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과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주눅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공부한다는 것을 정상과 비정상의 양분된 구획 속에서 모호한 감정으로 바라보는 자들은 차라리 상대하지 않겠다. 차라리 내가 적대로 삼는 것은, 겸양된 자세와 오만한 태도를 모호하게 감춘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존재, 고민하는 존재인 스스로에 대해 지나치게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공부하고 있음을 공유하는 사태에 대해, 그것 자체를 오만함으로 연결짓는다. 그들에게 겸손은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한다는 것을 감춘다는 자세에 기인한다고 믿는 것인데, 나는 그 자세에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동의하는 것은, 내가 공부하는 것 자체에 대한 열의와 신념만큼, 그것에 반대되는 입장을 유연하게 수용하고, 다시 고민해보는 태도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늘 격문의 태도로 글을 써 왔다. 매번 선언하고, 매번 좌절하고, 매번 재선언하면서, 시대와 함께 했다. 그는 정말 영화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난 정말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한다.   

나는 정말 공부를 위해 죽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유감이나, 쉽게 답할 수 없다. 

하지만, 입술에서 어떤 말 한 자라도 꺼내기 위해, 매번 선언하고, 매번 좌절하고, 매번 재선언을 할 수밖에. 

공부의 상처는 내 몫이나, 

공부의 열매는 '당신'의 것이기를. 

결국 그것이 내겐 '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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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7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우가 무대위에서 죽고싶고, 운동선수가 필드에서 죽고싶듯이...공부를 위해서 죽을 수 있진 않겠지만, 죽을때까지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실것 같다는 생각이....
ㅋㅋ아녜요?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6   좋아요 0 | URL
그러면 좋지요^^ 근데 언젠가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려합니다.

조선인 2010-05-17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의 열매가 당신의 것이기를... 그 격언을 잊고 살았네요. 반성합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22 13:37   좋아요 0 | URL
저도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천이 쉽지가 않네요. 언젠가 나도 모르는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길 희망하며 공부합니다.
 

가끔 안타까운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괜찮은 사람이었다가도, 괜찮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통화. 참 싫다. 학벌에 대한 문제 또한 그렇다. 더 정확하게 범위를 좁혀보자면, 학벌을 둘러싼 무의식 같은 거다. 난 학부는 3류를 나왔어, 그래서 편입을 생각해. 혹은 좋은 네임 벨류의 대학원으로 가려 해. 이건 지난 번에 '죄인 게임'이란 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을 했다. 내가 말하는 건, 3류라고 간주되는 대학을 나와서, 대학원은 사회가 속된 말로 '쳐주는 곳'을 나온 사람들의 불쑥 튀어나오는 피해의식 같은 거다.  

난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대학교를 나오진 못했다. 하지만 대학원은 -또, 사회에서 말하는 평가 기준으로 볼 때, 좋은 곳을 다닌다.(하지만, 이 '좋은 곳'의 의미와 범위는 과연 무엇일까?-'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갈치를 먹다 걸린 가시같은 질문이다) 그러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선배들이나 몇몇 지인들이 전화를 하면, 대뜸 난 묻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선생이 좋아야 해. 대학원 이름이 좋은 게 다가 아니라구."란 말은 한다. 그러면서, "아, -예전에 다닌- '우리'대학에 대학원 있었으면 편히 다닐텐데."란 말로 친절하게 자신의 심리를 설명한다.  혹은 '결국 사회에서 쳐주는 건, 학부 학벌이더라구. 대학원 학벌이 아니더라.'는 말을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꺼내는 대학원 선,후배들이 있다.  왜 그런 말을 나만 만나면 먼저 하는 것일까. 나는 2년 전부터, 누적된 이런 경험에 신경질이 나서, 그냥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또 다른 안타까운 풍경은, 대학원 내에서, 자신의 대학교 학벌이 좋지 않다는 것을 공부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짊어지고 가는 대학원 친구들이다. 간접적으로 많은 위로와 자신감 불어넣기를 해주고 싶은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 들을 때, 그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그러한 '결정주의'가 "난 솔직히, 이 대학원 온 거 그런 목적도 좀 있단다..'라는 말과 엮어질 때, 그 모호한 분위기는, 공부한다는 것의 외부와 내부는 무엇인지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 풀기 어려운, 현실과 이상의 고리와 벽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그런 시선이 이른바 권력을 비판하고, 그것에 나는 좌파요와 진보요를 꼭 표시하거나 들먹거리는 친구들의 입에서 나올 때, 자신들이 다니던 옛 대학을  '지성의 온정적 향수 공간'으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다니는 대학의 정체성, 그 정체성을 보존하는 교수들의 지성을 존중하는 것은 좋으나, 그 대학의 외부 현실에 대해서는, 이상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대학 사회의 더러움으로 환원시킨다. 그 더러움 안에, 자신이 다녔던 학교는 좋은 선생이 가득하고, 다른 곳은 속물이 가득한 곳으로 인식하며, 지성의 정수를 훼손시키는 자들이 있는 곳으로 몰아가는 의견들이 있다.  

그런 이들 중  공부보다, 공부 외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교수들의 신상 캐기에 더 바쁜 것이 씁쓸하다. 그러면서, 자신 스스로 그러한 담론의 감옥을 만들어 놓고, 그 감옥 안에서 학문의 순수와 불순의 경계를 만들어버리려는 '의로움으로 포장된 것 같은 지적 분노'가 불편하다. 한편으론, 하나의 이슈를 꺼내면, 그 이슈에 이상한 지적 참조를 달면서,  자신은 열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투로 지적 전투에 임하는 친구들도 안타깝다.  

그러면서, 공부가 좋아서, 선택한 곳으로서의 대학원은 이데올로기에 복속되고, 나는 그런 선택의 자유에 대해 늘 사회가 간주하는 현실 세태의 눈 안에서 분석된다. '좋은 대학원 가니 좀 나아진 게 있던가?'라는 호기심, 그리고 그 질문에서 새어 나오는, 전도된 학문 세계에 대한 비판 의식. 과잉된 분노가, 과장된 비난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진중권-되기'의 열망으로, 이름 알리기에 열심인 친구들도 있다. 텍스트에 무조건 정치라는 말을 넣기 좋아하고,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너무 '저널리즘적'으로 보려고 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래서, 깊이 있는 텍스트에 시의성의 개입을 시도하고, 그 텍스트를 쉽게 풀어쓰고, 타인에게 전달하고, 그 타인의 반응에 힘을 쏟는 친구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대학원을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될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이건 내가 우석훈의 책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의 북 리뷰에서 '이름값 효과에 대한 단상'으로 돌아본 적이 있는 내 주위 현상이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네 지도교수가 누구냐, 묻고. 아, 그 교수.. 그리고 이어지는 현황 공개와 분석. '잘 지내니'라는 말 뒤에 바로 나오는 그런 말들로 귓가를 따갑게 만드는 지인들의 안부 인사가 참 싫다.

편하게 공부를 하고 싶다. 사람들을 제대로/깊이 안 만난 지 2년이 넘었다. 참고로, 2년은 내가 대학원을 다닌 기간이다.  

학문을 가십거리로 만드는 이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기간이기도 하다.  

학벌과 학문을 섞어 만든 칵테일을 권하는 이들의 이름을 휴대폰에서 지운 기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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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3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집과 자존심이 멋진 얼그레이님의 홀로서기!
ㅎㅎ홧팅!!!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학회 일정표를 봤는데, 대학원생들을 위한 자리는 여전히 빈곤한 상태였다. '이단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생'들을 종으로 여기지 않고, 평등한 관계에서 학문을 이야기하게 만들겠다던, 그 말은 결국 '액세서리'에 불과하단 걸 매년 배신감 느끼듯,느끼게 된다. '이단'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단적인 공부 공간과 시간,그리고 연대의 자리.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런 자리가 필요한 곳이 한국의 커뮤니케이션학이 아닌가, 다시 마음을 잡게 된다. 헤르만 헷세의 말처럼, "실천의 결과가 고민이 아닌, 고민의 결과가 실천인 게 낫다"는 그 말을, 지킬 시간을 만들고, 다가오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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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13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스스로 만들고 찾아가시는군요?
믓쪄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살려고 노력중입니다. 하도 과거를 게을리 살아서요.^^;
 

어제,오늘 apouge님이 쓰신 <인문학의 죽음, 그리고 대학의 죽음에 대해>란 글을 잘 읽었습니다. "대학이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표현이다.대학이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학엔 (과거의) 대학이란 유령만이 떠돌 뿐이다."라는 제 나름대로 명명하자면, 이 급진적인 회의주의 형태의 수사에서, 우리는 현실의 절망을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고, 또 그런 체감과 더불어 오는 자극에 따라, 더 나은 희망 한 움큼을 쥘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마운 글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에서, 이 대학의 모순을 교수와 학생의 관계로만 설정할 것인가에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대학 사회 내 분명한 '적대'로, 교직원의 문제를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교수와 학생 관계에서 오는 교육의 모순을 은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저는 좀 더 미시적이고, 경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미천하지만, 몇 년간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이 경험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 사회에서 총장보다 왕은 '교직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직원'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교직원이 갖는 그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학생들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그냥, '서비스'차원에 머무른, '보조'의 차원에 머무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들알다시피 교직원이 갖는 그 모호함, 보이지 않음의 권력은, 교육에 대한 신성함의 추락을, 교수와 학생들 간의 관계만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특히, 교직원들은 자신들의 '전문성'을 토대로, 학생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을 꺼려 합니다. 예로 들어, '등록금 문제'가 있겠지요. 소위 '교육 투쟁'이라는 것 안에서 늘 제기되는, 등록금 문제에 있어, 학생회 측은 주로 교직원들을 상대로 학교 측 예산의 투명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예산설명회를 촉구하거나, 예산 내역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만, 교직원들은 너희가 평소 잘 모르는 용어가 많다, 모르는 부분이 많다며, 또 행정 상 비밀이 되는 것이 많다며, 공개하기를 꺼려합니다. 주로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라는 식으로 나오지요.  

더 문제는, 그런 전문적인 문제를 공부해와서, 다시 문제를 제기하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전문성'을 너희들이 뭔 데 문제삼느냐며, 행정일을 맡는 교수를 이용해서, 학생들에게 '(교직원 그들의 )  권위'를 보호해달라고 부탁하는 대리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가집니다. 그렇게되면, 교수와 학생의 관계에서 오는 그 교육을 매개로 한 예기치 않은 불편함은, 대학 사회 내 구조를 파악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사기를 꺾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례로 저는 2009년에, 대학원 내 문제이긴 하지만,  제가 원하지도 않은 명목이 등록금 항목에 책정되어, 방학 중에 교직원을 상대로 질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직원은 이 때, 이러한 예산 책정은 '본부에서 하는 것이라며, 자신들은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말이 가진 여리고 동정심 느껴지는 언어 속에서, 권력의 생기는 솟구칩니다. 저는 그것을 '평상심의 권력'이라고 제 스스로 부르고 있습니다.)저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다시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저는 성의있는 답변을 원했습니다만, 돌아온 것은 학교 홈페이지에 가면, 대학 정보 공개 문서가 있으니, 그걸 참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2008년 말이었나요. 그때부터 시행된 제도인데, 그 공개 정보는 그렇게 정확한 내역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돌아온 것은 비간접적인 경로였지만, 교직원 그들의 심기가 불편하단 뒷말이었습니다. 게시판을 통해, 뉴스 내용을 언급해가며, 이런저런 구조적 문제를 제기해도, 그 문제에 대한 답보다는, 나중에 대리자를 통해 '학생인데, 자신들이 하는 일과 그 전문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죠.  

하나는 교직원과 학생들이 갖는 '친밀성'과 '내밀성'의 문제입니다. 이런 친밀성과 내밀성의 일반화 속에서 제가 경험했던 것은, 제가 '예비역 권력'이라고 명명한 현상이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고 나서, 학생회를 맡으면서, 또 예비역 출신 학생회장, 임원들을 보면서, 그들이 결정적으로 학교 부패에 저항하지 못하고, 현실의 모순에 타협하게 되는 걸,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직원들의 고의적 전략이라고 무리하게 해석하고 싶진 않습니다. 다만, 뭐랄까요. 이건 한국적 현상이라고 할까요. 저도 군대를 갔다오면서, 그런 우를 많이 범했지만, 일이 서투른 친구들을 욕하게 되고, 군대를 갔다 오지 않은 친구들이 개혁과 혁명을 이야기하는 걸, 교직원들과 함께 구경하면서, '으이그, 세상 물정 모르는 놈, 네가 군대에 갔다 와봐야 알지'같은 말을 서로 공유하게 되지요.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대학 내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는 시기, 그 모순을 실천으로 변혁해보려고 하면, 부딪히는 것이, 그런 친밀성에서 오는 양보입니다. "야, 그냥 이번엔 넘어가자. 알 사람 다 아는 걸..뭐. 유연하게 행동해." 이런 우연치 않은 친밀성의 고리가, 그들만의 내밀한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이건 비단 예비역들의 정체성을 훼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런 고리가 우연하게 만들어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의리와 정, 인연 때문에, 옳음의 순간을 양보하게 되지요. 그런 '일반적인 인맥'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건 수많은 연관성 중에 하나겠지요.

이 안에서, 부딪히는 모순. 교직원과 교수의 관계 문제이겠죠. 뻔히 잘 아는 관계 안에서, 학생들의 '태클'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갈라지는 건. 87년 민주화 때, 상징적인 활동을 하며, 국가의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도, 학내의 민주화에 대해선 조용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 표현은 그냥 비유일 뿐입니다. 바깥에서 진보를 외쳐도, 학교 문제에는 꿀먹은 진보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수들에게 그런 부담을 너무 줄 수 없는 문제 아니냐는 반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동의합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그 연결고리죠. 이 세상에 대학이 썩었다는 걸 모르는 교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대부분 썩었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라고 생각하고 모순의 연결고리를 부여잡고, 학생들에겐, "너희가 좀 양보해라..어쩔 수 없는 문제야..", 교직원들에겐, "그런 그렇게 처리하면 될 것 같아요. 제가 그 학생 잘 말할께요. 염려하지 마세요."  결국 교수들 그리고 삶의 희망을 갖고 온 학생들은 이단들을 위한 자리(http://dangbi.tistory.com/52-> 이 포스트에서 인용했습니다.)를 만들 용기를 포기하게 되겠지요.  

이 포기와 양보의 순간은 생각보다 너무나 조용한 일상성 속에서 그냥 퇴색됩니다. 그리고 그 포기와 양보는 앞으로 다가올 학생들의 저항과 변화의 몸부림을, 또 하나의 관행으로 치부해버리는 공포 효과로 환원되는 것 같습니다. 그 효과가 뿌리잡은 곳에서 남은 건, 너무나 좋은 봄 날씨. 흩날리는 벚꽃,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안락한 공간들, 그리고 정상성의 독재입니다. 요구하고 저항하면, 나를 비정상으로 몰아버리는 이 정상성의 독재. 그 안에서 가장 조용하게 도사리고 있는 각각의 요인들. 그 요인들 중에서 오늘 하나, 교직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부족한 잡글로 돌아봤습니다.  

 

좀 다른 형태의 <호모 아카데미쿠스>를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 성찰성의 방향과 미래에 대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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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아, 대학원이나 가볼까 주의자'였다. '아, 대학원이나 가볼까 주의자'들에게 붙은 단서는, '아심뽀까'(아,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와 같다. '심심한데~'라는 그 앞 말이 붙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대학원 안에 들어오면서 조금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먼저 내가 이렇게 공부라는 것을 좋아하는 놈이었나를 확인/점검하게 되었다.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보면(물론 나는 정말 모르는 놈이라는 것을 밝힌다) 질투심이 생기고, 내가 안 읽은 책을 누가 잡고 있으면, 슬그머니 눈으로 메모했다가 장바구니에 담거나 도서관에 들렸다. 그러다보니, 나에게는 공부에 대한 애정보다 '절박함'이라는 게 남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 '절박함'을 때론 분노와 함께 동여매고 산다. 직장다니는 사람들을 술자리에서 만나면, 그들은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오빠, 형, 뭐뭐야.. 공부할 때가 좋은 거에요.."라는 그 진부한 칭찬도 아니고 비하도 아닌 말들. 그 말을 몇 년 째 듣다보니 요즘엔 그런 자리도 잘 안나가게 되었다. 한편으론 '공부 좀 더 해볼까'라는 그 말을 ' 다니는 대학원 어때요?'라는 말과 함께 붙여 물어보는 사람을 나는 싫어했고 지금도 그렇다. 귀찮아서 대충 대중문화를 공부하고 있단다라고 하면, '재미있겠다'라고 웃으면서 '형 ,오빠 뭐 준비해야 되요?'라는 말들, '영어 점수 몇 점 이상이어야 해요?', 등등을 물어보며, 나를 일일 입시 강사로 만들어주는 이들의 대화. 나는 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서, 그런 친구들의 이름이 휴대폰에 뜨면 전화도 일부러 안 받곤 한다.  

 

친구와 함께 신촌의 모 카페를 들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장을 한 젊은 남자가 큰 노트북 가방을 들고 와서 혼자 팬케잌을 시켜 먹으며, 서핑을 하고 있더랬다. 나는 원래 공부하면서 사람 관찰을 잘 하는 편이라, 그 사람이 신경 쓰였다. 뭘 서핑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웃고 진지해지다가 그 사람은 전화를 받았다. 대화 중에 내가 유심히 들은 말.."나..지금 일 중이야...그러니까..가만 보자.." 나는 그 날 집에 와서 그 남자 생각을 했다. 그냥 인터넷 서핑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나를 돌아보니, 그 남자의 말이 이해가 갔다. 대낮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시간에, 서핑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은, 분명 스스로의 이미지에 어떤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는 것 같다. 어느 낮 시간. 누워서 공부때문에 뭘 생각하고 있다가 전화를 받으면, 모처럼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예민한 친구들은 첫 인사가 여보세요가 아니다. "너 잤지?' 그러면 나는 좀 죄인 취급 받는 기분이 들어서 약간 신경이 곤두선 채로, "아니야. 책보고 있었어"라는 말로 때운다. 책보고 있다는 말은 대학원생이라는 위치를 아는 친구들에게 그나마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테니까.  

 

대학원에 있으면 내가 '죄인-게임'이라고 부르는 대화를 동료들끼리 한다. 유감스럽게도 낮에도 밤에도 쓰고 읽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자폐적인 게임은 이상한 우울함과 쾌감을 준다. 우울함을 쾌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게임인 것이다. "어제 내 친구한테 전화 왔는데. 증권회사에 취직했대. 그 친구 예전에 별로였는데..인생 참.." 그러면 나오는 후렴구는 "에효..나는 뭔지.."  

 

카페에서 본 그 남자에게 낮은 강박적 시간이었을 것이다. 낮에 자신이 해야 할 행위가 있다는 것. 그리고 한국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채워야 할 어떤 업무들. 그 안에서 그 남자는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카페에서 팬케잌을 먹으며,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다는 그 말을 '일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 '나 지금 바빠'라는 말로 감춘 채, 일말의 긴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 밑에 내가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닌 범주의 사람.그 안에서 공부는 잉여적 존재가 된다. '평생 공부'라는 말을 믿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살면서 많이 봐왔고, 지금도 보고 있지만, 그 말에 뜨거운 박수를 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입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팔자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걸 많이 봐 왔다. 공부를 절박한 심정으로 하는 사람을 존경이라는 가식적인 포장 아래 잉여라는 외계인으로 취급하는 사회. 그 사회 안에서 전혀 느껴도 되지 않을 죄책감으로 공부와 일의 우열관계를 회한으로 따지고 살아가는 운명. 과연 우리 시대에 일이란 무엇이고, 공부란 무엇일까. 이 골치 아픈 생각들이  요즘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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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4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4 01:13   좋아요 0 | URL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2010-05-04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4 15:2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리고 응원합니다!

비로그인 2010-05-11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아심뽀까...
요거 울 남편한테 쓴 작업멘트였는데...
그딴 짓이나 하지말고...아심대까...했어야 했어요^^

얼그레이효과 2010-05-11 14:4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잼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