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니는 대학원을 상대로, 나름의 문제의식을 갖고 몇 가지 문제를 제기했었습니다. 학교 측 답변이 없어, 우울했었는데, 제기한 두 가지 문제 중 하나, 종합시험비용은 결국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부담지우지 않는 걸로 결정을 했다는 답변을 방금 읽었습니다. 

두렵고 그랬지만, 알고 지내는 알라디너분들께 기도 부탁드리면서, 그 응원 덧글들 읽고 힘을 냈습니다. 또 그 응원 덕분때문에 성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얼그레이효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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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4 0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06-0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그나마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시네요.

얼그레이효과 2010-06-04 00:2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0-06-04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쓰신 만큼의 성과를 얻은 것도 반가운 일이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셈할 수 없는 귀한 경험을 하신 셈이네요.
제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단 있고 강한 분이신 모양이에요 ㅋㅋ
암튼 축하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6-04 13:0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후와님. 제가 고집이 좀 있습니다.ㅎ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다들 가고 싶어한다는 뉴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캐슬린(릴리 테일러 역)은 여기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친구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카사노바라는 이름의 뱀파이어에게 목을 물리고, 그녀 또한 뱀파이어가 된다. 카사노바는 그녀를 물기전에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꺼지라고 말해!" 하지만, 캐슬린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 채, 겁을 먹고 체념한다. 이제 캐슬린이 카사노바의 역할을 수행할 차례다. 아벨 페라라 감독과 그의 고교 동창인 작가 니콜라스 세인트 존 콤비가 만든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어딕션>(1995)은, 캐슬린에게 "당신이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난처한 질문을 영화 속 숙제거리로 선사한다. 이건 비단 캐슬린 만의 문제가 아니다. 캐슬린은 이 질문을 자신의 주변 동료들에게 우회적으로 꺼낸다. 그리고 그녀는 수업에 흥미를 잃고, 점점 더 그녀가 고민하는 세계에 몰두한다. 그녀는 흡혈귀가 되면서, 공부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관객이라면, 그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성찰-게임'을 시작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동료들의 피를 빨아야 한다. 늦은 밤, 피를 빨기 전, 오늘의 먹잇감을 찾고, 그녀의 집으로 초대하기 위해 공부에 대한 이야기, 학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는 흡혈귀가 되면서 예전부터 가졌던 공부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과 회의를 더 직설적으로 표출한다. 예민하게 더욱 예민하게. 가령 이런 장면이다. 





전쟁터에서 무참하게 살해된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시체를 보면서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고뇌. 주인공 캐슬린은 역겨워서 세상을 보기 싫어한다. 그녀는 영화 내내 냉정한 눈빛을 뜨는 시간 이외엔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보는 것과의 단절을 지속적으로 시도한다. 공부와 식욕. 글을 읽고 본다는 것과 욕구의 병렬.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것과 글을 읽고 본다는 것의 병렬.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은 사람을 본다는 것과 글을 읽고 본다는 것, 먹는다는 것의 병렬. 


캐슬린은 친구가 카페테리아에서 제공하는 햄버거를 한 입 물고, 바로 책을 펴자, "어떻게 먹으면서  읽을 수 있니?"라고 묻는다.    



친구는 말한다. "학위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캐슬린은 철학의 거장들을 자유의지를 가장한 사기꾼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녀는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는 동료들의 소극적 태도에 불만을 가진 채, 그 혹은 그녀들에게 더 거칠고 강한 그리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한다. 그러한 요구의 극단. 그 경계 안에서, 오늘도 동료들은 캐슬린의 제물이 된다. 캐슬린은 자신을 흡혈귀로 만든 카사노바가 한 말 그대로 동료들에게 돌려준다. "나에게 꺼지라고 말해!" 그러나, 동료들은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2002년에 나온  문학비평집 <문학의 광기>때문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문학평론가 권명아는, 책을 통해 늘 자신이 갖고 있던 공부에 대한 고뇌를 영화 <어딕션>을 통해 사유하고자 한다. 권명아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딕션>에서 자신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타인의 피를 요구하는 흡혈귀의 본성은 자신의 <현존>을 위해 <타인의 지식과 생명>을 빨아대는 지식인들의 본성과 일치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한 지식에 중독된 자들, 그들이 <오늘날의 지식인>이다. 그들은 악과 구원과 자유의지를 논하지만 자신들의 악과 구원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페라라는 아예 노골적으로 이렇게 질문한다. "박사학위를 따면 지옥의 문이 닫힐까." 그렇다면 이렇게 만연한 악에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에게 말해라. 꺼져버리라고, 애원하지 마라, 애원 따위는 통하지 않으니까"라는 흡혈귀의 전언은 악과 타협하면서 "어쩔 수 없다"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는 지식인들에게 던지는 페라라의 전언이기도 하다. 이를 타락한 대학사회를 비판하고(28)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면서도 대학제도에서 발을 빼기보다는 최후의 일말의 가능성 때문에 오늘도 비굴한 웃음을 띠고 학회를 전전하는 <우리 지식인들>모두에게 던지는 신랄한 질문이기도 하다.  

피의 먹이사슬로 얽혀 있는 이 지식시장 속에서 나 하나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 것인가, 내가 뭐 그리 잘난 존재라고, 꼭 대학교수가 되려고 한다기보다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지>. 이러한 자조와 타협, 자기포기 속에서 악은 중독되고 확산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지식인의 존재론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포기한다, 고로 존재한다>또는 <나는 중독된다, 고로 존재한다>인 것이다. <영혼을 팔지 말 것>,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영혼>을 두고 거래하지 말 것. 페라라는 이 단순한 대답을 여러 작품을 통해 제기하고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던 동료를 만나, 캐슬린은 포이에르바흐를 이야기하자며, 그녀의 집에서 피를 빨아먹는다. 그리고 그녀는 지식인의 태도를 물으며, 그녀의 밤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촉구한다. "왜 싫은 걸 싫다고 못해?"  



그녀는 뱀파이어가 된 이후, 그동안 자신이 처절하게 고뇌했던 내용을 담아, 열정적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론은, "철학은 선전입니다" 



캐슬린은 박사 학위를 딴다. 그리고 파티를 연다. 이 파티엔 그녀를 알고 있는 교수들과 동료들이 참석한다. 그러나 이 동료들 몇몇은 캐슬린의 이에 물린 또 다른 뱀파이어들이다. 피의 제전이 시작된다. 이것이 지식노동자의 삶이다.   

당신은, 공부와 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공부와 피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고 생각하는가. 공부는 처절한 것이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는 이를 만만하게 본다면, 오늘 이 수많은 지식노동자들은 단결하여 뱀파이어가 될 필요가 있다.  고로 공부와 피의 거리는 멀지 않다. 공부는 인간의 피를 통해 윤리를 되묻고, 스스로가 존재하는 이유를 점검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 지식 사회는 점점 이 피의 존재를 잊고 산지 오래다. 이 존재를 다시 깨달을 때, 우리는 인간 앞에서 떳떳해진 앎의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부를 통한 나의 상처는 오직 나의 몫, 이를 통해 맺어질 열매는 당신의 것, 그것이 '진보의 피'일지니.  우리는 이 처절한 피의 격문같은 삶을 멀리할 이유가 없다

며칠 전, 돌아가셨던 어느 시간강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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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당비의 생각(http://dangbi.tistory.com/) 에 실렸습니다. 

 

'없음'을 위한 민주주의

- 욕망의 교차 공간, 신도림역에 서서


김신식(당비의 생각 간사)

 

 나는 운동화를 비교적 빨리 바꾸는 편이다. 운동화 뒷쪽이 빨리 벌어져 너덜너덜해지기 때문이다. 내 운동화와 신도림역은 상극인 듯하다. 학교 위치상, 꼭 신도림역을 거쳐야 하는데, 지하철 안에서 신도림역 이름만 나오면, 미리 인상이 찌푸려진다. 오늘도 조심조심 걸어야지. 사람들이 날 밀더라도 짜증내지 말아야지. 걸을 때 되도록 내 뒷사람 구두 굽에 안 닫게 해야지. 하지만, 세상은 결심과 반대의 장면을 나에게 선사한다. 작년이었나. 킬 힐을 신은 여학생에게 역 계단에서 한 번 밟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산지 얼마 안 된 신발의 뒷 굽이 확 벌어져 신경질이 난 적이 있었다. 싸게 산 덕분이라 자신에게 위안을 보냈지만, 그런 경험이 갈수록 쌓이다보니, 신도림역은 나에게 '신경질역'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 나는 이 역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신촌 방향과 강남 방향으로 갈리는 두 플랫폼. 이곳에 오면 어떤 욕망이 보인다. 내가 살면서 추구해야만 하는 그 욕망. 그것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통로가 여기 있다. 서울에 진입해야만 하는 사람들. 갈수록 이 진입로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정치인들은 "지읍시다, 세웁시다, 만듭시다!"라고 주절대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은 없어져야 할 것이 많다. 기술이 늘어나고, 매체가 늘어나고, 사람들의 감각이 늘어난다. 내가 '발산형 사회'라고 부르는 현상. 모든 에너지들이 발산되는 구조. 이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그 피로도가 더해진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피로도를  '있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안이 시민들의 행복을 위한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음'을 위한 민주주의다.

‘질서적’ 민주주의를 벗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혼란이라고 생각하며, 민주주의는 이 혼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이 시대의 권력을 잡은 자들이 질서라는 개념을 민주주의의 가장 큰 효과라고 강조하면서, 그들은 이 질서가 주는 가지런한 자유를 자신들의 노력이라고 자화자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적한 것은, 사람들의 불안이다. 사람들은 늘 '있음'에 친숙해져야 하며, 이 '있음'에 기반을 둔 사회적 구조에 천착한다. 그러하여, 자신들의 일상에 '있음'을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고로 '없음'은 늘 민주주의의 적으로 여겨진다. 

 정전이 일어난 당신, 그리고 이웃의 집을 상상하기. 사람들은 정전이 일어났을 때 발생하는 그 고요함의 에너지를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있음'이 천착하는 존재론적 안전의 구조. 그러므로, 사람들은 '있음'에 대한 사고만으로 이 세상이 움직인다고/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라는 말, 이 말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각자의 사연은, 늘 '있음'안에서만 작동해야 하는 규범이 발생한다. '없음'에 대한 삶을 늘 혼란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그 '없음'의 삶이 주는 행복을 비현실적이라며 몸부림친다. '발산형 사회'안에서, 사람들이 저절로 표출하게 되는 언어 그리고 감정들. 이 언어와 감정을 배출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불안한 판단과 자기 검열. 

 

 결국 '극단적 없음'을 경험하지 못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삶 안에서, 그 삶을 유지하는 에너지 흐름이 중단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에너지를 발산하며, '발산형 사회'의 비극에 동참한다. 이 비극 안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언어들이 나의 몸 안과 밖에 넘쳐난다. 현대인의 고독과 무관심을 반영하는 메일 함 속 스팸 메일의 홍수, 나와 타인의 모호한 감시 경계 속에서 불안과 의심의 언어를 조장하는 '뒷담화'라는 현대 사회의 고도화된 안식처. 지나치게 큰 웃음과 울음. 방 안에 무엇 하나라도 틀어놓지 않으면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 걱정하게 되는 미디어 환경과 장소의 합일. 이것을 추동하는 도시들. 

 '있음'에 기반을 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상상력.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이 민주주의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상력이란 개념은 늘 현재의 '있음'을 둘러싼 포장의 언어가 되었다. 그 포장을 풀었을 때 사람들이 확인하는 것은 냉소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있음'이 주는 위험을 발견할 때라도, 그 '있음'을 경고하고, 성찰하는 이들의 시선은 '극단적 없음'을 늘 불온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단순한 절약/ 검약 정신을 챙기기?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런 '정비식' 민주주의가 아니다. 아직은 사람들이 '비방할' 가능성이 큰 '파괴적' 민주주의. 나는 이 민주주의의 현실적 실천의 언어를 여기서 제시할 순 없다. 다만, 꿈꾼다. 작은 프라이드 차 안에 몇 명이 들어가는지 기네스북 기록을 세워보려는 자들이 채운 풍경 같은 이 곳, 신도림역. 나는 차라리 이 사람들을 안전하게 수용하기 위해 구획을 짓는 민주주의가 아닌, 이 공간을 파괴하여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는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이다. 

 

‘있음’의 굴레를 탈출하자

 강수돌 선생이 말하는 '팔꿈치 사회'를 살아가는 타인이, 상대방을 이리저리 치면서 길을 갈 때, 그 길로 인해 생기는 짜증을 안 생기게 해달라는'나'의 요구는, 기존의 '있음'을 확장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공간의 '없음'으로 인하여, 욕망의 흐름 자체가 완전히 절단될 때. 그 절단이 주는 충격과 파격은 진보진영 특유의 '묵시록 효과'가 주는 과장된 경고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 안에 스며든 생각보다 무덤덤한 현실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상상과 실천을 관계 맺는 것을, '혁명'과 '급진'이라고 쉽게 부르는 진보들도 문제고, 그것을 '불안'과 '혼란'이라 지적하는 보수도 문제인 지금. 실천의 언어는 갈수록 타인의 눈치를 보고, 사유의 언어는 계속 '있음'이란 상품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윤리적 선만 긋는다.  '있음'을 위한 민주주의에서 내가 늘 느꼈던 불안함이란 건, 내 운동화가 타인의 움직임 때문에 너덜너덜해졌다는 게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느껴지는 창피함도 아닐 것이다. 내가 맨발로 이 땅을 걸어갈 수 있다는 행복. 그것을 행복이 아니라, 현실적 불안이라 보는 사회적 시선의 감옥에 스스로가 나오길 싫어한다는 것이 아닐까. 고로 이 행복 자체를 상상하는 게 점점 더 희미해진 현실.  '있음'을 위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라고 설득하는 이 감옥 안에 산 지 꽤 된 것 같은데, 나는 오늘도 자발적으로 이 감옥의 창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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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9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30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경험은 생각보다 평범했고, 낯익어 보인다. 그런 시끄러움도 없고, 어떤 비극도 없이, 조용하다. 그것을 기대하고 움직인 건 아니었지만, 이런 고요한 순간 속에서 삶의 어떤 흥미로운 기운을 다시 느낀다. 영화에서 보던 흥미로운 혹은 무서운 장면들이 실제로 삶에 나타날 때, 사람들은 생각보다 낯익게, 생각보다 친숙하게 생각보다 무덤덤하게 상황을, 사건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받아들임을 삶의 또 다른 무서움으로 생각해야 할 지, 아니면 어른이 되는 과정으로 여겨야 할 지. 여전히 아리송하다. 너무나도 편안히 삶의 제자리로 돌아오니, 이 낯익은 자리가 조금 낯설다. 

꿈이었으면, 팔뚝이라도 꼬집어보련만.  

<하하하>에서 문소리의 대사처럼, '대의'라는 것도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가 그 옛날 '대의'가 있는 세상을 꿈꾸었을 때, 그 세상 속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역사책을 이럴 땐 새로 쓰고 싶어진다.   

대의는 있었던 것일까. 혹은 급조된 것이었을까. 우리가 기념하는 대의의 실체는 무엇일까. 

왜 꼭 우리는 이 대의 안에 풍덩 빠진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까. 

나는 왜 정작 풍덩 빠지지 못한 채, 또 미안한 마음으로 그 풍덩 빠진 사람을 애도해주는 역할에 머무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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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제가 소속 대학원에 느끼는 구조적 문제로 인해, 나름의 보이콧을 할 거라고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틀의 조사 과정을 거쳐, 데이타를 만든 후, 오늘 학교 게시판에 제 소신을 전하고, 저번 항의처럼 가볍게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표했습니다. 

거창하게, 개혁과 저항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여력도,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내가 살고 있는, 내가 공부하는 공간 안에서,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하고, 단순한 소비자로 전락하는 것, 그리고 

나를 소비자 취급하는 대학원 사회의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오늘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대화를 촉구한 것에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대학 사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정작 그 안에서 늘 대학원은 주변화되어 왔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늘 마음걸렸던 걸, 부족한 한 사람이지만, 소통의 가능성을 믿고, 묵묵히 이겨내보려 합니다. 

저를 알고 있는 분들,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 마음이 연약해지지 않도록. 

교수와 제자의 위계,로 인해 침묵하지 않도록. 그냥 내고 다니면 되지라는 다수의 안전함/편안함/무관심과 친해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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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7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0-05-17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1   좋아요 0 | URL
화이팅입니다! 아자!

비로그인 2010-05-17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일을 시작하셨군요.
종교가 없어 제 기도는 무용지물이겠고 다만 마음속으로 응원하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2   좋아요 0 | URL
응원 고맙습니다. 정상적으로 논문도 쓰고, 책도 다시 읽기 시작하고, 이제 저도 좀 챙겨가며 하려구요.

비로그인 2010-05-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은 아닐까...걱정이 많이 됩니다.
제가 얼님을 안지 얼마 되지 않지만...줏대와 소신이 있는 분이라 강하게 느꼈던 바...
걱정 안할랍니다.
지치지 마시고 소신을 위해 끝까지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2   좋아요 0 | URL
지치지 않도록 밥도 꼭 챙겨먹고 합니다. 마기님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2010-05-18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8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아직 미약한 존재라, 해볼 때까지 해볼려구요. 응원 잊지 않겠습니다.

비로그인 2010-05-18 0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기를 빌어드립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4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번 한 주, 용기란 말이 이렇게 소중한 건지 몰랐어요.

2010-05-18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18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5-22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