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보고서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빵굽는타자기를 읽었다면 굳이 읽지않아도....이인칭 시점도 좋았고 1부 내면보고서의 유년기는 흥미롭지만 의미는 있겠지만 긴 영화이야기와 편지들은...글쎄
너무 쉽게 책을 썼다는 생각 그는 에세이보다는 소설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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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흰‘을 읽는다,

어제와 그제는 드라마를 울면서 봤다.

두 가지의 매체가 묘하게 어울린다,

드라마에서 희자 이모는 어린 아들을 등에서 잃었다. 열감기를 앓던 아들이 희자 이모 등에서 죽었다.

정아 이모는 배속의 아들을 잃었다. 배가 아프고 힘들었는데 집안일도 멈출 수가 없어서 그렇게 잃었다

소설속에서 화자는 자기 이전의 언니를 생각한다.

여덟달을 채 못 채우고 급하게 나온 그 달떡같은 아기는 딱 한 번 제 엄마와 까만 눈을 맞추고는 그대로 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 ‘죽지 마라 죽지마라.. 라는 제 어미의 힘없는 소리였음을 그 아기는 알까

희자 이모의 아들은 제 눈이 마지막으로 감긴 곳에 제 어미의 따뜻한 등이었다는 것을 알까

정아 이모의 태어나지 못한 아들은 자기의 존재가 그렇게 기대되고 기대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까

낯선 곳에서 작가는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은 제 언니의 기억을 꺼내며 하나씩 하나씩 흰것들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그건 참 한강 다운 일이고 죽은 언니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씻김굿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애도되어야 한다. 슬퍼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비로소 보낼 수 있다.

비단 죽음만이 아니다,

어떤 내 안의 사소한 감정 하나 경험치 하나도 충분히 알고 받아들이고 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찌꺼기가 남지 않게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여서 내 안에 작은 만을 이루지 않게, 그 만으로 물길이 막히지 않게 그렇게 흘려 보내는 행위는 필요하다

작가는 어떤 무언가를 내 보내는 과정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상상일 수도 있는 달떡같은 아기를 생각하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씻어내고 있는 것이 이 소설 같다

드라마속 두 이모는 그들이 직면한 어떤 죽음도 제대로 애도하지 않았다

그 미완성의 애도는 그렇게 쌓이고 쌓여서 혈관을 좁게 만들고 마음속에 많은 모퉁이를 만들고 굽이굽이를 만들어서 물길이 약해지고 흐름이 끊어지게 되었고 마침내 그것이 나중에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는 그 순간 터져서 , 마구 화내도 되는 사람 앞에서 터져서 다행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부럽다고도 생각했다.

 

흰‘에서 작가는 낯선 곳에서 낯선 생각을 이어나간다.

모두가 죽고 불타버리고 80년이전의 모든 것은 남은게 없는 도시에서 그때의 흔적들과 새로이 생긴 건물들이 이어진 묘하게 서로 섞이지 않은 경계선을 가진 도시에서 작가는 나와 이어진 흔적들을 생각한다

이질감도 있고 어울리지 않고 어색하지만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어떤 운명을 생각하고 그렇게 지금은 이물감이 드는 것이 또 다시 시간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알 수 없는 불안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툭 하고 죽음이 나타날 것같고 무언가 막연한 불안감이 확 그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까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야기가 불안하게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자꾸 하얀것들이 등장하면서 알 수 없는 불안과 조급함을 느낀다.

그래도 책장을 넘기는 일은 멈출 수가 없었다.

 

 

“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31)

 

진눈깨비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레이스 커튼

새로 발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 그녀의 맨살이 닿을 때 순면의 흰 천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같다. 당신은 귀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잠은 깨끗하고 당신이 살아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잠과 생시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순면의 침대보에 맨살이 닿을 때 그녀는 그렇게 이상한 위로를 받는다.

 

 

각설탕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끄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안항T다고 믿으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몇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았다.

거짓망르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 초를 밝힐 것

 

침묵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작별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뜰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우리 삶에는 죽음이 함께 있다.

삶과 죽음은 무자르듯 딱 잘라서 여기까지 라고 경계를 지을 수 없는 게 아닐까

연결되었다고 할 수도 없지만 다르다라고 할 수도 없는 무엇

우리 주변에는 어디나 죽음이 있고 내 기억에도 죽음이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내 마음도 있고 죽음을 기다리는 내 마음도 있으며 그것을 회피하는 나의 방어기제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죽음 내가 가야할 죽음이 내 삶과 늘 함께 한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이 결국 삶이라면 그 죽음 그들 사이에도 삶은 존재할 것이다.

작가는 낯선 곳에서, 죽어버린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삶으로이어졌더라면 혹시 없었을지 모르는 제 삶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에게 예전 어머니가 들려주었던 죽지마라 제발...

이제 그가 작가에게 들여준다,

죽지말아요...

작별이 있어도 인생은 계속된다.

 

삶이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뚝 하고 죽음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은 슬픔인 동시에 행복이다,

삶을 생각하는 순간에도 죽음은 늘 존재한다.

작가는 자기 삶을 이어가며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으며 경계도 희미하다. 다만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기에 두려워할 뿐이다,

세상의 모든 하얀것들을 떠올리며 어떤 죽음을 이제는 이 세상에 부재하는 무언가를 애도하는 과정에서 나의 삶을 생각하고 죽음을 셍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책을 읽는동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첫장을 편다,

이제 다시 조급해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으며 책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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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나쁜 사람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악한 사람도 찬찬히 살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석이 있고 어쩔 수 없음이 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라고?

천만에,,,,

그렇게 일일이 다 찾아보면 전두환도 좋은 남편에 좋은 아빠일테고 이명박도 좋은 사람일테고 박그네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누나고 딸이었을테니까

악한이라는게 누구에게나 골고루 평등하게 악한게 아니다,

천사도 누구에게 골고루 선하고 잘하고 좋기만 한건 아닐 것이다,

뜯어보면 악한에게도 선한 구석이 있고 선인에게도 서운하고 미운 구석이 있다,

그래서.. 모두가 같다고?

아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아팠는데 내가 그걸 몰랐거나 모른척 했거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그 이외 모든이에게 좋은 사람이었대도 나쁜 놈이다,

나쁜놈은 아무리 선한 구석을 발견해도 그냥 나쁜 놈이다,

 

디마프,, 에서 오늘 석균아저씨 이야기가 나왔다,

젊은 시절 아내를 사랑했고 줄줄이 있는 동생 그리고 그 동생이 몸이 불편해진 이유가 자기였고 그로 인한 죄책감 그리고 삶의 무게 등등 그 사람이 어쩧게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나왔다,

나쁜 줄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사느라 잊어버렸고 그렇게 나는 잊어버려서 가족들이 자기를 미워하는 이유를 몰랐고 무시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말은 험하게 나오고 행동은 거칠게 나오고 매사에 무시하고 막해대고 버럭버럭거린다,

이제와서 내가 몰랐다는거 그게 죄라고 그게 잘못이라고 깨닫는데

순간 나는 말했다, 그래서 뭐?

지금 알아서 뭐? 그렇다고 40년간 이어온 악행이 없어지나?

당신으로 인해 상처받고 문드러진 누군가의 삶은 되돌릴 수 있나?

후회해도 악인이고 여리고 선한 구석을 알아보게 되도 악인은 악인이다,

누군가를 알게되면 사랑하게 되진 않더라도 미워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사람과 관계없이 그저 지켜볼 수 있는 제 3자의 입장이고

그 사람과 관계되고 그 사라의 악에 몸서리치게 힘들었던 사람들로서는 그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기껏 때리고 마음껏 상처주고 짖밟고 어.. 몰랐어, 사실 나에게는 이러이러한 면이 있어서 그랬어.. 하고 말한다고 그 모든 게 사라지냐?

그의 후회에 눈물을 흘리고 온갖 궁상은 떨었지만 그래도 그가 악인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완이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해받을 수 있는 인간의 약함일지라도

정아에게 순영에게 그리고 다른 딸들에게는 나쁜 남편이고 나빴던 아버지다,

어쩌면 뼈속까티 완벽한 악인이어서 마음껏 미워하고 누구와든 함께 욕할 수 있는 악인인게 낫지

어설프게 아픔과 약함을 보여서 미워하는 일마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건 악질 중에도 가장 저급한 악질이다,

공자님도 말씀하셨다,

알고 저지르는 악행과 모르고 저지르는 악행중 더 나쁜 건 모르고 저지르는 악행이라고

알고 저지르는 악행은 저지른 악행에 대해 말하고 고치도록 하면 되지만 모르고 저지른 악행은 모르고 있는 것부터 알려주고 악행을 악행으로 알게 해야하는 일이라고

(정확한지 모르겠다)

몰랐어... 몰랐네..

그래서 뭐!!! 모르는게 자랑이냐

이렇게 대꾸하면 참 정없고 못되먹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컷 아프게 하고 어 몰랐어.. 해버리면 모든게 끝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 악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상대방이 미움을 가지려고 하는 순간

또다른 면을 보이면서 죄책감을 가지게 만드는 거다,

미워할 수도 없고 미워하는 일 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마는든 사람

타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고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매력을 발휘하면서

그게 진정한 악인디ㅏ,

내게 석균이란 인물은 그런 사람이다,

이제와서 왜 깨닫는건데

죽을때 까지 모르고 살지.... 악담만 나온다,

 

상관없는 타인의 눈에 석균의 삶도 아프고 고단하고 무겁다.

그래서 그의 선택들과 말들과 행동들이 아하,, 그랬구나 하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부딪치고 살았던 가족에게는 이해받기에 앞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야한다, 용서는 그 다음의 일이고 설령 용서가 되돌아 오지 않더라도 원망하면 안되는 일이다,

 

드라마는 아마 깨닫고 변해가는 석균 아저씨를 정아이모가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딸 순영이가 엄마인 정아 이모에게 왜 그랬는지 아니까.. 다 그럴 이유가 있고 엄마가 그때 힘든거 아니까 말 못한거야 한 것처럼

정아 이모가 석균아저씨한테 다 알아... 하고  폭넓게 받아주지 않으면 좋겠다,

그건 해피엔딩도 뭐도 아니다,

 

나는 누군가 우리에게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이 뻔뻔하게 모르고 자기가 잘나서인줄 알고 무시하는 꼴이 더 미워서 엉뚱한 석균아저씨에게 그 마음을 투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드라마랑 달라서 나쁜 사람이 반성하고 후회하는 일은 참 드물더라,... '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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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그 작품속의 등장인물은 어느 누구도 타인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을에 새로 들어오는 스즈에게도 나와는 다른 성향의 타인에게도 모두를 끌어안고 간다,

환타지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지만  가마쿠라 라는 곳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누구든 우리가 되어버리고 가마쿠라를 거쳤서 어디로 갔던 누구든 여전히 우리가 된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

어쩌면 조금 조심스럽고  적당한 간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함이랄까 거리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만큼 거리는 있을 지언정 사이에 금을 긋지는 않는다,

먼 우리 가까운 우리 조금 어중간한 우리들이 모여  이야기를 이어간다,

새로운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들의 시선, 전학생을 바라보는 동급생들의 시선

다리를  잃은 친구를 바라보는 동료들의 시선

유부남을 사랑하는 사치를 바라보는 동생들과 축구 코치의 시선

스포츠 용품 점장과 카페 주인 아저씨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 두사람이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등등

모두가 타인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우리라고 생각한다.... 고 나는 믿는다,

만화니까 할 수 있는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곱권의 만화속에서 누구하나 타인은 없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아버지는 말한다

타인의  신발에 발을 넣어보기전에 판단하지 말라고

우리가 은연중에 받아들인 어떤 가치관이나  그냥 습관적으로  여기는 생각의 좌표속에 어쩌면 큰 편견이 있고 어떤 틀이 있어서 우리와 타인을 구분하고 타인을 나쁘다고 규정하고 벽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흑인이 나쁜게 아니고 마을에서 은둔하고 있는 이웃이 나쁜게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잘 모를 뿐이다,

알고 나서 그가 악한 사람인게 드러난 후에 미워해도 늦지 않다,

우리가 타인과 다른 건 당연하지만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라고 남매에게 말해준다,

 

 

 

 

1968년  아이오와주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푸른눈 갈색눈의 체험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누군가를 편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차별을 하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는게 아니다,

아니 이유는 있지만 그 이유의 근원이 늘 옳은게 아니라는 것

누구든 누구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른 것들사이에서 기어이 동질감을 찾아내고 학연 혈연 지연 피부색 종교 신념으로 덩어리를 만들고 다른 덩어리들과 구분하면서 우리를 더 멋지고 옳다고 믿기위해 다른 덩어리들을 계속 깍아 내린다,

내가 더 우월해지는 일은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어떤 방향이 아니라 타인들을 끌어내리른 것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2

 

현재 우리 사회에도 많은 우리와 많은 타인이 존재한다,

다문화가정이 많아진 만큼 인종적인 문제도 새롭게 드러나고

남자냐 여자냐의 문제

어느 지역 출신이냐의 문제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의 문제

나아가 집의 평수에 따라 사는 동네에 따라

심지어 어떤 계급의 부모를 가졌느냐에 따라 많은 구분들이 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끈끈한 의리를 드러낼수록 그 끈끈한 우리바깥이 존재할 수 밖에 없아,

우리는 점점 끈끈해지고 의리있고 간도 빼주지만 우리가 아닌 타인은 그냥 투명해서 보이지 않거나  두렵거나 성가실 뿐이다,

차라리 콩가루처럼 하나하나 제각각 제멋에 놀고 나만 생각하고 고민하는 쪽이 오히려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해본다,

나만 빼고 모두가 타자라면 타인이라면 그건 외로울 일도 없고 이방인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을까

너무 극단적인가?

 

어쩌면 이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없어지면서 그 틀은 더욱 견고해지고 우리끼리라는 내부적 단결이 강해지고 그 내부의 순수함을 더 강하게 지키고 싶어한다,

조금이라도 타인이 섞이는 것 그래서 어색해지고 내키는대로 말하고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어색하고 싫어서 그저 편하고 잘 아는 ... 서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를 더 편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이 편해지고 더 이상 우리 이외의 것에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고 관심이 생길 필요가 없다면 벽은 더욱 높아지고 견고해진다,

편한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편하고 익숙하다는 것만으로도 차별을 진행된다,

어떤 인식이 없고 나는 아무런  편견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타인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나만의 익숙함에 만족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차별이 될 수 있다,

상상력을 가지고 누군가 다른 이의 입장을 생각해보는 것

차별을 줄이는 건 거기서 시작할 수 있다,

 

#3

 

모든 남자가 여혐은 아닐것이고 잠재적 범죄자는 아니라고 주장만을 할게 아니라

여자들이 두려워하는 현실을  한 번 쯤은 상상해보고 공감하려고 해보라는 거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다닐 수 있는 밤길이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의 원인일거구

그냥 내 마음이 급해서 발걸음을 빠르게 하며 앞사람을 따라잡았던 그 순간

그 앞사람은 혼자 생사를 오가는 상상을 했을 수도 있다고

어두운 골목길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고 벽으로 밀어붙이고 안아주는 연애가 누군가에게는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는 것

내 좋은 의도가 상대에게도 똑같은 모양으로 갈 수 없을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면 안될까,.. 라고

돈이 많은 집안의 어린이까지 공짜 급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않으냐는 합리적인 사고대신

의무교육중인 학생들은 누구나 공평하게 의무급식을 해야하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 해볼 수 있는 것 , 내가 베푸는 선의의 시혜가 누군가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상처일수도 있다는 사고의 확장이 필요하다,

 

무언가 대단한 활동을 하는게 아니라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 내가 어떤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상식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는 순간 나의 경계가 더욱 확대되지 않을까

나와 같은 사람은 누구도 없다,

비슷한 사람은 있을지라도  하나하나는 다 다르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사회생활이 가능하다,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한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웃어야 하는 것이다,

 

내 삶에서 타인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으면 한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 타인은 궁금하고  신비로운 존재이길 바란다,

알지 못하는 대상이 무섭고 공포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확장이었으면,....

그냥 그랬으면 좋겠어서,...

한줄 이상의 일기를 주저리주저리 오래오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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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6-1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특정 대상이나 상대방의 사정을 모르면 그/그것에 대한 편견이 생겨요. 그리고 그 편견을 바라보는 관점이 ‘차이’가 아니라 ‘차별’로 형성되고요. 타자를 알아야 편견의 오류를 알아낼 수 있는데, 무능한 생각이 들통날까봐 일부러 회피하는 것 같습니다. 편견의 가해나자 피해자 모두 지치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푸른희망 2016-06-16 18: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모르면 두럽고 두려운건 나쁜 거라고 여기죠.다른건 결국 틀린것이되구요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도 소년 파이의 모험이야기

뱅골 호랑이와 구명보트에서 277일간의 모험이야기

어쩌면 동물들로 대처된 사람들의 이야기딜지도....

어떤 이야기든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숙명이 있다,

파이가 들려준 두가지 버전의 이야기 중에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싶은 이야기 더 멋지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선택하면 된다, 작가는 이야기를 썼고 독자는 이야기를 듣는다(읽는다)

작가가 A라고 말한다고 독자들도 A라도 찰떡처럼 알아들을 필요도 없다,

A` 이거나 a 이거나 아니면 엉뚱한 Z 일 수도 있다,

 

인도 소년.. 아니 이제는 소년이 아닌 청년 이상 나이를 먹은 그때의 소년 파이는 작가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그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 서사를 그저 담담하게 말한다,

힘들었고 고생했고 불안하고 아득했던 이야기를 전한다,

그걸 우리가 믿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그 이야기에서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 그리고 내게 보이는 것만 보게 될 뿐이다,

 

나는 존엄을 생각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존엄을 잃고 싷지 않았떤 소년 파이를 본다,

리처드 파크처럼  개걸스럽게 육식을 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도 파이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고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을 생각하고 그 신들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파이는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상황으로 떨어지더라도 존엄을 잃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보았다,

리처드 파크의 존재 자체가  그리고 그 호랑이와의 관계맺음에서 스스로의 존엄과 타자에 대한 존엄을 함께 생각하고 관계를 꾸리고 있었따,

내가 본 소년은 그랬다,

 

사실 침춤호가 가라안고 그 이후의 일들은 믿을  수 없고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동물들과 조난을 당했대도 그러하고 사람들과 조난을 당했때도 그러하다,

바닷물에 젖고 태양에 익어가고 피를 뿌리면서 먹어야  하고 벵골호랑이를 계속 감시하며 삶도 이어나가야 하는 상황들은 그냥 이야기였다,

흥미진진하지만 그냥 이야기인게 가장 편한 그렇게 믿고 자꾸 듣고 싶었던 어떤 이야기

그 이야기는 자꾸 질문을 던진다,

너라면 어떻게 할거니?

어떤 선택을 할거야?

날 비난하겠니?

이 이야기를 믿을거야? 말거야?

너는 도데체 어떻게 살고 있는 중이니?

너는 옳다고 믿니?

소년은 질문을 던지고  나는 자꾸 머뭇거리면서 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자꾸 책장을 넘긴다,

그리고 이건 존엄에 관한 이야기야,, 하고 억지로 결론을 지어버린다,

물론 존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다양한 가지를 뻗고 있다,

나는 그저 하나의 가지만 꺽어 보고는 결론을 내린다,

한정된 공간에서의 한정된 시간동안의 이야기가 크게 세계를 확장한다,

그래서 좋은 이야기라고 .... 믿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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