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애착하기보다 무심하기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고 그 칼럼이 신문에 실렸다. 그 칼럼의 초고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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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무심함의 장점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에게 “숙제는 했니?”, “잠잘 시간이 됐으니 이 닦아야지.” 등등의 잔소리를 했다. 옆지기에게는 “퇴근이 왜 이리 늦어?” “모임이 너무 많은 것 아니야?” 등등의 잔소리를 했다. 아이들도 옆지기도 내 잔소리가 듣기 싫었으리라.
내가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로 돈을 벌고 블로그에 글을 쓰게 되면서 잔소리가 없어졌다. 살림하랴, 아이들 키우랴, 돈 벌랴, 글 쓰랴, 책 읽으랴 얼마나 바빴던지 식구들에게 잔소리를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일이 많아져 머릿속이 복잡해지니 애들과 옆지기에게 저절로 무심해진 것이다. 그래서 나와 식구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
한마디로 말해 나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나와 옆지기와의 관계가 좋아졌다. 나의 무심함 덕분이었다. 나의 무심함은 생활 습관이 되어 애들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관심이 많다 보니 잔소리가 많아지기 일쑤다.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내뱉는다.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하면 문제가 없지만 자기를 괴롭힌다고 여기고 피하고 싶어 한다면 사이가 나빠지고 만다. 누구나 자신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때로는 인내심을 가지고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요령이 필요한 일에 인내심이 부족해서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로 인한 불행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본인이다.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말했듯이 지혜의 절반은 인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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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고를 다 버리고 제목도 고쳐서 다른 칼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초고를 썼기에 ‘애착하기보다 무심하기를’이라는 칼럼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초고가 없었으면 ‘애착하기보다 무심하기를’이라는 칼럼을 쓸 수 없었다. 그러니 버렸더라도 초고는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보통 나는 200자 원고지 10매를 쓰려 할 때 초고를 13~14매 정도 쓴다. 초고를 써 놓고 그다음에 퇴고를 하면서 불필요한 문장이나 문단을 없애서 10매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나무를 잘 가꾸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듯이, 더 나은 원고를 만들기 위해 불필요한 글을 잘라 내는 것이다. 가지치기를 하면서 ‘원고지 10매를 넘지 않도록 해 달라는 신문사 측의 요구’에 따라 10매나 9.9매의 원고가 되도록 완성해 나간다.
어느 책에서 보니 써야 할 원고 분량의 세 배가 되는 초고를 쓰고 나서 3분의 2의 글을 버리는 작가가 있다고 한다. 그 작가가 나보다 훨씬 좋은 글을 쓰는 작가임이 분명하다. 생각의 가지를 여러 방향으로 길게 뻗어 나가게 해서 초고를 많이 쓸수록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적은 분량의 초고보다 많은 분량의 초고가 좋은 글을 완성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과 열 개 중 빛깔이 고운 사과를 고르는 것보다 사과 서른 개 중 빛깔이 고운 사과를 고르는 게 유리한 것과 같은 이치다.
초고를 쓸 땐 가지치기를 염두에 두고 생각나는 대로 글을 많이 쓰는 게 좋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한 가지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생각만 하지 말고 무조건 글을 쓰라는 것이다. 한 문단을 쓰고 나면 그다음 문단을 쓸 수 있게 된다. 글이 새 글을 부른다.
이 글에 인용한 책....................
발타자르 그라시안, <사람을 얻는 지혜>
알아 두면 좋은 글 :
지혜의 절반은 인내에 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법칙은 참을 줄 아는 것이고, 지혜의 절반은 인내에 있다”라고 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종종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한다. 이는 자제력을 기르는 데 좋은 훈련이 된다. 평소 이 훈련을 자주 해 두어야 한다.
자제력을 가지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기쁨인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참아내야 한다.(178쪽) - <사람을 얻는 지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