 보이죠. 요즘은 노인들이 젊게 사셔서 아마 제가 샀던 흰 스웨터를 아무도 입지 않을 것 같네요. 우리 외할머니가 그런 옷을 입으신 적 있어 그땐 그런 옷을 사야 되는지 알았어요.
요즘 좋은 점은 혼자 자유로운 시간이 있다는 거예요.
오늘도 추운지 모르겠네요. 아파트에 사니 밖의 날씨를 잘 모르겠어요. 추운 겨울이지만 마음은 따뜻하게 보내셔요.^^

희선 2023-11-20 0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좋았다는 걸 알기도 하네요 그러면 지금 또한 좋은 거겠습니다 발레 오래 하셔서 칭찬 받으신 걸 거예요 꼭 발레 학원에 오래 다니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닐 겁니다 좋은 말은 좋은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지요 이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기면 괜찮겠습니다

페크 님 발레 오래 하셔서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실 겁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3-11-20 09:59   좋아요 1 | URL
지나고 나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당시엔 소원이 나 혼자 하루를 보내는 거였어요. 아마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러면서 애들을 키울 것 같네요.
그러니까 ‘현재를 즐겨라‘가 되겠습니다. 발레 자세에 대한 칭찬은 기분 좋았어요. 칭찬보다 지적이 많은 발레 시간이거든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다가 저의 친정어머니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자식이 찾아와 주면 반가워 하지요.
솔직히 암 같은 큰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발레의 즐거움을 기꺼이 포기하죠. 하하~~ 건강을 위해 뭐든 운동해야 하잖아요. 헬스클럽은 재밌없고 그 대안이 저에겐 발레였답니다. 발레는 의외로 땀이 많이 나는 운동이라 좋습니다. 희선 님도 건강한 겨울 보내세요..^^

모나리자 2023-11-20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쓰셔서 제출하셨군요.ㅎ 시작이 반이라니까요.
맞아,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아이들 손잡고 걸어가는 엄마들 보면 그런 생각 자주 했어요. 그때가 제일 행복할 때인데 아마 모를 걸, 하고 아이들을 보면 우리 얘들도 저때가 있었는데 더 안아주고 놀아주지 못한 게 후회되더라구요. 되돌릴 수 없는 게 시간이라 더욱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 나가서 걷는 게 꾀가 나기 시작하네요. 다시 홈트 요가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ㅎ
따뜻하게 꿀잠 주무세요. 페크님.^^

페크pek0501 2023-11-21 12:48   좋아요 0 | URL
펑크를 면해서 다행이었어요.ㅋㅋ
아이 키워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다 공감할 듯해요. 혼자만의 달콤한 시간도요.
저 역시 집콕이 가장 좋아요. 다음달에 건강검진 해야 하는데 늘 의사로부터 듣는 얘기는 운동 시간을 늘려라, 예요. 저혈압이었는데 조금씩 오르고 다른 것도 예를 들면 몸에 좋지 않은 콜레스테롤 수치도 조금씩 오르고요. 게다가 친정어머니가 당뇨병 있어서 가족력 때문에 제가 운동 많이 해야 하는데, 운동하면 기분 좋아지는 건 의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일인데 그러나 우리는 운동이 귀찮잖아요. 막상 나가면 괜찮은데 나가기까지 귀찮은 마음이죠. 요즘 TV 보면서 실내자건거 타는데 30분이 길어서 20분으로 줄임. 실내자전거 추천! 좋은 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