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과 내 입을 통해 내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내가 알고 말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것 즉 삶으로 연결시키는 것 역시 다른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많이 듣고 많이 읽어서 아는 건 제법 모였다.

 

성인식에 대한 두차례 강연을 들으면서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성폭력이란 적극적인 동의 표시가 있지 않은 한 관계는 모두 폭력적이 된다는 것도 안다.

자발적 동의에 의한 합의가 있어야 하고 동의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가능하며 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동의가 협박이나 공포 혹은 속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전한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거부하지않았다는 것 머뭇거렸다는 것 그리고 제발로 모텔을 따라가고 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이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셨다는 것과 스킨쉽을 허용했다는 것이 섹스를 해도 된다는 동의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왜 따라갔대? 왜 그렇게 마셨대? 왜 나오지 않았대?

제발로 들어갔고 제 카드로 지불했으면 이미 동의된 관계가 아니야?

리고 말하는 것 그것 역시 폭력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주장하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조건 우기는 사람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세상의 질서를 무기로 당위성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건 미투고 저건 미투가 아니라고 침을 튀어가며 열변을 토하고 선을 긋고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이 우습고 한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워버릴 수 없다. 그들이 맞다고 주장하고 그들 편에 서는 건 쉬운 일이니까

그래서 늘 배워야 하고 생각해야하고 의심해야 한다,

그게 쉽게 지치고 남의 옷을 걸친 것처럼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생각하고 공부하는 게 필요한 모양이다.

 

두권의 책 내용이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페미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되었나 어떤 과정을 거치며 변화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면서 단단해지고 있는지를 각각의 저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자꾸 의심하고 질문하고 대답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고

가족사에서 여성의 문제가 민족적 문제와 부딪치는 갈등을 겪기도 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고딕체 페미니즘의 단단하고 견고함을 거쳐 이제 말랑해지고 수용하는 페미니즘으로 가기도 하면서 모두 고민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제 완성된 페미니스트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이전 보다 덜 흔들리고 편안해졌을 뿐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역시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하게 대답을 하지 못할것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지혜는 한채윤이  것처럼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니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 딸들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고

지금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저항해야 전달되는 상식들이 그저 당연하게 통용되고 모두가 젠더의식에 예민하고 고민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는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당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고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면 누구나 접하는 보통의 경험 성적인 불쾌감(폭력 추행 희롱을 포함한)

그건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져야 함에도 누구나 겪고 있어서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지말아야 하고 무던하게 삭혀야 하는 일들 부터   퍽하면 들리는 "여자들도 군대를 가라"는 퉁박이나 가정사니까 연인관계니까 개인적인 문제라고 치부되는 친밀한 관계의 폭력문제 그리고 나아가 젠더문제들을 어쩌면 시시콜콜하지만 그래서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멍들고 부서지고 피흘리는 것만이 폭력이 아니고 누군가의 말과 존재에 주눅들고 불안하게 서성이며 그 모든 불안의 책임을 지려고 드는 강박조차 폭력의 증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순수하고 완벽한 피해자만을 구제하려는 지독한 이중성에 대한 말들은 예전 내가 처음 여성학을 알았던 20년도 훨씬 전과 다를게 없다는게  허망하기도 했다.

 

두번의 강의의 마지막에 강사가 질문을 했다

"혹시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나요?"

천만에... 너무 이해되고 공감되고 수긍한다.

다만.. 내가 이렇게 이해하고 알고 있는 것을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될 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엄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아줌마가 되고 페미니스트 할머니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금 그렇게 살고 있나.. 자꾸 돌아본다

페미니스트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긴 쉽지 않다.저마다 가지고 있는 정의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고 그게 당연하다

누구나 답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의 답만이 정답은 아니다.

책의 말미에 쓰인 말처럼 누구나 자기의 속도로 그렇게 페미니즘으로 향하면 되는 일이다.

 

책을 통해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폭력은 직접 모욕을 주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장단을 맞춰주고

그저 바라보며 키득거리고

그리고 혀를 차면서 불쾌하다는 듯이 나는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 폭력이다. 폭력을 시작하는 사람은 하나겠지만

그 폭력을 완성하는 것은 모두이다.

침묵이 폭력을 완성하기도 한다.

생각하고 의심하고 그리고 용기내어 말하고 한걸음 나아가는 것

그건 어디서나 필요하다.

 

누군가 니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뭐냐고 한다면

 내가 너보다 더 대우받아야 겟다.

내가 너만큼은 대우받아야겠다. 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하고 서로 존중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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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21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사람이라고 보는 급진적인 관점이다.” (323쪽)

저는 이 책을 쓴 저자가 말하는 페미니즘의 의미에 공감했습니다. 사람은 존중받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