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부식 선생을 둘러싼 아픈 사건들이 몇몇 있다. 이 아픔은 여러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이 아픔의 속사정을 재론한다는 것에 대해 난 여전히 신중하고픈 입장이다.(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달변가이며, 문장가이다. 그리고 여전히 뛰어난 출판인으로서의 감각을 지닌 채, 대중들과 조용히 소통하고 있다. 이 정도까지만 소개하겠다. 역사와 기억에 대한 그의 진심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민주주의, 역사, 기억에 대한 그의 명문 중 하나인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환멸 역에서>의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생각의나무 시절, 당대비평이 휴간하기 전, 2005년 2월호의 흔적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가 있던가. 불안과 동요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할 때 모든 것은 숨가쁘게 거래의 양식으로 변한다. 관심과 사랑과 화해의 방식까지도. 그것은 이미 불안의 시대에 유일하게 확실하다고 믿어지는 관계의 방식이자 삶의 단일한 원리가 되어 있음으로 삶을 지배하는 배후의 폭력은 쉽게 대상화되지도 않는다. 지난한 단계를 거쳐 한결 참신해지고 한층 장황해진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도 우리의 삶을 덮친 불길한 기운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하지 못한다. 아니 우리가 마주친 이 시대의 거대한 역설은, 무수한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을 자양 삼아 탄생된 그 민주주의가 광휘를 발하는 동안 사람들의 무력감이 더욱 심각해져 마침내는 실어증 상태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 223쪽 

 

비인기 과목임을 자조하던 '역사업자'들을 오늘처럼 바쁘게 만들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고구려사에서부터 해방전후사까지 시대별 전문가들을 모두 불러내어 고루 활력을 불어넣었던 사례도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역사는 국책사업이 되었고,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로 고단한 대한민국에서 최대의 사회적 논쟁은 다름 아닌 '광화문 현판 교체'문제이다. 역사가 돈 되는 사업이 된 마당에 앞서 이재를 터득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 마침내 전방위적 과거사 규명의 시대다. 영화 <그때 그 사람>은 개봉되기도 전에 사회적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쿨한 냉소'든 역사의 희화화든 '역사라는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의 가치와 참신성, 그리고 무엇보다 시장성이다. 역사의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지닌 상처와 고통의 기억도 상거래의 법칙을 강요받는다.  

사람들은 과거사라고 해서, 상처나 고통이라고 해서 다 동등한 것은 아니며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받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이내 알게 된다. 진상규명, 명예회복, 보상이라는 수순으로 된 창구들을 지나쳐가는 속도에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참혹한 상황은 사람들의 상처나 기억들 사이에 경쟁이 생겨나거나, 정치적 수요가 만들어낸 특정의 표준적 기준에 맞추어 기억들이 변형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타난다. 어쩌면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현재'로부터 다 터득하고 있는지 모른다. 과거라는 시장에서 어떤 것이 고가로 거래되고 어떤 것이 외면당하는지. 225-226쪽 

 

덧붙이자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리 없이 통합되어 있는 가식된 현재와 현재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즉 '위험하지 않은 과거'에는 솔직히 관심이 없다. 인간의 고통과 기억은 - 그것이 설사 모순과 수치심으로 채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의 시장에 나앉아 좌판에 나열된 채 사람들의 시선을 구걸토록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인간의 불행한 운명과 고통의 기억을 전유하여 자기 정당화의 밑천으로 삼으려는 현세적 권력의 기도에 저항하기 위해 '기억하기의 고통'을 수행하지 않은 기록을 기억의 정본으로 삼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이 말했던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떤 기억'들이 <돌 속에 갇힌 밤>에는 틈새 속에 박혀 있다. 기억의 혁신은 거의 언제나 틈새 속에서 일어난다. -228쪽 

어느 때부턴가 시대적 유행어가 된 '민주화 이후'라는 말을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이 단지 양극화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수사적 균형 아래 위태롭게 매달려 있음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이 허위의 균형이 숨긴 거짓은 이제 폭로되어야 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수사적 정의는 오늘의 민주주의가 처한 상태를 숙고하도록 자극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민주주의인가"라는 질문이 개입되어 있지 않음으로 동어반복의 틀 속에서 민주주의를 물신화시킬 위험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참여 민주주의'가 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냐고 질책하는 고언은 진지하지만 위험하다.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하고 있는 불행은 그 민주주의가 할 수 없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아무 것이나 행해도 된다고 믿는 것으로부터 더 심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23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당대비평>을 다시 읽는다. 오늘은 첫번째 시간, 1997년 조세희 선생님의 창간문 몇 구절을 담아 본다.  



<창간호를 내면서>- 무산된 꿈, 희망의 복원 / 조세희(1997년 9월) -16p~17p

누구든 아주 조금만 생각해도 속으로 눈물 날 바로 이 1997년에 우리는 긴급한 마음으로 <당대비평>을 내놓는다. 시작은 셋이 했다. 우리는 이미 여름 기운이 느껴지는 어느 날 밤 아주 심각하고 또 더할 수 없이 비장한 마음으로 편집회의를 시작했는데,그 자리에서 우리가 결정하고 다음 날부터 급히 청탁에 들어가 만들어낸 것이 물론 미흡한 점이 수없이 많을 이 창간호이다.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해주시고, 차근차근 준비해 알찬 내용의 책을 경제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는 겨울이나 내년 봄, 또는 아예 1년 뒤에 내라는 분들의 충고도 있었지만, 좀더 많은 사람들과의 합의나 계획, 대안, 그리고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1997년이 가하는 정신적 압박이 크니까 우선 그것에 저항하고 보자고, 우리는 생각했었다. 나 개인은 1995년에 시작해 1997년까지 이어진 두 나라 노동자들(두 나라는 한국과 프랑스, 얼그레이효과 설명)의 투쟁, 즉 신뢰할 수 없는 권력이 결정하는 조건에 따르지 않겠다는, 미래를 위한 당당한 저항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 실제로 우리가 책을 만드는 시간에도 지난 긴 세월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절망으로 이끈 구독재체제의 또 다른 얼굴들이 21세기까지 점령해버리겠다는 음모,거래,암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지난 독재시절 이들 하나하나가 사실은 자기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인이 아니었다.  

내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 더욱 그랬던지, 나에게 그들은 손에 국민의 피를 묻힌 권력자 밑에서, 또는 그 권력자와 제휴한 또 다른 독재자 밑에 들어가 노예의 삶을 산 종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안겨다주었던 갖가지 절망이 지금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한다. 

20세기를 우리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보냈다. 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이 헤어졌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죽었다. 선은 악에 졌다. 독재와 전제를 포함한 지난 백 년은 악인들의 세기였다. 이렇게 무지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이타적이지 못한 자들이 마음놓고 무리져 번영을 누렸던 적은 역사에 없었다. 다음 백 년의 시작, 21세기의 좋은 출발을 위해서라도 지난 긴 세월의 적들과 우리는 그만 헤어져야 한다.  

16~1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진부한 회한이 될 수도 있지만, 나를 비롯한 젊은이들은 '계간지'의 체온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소속된 '당대비평' 일도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점에 가서, 차라리 <지큐>나 <에스콰이어>에  실린 '새끈한' 문화비평이나, '시사평론'을 읽고 "야, 허지웅이 쓴 그 칼럼 봤어?", "김현진이 쓴 에세이 봤어?"로 말문을 트는 친구들이 익숙한 세대에 속한 나로선, 가끔 <창작과 비평>이나 <실천문학> 이야기를 꺼내는 내 또래 친구들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하다.(물론 이 징그러움은 좋은 의미다) 

출판 시장을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출판론>이란 학부 강의 때, 모 메이저 출판사 사장님으로부터 '인문,사회 출판 시장의 죽음'을 듣고 난 이후로, 또 내가 실제 공부 이외의 활동으로,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느끼는 한기와 온기란 게 있다. 각종 칼럼을 통해 '앓이'를 표시하는 그런 인문 사회 비평 저서의 '감기 현상'을 글로 아닌, 내가 직접 체감할 때, 좀 깊은 고뇌를 하게 된다.  

나는 다행히 '인복'은 있어서, 90년대 문화 관련 잡지들의 출간이 활황이었을 때 그 주도자들과 친분을 쌓고 산다. 그래서 그 시대의 '무용담'들을 종종 들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절판되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잡지들이 진열된 장소로 초대받아, 옛 추억들을 매만질 수 있는 시간도 가진다. 많은 분들이 그 시대를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시대는 또 이 시대만의 룰이 있다는 걸 부정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늘 이런 회한이 나오면 등장하는 현실의 체제는 '인터넷'일 것이다. 글만 잘 쓰고, 시각만 독특하면, 또 그것으로 주목을 받으면 출판사는 러브콜을 보낸다.  

2

하지만, 인문/사회비평 쪽에선 유난히 '젊은 피'에 대한 판단 유보가 센 것도 있다. 특히 나같은 대학원생들에 대한 출판사 쪽의 아쉬움이라고 할까. 나도 필자 섭외 때 그런 걸 경험했는데, '논문체'에 익숙한 친구들은 출판사로부터 몇 가지 지적들을 받는다. 아마 대중과의 소통 부분일텐데, '쉽게 읽히는 글의 방식'에 대한 트레이닝을 요구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지적을 대중문화를 다루는 모 잡지에서 꽤 받았다. 하지만 결국 부적응으로 난 그 자리를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흔히 이런 구분선이 작동한다. '시의성의 문제'. 내 또래 공부 한다는 친구들은, 늘 한윤형이나 노정태 이야기를 자주 꺼낸다. "나는 그 친구들처럼 시의성있는 사건들을 빠르게 해석못하겠더라구."로 시작하는 핑계들. 그래서 좀 호흡이 길 수밖에 없고, 글을 쓰게 된다면, 이런저런 학술적 살붙임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미리 겁을 준다(?). (물론 상황 자체를 빨리 해석하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형태로 녹여내는 그 가치는, 분명 지금 주목을 받는 개개인이 스스로에게 투여한 노동의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성과들을 존중한다.)

실제로 그런 친구들의 글을 받아보면, 정말 겁난다. 그런데, 이런 겁이란 자신이 속한 학술적 제도 안에서 스스로가 연구자로서 잘 살고 있음을 '티 내고' 있다고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헤비한' 이 글들의 정체를 직시해보면, 그들에겐 "난 역시 대중과 소통할 자격이 없어."로 시작하는 두려움이나 자괴감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연구실 안에서 논문과 함께 숨었다. 그 현상은 아마 더 심해질 것이다. 

'계간지'가 제대로 돌아가기엔, 참여하는 사람들이 워낙 바뻐, 실제로 내가 들은 '귀동냥'에 의하면 좀 엉성하게 만들어지는 경우가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이 시장도, 충분한 개인의 자금 확보력이나 물적 토대의 지원을 '카리스마'있게 해주는 개인이 없으면 당장 무너질 모래성이 많다. 내가 속한 장르를 '인문,사회 비평지'라고 하자면,  이 장르의 오랜 생존자인<문화과학>은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다. 나는 <문화과학>의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소통의 형식을 놓지 않기 위해 공들인 노력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면, 존경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문화과학>의 목차만 보면, 지금 하는 이야기들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의 재판인 경우도 많다는 걸 느낄 때도 있다. 이건 지식인들이 갖는 예리한 '예언자적 촉감'일수도 있고, 시대가 부딪히는 '문화적 순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이들의 '생존'으로 인해, 나는 그런 생존의 양식들을 뷔페음식 먹듯이 경험하는 행복함을 누릴 수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카리스마적 개인'의 존재. 비하인드 스토리엔 이 표현이 낯익다. 누군가가 열성적으로 많은 비중의 글 노동(글쓰기 뿐만 아니라, 필자 섭외를 비롯한 업무를 포함)을 하지 않으면, 한 권의 책을 내기가 어려운 구조는 늘 존재해 왔다. 학생들에게 강의도 해야 하고, 본인의 연구도 해야 하며, 또 각각 학술 모임에 참여해 인사도 해야 하고, 학교 외 업무를 하다 보면, '계간지'의 그 두터운 내용을 챙기기 위해 매번 '출석체크'를 해줄 수 있는 기대는 늘 이상이 되고 만다. 그러다보면, 개인의 '비평 감'에 의존하게 되고, 또 잘 나가는 필자들의 '비평 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러면 판매와 호응의 측면도, 결국 약간의 '감'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젠 어떤 기획 아래 모여 무엇을 만든다는 건 참 힘든 시간임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유명한 필자', '스타 지식인'을 모셔올까.라는 '이름값 효과'에 대한 유혹도 생기지만, 비평적 존심이 있는 분들은 이런 전술에 고개를 흔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발굴의 노동을 시도하자!'라고 의견을 공유하다보면, 현실 비평계에 대한 '냉혹한 판단과 사람들이 두르는 찬사에 대한 보류'로 하루를 마감할 때가 많다. 

5  

세대 교체. 젊은 피의 수혈. 사실 내가 속한 <당대비평>(줄여서 '당비')은 이 전술에 대해 실패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당비'를 아는 사람들은 아직 문부식 선생이나, 임지현 선생의 '당비'로 기억을 많이 한다. 이 그늘을 벗어나야 하는 게 아마 나를 비롯한 젊은이들의 고민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좀 팔아야 한다는 현실적 고민 안에서, 이 '유혹의 기술'이 주는 속물성을 벗어나고자 어떤 '진정성'을 발휘할 것인가라는 쉽지 않은 고민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06-10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1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1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5 1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1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라는 제 감이 역시 범상치 않았군요 ㅎㅎ
그리고 제 눈치 없음 또한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고요.
그래도 힘내세요.
얼그레이님을 응원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6-11 00:19   좋아요 0 | URL
아구 과찬이십니다. 더 열심히 살아야할 것 같아요.~
 

 

 6.2 지방선거가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의 ‘깨갱’모드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이 자만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시, 이번 선거의 주요 코드였던 ‘심판’이란 단어를 복기해보자. 적어도 투표에 참여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이 ‘예쁜 자식’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머리말로 달았다. 자식들 다 고놈이 고놈이지만, 그나마 괜찮은 놈이 민주당이기에 찍었다는 원칙. 역사는 민주당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소위 ‘반(反)의 정서’로 국민들이 도와준 경우가 몇 번인가를 세어보자. 아니 횟수가 중요하지 않더라도, 민주당이 ‘깨갱’할 때, 국민들이 투표로 도와줬던 그 순간의 농도를 측정할 때, 민주당이 처한 위기의 농도는 꽤 짙었다. 
  

되감기 버튼을 누른다. 결과론적이다, 누구의 탓이다는 6.2 지방선거를 둘러싼 주요 ‘뒷담화’의 틈을 뒤집고 내가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장면은, 민주당의 성배를 위해 독배를 들었다는 민주당의 서울시장 경선후보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다. 이계안을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서울시장 선거에서 한명숙의 ‘아쉬운 패배’를 분석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것보다 내가 촉구하는 것은 민주당의 어떤 태도이다. 앞에서 말한 ‘반(反)의 정서’로 대체 언제까지 일관할 것인가. 누군가는 플러스 - 마이너스, 영이라는 이 제로섬 게임의 틀을 깨야 한다. 나는 이 게임의 틀을 깨지 않는 한, 한나라당, 민주당에 대한  ‘도찐개찐론’을 여전히 철회할 마음이 없다.  

 

심판론 앞에 초조해진 또 하나의 정당, 민주당

 

 'MB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이계안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워낙 ’심판‘이라는 모토가 주는 준엄함 때문인지, 당의 결정을 따른 이계안의 태도에 대해 언론은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요 프레임은 “이제 우리를 위해 오실 심판자 한명숙님이여!”였다. 많은 사람들은 “두고봐라, 이명박과 오명박”으로 대동단결한 듯 했다. 심판이라는 정서가 주는 도전자 정신의 주입과 공유는 한명숙과 오세훈의 TV토론과 출구조사의 관련성에 대해 의외의 결과를 내놓았다. 한명숙은 생각보다 준비되지 않았고, 오세훈은 회가 거듭할수록 의기양양했다. 오히려 이 의기양양함으로 빚어진 마지막 TV토론에서의 오세훈의 태도는 분명 마이너스 였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손실을 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출구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 한명숙이 TV토론에서 보인 어눌한 태도는 그리 중요한  감점 요인은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내가 잘 가는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 점을 안심하고 있었다. “거 봐요, 뭐 TV 토론 사람들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랬잖아요.”

 하지만, 국민들의 안심과 정당의 안심은 달라야 한다고 본다. 민주당은 분명 ‘심판’이라는 모토를 잘 ‘이용’하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판을 ‘구성’할 줄만 알았지, ‘창작’할 여력은 역시 없었다는 걸 입증했다. 한명숙의 선전 뒤에 숨은 민주당의 불성실함을 우리가 애써 덮어줄 이유는 없다.

 

 ‘사람특별시’라는 이번 선거의 모토 안에서 기획된 공약들의 논리를 점검해보자. 공약의 논리를 관통하는 것은 철저히 ‘심판’이라는 모토 아래 ‘반(反)의 정서’를 이용하는 것 뿐이었다. “여러분, 오세훈식 행정이 이러저러 했습니다. 너무나 엉망이에요”에 주렁주렁 달린, 반대 이야기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그럼으로 우리는 이렇게 하겠습니다의 논리. 상식적으로는 맞다. 근데 민주당은 옳지 않은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내세운 분석안을 그럴듯하게 잘 포장은 했지만, 이 포장의 약발이 이번 선거뿐인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반대’를 넘어서, 그것에 기계적으로 대응하는 식의 공약은 넘쳤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서울을 고민할 수 있는 공약은 빈곤했다. ‘반대 이야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함으로써 국민들이 ‘그래도 이 친구들이 비교적 상황 판단을 잘 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심리선에 적당하게 걸쳐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선거에도  국민들을 ‘헉!’하게 하는 민주당의 의외성은 없었다. 선거 준비를 정말 잘했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또 한 번 국민들의 동정에 업혔다고 봐도 무방하다. 혹자는 이번 정부의 행보를 통해 정말 “‘운빨’ 장난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당의 ‘운빨’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민주당의 의외성이 돋보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계안에 대한 이야기. 특히 이계안과 한명숙의 경선 과정이다. ‘정권 심판’이라는 모토의 농도가 워낙 짙어, 대중들이 봐 준 측면도 있지만, 경선 과정에서 tv토론을 거부한 채, 여론조사 형식으로 후보를 추대한 일은, 민주당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민주당은 후보 추대 과정에서, 사실 “우리에겐 한명숙 ‘씩이나’ 있다구!”를 외칠 정치적 전술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정작 민주당은 조급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인물이 없었다. 결국 남은 건 “우리에겐 한명숙 ‘밖에’ 없다구!”였다. 물론 이 결핍과 빈곤의 절박함이 한명숙이라는 인물론을 돋보이게 한 건 유효했지만, 만약 ‘심판’이 그리 지배적인 테마가 아니었다면, (좀 더 세게 말해서, 이 ‘운빨의 코드’마저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리 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될 듯하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이계안의 정책이 한명숙의 그것보다 더 뛰어난가? 그것을 장담할 순 없다. 다만, 이런 몇 가지는 적어도 생각해볼 수 있었을 거다. 내가 봤을 땐, 민주당에서 경선 과정 안에 토론을 넣었더라도, 한명숙은 이계안을 이기고 후보가 되었을 게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토론이라는 과정 자체를 없애고, ‘심판’을 준비하는 시간 절약의 효과가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측면은 토론을 통한 서울 시정에 대한 학습 효과였을 것이다. 이계안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생각, 한명숙이 내세우는 서울 시정에 대한 그것들을 주고 받으면서, 한명숙이 나름 서울을 학습할 수 있는 시간도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 민주당 이미지 전반에도 심판이라는 선거 전략과 더불어, 민주당이 현실 정치 안에서 어떻게 한국 사회를 인식하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어필할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할 때, 민주당은 장기적인 입장에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전술 하나를 놓친 셈이다.

 

 민주당마저 웃을 이유는 없어

 다행히(?), 사람들은 적진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좀 모자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덮어 주었다. 그 안에 이계안도 들어가 있다. 그 또한 이 정서의 논리에 수긍해야만 했다. 예상대로 민주당은 힘을 얻어, ‘중단’과 ‘촉구’의 정치적 수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혹자는 “그래, 이러라고 뽑아준 것이다”라고 자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확히 이 시점이 민주당에게도 역풍이 올 수 있다는 위기의 징조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체감한다. 민주당이 야당으로 내세우는 그 ‘반(反)의 정서’가 남은 2년을 채운다면, 변덕 심한 대중들이 또 얼마든 다른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노무현 탄핵 이후 총선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들의 태도는 결국 자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절망했다. 그 절망이 지금 이 정부를 찍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민주당이 그렇게 강조하는 ‘뉴 민주당 플랜’이라는 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혹시 이게 위기 때만 쓰이는 민주당 스스로의 자위 기구가 아니길 부디 믿고 싶다.

 결빙 효과를 깨야 한다

 특히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단일화에 합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 진보정당을 ‘이상주의’로 매도했던 프레임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 사회 내 현실 정치를 구성하는 정당, 언론, 시민의 노력에 대한 어떤 고민을 이야기하게끔 만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한국 사회라는 영화를 비평하는 진보주의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그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뛰어들면 철이 지났거나, 너무나 생뚱맞다고 힐난한다. TV토론에서 노회찬이 오세훈의 입을 납작하게 해주길 바라는 대중의 욕망이, 정작 표로 이어지지 않았던 현실이 아직 한국 사회의 진실이다. (많은 네티즌은 답답한 tv토론을 지켜보면서, 오세훈의 복지를 입만 살아 있는 ‘오랄 복지’라고 평가하면서도, 또한 노회찬의 ‘입만을’ 빌리고 싶어 했던 듯하다) <백 분 토론>에 나오는 진보적 달변가와 한국 현실 정치에 뛰어든 그들이 다르다고 혹은 아직 모자라다고 간주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덧씌운 편견이 아닐까. 우리는 정작 추구할 수 있는 정치적 쾌락 앞에 그 현실이라는 ‘구성된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먼저 타이르는 건 아닐까. 민주당에 대한 절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민주당 자체에 또 하나의 기대감을 갖는다는 것으로 우리의 생각이 이어져선 안 될 것이다. 결국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귀결되는, 정치사회학에서 설명하는 ‘결빙 효과’를 깨기 위해선, 우리는 꾸준하게 진보 정당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공간의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보 정당 스스로의 노력 또한 필요함은 물론이다. 
 

<온라인 당비의생각(http://dangbi.tistory.com/61)>에 게재된 원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0-06-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6-08 00: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마기님. 다행히 진보적 지식인들이, 민주당이 자만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칼럼들을 계속 써주고 계시더군요. 다행이에요.
 

한 가지 문제는 해결했다. 이제 다른 한 가지 문제가 남았는데, 이게 큰 산이다. 아무래도 총장과의 면담까지 가야할 것 같다.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졸업을 앞둔 다음 학기까지 지루하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갈등의 선을 넘어야 할 듯하다.

내가 그동안 제기한 문제에 대해 답변을 대신해 준 교수님은 공개게시판을 통해, 다른 학생들에게 내가 했던 요구들처럼 더 요구하는 문화, 이런 요구를 공론화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라고 오히려 촉구했다.  

교수님의 답변을 통해 양심과 정의가 살아있어서 다행임을 확인했다.  (특히 교육 현실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희망을 본 전반전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10-06-05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되었네요.
다른 문제도 잘 해결될 것만 같습니다.
아~~외롭고 힘든 길일거라고 걱정했었는데, 어느정도 보람도 찾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희망과 함께 할 수 있다니...오히려 의욕도 불끈불끈 하시겠다?!
얼님~~홧팅!!!!

얼그레이효과 2010-06-05 14:57   좋아요 0 | URL
제가 빨리달리기보다는 오래달리기를 좋아하는데요. 학교가 저라는 벌집을 쑤셨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한 번 보여주고 싶어요.ㅎ 고맙습니다.

롱롱 2010-06-0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엊그제 정말 우연히 반가왔어요! 아무튼 고민하시던 문제가 일부나마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고 잘 되었어요. 그 얘기도 만나면 해주세요^^ 조만간 봐요,

얼그레이효과 2010-06-05 14:58   좋아요 0 | URL
저도 반가웠어요. 문화학과 분들은 제가 수업때로만 봤지만, 사람들이 포근하고 좋더군요. 롱씨의 학업에도 좋은 영향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