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바다, 한때 - 이자규 시집
이자규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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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난 시를 잘 모른다. 모르지만 시의 매력은 알고 있어 시를 배우고 싶었다. 코로나19만 없었다면 주 1회로 시를 배우는 시 강좌를 수강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세상은 내 뜻에 상관없이 아니 내 뜻과 반대로 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 시간을 견디며 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끝은 있는 법이다, 하고 그 생각에 힘을 주며 버티기로 한다.

 

 

이 시집의 저자인 이자규 시인과 나는 2000년대 초반에 시를 배우는 강의실에서 처음 만났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는 그때 시인으로 등단해서 수강생들의 축하를 받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내가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많은 후배 수강생들 중 유독 나를 예뻐해 주는 선배님이었다. 몇 년쯤 알고 지내다가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 다행히 이메일 주소는 남아 있어서 내가 작년에 내 책을 보내 줄 수 있었고, 이번엔 세 번째로 시집을 출간한 선배님이 내게 시집을 보내 왔다. <아득한 바다, 한때>라는 신간이다.

 

 

시집 제목을 보자마자 ‘참 선배님답구나.’ 생각했다. 저자는 평범함을 거부하고 독특함을 지향한다.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으로 시집을 열었다. 시가 참 어렵네, 하고 느끼며 뒤적이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시를 발견했다. 여러분도 감상하시라고 필사해 올린다.

 

 

 

....................
 유리벽 에세이
                                                     이자규

 


  내가 강을 말하면 그는 산을 말한다 그가 창문을 열면 나는
긴팔 옷을 걸쳤다

 

  침묵과 침묵은 서로 꼬리 흔들다
  소원해졌을 때 그가 색소폰을 불고 나면 나는 유행가를 들었다

 

  무인도와 협곡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 그는 나 내가 그여서 한 접시의 푸성귀와 생갈치에 뿌리는 양념소금처럼 등 돌리며 다시 스쳤다

 

  폰에 저장된 그의 관악기 부는 서양음악 두 귀를 막다가 폰 휴지통으로 보낸 뒤 아우성치는 한 여운을 읽고 있다

 

  끼니 없는 추억을 들으며 내가 냄비 소리 냈을 때 그는 이부자리를 깔았다

 

  유리벽의 안과 밖은 서로를 견디고 견뎌낸 온도 차이일 뿐 아무 일도 아닌 듯 그가 웃었을 때 나는 눈물이 났다

 

  못 위에 새를 보며 그는 오고 있다 하고 나는 가고 있다 했다(80~81쪽)
....................

 

 


나 개인의 감상을 써서 독자로 하여금 이 시집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아 시를 그대로 옮기는 걸로 리뷰를 대신하고자 한다.

 

 

새롭고 독창적인 시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이 시집을 추천한다.

 

 

다음 시도 소개하고 싶어서 밑줄긋기 박스에 넣는다.

 


(77쪽) 아름다운 최후를 위해 살았다
푸른 의지로 열렬히 나부꼈다
단풍으로 뜨거웠던 노후가 생의 절정이라서
흙에 들어야 할 노래가 흙의 색깔로 천천히
바람이 분다
나무의 사지가 비틀릴수록 그의 내생은 깊어서
가느다란 잎맥이 마지막 입맞춤을 불렀다
가끔 폭설과 함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도 새겨졌다

미명을 사르던 가지 끝
지난 해 보낸 제 분신들을 알고 있는
인지의 나무

땅에 닿는 순간까지 푸르렀던 의미
모든 것은 기억의 뼈대로 키가 큰다
낙엽의 주검은
불굴의 그늘이 될 귀환이므로
겨울새 하나 둘 가지에 열리기 시작했다(‘낙엽’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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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5-23 15:0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즐거운 일요일 오후 되세요.^^

페크pek0501 2021-05-23 15:10   좋아요 7 | URL
아휴~~ 첫 댓글 님, 고마우셔라...

점심은 맛있게 드셨나요?
저는 입맛은 없고 커피만 당기네요. ㅋ
시 강의를 수강하고 싶었는데 무용도 계속 배우고 싶은데 코로나가 안 끝나네요.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우리입니다. 힘을 내서 버텨야겠습니다. ^^

페넬로페 2021-05-23 16: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에부터 시를 별로 읽지 얺은 듯 해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시를 분석하는 공부에 질려서 그런듯도 해요.
이제부터 조금씩 시를 읽고 싶어요^^
이 책은 페크님과 같이 시를 배운 동기의 시집이라 더 반가우실것 같네요**

페크pek0501 2021-05-23 18:04   좋아요 3 | URL
저도 자주 시를 읽자, 하고 계획을 세우곤 한답니다.
해석을 하는 것도 의미있겠지만 저는 시인의 표현법을 배우길 좋아합니다.
위의 시에서 예를 들면˝ 아우성치는 한 여운을 읽고 있다˝라는 문장이 재밌잖아요.
유치환 시인이 쓴 깃발이란 시에 나오는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란 표현과 비슷한 것 같지만 또 다른 느낌을 주지요. 여운이 강하게 느껴질 때 아우성치듯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해석을 잘할 자신은 없으나 시인의 독창적인 표현법을 배우려고 이 시집을 정독하기로 했답니다. 이 시집을 읽으면 두뇌를 많이 쓰게 되는 이점이 있을 듯해요.

그레이스 2021-05-23 16: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왜 눈물이 났는지 알 것 같아요.ㅠ
함께 있는 사람때문에 외롭다는 게 전달이 되네요.
그 웃음때문에 더... 그래서 화가 나요.

페크pek0501 2021-05-23 18:06   좋아요 4 | URL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네요. 시 해석의 다의성. 이게 또 시의 매력이죠.
시는 제멋대로 상상하고 유추할 수 있어 우리의 사고력을 확장시키게 만들 것 같아요.
올 여름엔 시를 사랑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5-23 18:14   좋아요 4 | URL
저는 그 웃음이 끝까지 이해못한 웃음으로 느껴졌는데 제가 너무 나갔나보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1-05-23 18:23   좋아요 3 | URL
너무 나가기도 하는 게 또 시의 매력아니겠습니까.(솔직히 저는 시를 잘 몰라서 이 시집의 저자와 만나 물어보고 배우고 싶더라고요. ˝이 문장은 무얼 말하는 거죠? 뭘 말하고 싶어서 이 시를 쓰셨나요?˝ 이렇게 질문하면서요.
그런데 만나려면 저자가 저의 집에서 왕복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곳에 사시니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걸 믿어요.

소설도 그렇지만 시도 읽을 때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올해 읽을 때와 3년 뒤에 읽을 때 다를 듯합니다. 어쨌든 시인들의 표현법은 흥미롭습니다. 저 같은 평범한 사람에겐 더욱.

댓글, 감사합니다.

cyrus 2021-05-23 17: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시를 안 읽은지 오래됐어요. 야근 잔업이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가벼운 분량의 책, 시집이나 그림책을 읽어야 할 것 같아요. ^^

페크pek0501 2021-05-23 18:07   좋아요 4 | URL
저도 시 공부를 많이 하고 싶어요. 그러면 더욱 시 읽기가 흥미로워질 것 같습니다.
그림책도 좋지요. 요즘은 어른이 읽을 동화책, 그림책도 많은 것 같더라고요.
글자가 적어서 오히려 상상력을 발전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붕붕툐툐 2021-05-24 0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크님의 시인 등단을 기대합니다! 시 너무 좋은데 잘 안 읽히는 게 함정. 그래도 좋아요. 이자규님의 시도 좋네요~~

페크pek0501 2021-05-24 10:25   좋아요 3 | URL
ㅋㅋ 저는 시인 등단을 원치 않아요. 심리학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심리학자가 되길 바라는 게 아니듯이요. 시를 잘 모르지만 흥미로워서 배우고 싶을 뿐입니다. 글쓰기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현재 칼럼니스트로 글을 잘 쓰는 것만 목표입니다.
저도 시가 안 읽히는 게 함정. 이 시집 참 괜찮습니다. 참신해요.
붕붕툐툐 님, 반가웠습니당~~~

겨울호랑이 2021-05-24 11: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번 째 시에서 흙으로 돌아갈 때 흙 색깔로 간다는 구절이 인상적이네요. 어쩌면 우리 삶이란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페크pek0501 2021-05-24 13:04   좋아요 3 | URL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자기 생을 혼자 꾸려 간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다른 이들과의 상호 작용에 의해 삶이 구성됩니다.
모든 경험과 기억의 뼈대가 삶을 만들어 간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희선 2021-05-25 02:2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시를 배우는 강의실에서 만나고 소식이 닿아 페크 님은 책을 보내드리고 받으셨군요 그런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 거의 잊어버리지만... 잊지 않아도 갑자기 연락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끔 시를 보기는 하지만 그렇게 깊이 보지는 못하는군요 그래도 그걸 보면 괜찮기도 합니다 시는 한번보다는 두 번이나 여러 번 보는 게 좋을 텐데...


희선

페크pek0501 2021-05-25 22:05   좋아요 3 | URL
이메일이 있어서 연락이 가능했어요. 한때 이메일을 주고받던 시대가 있었어요.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그땐 참 신기하게 여겼는데...
핸드폰이 생기면서 이젠 폰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래도 이메일의 편리한 점은 상대가 바쁘게 볼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급하지 않은 안부 인사는 이메일을 이용해요.
시집을 자주 들춰 보는 한 해로 기록되길 바라며 시집을 찾아 쌓아 두었어요.

희선 님. 굿 ~ 밤~

scott 2021-05-27 20: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크님 소개해주신 시집 급한 마음에 검색했는데 이지규로 ㅎㅎ이자규님이셨네요. 반복해서 읽을때마다 여러 상념들이 떠오르는 시, 좋은 시 소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1-05-27 22:54   좋아요 2 | URL
옙. 제가 구매한 책 중에서 소개할 책이 많은데 앞으로 천천히 올려 보겠습니다.
필사해서 밑줄긋기 박스에 넣고 싶은 것도 많답니다.
저 역시 스콧 님이 올려 주신 음악과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시는 전혀 상관 없는 낱말들을 연결해 생각할 수 있는 점이 유익하고 재밌는 것 같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