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결혼했던 1988년 그해, 남편이 내 이름을 부를 순 있어도 아내인 내가 남편 이름을 부르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감히 아내가 남편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게 시집 식구들의 의견이었다. 우리 부부는 동갑이니 남편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남편 이름에 ‘씨’자를 붙여 불렀고 남편은 나의 이름에 ‘씨’자를 붙이지 않고 불렀는데도 내가 부른 남편의 호칭만 문제가 되었다. 이는 내가 처음으로 여성의 낮은 지위를 뼈저리게 자각한 사건이었다.

 

 

  이런 걸 경험한 터라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처음 만났을 때 무척 반가웠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들여지는 거라고 말하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울프의 <자기만의 방>, 그리고 우리는 남성과 싸우는 게 아니라 단지 나쁜 원칙과 싸운다고 말하는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 등을 읽으며 세상의 불합리와 불공정을 배웠다.

 

 

  그로부터 십 년 세월이 흐르자 아내가 남편 이름을 불러도 괜찮은 시대가 되었다. 시동생이 결혼하여 새로 생긴 동서가 그걸 증명했다. 세월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그렇게 높여 놨다.

 

 

  오늘날 페미니즘이란 말은 진부하다. 오랜 기간 인구에 회자되다 보니 자칫 페미니즘에 대한 모든 책들이 새롭지 않은 뻔한 주장을 담고 있을 거라고 보기 쉽다. 나도 그랬다. 그러다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다. 이 책은 진부하지 않고 새롭다 못해 충격적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기존 인식의 틀을 뿌리 뽑고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만들어 세상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유지해 온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을 전부 지워 버리고 새로운 내용으로 사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독자에겐 마음 불편한 책이 될지 모른다.

 

 

  이 책은 남자에게 대항하여 싸우자고 소리치지 않으며, 여자의 힘을 기르자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남자든 여자든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알아야 할 일들을 알려 주기 위해 세상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졌던 생각들이 맞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기회를 갖게 해 준다. 

 

 

  우선 저자는 머리말에서 물음에 대해 언급한다. 모든 물음은 질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방식을 반영한다는 것.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는 것.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 답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왜 그렇게 취업하려고 노력하니?”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니 평상시 얘기할 때도 주의가 필요하겠다. 나의 말에 어떤 편견과 선입견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검토해야겠다. 인간을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려면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저자는 우에노 치즈코의 말을 옮겨 적는다. 


 
  「여성주의 사유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였다. 우에노 치즈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서화된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여성의 역사가 출발하다 보니,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여진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 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된 남성들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는 남성에 의해 쓰인 여성의 역사에서 여성의 모습은 왜곡될 수밖에 없으니, 결국 여성 모두가 갖고 있는 시각은 남성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시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리면,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들여진다는 것이겠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도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게다.

 

 

  저자는 ‘동성애 혐오 문화’에 대하여 날카롭게 지적한다. 자신이 동성애를 허용하자고 주장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누가 동성애를 허용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한다. 여성이나 흑인, 장애인 모두 누군가 찬성하지 않아도 살아가듯이, 동성애자 역시 누군가의 동의와 허락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자임을 알리겠다는 위협이 한 사람의 인권을 몰수하는 ‘권력’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퍼져 있는 동성애 혐오 문화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의 가해자는 사회 구성원 모두라고 볼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해선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면에선 소수자이며, 그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는 것.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든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고.

 

 

  이 밖에도 성비 불균형으로 인한 여아 낙태, 가정 폭력, 정신대 문제 등이 인권 문제임을 지적한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을 규율하고 있는 외모, 학벌, 나이, 서울 중심주의 등으로 인한 차별 사안도 인권의 침해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제도는 세계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현재 존재하는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이러한 현상이 어디 제도뿐이겠는가. 우리는 각자 알고 있는 모든 원칙들을 일말의 의심 없이 반드시 지켜야 마땅한 것들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지 않은가. 가장 큰 문제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우리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2020년이다. 시대가 변했다. 하지만 요즘도 한국인이 이주 노동자를 무시하여 일어난 사건과, 남성이 여성 비하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된 사례를 각종 뉴스가 심심찮게 보도한다. 모든 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차별과 편견은 아직도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 <피은경의 톡톡 칼럼>의 167~172쪽의 글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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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

 

<제2의 성>
<자기만의 방>
<여성의 신비>
<페미니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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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책을 출간했다. <피은경의 톡톡 칼럼>이라는 책이다. 출간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다. 그 일 년은 코로나19로 인해 지루함을 자주 느낀 시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쏜살같은 급류의 시간을 느끼게 된다.

 

 

내 책에 수작이 많이 담겨 있다고 말해 준 벗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책 열 권을 구매해서 자기 친구들에게 돌린 벗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책이 모 대기업의 한 부서에서 권장도서로 선정되게 해 주신 분과 그 소식을 전해 준 지인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책의 리뷰와 백자평을 써 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책이 담긴 페이퍼를 써 주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사소한 일상생활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삼아 작가의 통찰력으로 동서고금의 명저와 연결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해 주신 독자 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내 책에 대한 글에 좋아요를 누르신 분들과 댓글을 남기신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방문자 여러분 모두 고맙습니다!!!

 

 

 

 

 

 2020년 8월 24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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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06 14: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우 종합 2위 에세이 1위~!!!!!! 작가님이셨군요^^ 페크님 글 완전 공감 합니다😆

2021-08-06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06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8-06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아 2021-08-06 14: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작가님이신줄은 알았는데 에세이 1위 넘 멋지심요~ 💕👍👍

2021-08-06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이버 2021-08-06 15: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벌써 일 년이라니 시간 정말 빠르네요~! 제게는 칼럼의 매력을 처음 알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출간 1주년 축하드립니다
✧⁺⸜(・ ᗜ ・ )⸝⁺✧

2021-08-06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21-08-06 16: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글에 나타난 페크님의 주위에 대한 고마움과 관심이, 페크님께서 받으신 사랑의 원천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페크pek0501 2021-08-07 16:01   좋아요 2 | URL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인복이 있는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어요.
시댁 식구들을 잘 만난 것부터가 그래요. 저에게 보약을 해 줬다고 하니까 우리 친구들이 특이한 시댁이래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

바람돌이 2021-08-06 16: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글이 좋으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
출간 1주년 축하드려요. ^^ 새로운 책을 쓰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

페크pek0501 2021-08-07 16:03   좋아요 1 | URL
완전 오바십니다. 과찬의 말씀, 이라고 겸손한 척하는 게 아니라 실화예요.
축하에 감사드립니다. 책은 4~5년에 한 번씩 내면 된다고 보고 다른 쪽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좋은 하루 되십시오. ^^**

그레이스 2021-08-06 17: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페크pek0501 2021-08-07 16:0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감사 감사드립니다. ~♡

붕붕툐툐 2021-08-06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벌써 1년~ 책이 얼마나 좋으면 1위할 수 있는 겁니까?
페크님 책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페크pek0501 2021-08-07 16:05   좋아요 1 | URL
책이 좋아서가 아니라 알라디너들의 의리로 된 것 같아요.
제 책에 대해 기대는 마십시오. 기대는 실망을 부르는 법이니.
저는 툐툐 님이 애정하시는 - 영어 문장 나오는 - 그 책을 꼭 살 생각입니다.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좋은 문장이 많아서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8-06 22: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크님의 책 지난해 8월이었는데, 금방 1년이 지나왔네요.
작년의 일인데 얼마 전 같아요.
좋은 기록, 캡쳐해서 가지고 계시군요.
출간 1주년 축하드립니다.
페크님 시원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1-08-07 16:06   좋아요 3 | URL
글쎄 말이에요. 벌써 1년이라니... 서니데이 님이 제 책의 리뷰를 쓰셔서 이달의 당선작이 된 게 두세 달 전 같은데 말이죠.
알라딘 서재의 상단에 제 책이 떠서 이게 뭐지, 그랬어요. 그리고 찍어 두었죠.
축하 감사하고요.
전 서니데이 님이 계신 이곳 알라딘이 참 좋습니당~~

희선 2021-08-07 02: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크 님이 결혼하실 때와 시간이 흐르고 좀 달라졌겠습니다 남자는 되고 여자는 안 되기도 하다니... 나누지 않고 같은 사람으로 살면 더 좋을 텐데, 아직도 그 길이 멀지 않나 싶어요 뭐든 갈수록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책이 나온 지 한해가 됐군요 축하합니다 이 책을 봐야 할 텐데, 하다가 다른 책을 봤네요 2021년 안에는 봐야 할 텐데...

페크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2021-08-07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