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684162 

이 주소로 보시면 방송보실 수 있습니다. 

단독 리뷰는 아니고, 중간에 짧게 나옵니다. 

인터넷뉴스 바이러스란 곳에서도 당비의생각03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을 책으로 꼽아줬군요. 

http://www.1318virus.net/modules/news/view.php?id=14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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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2-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에스비에스가 무슨일로 ㅡ.ㅡ
 

 한보희 선생이 영화 <국가대표>비평을 <온라인 당비의생각>에 연재한다. 분량이 많아서, 글을 나누었는데, 첫 파트가 올라왔다.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공유하고자 링크를 건다. 한보희 선생은 현재 《당대비평》기획위원회의 기획위원이자 what's up총서 시리즈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 시리즈 중 하나인 슬라보예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번역했으며, 또 한 권을 열심히 번역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http://dangbi.tistory.com/30 

2009년 12월 22일 화요일 당비의생각03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과 관련된 작은 이야기모임을 가지려 한다.  이 이야기의 내용은 <온라인 당비의생각>에  소개될 예정이다. 

패널은 한윤형(<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뉴라이트 사용후기> 저자)  /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저자) / 송인혁 (전 연세대학원신문사 편집장) / 한보희 (<당대비평> 기획위원) 예정이다. 

그리고 나와 웅진씽크빅 인문교양담당 임프린트 산책자 분들이 수고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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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소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92842.html 

젊은 연구자들 눈으로 본 죽음의 정치학
노무현 추모열기서 엿본 ‘대안 없는 애도’
민주주의 확장 이어지지 못한 원인 짚어 

 어째서 추기경과 늙은 소를 향해 쏟아졌던 ‘애도의 눈물’이 용산참사 희생자들은 외면했을까?

100만 이상이 합류한 김수환 추기경 장례 추모행렬과 역시 100만을 넘겼던 독립영화 <워낭소리> 대박 현상을 “도덕적·인권적 감수성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의 징후”로 읽은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정용택 연구원은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행렬엔 500여만이 공권력과의 충돌을 무릅쓰고 집결했다. 그 사건들 앞뒤로 화물연대 박종태씨, 7명의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목숨을 버렸지만 용산처럼 그들은 잊혀졌다.

2009년의 죽음들에 관한 이 뚜렷한 사회적 기억의 비대칭성. 진보적 젊은 두뇌 집단인 당대비평 기획위원회가 엮어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바로 그 현상과 배후를 여러 필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하고 질문한다. 상당한 세월을 지나서인지 해석과 질문들은 정제되고 순도가 높다.

‘종교가 되어버린 광장의 애도’라는 글에서 기억의 비대칭을 낳은 “시민사회의 문화적 동학”에 주목한 정용택 연구원은 “마땅히 애도돼야 했던” 용산참사와 “너무 과도하게 애도된” 추기경과 늙은 소와 노 전대통령 현상 사이에 모종의 길항작용이 존재한 것으로 본다. 우선 그는 용산에 대해 대중은 애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도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란 보통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어떤 추상적인 것, 즉 조국, 자유, 어떤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반응은 대개 삶에 대한 총체적인 의욕의 소멸로 집약되는데 심한 애도의 슬픔은 채워질 수 없는 깊은 공허와 무기력을 수반한다.

이런 애도가 제대로 수행되려면 애도의 주체가 자신이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권이 내세운 ‘뉴타운’, 그리고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선진화를 이룩한 대한민국’이라는 성공신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애착의 대상을 상실했음에도 그 신화에 애착을 지녔던 대중은 거기에 집중된 리비도를 철회하지 못하고 부유했다.

권력의 폭압 속에 대상의 상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한 대중은 용산을 외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대상의 현존에 대한 불신 또한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들의 귓전엔 용산을 기억하라는 외침이 계속 맴돈다. 그때 추기경이 선종했고 <워낭소리>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대중은 정체 모를 상실감을 거기에 전이시켜 알 수 없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애도를 쏟아부었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하나 무의식적으로는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대로 된 애도가 불가능한 이런 상태는 우울증을 앓는 주체의 행동과 유사하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실을 애도하는 우울증 환자의 애도는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애도는 자아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우울증은 더욱 심화된다. 용산참사로 인한 상실감을 추기경이나 <워낭소리>의 늙은 소에 대한 애도 행위로 극복하려던 대중의 빗나간 애도는 필연적으로 상실감과 슬픔을 더 키웠다. 그 결과 뒤이은 노 전 대통령 타계 때 대중은 더욱 폭발적인 애도를 표시했다. 정 연구원은 사회학자 뒤르켐의 종교적 집합의례 개념을 빌려, 노무현이라는 기표가 그의 자살을 통해 초월적 기의로 기능하면서 성화(聖化)됐다고 본다. 그것은 ‘탈정치화된 정치인’, ‘권력의 술수에 따른 정치적 희생양’, ‘바보 노무현’ 이미지로 재현됐다.

성화된 노무현은 물론 실재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평택 대추리 진압, 재임 기간 23명의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노동자 탄압 등 ‘신자유주의’로 포괄할 수 있는 정책들을 노무현·참여정부의 한계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만 돌릴 수 있겠느냐고 정 연구원은 반문한다.

그럼에도 대중은 전직 대통령이 자살하자 ‘원래 없던’ 성화된·이데올로기화한 그의 자질을 실재한 양 착각하고 그것을 상실한 것처럼 애도함으로써 결핍을 상실로 기만적으로 전이하는 우울증적 주체와 유사한 오류를 범했다.

이 모든 현상의 근원에는 이명박이 자리잡고 있지만, 노무현의 실재가 이명박과 얼마나 다르냐고 정 연구원은 묻는다. “우리는 대중들이 갖고 있는 노무현과 이명박의 이 기묘한 대칭구도 자체를 문제삼아야 한다. 이상화된 노무현의 이미지를 깨버렸을 때, 드러나는 실재의 노무현은 사실 이명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나아가 지금 대중들은 노무현을 상실해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이미 다른 일로 인해 우울하기 때문에 노무현의 죽음을 상실로 인지하고 그 상실을 회복하기 위해 세계 내의 기호, 곧 노무현이라고 하는 상상의 이미지를 삼킨 것임을 말해야 한다. 우울증적 대중들은 자신들이 단 한 번도 소유해본 적이 없는 ‘노무현’ 또는 그것이 역설적으로 지시하는 ‘민주주의’의 상실을 연기(演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민주주의의 회복을 끊임없이 연기(延期)하고 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애도의 집합의례를 수행하면서 상상의 도덕공동체를 만들었고, 반대자들과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서로 배제하며 포함하는 동치(同値)관계를 이루었다. 그 결과 피아의 이분법 속에 제3의 정치적 삶의 자리는 허용되지 않고 대안적 시선은 존재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렇게 해서 용산과 화물연대, 쌍용자동차의 희생자들은 잊혀졌다.

결국 대중이 잃어버린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민주주의이며 민주공화국의 이상이다. 이를 향한 대중의 우울증적 충동은 애도나 촛불집회와 같은 집합의례 형식으로만 살아남아 단지 광장에서 대중들이 모였을 때만 현존할 뿐이다. 그것만으로는 현실의 구조를 바꿀 수 없다.

“모든 죽음의 수행자, 이 시대의 지배적 구조인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저항”을 촉구한 시인 송경동은 가장 단호하게 그런 입장을 견지한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적대시한다면, 파시스트들이 자유주의자로 행세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며 ‘무의식적 보수성’ 극복과 자유주의적 법치 확립을 우선해야 한다고 한 박동천 전북대 교수는 노무현의 공도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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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주소 :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12111733465&code=900308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당대비평 기획위원회 | 산책자 

  왜 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에는 눈물을 흘리지만, 용산의 죽음에는 무심한가. 무크지 ‘당비의 생각’ 3호는 2009년에 있었던 몇 건의 죽음에 관한 사회적 기억을 다뤘다. 만인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은 동일하지 않다. 전직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자살과 그 후의 격랑이 그 몇 달 전에 온 몸에 불이 붙어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한 사회적 망각을 촉진했던 사실이 그를 입증한다. 1년이 다 되도록 고인들이 천도조차 하지 못하고 냉동고에 누워 있는 현실만 끈질기게 그 죽음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용산의 죽음을 외면하는 핵심에 ‘사유재산’이 있다고 한다. “단지 이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도, 자유도, 인간의 권리도 침해당할 수 있지만 결코 재산에 대한 질서는 흐트러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재산에 대한 질서”는 곧 “자본주의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의 재산에 ‘해코지’했다고 비난받는 용산의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도 자신의 재산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앞의 재산이 곧 개발이라면, 뒤의 재산은 삶의 터전 그 자체라는 점이다. 고로 “용산은 삶에 대한 요구가 개발에 대한 요구를 결코 앞설 수 없다는 것”이다.

송경동 시인은 “최고의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어 보고도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노무현)의 죽음에도 이 시대 보편적인 산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며 “화살이 단지 또 하나의 관절로 기능할 이명박 개인에게로 쏠릴 뿐, 단 한 번도 이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구조들에 대한 천착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했다. 한 영웅의 죽음에 매달리려 하면 노무현,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많은 이가 학살을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는 망각될 수밖에 없다.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대중과 대중운동에 필요한 것은 구원자가 아닌, 새로운 정치를 구성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라고 했다.

<손제민기자 jeje17@kyunghyang.com>(2009.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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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살 때, 한 문화단체에서 일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나를 '스카웃(?)'하러 온 저명한 문화평론가 한 분과의 일화가 떠오른다.  

"자네, 올해 나이가 몇 인가?" 

"예. 스물 여섯입니다.." 

"오..그래. 스물 여섯. 사실 그 나이 때는 벌써 날고 기는 애들 많은데.." 

(나 : 씩 웃으며 '그런가?', '그런가ㅜ'한다) 

"그래. 4학년인 것으로 아는데, 진로는..?"  

(대학원에..진학을..이란 말을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었는데..이미 진로는? 하고 

그 분이 나의 미래를 알아서 그려주셨다) 

"거 뭐..대학원 가서.. 학부 후배들한테 밥이나 사주면서..들은 거 몇 개 주절거리고.. 

그런 것보다야... 차라리 나와 함께 일 좀 해보는 게 어때..? 글 쓰는 것 계속 좀 키우면서.. " 

(나 :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물었다) 

"선생님, 어떤 글이 좋은 글이죠..?" 

그는 손을 살짝 펴고는 

"그건 말이야. 누군가 자네 글을 만졌을 때 앗 뜨거!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생기게끔 

하는 글이 좋은 거지.." 

그 말을 현실화시키려고 참 많이 썼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많이 쓰고, 많이 떨어지고, 미지근한 것 몇몇 개 받고..그런 걸로 괜히 과장된 자랑이나 하고.. 

간사가 되고 나서, 논문을 쓰고 나서..내 스스로에게 가장 안타까운 건 '날렵한 글'을 쓸 수 

있던 능력이 많이 감퇴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년에 지도교수에게 얼굴 벌개진 상태로.. 

"전 문학적인 논문, 칼럼 같은 논문을 쓸겁니다.."란 객기를 부렸나보다.. 

'열문'의 경지.. 

이젠 좀 토나올 정도로 써야 겠다... 

왼손 오른손에 연필 하나 끼고 비벼보자....손에서 불이 날 때까지... 

글에서 불이 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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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09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