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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과 여름을 뒤덮은 촛불 행렬 가운데 나도 있었다. 당시 대학원 사람들에게도 참석을 호소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난 '신기한 사람'으로 취급받은 것 같다. 광장은 뜨거웠지만, 연구실마저 뜨거워질 수는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저녁이 되면 나의 발걸음은 자동적으로 청계광장을 향했다. 발걸음을 내딛었을 때, 동료 연구자 한 명이라도 "같이 가!" 라는 말을 할 줄 알았지만, 그러한 기대는 너무나 컸던 것 같다. 어느 날은 비가 너무 내려서, '헛탕'을 치기도 했다. 문자가 왔다. 비가 와서 어떡하냐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끼리 광장에 간 나를 자신들의 저녁 식사 이야깃거리로 올린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에 관한 토론 수업이 벌어지던 시간이었다. 당시 '촛불'이 활활 타오르던 그 때, 자연스럽게 수업 시간에는 '촛불'이야기가 나왔다. 토론이라는 것은 물론 '반대'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는 토론이란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마음 속에는 남모를 서운함도 있기 마련이다. 다들 이렇게 어떤 의지를 분출하고 있는데, 그 의지를 '무섭다', '너무 진지하다'와 같은 표현으로 몰아가는 동료들의 표현에 따가운 '언침'을 놓고 싶었지만, 그 정도에서 참았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또 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수고'를 "어휴..난 그런 무리..그런 막 일제히 움직이는 거..나 원래 그런 것 싫어해서.."류의 표현 등으로 김을 새게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튀는 '사람들의 논리라든지, 표현 양식같은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러한 사람을 '멋진 사람'이라기보다는, '비겁한 사람' 혹은 '예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신의 유리한 공간을 만들어놓고, 다원주의를 얄팍하게 포장한 상태를 드러낸 것 밖에는 안 된다. 어설픈 냉소주의라고 할까. 상대방이 뜨거운 논리로 나온다면, 자신 또한 뜨거운 논리로 맞부딪히는 것이 이야기 주고 받기의 '예의'가 아닐까.  

'촛불'당시를 상찬하던 수많은 지식인들의 덕분인지, '촛불'의 달콤함은 어떤 미래를 낳았다기보다는, 2008년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다. '촛불'은 우리에게 물론 긍정적 함의들을 주었지만, 연구자의 위치에서, 나는 그러한 긍정적 함의만을 주고 사라지는 지식인들, 학자들의 태도가 많이 아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한 상찬의 행위 속에는 '머리 좋은 구경꾼'의 위치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대학원생들이 모인 논문 발표회를 갔더니, 많은 대학원생들이 촛불을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촛불'을 든 사람들의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는 연구자들의 글은 없었다. 모두가 '현학'의 꼬리표만 달고, 이 현상을 어떤 고급스러운 이론으로 분석할 것인가에 골몰한 것 같았다. '촛불'은 좋은 연구 주제일지언정, 그 이상을 추동하는 기운은 대학원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많이 배우고, 많이 얻은 사람일수록, 그만큼 나눠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고로 '지성의 최전선'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학원이란 공간에 있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어떤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은 연구 주제로서의 '촛불'이 광장의 진심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의문이 들었다. 참 많은 이론들이 나왔고, 참 다양한 견해들이 나왔지만, 결국 이러한 이론과 견해들이 사그라진 촛불과 함께 잠들어버린 것에서 나는 오늘날 무력해진 지성인들의 기운을 짚어본다.   

혁명이 지식이 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혁명은 우리에게 진중한 의미를 던져주지만,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역사적 상식' 이상으로 이야기해보려 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촛불'도 마찬가지다. '촛불'이 사그라들 2008년 말 당시, 누가 그랬다. "누가 요즘 '촛불' 을 이야기합니까?" 무엇인가를 바꾸어보려는 인간의 의지가 마치 유행타는 교회 프로그램처럼 간주받는 세상 속에서 자기 검열의 기운은 개인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미안하게도 지금 한국의 대학원생들에게 이 세태를 진단하는 의견을 묻는다면, 당신은 '헛탕'을 칠 것이다. 대학원생들에게 학문은 '기능'이 된 지 오래이며. 이러한 나의 냉소는 당분간 변하지 않을 듯하다. 모든 이론을 섭식하는 데는 참 능수능란하지만, 그것을 현실 속에서 사유해보려는 노력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이것이 오늘날 대학사회의 현주소이자, 대학원의 그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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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4-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마음이 곧 제 마음이군요! 촛불 든 거리와 다시 돌아온 일상의 터전은 많이 달랐죠. 몸이 먼저 느끼더군요.

얼그레이효과 2009-04-19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먼저 느껴지더라는 말씀..깊이 새기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오면서 내가 줄곧 고민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따뜻한 사회과학이란 존재할까?"이다. 학문 간의 통합이 요청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인문학은 따뜻하다', '사회과학은 차갑다'라는 인식이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평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나에게 온기보다는 냉기가 사회과학과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게 된다. 물론 사회과학의 냉기는 우리 사회에 분명 필요한 이론을 만들어내고, 맛깔나는 목소리를 동반하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정작 사회과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속한 사회를, 내가 바라보는 사회를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대상인 '사회'에 애정이 있는가를 늘 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난 기본적으로 '애정이 있어야' 비판도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나에겐 나를 때로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여자 친구가 있다. 내가 그 친구의 사고를 존중하는 것은 그녀가 나를 비판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비판할 때의 그 조각들을 조금씩 모으다보면, 이상하리만치 거부할 수 없는 사람 냄새가 묻어 있다. 우리는 이른바 '평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커피숍 거울에 대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국회 안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가정에서 우리의 입에 그리고 손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의 수는 몇 명일까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 비판하고, 잘 평가하는 능력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비판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그런 능력들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러나, 언어가 넘쳐나고, 그 언어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이 분열되고, 또 분열되면서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상처들 또한 받으면서 산다.  

대학원에 오면, 뭔가 그러한 상처들을 깨끗하게 치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일종의 안식처라고 할까. 하지만, 아직 모르겠다. 이 곳은 정녕 '따뜻한 사회과학'을 할 수 있는 곳일까, 나는 의문 속에 갇혀 있다. 사람이 들어가야 할 학문에, 사람은 빠져 있고, 오히려 그 '학문'이란 명명의 권위에 눌려, 학문이 사람을 짓누르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사람을 챙기고 가려는 따뜻함은 보이지 않은 채, 자신의 학술적 글쓰기 안에 들어있는 비판 의식 내 언급되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채 희생된다. 그리고 그러한 희생이 더더욱 잘 될수록, 글쓰기를 수행한 연구자는 좋은 논문을 발표하겠다는 욕심에 그 희생의 고통을 지나친다.  

사회에 대해 말을 하려는 노력들보다는, 그 사회를 도구로 삼아, 누구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해지고 있는 것이 내가 한국 사회  내 대학원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위기'라면, 이것은 정녕 과잉된 것일까. 사람의 존재를 연구하며, 사람의 절실함을 외면하지 않고, 사람의 고통과 비애를 함께 고민하고 또 다른 나아감의 연대로 지칭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학문을 한다는 것은 정녕 어려운 것일까.   

누군가 나에게 당신은 무슨 공부를 하십니까? 혹은 무슨 연구를 하세요? 혹은 무슨 전공이냐고 묻는다면,,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따뜻한 사회과학을 바라는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  인간을 '이용'하지 않고, '존중'하는 지적인 대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출세와 야욕에 휩쓸려, 일시적으로 인간을 사용하고, 내팽기치는 것이 행여 글쓴이의 테크닉으로 좋은 논문으로 평가받을지라도, 그 좋은 논문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상자는 바로 당신의 지도교수가 아니라, 당신의 연구 속에 들어있는 연구대상자, 바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정녕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내게 던져진 영원한 숙제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숙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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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15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효과님의 연구성과를 어서 보고 싶네요.
아 이 글 참 잘어울리네요, 이 비오는 봄밤에.

얼그레이효과 2009-04-18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서요.^^; 노력해야죠.

lucy 2009-10-27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랑 같네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기 -
가끔 당신의 따뜻하고픈 바라'봄'이 버거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야 세상이 녹고 피가 잘 돌아 진짜 따뜻한 '봄'이 올거라고 믿어요.
음,, 난 따뜻한 당신보다 뜨거운 당신이 좋지만요, 키키-

얼그레이효과 2009-10-28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이 글을 시작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망설였다. 내가 속해있는 곳을 '고발'해보겠다는 것이냐, 아니면 판 자체를 바꿔보겠다는 것이냐, 스스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약 일 년 반 동안 고민하면서 내린 결정은 글을 써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당신이 속해있는 그곳이 어디인데? 대학원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사람들 입에서 "대학원이나 가 볼까?"라고 인식이 되는 그 '대학원'이 맞다. 대학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런 '대학원이나'하던 자신이 대학원 특유의 장 논리에 차츰 적응해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더불어 그런 말을 했던 자신도 '타자화'시킨다. 쉽게 말해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라, 대학원이 사실 들어오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데?"부터 시작해서, "막상 들어오면 죽어, 졸업을 누가 함부로 시켜주나?" 등등 다양한 반응들을 체내에 흡수하거나,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대학원을 '대학원사회'로 명명함으로써 나타나는 다양한 의미들을 고려해볼 때, 대학원은 '대학원이나 가볼까?'의 그곳이 맞고, '막상 들어와서 제대로 하면 지옥같은 곳'의 그곳도 맞다. 대학원을 거친 많은 조언자들이 그렇듯이 이 곳은 정말 '혼자놀음'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갈리는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글을 보면, 상당히 오랫동안 대학원 생활을 한 것 같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제 일 년 반 정도 대학원 생활을 한 20대 석사과정생이다. 대학원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을 만큼 재정적인 기반도 탄탄하지 못할 뿐 더러, 이 곳에 살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이상하리만치 불쾌한 자극들이 이 곳을 탈출하자고 유도하고 있다. 근데 내 심경이 좀 복잡하다. 뭔가 이 곳의 어두운 기운들을 다 '까발리고' 가고 싶다. 이건 비단 내가 속한 대학원 한 곳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내 속한 대학원 전체를 한 번 '까발리고'싶은 생각으로 가득찼다. 그러기위해선 탈출과 동시에 오랜 기거도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알려면, 그리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려면 나는 '내부고발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질문의 유형이 있다. 일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 "이봐 인생은 두 가지 타입의 사람이 있지"같은 것 말이다. 그런 일정한 질문의 유형 중에 또 하나는 우리가 아주 어릴 적부터 들어온, 그리고 주입받는 "자네는 인생을 살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와 같은 것이 있다. 나는 살면서 전자의 질문보다는 후자 쪽을 스스로 많이 고민해 봤다. 이제 2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에서,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무엇을 읊조린다는 것이 많은 인생의 선배들에게 죄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공개하자면, 나는 '역사'와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교육'은 요즘 내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다. 이것은 사실 한국 사회 전체가 어찌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교육은 국가의 문제, 개인의 문제이며, 이것을 좀 더 심화시키자면, '문화'의 문제이다. 교육이 문화라는 것과 연결될 때, 우리나라의 교육 문화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 공교육과 사교육과 같은 '교육 현실'의 차원을 넘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지만, 가장 자리가 잡혀있지 않은 대목이다.  

나는 참고로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커뮤니케이션학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방송학이라고 알고 있는 학과에 속해 공부하고 있다. 나의 전공을 밝히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교육문화'에 대한 성찰을 위해서다.  내가 속한 커뮤니케이션학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가장 깊이가 없는 학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학문은 오늘날 스스로 신자유주의의 노예가 되길 바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새 이 학과는 성찰할 수 있는 지식인을 키워낼 수 있는 지적 토양의 장이 되기보다는, 사회에서 한 번 뜰 수 있는 짭짤한 '기능인'만을 키우는 학과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사회를 비판하는 것만이 커뮤니케이션학의 최종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사회'와 결부되어 있어야 하며, 사회에 대한 관심을 '도구화된 목적'의 차원을 넘어선 무엇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대학원생들이, 그리고 학부생들이.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것이 교수들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연구에 '도구화'되는 제자들, 그 과정 속에서 '벌벌 기어야'하는 제자들의 입장을 나는 대학원에 들어가기전에 많이 들어왔고, 각 종 기사로 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가 대학원생들의 몫도 있다고 이제 생각한다. '요즘 대학원생'들이란 표현이 거슬릴 수 있겠지만, 나는 과감히 쓰겠다. '요즘 대학원생들' 의 문제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다양한 문제들에 묻혀, 그리 적극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분명 심각하고 중요하게 고민해 봐야 할 측면이다.  

나는 바로 그 측면을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어떤 학문의 외피로 인한 현학적 문체를 떨구어내고, 최대한 거칠게 쓸 것이다. 나는 사실 이 '대학원'사회의 어두움에 대한 성찰이 한국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안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선배연구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수들을 질타하고 싶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 속에 나 또한 얽혀 있으며, 나는 이러한 이중적 위치 속에서 반성의 주체로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주체로서 성장하고 싶은 마음 또한 숨길 수 없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던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알았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때문이었다. 그의 사회학은 소위 '재귀 사회학'으로 불리면서, 그는 학자 자신이 연구를 할 때, 자신을 둘러싼 여건들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이었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저작들 중 <자기 분석에 대한 초고>라는 책이 한 권 있다. 나는 지난 겨울에 그 책을 읽으면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기록'의 순간이 필요함을 계속 재촉했고, 그 결심을 오늘에서야 내렸다.   

성찰할 수 있는 인생 속 몇 번의 시기 가운데, 나는 지성의 최고점을 찍을 수 있는 데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고려하고 있는 '대학원'이라는 공간이 사실은 얼마나 무기력하고, 혹은 얼마나 수동적이며, 얼마나 기능적인지를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을 위한 자기 성찰의 측면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을 위해선 (요즘 들어 드는 생각이지만) 계속 쓴 물을 단 맛이 느껴질 정도로 마셔야 할 것 같은 자세가 필요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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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4-1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사회성'이 길러져야 하는데 - 저는 요새 이 '사회성'이란 말이 사람을 얼마나 억압하고 통제하는가 생각합니다 - 복종 내지는 타협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데 고발하는 이들은 당연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나름 내부고발이라면 내부고발,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09-04-15 0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발'은 제 자격으로는 너무 과분하고, 또 제가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고^^;; 겸손하게...차분하게..우리나라 지식장의 구조들을 살펴보고 싶은 기분으로..'소고'를 펼치고 싶네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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