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과 내 입을 통해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내가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즉 삶으로 연결시키는 것 역시 다른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많이 듣고 많이 읽어서 아는 건 제법 모였다.

 

성인식에 대한 두차례 강연을 들으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성폭력이란 적극적인 동의 표시가 있지 않은 한 관계는 모두 폭력적이 된다는 것도 안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동의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가능하며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동의가 협박이나 공포 혹은 속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거부하지않았다는 것 머뭇거렸다는 것 그리고 제발로 모텔을 따라가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것과 스킨쉽을 허용했다는 것이 섹스를 해도 된다는 동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왜 따라갔대? 왜 그렇게 마셨대? 왜 나오지 않았대?

제발로 들어갔고 제 카드로 지불했으면 이미 동의된 관계가 아니야?

리고 말하는 것 그것 역시 폭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주장하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조건 우기는 사람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무기로 당위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건 미투고 저건 미투가 아니라고 침을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선을 긋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우습고 한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들 편에 서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늘 배워야 하고 생각해야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게 쉽게 지치고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생각하고 공부하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두권의 책 내용이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나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단단해지고 있는지를 각각의 저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꾸 의심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가족사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적 문제와 부딪치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고딕체 페미니즘의 단단하고 견고함을 거쳐 이제 말랑해지고 수용하는 페미니즘으로 가기도 하면서 모두 고민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제 완성된 페미니스트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전 보다 덜 흔들리고 편안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역시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 못할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지혜는 한채윤이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고

지금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저항해야 전달되는 상식들이 그저 당연하게 통용되고 모두가 젠더의식에 예민하고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당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고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면 누구나 접하는 보통의 경험 성적인 불쾌감(폭력 추행 희롱을 포함한)

그건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져야 함에도 누구나 겪고 있어서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지말아야 하고 무던하게 삭혀야 하는 일들 부터   퍽하면 들리는 "여자들도 군대를 가라"는 퉁박이나 가정사니까 연인관계니까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되는 친밀한 관계의 폭력문제 그리고 나아가 젠더문제들을 어쩌면 시시콜콜하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멍들고 부서지고 피흘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고 누군가의 말과 존재에 주눅들고 불안하게 서성이며 그 모든 불안의 책임을 지려고 드는 강박조차 폭력의 증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순수하고 완벽한 피해자만을 구제하려는 지독한 이중성에 대한 말들은 예전 내가 처음 여성학을 알았던 20년도 훨씬 전과 다를게 없다는게  허망하기도 했다.

 

두번의 강의의 마지막에 강사가 질문을 했다

"혹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요?"

천만에... 너무 이해되고 공감되고 수긍한다.

다만.. 내가 이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을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아줌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할머니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 자꾸 돌아본다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긴 쉽지 않다.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

누구나 답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의 답만이 정답은 아니다.

책의 말미에 쓰인 말처럼 누구나 자기의 속도로 그렇게 페미니즘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다.

 

책을 통해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폭력은 직접 모욕을 주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장단을 맞춰주고

그저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그리고 혀를 차면서 불쾌하다는 듯이 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을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겠지만

그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모두이다.

침묵이 폭력을 완성하기도 한다.

생각하고 의심하고 그리고 용기내어 말하고 한걸음 나아가는 것

그건 어디서나 필요하다.

 

누군가 니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뭐냐고 한다면

 내가 너보다 더 대우받아야 겟다.

내가 너만큼은 대우받아야겠다. 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하고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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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사람이라고 보는 급진적인 관점이다.” (323쪽)

저는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의미에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
 

 

 

 

 

 

 

 

 

 

 

 

 

 

 

1. 정말 잘 읽힌다. 잡은지 반나절이면 끝이다.

 

2. 게이고의 유일한 시리즈 인물인 가가 형사는 은근 매력적이다

   무심하고 냉정하지만 치밀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물고 늘어지는 점이 좋다.

   실제 이런 형사가 얼마나 될까 싶어  아쉽다.

 

3. 게이고는 추리소설을 쓰지만 늘 사회문제를 말하고 싶어한다.

   사람이야기. 관계망속에서 큰 권력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주된 관심처럼 보인다.

   어쩌면 추리물이 인간의 본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 정의롭고 도덕적인 결론이 나온다.

  용기를 내라. 진실에서 도망치지 마라. 스스로를 믿어라. 등등등

 

4. 피해자가 죽고 경찰이 가족에게 탐문을 할 때 의외로 가족들이 죽은 가장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잘 모른다는 묘사가 인상적이다.

사실 내가 늘 보고 매일 만나는 사람을 잘 안다고 믿지만 얼마만큼 알까

사실 가족이지만 서로의 개인적인 면을 존종해주고 싶어서 일정부분은 공유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믿고 있고 그것이 존중이라고 믿는데 막상 죽고 나서 그가 어떠했느냐고 묻는다면 살아있을때의 존중이 죽어서는 무심함 무관심이 되고 말았다. 사실 우스개 말로 가족이니까 그러는거 아니라는 말처럼 가족이니까 말하지 않고 가족이니까 폐끼치지 않고 가족이니까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는 면도 많아서 과연 내가 죽는다면 혹은 가족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뭉뚱그려서 할 말은 많을지 몰라도 형사들이 세세하게 캐묻는 탐문에는 대답할 수 있을까 나부터 의심스럽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어떤 큰 조직에 이용될 수도, 어쩔 수 없이 연류되어 원치 않은 선택이나 행동을 하거나  그것만이 살길이어서 하는 수 없이 행해지는 것들이 있다.

큰 흐름을 봐야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고쳐나가야 하고 바꾸어야 하지만

그 속에서 그것이 잘못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어쩔 수 없는 상태에서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내가 한 행동과 말과 태도는 가장 작은 범주에서는 내가 선택한 것이다.

누군가가 등을 떠밀고 억지로 밀고 가더라도 나에게는 작지만 중요한 거부할 수 있는  힘은 있을거라 믿는다.

안타깝지만 행동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은 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면 반성도 함꼐

 

일본의 신사들 일본의 다리 지명등을 보면서 여행에 대한 욕구가 불쑥 느닷없이 올라온다.

신사를 찾아 참배하는 거나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탐문을 하고 돌아다니는 행동들 메밀국수. 정식같은 음식들 작은 노포들에 대한 묘사

드닷없이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그냥 덮는다는 것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가장 나쁜 방법이다.

세상엔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없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

덮어주는 건 가장 나쁜 가르침이라고 가가 형사가 말한다. 그러게 배운 아이는 모든 걸 덮는 것으로 무마하려는 그릇된 도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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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2-22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가와 시리즈도 있습니다.
대표작은 용의자x의 헌신이죠☺
 

 

 

 

 

 

 

 

 

 

 

 

 

 

우리의 경험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가 각기 다르다는 뜨시며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도 단 한가지가 아니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연대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전략들을 세밀하게 세움으로써 다양성을 추구했다. 정치적 연대를 발전시키려 한다면 여성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이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탐색해야 한다. 유색인 여성들이 서로를 배우려고 함께 노력할 때 자매애를 구축해야하는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연대를 위해 백인 여성에게 의지할 필요는 없다. 백인 여성들은 기회주의적인 관심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반인종차별주의자 여성들과 단결할 수 있다. 우리는 정치적 연대와 페미니즘 운동으로 하나되어 단결할 수 있고 자매애라는 개념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회목시킬 수 있다.

 

1. 흑인여성 .페미니즘 이론 형체 만들기

 

 프리단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페미니즘 담론을 지배하는 백인 여성들도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시각이 모든 집단의 여성들이 실제로 겪는 경험에 비추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의문을 거의 품지 않는다. 또한 최근 몇년 동안 비록 편견에 대한 지각이 상당히 늘어나긴 했지만 그들의 시각에 인종적 계급적 편견이 어느 정도까지 반영되었는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배 체제로서 성차별주의는 제도화 되었지만 이 사회에서 여성의 운명이 한가지 절대적인 방식으로만 정해지지 않았다. 억압바든다는 것은 '선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억압받은 사람들은 비록 조직화된 저항에 참여하지 않고 저술을 토해 억압의 본질을 분명히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자신이 억압받은 사실을 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거칠고 가차없는 비판은 페미니즘 투쟁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며 해방 이데올록를 함께 만들고 해방 운동을 함께 하자는 의도였다.

 

2. 페미니즘 .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하기 위한 운동

페미니즘은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투쟁이다. 페미니즘의 목적은 특정한 여성 집단이나 특정한 인종이나 계급의 여성에게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페미니즘이 생활방식도 아니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성의 정체성이나 역할도 아니라는 점이다.

남성과의 사회적 평등에 촛점을 맞추어 페미니즘을 정의하면 결과적으로 차별대우 남성의 태도 법적 형태등을 강조하게 되다. 반면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하면 지배체제에 그리고 성 인종 계급의 억압의 상호연관성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앞으로 페미니즘의 투쟁의 토대는 성차별주의및 여타 형태의 지반 억압의 문화적 기반과 원인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지하는 것으로 탄탄하게 기반을 다져야 한다. 억압 철학의 구조에 도전하여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페미니즘적 개혁은 영햐력을 오래 발휘할 수 없다.이 운동은 남성과 평등해지자는 운동이 아니라 사회에서 성차별적 억압적 상황을 종식시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다.

 

3.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성

 

성차별적 지배는 다른 형태의 억압과 다르게 사람들 대부분이 가정에서 실제로 목격하거나 체험했다. 우리는 대체로 가정을 떠나 넒은 사회에서 인종차별이나 계급 차별을 목격하거나 체험한다. 남자가 없는 가정에서 조차 어머니나 다른 어른들의 관계를 통해 아이들은 성차별적인 역할형태를 엄격하게 준수하고 권위적 지배를 중시 여기도록 학습한다.

각각의 사람들이 모든 형태의 억압에 저항하도록 투쟁이 필요하다고 인식해야만 정치의식은 중요한 발달 단계로 도달한단. 성차별적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여성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4. 자매애 .  여성들간의 정치적 연대

 

우리는 우리들만의 언어를 정의해 사용해야한다. 함꼐 피해자가 되어 이를 바탕으로 유대를 맺거나 공통된 적에 대응하려고 유대를 맺는것이 아니라 성차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페미니즘 운동에 정치적으로 참여한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유대를 맺어야 한다 서아별적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페미니즘 우동에 정치적으로 참여한다면 남성과의 평등이라는 이슈 혹은 남성 지배에 대한 투쟁에 만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착하고 남성은 나쁘다는 성차별ㅈㄹ적 억압구조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설명은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남성 지배에 저항할 수 있으려면 우선 성차별주의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야 하며 여성의 의식을 변화 시키는 노력을 해야한다. 여성들은 서로간에 성차별적 사회화가 된 것을 노출시키고 살펴보고 제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면서 서로의 힘을 키워주고 지지하며 정치적 연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견고한 기반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다르며 그 다른 점은 타인의 우리에 대한 인식에 얼마나 결정적인 요인이 될지를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를 존중하도록 끊임없이 일꺠워주어야 한다. 우리 모두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받지만 모두가 억압을 받는 것은 아니며 억압의 정도가 균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경험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우리의 요구가 각기 다르다는 것이며 정치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도 단 한가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연대를 위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전략을 세밀하게 세움으로써 다양성을 추구한다. 저이적 연대를 발전시키려면 여성들은 다양한 문화를 지닌 이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탐색해야 한다.

연대는 지지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연대를 경험하려면 공통된 관심사와 신념을 가진 공동체여야 한다. 즉 자매에를 구축하고 하나로 뭉치겠다는 공통된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일치됨을 중심으로 통합하고 자매애를 구축해야한다. 지지는 부차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지는 쉽게 얻고 쉽게 철회된다. 그러나 여대는 지속적인 참여가 요구된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우리가 성장하려면 다양성과 의견 불일치와 차이가 필요하다. 연대감을 느끼려고 굳이 차이를 없앨 필요는 없다. 억압을 종식하려는 투쟁에 동등하게 임하기 위해 동일한 억압을 겪을 필요는 없다. 여자끼리 결속을 위해 반 남성적 정서를 가지기 보다는 풍부한 경험과 문화와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5. 남자 .. 투쟁을 함께 하는 전우

 

분리주의 이데올로기는 여성 홀로 페미니즘 혁명을 할 수 있다고 미도록 부추겼지만 실상 여성 홀로는 불가능하다 성차별적 억압을 유지하고 지지하느 ㄴ주된 행위자는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자신의 의식과 사회 전체의 의식을 변혁시킬 책임을 맡아야만 성차별적 억압은 사라질 수 있다. 남성들은 주된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는 남성들도 저항 투쟁에서 똑같은 몫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남성들은 동성 동료들의 성차별주의를 폭로하고 대항하고 반대하고 변혁하는 식으로 공헌할 수 있다.

 

6.권력을 보는 시각 바꾸기

권력이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지배및 통제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이 사회 정치적 영역에서 남성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면 남성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할 것을 안다. 그리고 남성집단은 권력세계로 진입한 여성들이 기존 상태를 고수하고 유지하려 할 때만 남녀의 평등한권리를 보장해주었다. (남성형 권력을 동일하게 준수하고 따르기를 바란다) 권력에 들어간 여성들은 가부장주의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면서  권력의 개념이란 지배와통제라고 인정하고 그런 권력을 행사한다.

여성이 성차별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으려면 권력을 지녀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다. 가장 억압받는 여성조차 분명 나름의 권력을 행사한다. 가장 약하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집단이 쥐고 있는 권력은 자신에 관한 정의를 권력자가 강요하는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권력에 의해 정의된 자신의 현실을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이처럼 근본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저항행위이며 강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자신들이 권력이 없다고 믿도록 조장해서는 안된다. 여성들이 매일 행사하는 권력들을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며 그 권력들이 성차별적 지배와 착취에 저항하는 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7.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기

 

페미니즘이 일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보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여성 노동자의 경제 상황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심리적 착취에 저항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임금을 받든 무임금이든 여성이 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에게 새로운 자아개념과 자기 정의를 제공한다.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전문직과 출세에만 집중했기때문에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마치 다른 모든 노동 특히 저임금 노동은 가치가 없는 듯 행동했다 페미니즘은 민중여성들이 하는 일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태도는 남성들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8. 여성 교육. 페미니즘 어젠다.

 

읽기 쓰기에 기본을 두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기본이다

 

9. 폭력을 종식하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

 

폭력은 권력의 문제이며 사회 가정에서 권력이 남성에게 몰린 구조에서 권력이 있는 남성이 물리적 정서적 억압을 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력이 폭력을 만들어내는 구조에서는 성차 인종차 계급 차 모든 경우 폭력이 유발될 수 있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권력을 많이 가진 쪽에서 적을 쪽으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지 못한 남성들은 그곳에서 억눌려 있던 폭력성을  통제상황이 필요 없는 경우 즉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처벌의 위험이 없는 상황에 행사한다. 가정은 대게 통제가능한 상황이며 대상은 여성이나 어린 아이다 남성은 자기가 가진 감정적 고통을 여성에게 배출하고 투사한다.

남녀간의 사랑과 폭력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의 성별이 아니라 물리적 관계이다. 누군가는 선천적으로 공격적 성향을 가졌고 누군가는 선천적으로 수동적 성향을 타고 난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폭력에 관대해지거나 익숙해져서는 안된다.

가족내의 폭력 에서 군국주의적 전쟁  아동에 대한 통제와 교육이라는 이름하게 행해지는 폭력등 약자에 대한 자연스러운 통제등 모든 폭력을 낯설게 바라보며 재 정의해야한다.

 

10 혁명적 양육

 

 여성의 양육은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며 페미니즘 운동가를 비롯한 사회 모든 구성원들은 이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모성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가하고 모성이 여성에게 강요된 경험이나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경험이 되지 않도록 하며 여성 혼자서든 남성과 함께든 상관없이 여성의 양육이 훌륭하고 효과적인 것이 되도록 페미니즘의 맥락안에서 여성의 양육은 세롭게 인정받고 칭찬 받아야 한다.

어머니다운 돌봄과 아버지 다운 돌봄의 구분없는 효과적인 양육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11. 여성의 성적 억압종식시키기

여성은 자기 성에 대한 결정권이 있다.

 

페미니즘은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공통된 가치가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해야할 행동들은 하나일 필요는 없다.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는 지구의 절반 인구들도 저마다 인종 종교 계급 학력 지역에 따라 다른 특성을 가진다. 각자가 가진 고유한 특성과 경험  생각 감정을 하나의 틀로 묶을 수는 없다. 성차별이 성 평등으로 가는 길에서 원하는 것이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어떤 기본값을 가진 여성들을 모델로 모두가 그렇게 하나로 묶여야 할 필요는 없다.

백인 여성들이 시작한 페미니즘이 유색인종 여성들에게는 맞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처럼

모두가 만족할 만한 가치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경험하고 내가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토대로 행동할 수 밖에 없다.

그 토대에서 한계를 느끼고 욕망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한다.

하나의 가치만 내세우며 그 기준에 모두가 따르라고 한다면  그건  또하나의 차별이 된다.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인 것이라고 여성주의는 말한다.

내가 아니라 다른 타인이 겪은 차별 역시 차별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우리가 바꾸어야 할 과제가 된다. 여성이어서 차별받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로서 차별받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성들간의 정치적 연대 그리고 남성들은 적이 아니라 함꼐 가야 할 동지라고 생각하는 것

폭력에 대한 생각들 바뀌기 위해 선행되어야할 교육의 문제 육아의 문제 그리고 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  어쩌면 페미니즘의 흐름이 긴 만큼 이제는 당연하게 이해할 내용들도 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드라마 <미스티>를 보며 누구나 부러워하고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는, 주인공 고혜란의 남편 강태욱을 보며 참 많이 답답했다.

참 좋은 남자라는 건 알겠는데  상대가 바뀌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건 아니지 싶었다.

고혜란이란 여자는 최고에 대한 욕망이 있고 무엇보다 일이 우선이었고 그렇게 도전할만큼 충분한 능력과 배짱과 용기도 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사귀었을때 고혜란은 충분히 그런 면을 드러냈다. 내숭떨지 않고 아닌척 하지 않으면서 나는 욕심이 많고 그걸 이룰거라고 그래서 결혼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멋지게 강태욱은 그런 그녀에게 명함이 되어주고 배경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니까 괜찮다고 까지 했다.기꺼이...

뭐 연애할때 무슨말을 못하랴... 하고 말한다면 할말이 없다만

고혜란이 충분히 욕망덩어리고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라는 것도 알겠지만 그녀는 그 본능에 늘 충실하고 정직하다. 모든 패를 드러내고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인데

결혼후  변하지 않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치열하게 싸우며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방에 쳐박혀서 꽁하고 삐진 그 남자 강태욱이 이해되질 않는다.

자기랑 달라서 좋아해놓고 자기와 너무 안맞다고 토라진다(말그대로 토라진다. 화를 내는게 아니라)

7년전 혼자 유산했다는 이유로 현재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고혜란인것처럼 꽁하다.

내 뜻대로 달라지지 않는다고 내 뜻대로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정서적으로 냉대하는 것도 결국 폭력이 아닐까... 주인공이라서 멋지게 나오니까 모든 것이 덮이는 거지만 결국은 그도 폭력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책은 저자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그래픽 노블이다.

오사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멋지게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고 기대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멋진 누구나 좋아하는 남자 닐을 만나고 둘은 사랑에 빠지고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커플이 되었다.누구나 닐을 칭찬했다 멋지다고 젠틀하고 젊은 시절 내모습같다고 모두가 좋아했다.

그런 닐을 사귀게 된 오사는 뿌듯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닐이 이상하다.

아니 어느 순간 바뀐 건 아닐 것이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내게 관심이없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싫어한다.

옷차림을 타박하고 화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며 니가 그래서 잘못이라고 모든 것이 니 잘못이라고 윽박지르고 따지고 소리지른다.

사랑하니까 그런거라고 믿었지만 자꾸자꾸 주눅들 수밖에 없다.

잘못을 지적당하기 시작하면 무엇이든 내잘못인것만 같다.

내가 화장을 이상하게해서 내가 그의 마음을 몰라주고 친구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려서

내가 칙칙한 옷을 입어서 옛날 남자친구에게 받은 엽서들을 정리하지 않아서

내가 무엇무엇을 하지 않아서  혹은 내가 무엇무엇을 했기때문에 그가 화를 내고 소리지른다.

이젠 그의 표정과 말투에 예민해지고 무엇이 옳고 그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나올지가 중요하다. 내가 잘못한게 무엇인지 그의 심기를 건드린게 무엇인지 그것을 빨리 알아채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이다.

이것이 옳으냐 그러냐는 중요하지 않다

짙은 화장에 개성있는 옷차림에 활발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롭던 오사는 사라지고 칙칙하고 비슷비슷하고 평범한 오사가 닐 곁에서 전전긍긍한다.

어느 순간 이렇게 7층에서 뛰어내려 내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지만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니까

잔소리가 화가 되고 짜증이 되고 윽박이 되고 그리고 물리적인 폭력으로까지 번지면서 오사는 생각한다. 이건 아니다. 이렇게 맞고 당하고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고립되어 살수는 없다

내 모든 삶을 닐과 바꿀 수 없지 않을까

그러나 닐이 웃어주고 미안하다고 하고 안아주면 모든 것은 그저 녹아버린다.

그래 별일 아닐꺼야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인데

내가 뭐라고.

오사는 점점 닐에게 길들여지고 스스로 무능해지고 있다.

 

왜 그렇게 살지? 왜 그렇게 당하면서 한소리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고 의지가 없이 끌려가는거지?

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쉽게 말할 수 있다.

아니라고.. 아니되라고 왜 말하지 않았나요?

근데 그 순간 이게 잘못된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하는 걸까? 그게 혼란스러운 지점이 있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겨버리면 내가 이상한가 생각할 수 밖에 없고

너는 못나고 못나고 못나고 어리석고 어리석고 어리석고 무능하고 무능하고 무능하고... 그렇게 되풀이해서 들어온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지탱할 수 없다. 의존적이고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책은 사람이 어떻게 길들여지고 어떻게 점점 약해지고 무능해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현실을 용기있게 직면하는 순간 도움을 받을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길도 쉽지 않다.

다시 되돌아가는게 편하게 생각되기도 하고 내가 과연 할 수있을까 하는 마음도 들고 한번 든 상처로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상담을 받고 진단서를 끊고 고소를 하고 재판을 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

결국 오사 역시 모든 과정을 겪고도 한 참 후에 닐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보고 안도한다.

미안하지만 .. 이제 닐의 관심대상은 저 여자가 되겠구나 이제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겠구나 하는 순간 안도한다.

폭력이 나쁜 건 사람을 아프게 하고 다치게 하는 것이지만

스스로를 약하게 만들고 믿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고 만드는 것이 더 위험하다.

 

사랑이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정의란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감정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다.

타인을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  내가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를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기도 하다. 나만 아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끼는 마음

그것만 기억하고 있어도 적어도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사랑이 폭력이 되어버리는 일은 적어지지 않을까

 

 

여기까지 페이퍼를 썼을 때 계속 미투  고백이 이어진다.

문단에서 연극계에서....

지금 드러난 분야 이외 다른 곳인들 당당할 수 있을까?

권력을 이용해서 지위를 이용해서 더럽고 추악한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뿐 아니라

내 일이 아니니까 나는 직접 행동하지 않았으니까

뭔가 여지가 있으니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거나

나는 그냥 침묵하고 말겠다고 그게 중립적인거라고 스스로 포장했던 모든 사람들

그들 역시 모든 비난과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폭력 당사자가 아니라 옆에서 침묵하고  객관적인 입장이 되겠답시고 중립이라고 도망가던 모든 이들 역시 방관자라는 이름의 폭력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건 아무것도 아닐거라고 애써 위안하고 나는 저만큼은 아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조금 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세상에 당연하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니겠냐고  잊으면 되고 툭툭 털면 되는거 아니냐고 쉽게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깃털만큼 가벼운 말이 누군가에겐 바위처럼 무겁게 내려치는 고통이다.

사랑한다면 이해한다면 아껴주고 싶다면

그 상대가  NO!! 라고 말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게 먼저가 아닐까

그리고 당연히 받아들이는  마음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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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이 생긴 첫 아이에 관한 그림책 동화책 그리고 육아서적은 있는데

이미 형 누나 언니 오빠가 있는 상태에서 태어난 둘째에 관한 이야기는 없을까?

 

큰 아이가 폐위된 왕의 입장이라면

둘째는 태어나면서 누군가와 경쟁해야하는 각박한 환경에 던져진다.

이유없이 억울했고 화가 났고 무언가 참고 눌러야 한다는 본능은 둘째라는 숙명일지 모르겠다.

태어나며 나누어야 하고 나누어 주는 대상에게 감사해야했고 나를 미워하는 누군가에게 잘보이기 위해 귀여워야 하고 사랑스러워야 함을 장착해야 한다.

내가 주장하면 동생이라 철이없다거나 둘째 특유의 욕심이라고 한다.

나의 행동과 태도는 나의 개성이 아니라 둘째가 갖는 특성이라는 안경을 통해 판단이 된다.

나는 내가 아니라 그저 둘째였다.

 

그런 둘째에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는 없을까

 

아이를 둘 낳으면서 둘째를 보면서 그 아이의 이유없는 투정과 짜증과 토라짐에 이유가 있음을 안다

그 아이의 행동은 예전에 내가 했던 그 행동들이었다.

같은 둘째로 동질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엄마가 언니가 둘째를 미워했던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아무래도 조금은 뒤로 처지고 손이 안간다는데 무심해지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예쁨 받는지 눈치로 알아야 하고 그게 생존본능이 되어버린... 그래서 내가 원치 않은 내 모습이 칭찬 받는 내모습이라는 걸 몸에 익히면서 억울하고 어딘가 어정쩡했던 기분들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나도 그렇게 서럽고 외롭게 자랐는데

아이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도 그렇게 손이 안가는게 다행이라고만 여기는 내가 있다

입장이 바뀌는 시각이 바뀌는 걸까?

태어나면서 사랑받고 으시대며 자라다가 동생이 생기면서 모든 것을 나누고 양보해야하는 큰아이의 짠함 만큼 태어나니 이미 모든 걸 반쪽에 만족해야하는 둘째가 있다.

누가누가 더 억울한가 내기하려는 건 아니지만

각각 힘듬이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나도 나의 둘째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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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은 마르크스가 생산수단과 관계라고 정의한 것보다 훨씬 많은 뜻을 지니고 있다. 계급은 당신의 행동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 (계급에 따라 정해진) 당신의 경험은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들 당신이 배운 행동양식, 당신이 자신과 타인에게 기대하는 점. 미래에 대한 당신의 생각,당신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중산계급 여성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급'을 기꺼이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계끕에 따른 행동양식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계끕에 따른 태도는 계급행동을 실제로 논하거나 스스로 계급행동을 바꾸지 않으려는 교묘한 속임수다. 그러나 이런 행동양식은 반드시 인식되고 이해되고 바뀌어야 한다.

 

                               

                벨 훅스 < 페미니즘>중 인용된  리타 매 브라운의 < 참을 수 없는 한계>에서

 

 

영화와 위 인용문이 상관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책에서 읽었던 저 문구가 떠올랐다.

누구나 자기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고 촘촘한 층위의 계급이 존재하고  차이가 존재하고 그로인한 차별이 있고 입장이 있고 관점이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의라든가 상식이라든가 평균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근거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내가 믿는 근거가 내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는 막이라는 걸 모른다.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기때문에 기준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내세우는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기울어진 저울이라는 것도 관심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공평과 불평등 그리고 차별은 그저 책에서 존재하고 관념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나는 어떤 차별도 어떤 편견도 없다고 믿는다.

내 기준에서 판단하고 내 기준에 맞지 않은 것을 거부할 뿐이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살인으로 30년을 복역했던 미스미는 출옥해 자신을 고용했던 식품공장장을 살인해서 태워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의 변호를 맡은 냉정한 시게무라는 그를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기로 한다. 법을 기준으로 미스미의 사건을 다시 검토하고 살인의 의도와 살인과 강도의 순서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질렀던 이유등을 파헤치면서 그저 냉정하게 법의 잣대로 조금이라도 그의 형을 낮추려고 한다. 물론 그게 시게무라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할수록 미스미는 자꾸 말을 바꾸고 피해자의 딸사카에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게다가 판결을 앞두고 미스미는 그간의 모든 진술을 뒤집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시게모리를 극심한 혼란이 빠뜨린다.

 

냉철하게 법으로만 미스미를 대하는 시게무라.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그리고 그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런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법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형을 낮출 것인가를 기본값으로 두고 미스미의 범행을 기계적으로 파악한다. 연인을 끊은 딸을 통해 조금이라도 연민을 이끌어내볼까 하는 마음에 홋카이도까지 가고 여러번 면회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지만 그건 그저 변론을 유리하게 이끌기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 시게무라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굳건하게 가지고 있던 관점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스미 역시 자기와 다름없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자기 역시 부모때문에 상처입은 딸이 있고 자기가 조금이라도 무심해지면 그 딸 역시 미스미와 딸이나 피해자의 딸 사카에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한다. 모두가 다르다고 여기던 관점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진다.

사람을 죽였던 미스미는  죽은 카나리아를 묻어주고 남은 카나리아를 자유롭게 해주었던 면을 가지고 있고  사카에게 가지고 있는 아픔을 공감하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변하지 않은 존재야  와 사람은 변화 시킬 수 있어 라는 믿음 두가지중 어떤 것이 맞을까를 이야기하던 시게무라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  의견자체가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를 무조건 밀어붙이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은 그대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제각각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미스미를 바꿀 수 잆다고 믿음으로 사형대신 30년형을 선고했던 지난날 판사였던 시게무라의 아버지와 미스미가 강도로인한 살인이라는 것을 뒤집어 사형대신 무기징형으로 낮추려는 시게무라역시 미스미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철저히 자기 입장(법)에서 대상을 판단할 뿐이다.

 

영화는 정말 미스미가 살인을 했는지 사카에대신 죄를 뒤집어 쓴 것인지  미스미의 진실은 무엇인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고 끝을 맺는다. 어쩌면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되묻고 있는 듯했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것이 법이라는 이름뒤에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교묘하게 비웃는 미스미의 말과 첫번째 살인 그리고 두번째 살인에 이어 세번째 살인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가 뒤섞인 표정과 행동은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사람을 바라보는가? 사건을 판단하는가를 묻고 있는 듯했다.

 

시게무라는 법대로 하면 모든 일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스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미스미를 살리기 위해 사카에의 진실을  이용해야 할 때와 덮어야 할때를 판단하는 것조차 그에게 낯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있게 뻔뻔하게 매번 말을 바꾸는 미스미앞에 모든 것이 진실일것도 같고 모든 것이 거짓일것도 같은 애매함 앞에 길을 잃는다. 그가 철석같이 믿었던 법조차 그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한 인간에게는 법으로 판단하는 것 이외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법이라는 것이 만병통치약인가 하는 모호함까지 더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거리에서 머뭇거리는 시게무라를 내려다 보며  화면은 어두워진다.

십자가 형채로 남은 시신을 태운 자국과 짧은 꿈속에 눈싸움을 하고 드러누었던 미스미 시게무라 사카에의 모습을 위에서 보면 세걔의 십자가 형상이고 마지막 사거리역시 십자가 모습이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에 과연 정의라는 것만 존재할까 내가 믿는 신념은 항상 옳은 게 맞을까? 시게무라의 혼란은 아마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삼성 이재용의 판결이 났다는 기사가 떴다.

1심과 다르게 집행유예로 판결이 났다는 기사와 해맑게 배시시 웃고 있는 50넘은 이재용의 사진을 보니 영화나 현실이나... 하는 생각을 한다.

 

법대로 하자구.. 법대로 해.. 라고 호기롭게 소리치며 법이 모든 만병통치약인듯 여기던 때도 있었다. 법이란 모든 것을 정의롭고 공평하게 판단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때는 행복했다.

결국 법이라는 것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의 일이란 완벽하고 순결한 공정함 걕관성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법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이가 부족하고 편견이 가득한 주제아 정의롭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 세상에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 이동진의 평을 보면서 무릎을 치고 아하.. 이렇게 봐도 되는구나 하고 감탄했지만

내가 영화보고 나온 추운 날 어떤 판결은 또 다른 방향으로 영화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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