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은 마르크스가 생산수단과 관계라고 정의한 것보다 훨씬 많은 뜻을 지니고 있다. 계급은 당신의 행동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 (계급에 따라 정해진) 당신의 경험은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들 당신이 배운 행동양식, 당신이 자신과 타인에게 기대하는 점. 미래에 대한 당신의 생각,당신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중산계급 여성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급'을 기꺼이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계끕에 따른 행동양식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계끕에 따른 태도는 계급행동을 실제로 논하거나 스스로 계급행동을 바꾸지 않으려는 교묘한 속임수다. 그러나 이런 행동양식은 반드시 인식되고 이해되고 바뀌어야 한다.

 

                               

                벨 훅스 < 페미니즘>중 인용된  리타 매 브라운의 < 참을 수 없는 한계>에서

 

 

영화와 위 인용문이 상관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책에서 읽었던 저 문구가 떠올랐다.

누구나 자기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고 촘촘한 층위의 계급이 존재하고  차이가 존재하고 그로인한 차별이 있고 입장이 있고 관점이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의라든가 상식이라든가 평균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근거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내가 믿는 근거가 내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는 막이라는 걸 모른다.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기때문에 기준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내세우는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기울어진 저울이라는 것도 관심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공평과 불평등 그리고 차별은 그저 책에서 존재하고 관념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나는 어떤 차별도 어떤 편견도 없다고 믿는다.

내 기준에서 판단하고 내 기준에 맞지 않은 것을 거부할 뿐이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살인으로 30년을 복역했던 미스미는 출옥해 자신을 고용했던 식품공장장을 살인해서 태워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의 변호를 맡은 냉정한 시게무라는 그를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기로 한다. 법을 기준으로 미스미의 사건을 다시 검토하고 살인의 의도와 살인과 강도의 순서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질렀던 이유등을 파헤치면서 그저 냉정하게 법의 잣대로 조금이라도 그의 형을 낮추려고 한다. 물론 그게 시게무라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할수록 미스미는 자꾸 말을 바꾸고 피해자의 딸사카에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게다가 판결을 앞두고 미스미는 그간의 모든 진술을 뒤집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시게모리를 극심한 혼란이 빠뜨린다.

 

냉철하게 법으로만 미스미를 대하는 시게무라.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그리고 그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런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법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형을 낮출 것인가를 기본값으로 두고 미스미의 범행을 기계적으로 파악한다. 연인을 끊은 딸을 통해 조금이라도 연민을 이끌어내볼까 하는 마음에 홋카이도까지 가고 여러번 면회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지만 그건 그저 변론을 유리하게 이끌기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 시게무라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굳건하게 가지고 있던 관점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스미 역시 자기와 다름없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자기 역시 부모때문에 상처입은 딸이 있고 자기가 조금이라도 무심해지면 그 딸 역시 미스미와 딸이나 피해자의 딸 사카에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한다. 모두가 다르다고 여기던 관점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진다.

사람을 죽였던 미스미는  죽은 카나리아를 묻어주고 남은 카나리아를 자유롭게 해주었던 면을 가지고 있고  사카에게 가지고 있는 아픔을 공감하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변하지 않은 존재야  와 사람은 변화 시킬 수 있어 라는 믿음 두가지중 어떤 것이 맞을까를 이야기하던 시게무라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  의견자체가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를 무조건 밀어붙이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은 그대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제각각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미스미를 바꿀 수 잆다고 믿음으로 사형대신 30년형을 선고했던 지난날 판사였던 시게무라의 아버지와 미스미가 강도로인한 살인이라는 것을 뒤집어 사형대신 무기징형으로 낮추려는 시게무라역시 미스미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철저히 자기 입장(법)에서 대상을 판단할 뿐이다.

 

영화는 정말 미스미가 살인을 했는지 사카에대신 죄를 뒤집어 쓴 것인지  미스미의 진실은 무엇인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고 끝을 맺는다. 어쩌면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되묻고 있는 듯했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것이 법이라는 이름뒤에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교묘하게 비웃는 미스미의 말과 첫번째 살인 그리고 두번째 살인에 이어 세번째 살인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가 뒤섞인 표정과 행동은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사람을 바라보는가? 사건을 판단하는가를 묻고 있는 듯했다.

 

시게무라는 법대로 하면 모든 일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스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미스미를 살리기 위해 사카에의 진실을  이용해야 할 때와 덮어야 할때를 판단하는 것조차 그에게 낯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있게 뻔뻔하게 매번 말을 바꾸는 미스미앞에 모든 것이 진실일것도 같고 모든 것이 거짓일것도 같은 애매함 앞에 길을 잃는다. 그가 철석같이 믿었던 법조차 그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한 인간에게는 법으로 판단하는 것 이외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법이라는 것이 만병통치약인가 하는 모호함까지 더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거리에서 머뭇거리는 시게무라를 내려다 보며  화면은 어두워진다.

십자가 형채로 남은 시신을 태운 자국과 짧은 꿈속에 눈싸움을 하고 드러누었던 미스미 시게무라 사카에의 모습을 위에서 보면 세걔의 십자가 형상이고 마지막 사거리역시 십자가 모습이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에 과연 정의라는 것만 존재할까 내가 믿는 신념은 항상 옳은 게 맞을까? 시게무라의 혼란은 아마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삼성 이재용의 판결이 났다는 기사가 떴다.

1심과 다르게 집행유예로 판결이 났다는 기사와 해맑게 배시시 웃고 있는 50넘은 이재용의 사진을 보니 영화나 현실이나... 하는 생각을 한다.

 

법대로 하자구.. 법대로 해.. 라고 호기롭게 소리치며 법이 모든 만병통치약인듯 여기던 때도 있었다. 법이란 모든 것을 정의롭고 공평하게 판단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때는 행복했다.

결국 법이라는 것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의 일이란 완벽하고 순결한 공정함 걕관성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법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이가 부족하고 편견이 가득한 주제아 정의롭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 세상에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 이동진의 평을 보면서 무릎을 치고 아하.. 이렇게 봐도 되는구나 하고 감탄했지만

내가 영화보고 나온 추운 날 어떤 판결은 또 다른 방향으로 영화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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