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 Midnight 중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을 읽었다. 

첫번째 실린 단편 '애러비'는 뭐지 싶었고, 두번째 실린 단편 '가슴 아픈 사건'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는데, 세번째 실린 중편 '죽은 사람들'은 아주 재미있었다. 

'죽은 사람들'은 모컨 자매가 여는 연례무도회에서 벌어지는 하루 저녁의 일을 다루고 있다. 이 연례무도회에 참석한 모컨 자매의 조카 게이브리얼은 교사로서 이곳의 다른 사람들보다 지적 수준이 높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이밤 그의 유일한 걱정은 준비한 연설의 성공 여부이다. 게이브리얼은 함께 춤을 추게 된 동료 교사로부터 "친영파"라는 비난을 받고 마음이 착잡해지지만(이 대목에서 새삼 아일랜드의 폐쇄성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교사가 예상 외로 일찍 자리를 뜨고 준비한 연설이 성공하자 잔뜩 고무된다. 무도회가 끝나고 떠나기 직전 바라본 아내 그레타의 모습이 게이브리얼에게 신혼 무렵 같은 뜨거운 욕망의 불을 지피는데... 잔뜩 기대하고 호텔방에 들어선 게이브리얼은 막상 그레타는 전혀 다른 생각, 오래전 죽은 연인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마침 이 책을 읽은 것이 추석 연휴 아닌가. 

나는 그레타의 마음을 즉각 이해했다. 한마디로, 명절에 시가에 간 며느리 아닌가! 매년 가야만 하는 시고모네 파티... 지치고 힘들어 죽겠는데 주책맞게 욕정에 들뜬 눈치 없는 남편... 

아, 게이브리얼아, 이 눈새야... 


예상 외로 재미있었기 때문에 <더블린 사람들>도 읽어보고 사두고 싶어졌는데, 여러 판본 중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조언 부탁드립니다..



































 소설을 읽을 때 취향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부분이 "무거움과 가벼움의 배분 비율"이다. "비극과 희극"이라 해야 하나, "눈물과 웃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저런 걸 생각해 봤지만 역시 "무거움과 가벼움"이 제일 적확한 것 같다. 시종일관 무겁기만 한 소설도 별로고, 시종일관 가볍기만 한 소설은 더 별로고. 전체적인 줄기나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묵직하지만 농담이나 일상 대화 등을 통해 적절하게 환기를 시켜주는 소설이 좋다. 그것이 실제 세상이나 인생의 모습에도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복자에게>는 상당히 내 취향을 저격한 소설이었다. 무거움 8, 가벼움 2 정도 되려나. 그러고보면 예전에 좋아했던 박민규도 이런 이유였던 듯하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무거움 5, 가벼움 5 정도 되려나. 가벼움의 비중이 그 이상 올라가면 읽을 때는 재미나도 기억에는 오래 안 남는 것 같다. 아무튼 김금희는 <너무 한낮의 연애> 이후로 처음이었는데, 더 읽어봐야겠다 생각하고,


 "무거움과 가벼움의 배분 비율"의 최적화로 강경옥의 작품 중 나의 최애가 된 것이 바로 <노말시티>이다. 주인공 마르스가 자신이 연구소에서 실험체로 태어났다는 점, 성별이 주기적으로 바뀐다는 점,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능력으로 인해 괴물 취급을 받는 점 등으로 인해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절을 보내는 와중에, 이샤와의 로맨스는 그 캐릭터 특유의 밝음과 풋풋함으로 인해 만화 분위기 전체에 많은 영향을 준다. 비율은 무거움 7, 가벼움 3 정도 되려나? 처음에는 가벼움 쪽이 좀더 높았고 뒤로 가서는 무거움이 상당히 높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그 정도이다. 






  어디 보자, 얼마전 읽은 <피프티 피플> 또한 그 점에서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는데, 무거움 6, 가벼움 4 정도? 리뷰를 써야하지 하면서 아직 못 썼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악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지극히 품고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인 듯 하다. 사실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에 정세랑 작가가 출연한 적이 있어 책은 진작에 사 두었었는데 이제야 읽었고, 그 방송도 다시 들었다. 벽장 속 동성애자 이야기를 상당히 발랄한 어조로 풀어낸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방송에서 들으니 작가님 말투도 꽤나 발랄하다. 

 더 읽어보려고 <시선으로부터>도 사 두었다. 








EBS에서 하는 <그레이트 마인즈-위대한 수업>을 첫회에 딱 본방 보고 나서 못 보고 있다가, 월요일부터 3일 연속 본방사수에 성공했다. 주디스 버틀러의 강의를 들으니, 또 요즘 읽고 열심히 페이퍼를 쓰고 있는 <퀴어이론 산책하기>에 버틀러가 계속 나오다 보니, <퀴어이론 산책하기>를 끝낸 뒤에 버틀러 책을 한 권 쯤은 읽어보고 싶다. 어렵겠지.. <젠더트러블>은 하도 어렵다 얘길 들어서 손이 안 가고, 주디스버틀러에 대한 해설을 담은 책과 관심이 가는 책 두 권을 담아봤다. 그나마 덜 어려운 책은 이중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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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23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23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09-23 06: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죽은 사람들 깜짝 반전에 완전 놀랐어요.
저는 더블리 사람들 열린책들로 가지고 있는데 다른 판본은 안읽어봐서😅 열린책들 괜찮았어요 ^^

독서괭 2021-09-23 08:10   좋아요 3 | URL
완전 동상이몽이더라구요. 어쩜 이렇게 눈치가 없나 했어요ㅋㅋ 새파랑님은 열린책들이군요.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9-23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더블린 사람들> 예전에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으로 읽었는데 괜찮았습니다. 최근에 다시 다른 버전으로 읽고 싶어져서 열린책들 <더블린 사람들>을 사두었네요. 괭 님은 이번에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은 셈이나 마찬가지니... 문동 버전은 어떨지 추천드립니다.

독서괭 2021-09-23 10:45   좋아요 2 | URL
오 잠자냥님은 이미 재독을 준비하셨군요! 문동을 추천받기도 했고 저 중에 문동이 젤 예뻐 보여서 ㅋㅋ 아무래도 문동을 사게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막시무스 2021-09-23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거움과 가벼움의 비율로 소설의 느낌을 표현하니깐 재미있는데요!ㅎㅎ...라면맛 품평회하는 느낌도 들구요!ㅎ 저도 말씀하신 8대2 내지 7대3 정도의 레시피가 황금비율이라고 생각합니다.ㅎ....‘눈새‘가 무슨 뜻일지 1분가량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환자 해석하고 나서 커피 뿜을 뻔 했습니다.ㅎ 오늘도 즐건 하루되십시요!ㅎ


독서괭 2021-09-23 10:47   좋아요 1 | URL
라면맛 품평회 ㅋㅋㅋ 레시피라고 표현하시니 더 재밌네요. 8대2 7대3 정도 비율이면 저는 홀랑 넘어갑니다 ㅎ 물론 유머코드가 맞아야 하지만요. “눈새”를 모르셨군요. 진지하게 고민하셨다는 말씀에 저도 웃었네요 ㅋㅋ 막시무스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초딩 2021-09-24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문동 더블린 사람들 읽었었어요.
음 정말 ㅜㅜ 더블린에 내가 좀 살았어야하나. 왜 이렇게 동네 이야기가 많지 이랬었어요.
더블린 사람들 보다,
문동의 해설이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어서 좋았어요 ^^

독서괭 2021-09-25 00:07   좋아요 0 | URL
문동으로 읽으셨군요. 모르는 동네이야기 세밀하게 많이 나오면 집중이 힘들죠 ㅜㅜ 이걸 아는 사람이 읽는 거랑 모르는 내가 읽는 거랑 많이 다를 거란 생각에 맘도 아프고..
해설 좋다 하시니 꼭 읽어보겠습니다^^
 

요즘 하늘이, 특히 구름이 너무 아름다워서 <날마다 구름 한 점>이라는 책이 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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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9-22 11: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었군요ㅎㅎ저도 찜~♡

독서괭 2021-09-22 16:32   좋아요 1 | URL
구름감상협회가 있다는 게 재밌더라구요^^

새파랑 2021-09-22 1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도서관에서 빌려서 봤는데 신기한 구름사진이 많더라고요. 오늘도 하늘이 너무 맑고 구름도 예쁘네요 ^^

독서괭 2021-09-22 16:33   좋아요 2 | URL
오 빌려 보셨군요! 한동안 여기저기 소개되길래 담아두고 잊고 있었는데 요즘 구름 모습 보니 다시 생각났어요^^

초딩 2021-09-22 1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로드했는데
한강 위 구름이 넘 예뻤어요 ~

독서괭 2021-09-22 16:33   좋아요 1 | URL
반짝이는 한강과 포근한 구름의 조합은 최고입니당~!^^

수이 2021-09-22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딸아이가 좋아서 매일 보는 책인데 이렇게 마주하니 좋네요 :)

독서괭 2021-09-22 16:34   좋아요 1 | URL
와 따님이 매일 볼 정도로 좋아하는군요! 구매욕이 더욱 상승합니다😆
 


이 책 페이지에 들어가보니 페이퍼가 내 글로 도배되어 있다 ㅋㅋㅋ 누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


퀴어이론의 특징 네번째!

=>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

정체성 정치가 그동안 소수자 운동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지만, 내부의 동질성을 깨려는 사람들을 쉽게 배척하게 되는 점, "정상성과 규범성을 생산하는 틀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보다는 그 틀 안에서의 평등을 목표로 하는 방향으로 쉽게 흘러가곤" 한다(77쪽)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모든 정체성을 반대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정체성이 배타적인 경계 설정을 통해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여 만들어지는 것일 때 그 배제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심문하는 것이다."(80,81쪽)


정체성 정치에 대한 비판은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는 다르고, 정체성 전부를 초월할 수 있다는 오만과도 다르다. 정체성은 결코 단순하지도 획일적이지도 않고 곧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 히더 러브Heather Love의 말대로 정체성은 변치 않는 본질이라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는 경험이라서 중요하다.  - 80쪽


퀴어이론의 특징 다섯번째!

=> 교차성을/으로부터 사유하기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작업하는 퀴어 이론가들은 다양한 국가, 인종, 민족을 바탕으로 한 사회.문화.정치적 지형을 변수로 들여올 때 퀴어 이론에서 교과서처럼 받아들여지던 개념과 인식틀에 어떤 간섭이 일어나는지를 보이면서 퀴어 이론의 담론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다.  - 85쪽


노트에도 정리해봤다. 으으 이제 내일부터 연휴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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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7 18: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용도 정리되고 글씨도 멋진거 같아요 😄

독서괭 2021-09-17 22: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간만에 노트필기 하니 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네요☺️

붕붕툐툐 2021-09-17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눈에 쏙 들어오는 필기 뭔가요? 대단대단~👍👍

독서괭 2021-09-17 22:51   좋아요 2 | URL
쌤한테 칭찬받았다~~ 제가 이래봬도 왕년에 모범생이었습니다 ㅎㅎㅎ

scott 2021-09-19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해피 추석~


∧,,,∧
( ̳• · • ̳)
/ づ🌖

독서괭 2021-09-19 15:50   좋아요 1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예쁜 이모티콘까지 ㅎㅎ 행복한 추석 보내세요^^
 



퀴어이론의 특징(최소한의 기본적인 문제의식 내지 최소한의 공통된 접근방법) 두번째! 

=> 정상성을 해체하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담론은 선/악, 도덕/퇴폐, 공/사, 보편/특수, 남성/여성, 건강한 것/병리적인 것, 비장애/장애, 백인/유색인, 부유함/가난함 등의 수많은 이분법에 의해 지탱되고, 또 그러한 다양한 이분법적 위계를 계속 재생산한다. 따라서 '우리도 정상이다', '우리는 병리적인 존재가 아니다'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은 필연적으로, 그럼 나 대신 다른 누군가를 비정상 또는 병리적인 것으로 낙인찍고 나만 혼자 탈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 64쪽 

버틀러의 말대로 권력이 가장 성공적으로 작동할 때는 권력이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은폐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일 때다. 이성애 규범성은 명확한 명령으로 이뤄져 있기보다는 때로는 서로 모순적이긴 하지만 '이게 옳지 않나?' 싶은 감이 구성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이성애 규범성과 더 싸우기 힘든 것이다.  - 66쪽


퀴어이론의 특징(최소한의 기본적인 문제의식 내지 최소한의 공통된 접근방법) 세번째! 

=> 섹스-젠더-섹슈얼리티 전반의 지각 변동

 "기존 페미니즘과 게이 레즈비언 이론이 당연시하던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구조화하는 이분법적 이해를 교란시키"(71,72쪽)는 이러한 특징은, 예전에 읽었던 <LGBT+첫걸음>이라는 책을 떠오르게 한다. 이 책에는 내가 상상도 못했던 여러 종류의 정체성과 지향성이 등장하는데, 이분법적 구조에서는 이런 다양성이 "비정상"으로 뭉뚱그려져 추방된다. 그래서 퀴어를 이야기할 때 "무지개"나 "스펙트럼"이라는 용어를 많이 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 '퀴어'라는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느슨하고 잠정적인 호명 말고는 '우리'로 간단히 묶일 수 없는 '우리'는, 무엇에 동일시하여 나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하고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 이상은 단답형 문제로 풀 수 없게 된 이러한 질문을 마주하여, 이 책에서 보이겠지만 퀴어 이론은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욕망, 억압, 정체성, 언어와 재현, 체현과 감각, 이런 것들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효과를 낳는지를 탐구한다.  -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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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6 17: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스팩트럼 때문에 무지개라고 하는거군요. 저 처음알았어요 😅

독서괭 2021-09-16 18:39   좋아요 3 | URL
네 그렇다고 합니다. 새파랑님 계속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퀴어이론의 특징(최소한의 기본적인 문제의식 내지 최소한의 공통된 접근방법)이라고 소개되는 것 중 첫번째가 

"토대를 심문하기" 이다. 

'토대', 즉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규범들에 대해 당연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이러한 방법론의 정립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이 푸코의 계보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분석이라고 한다. 


따라서 푸코에게 계보학이란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이 타당한가를 따지는 작업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과학적이라 간주되는 제도화된 담론의 "중앙집중적 권력의 효과에 대항하는" "앎들의 봉기"이다. 푸코는 수많은 퀴어 이론가들이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제일 먼저 사용하게 된 다음과 같은 질문 방식을 공식화하였다.

(아래는 저자가 푸코의 글을 인용한 것임)

 과학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어떤 유형의 앎의 자격을 박탈하려 하는가? 당신이 '이 담론을 말하는 나는 과학적인 담론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학자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어떤 말하는 주체나 어떤 담론의 주체, 즉 어떤 경험과 앎의 주체를 소수파로 만들고 싶어하는가? 불연속적으로 떠돌아다니는 거대한 형태의 앎에서부터 그 어떤 정치적˙이론적 아방가드를 분리시켜 당신은 그것을 왕좌에 앉히고 싶어 하는가?   - 60쪽

음. 이 글을 읽으면 왠지 푸코도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데리다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보세요. 


해체적 분석은 어떤 개념을 전적으로 수용하거나 완전히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떠받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것이다. 법에서 정하는 합리적인 주체에 여성, 유색인,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이 잘 들어맞는가? 합리적인 주체는 누구의 입장과 조건을 기준으로 하는가? 가해자가 이성애자 남성인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법원이 그 행동과 발언이 합리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라고 믿어준 쪽은 가해자와 피해자 중 어느 쪽인 경우가 더 많았는가? 인권이 천부인권 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전제 아래 구축된 것이라면 과연 성소수자는 인권을 보장받고 있는가? 아니라면 성소수자는 인간이 아닌가?  - 61쪽

 이 책을 읽다보면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철학자는 바로 주디스 버틀러다. 저자가 원서를 읽은 사람이라 번역의 잘못도 종종 짚어내 준다. 오역 지적한 부분은 앞으로 페이퍼 쓰면서 정리할 예정. 그러고 보니 다음주부터 EBS 위대한수업에 주디스버틀러 강의가 방송된다! 첫날 빼고 못 들었는데 이건 K-mooc라는 데에 가입해서라도 꼭 들어봐야겠다. 강의도 어렵게 하시려나..?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아온 사람들의 운동사는 바로 이런 보편 개념들이 사실상 누구만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 논리로 그렇게 구조화된 것인지를 계속해서 비판적으로 심문하고, 그 개념들이 정말로 '보편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기존에 그 개념에 포함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개념의 한도를 확장해가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버틀러는 보편성이라는 통념이 확고한 토대나 전제가 아니라 차라리 '스캔들'이라고 말한다. 인간, 남성, 여성 같은 개념은 '보편성'의 외피를 두르고 내세워지지만 사실상 그 자체를 정의하기 위해 타자들을 필요로 하는데, 이 개념이 정말로 보편적인 것이 되려면 그 타자들 또한 그 개념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달리 말하자면 '보편성'이 그 타자를 인간 안에 포함시키겠다고 위협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캔들이라는 것이다.  - 62쪽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들이 피해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쓴 것이 느껴   진다. 자극적이고 끔찍한 내용이 많이 실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인데, 그럼에도 충분히 그 악행   에 진저리가 쳐진다. 저자들의 용기가 대단하고, 이렇게 나서준 것이 너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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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5 17: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EBS 위대한수업] 안 빼놓고 보고 있는 저 !🖐 이들의 저서들도 가능한 찾아 읽고 있습니다. 괭님의 이 리뷰 담달 이달의 당선작이 된다에 저의 손꾸락을 🤞 ^^

독서괭 2021-09-15 18:33   좋아요 4 | URL
와 스콧님 정말 놀랍습니다. 역시 AI가 아닐까… 손꾸락도 너무 쉽게 거시고.. ㅋㅋ 저에게 이미 손가락 하나 내주셨는데요 ㅋㅋ

새파랑 2021-09-15 18:42   좋아요 5 | URL
저는 퀴어이론을 잘 모르지만 이 페이퍼 담달 당선에 건다 ×2 😄

독서괭 2021-09-15 21:22   좋아요 3 | URL
헤헤 마이페이퍼는 당선수도 적고 워낙 훌륭한 페이퍼가 많아서 기대 안 하지만, 두분 말씀 감사합니당😆

청아 2021-09-15 22:06   좋아요 3 | URL
스콧님 또 손꾸락 거셨네요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9-15 22:25   좋아요 2 | URL
손꾸락을 너무 쉽게 여기시는 스콧님.. AI이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청아 2021-09-15 2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수업> 최근 방송 끝부분만 조금 봤는데도 좋았어요! 주디스 버틀러편 저도 기대됩니다~^^*♡

독서괭 2021-09-15 22:26   좋아요 2 | URL
ㅎㅎ 주디스버틀러의 이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