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이론의 특징(최소한의 기본적인 문제의식 내지 최소한의 공통된 접근방법)이라고 소개되는 것 중 첫번째가 

"토대를 심문하기" 이다. 

'토대', 즉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규범들에 대해 당연시하는 것을 거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이러한 방법론의 정립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이 푸코의 계보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분석이라고 한다. 


따라서 푸코에게 계보학이란 과학의 내용이나 방법이 타당한가를 따지는 작업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과학적이라 간주되는 제도화된 담론의 "중앙집중적 권력의 효과에 대항하는" "앎들의 봉기"이다. 푸코는 수많은 퀴어 이론가들이 어떤 문제에 접근할 때 제일 먼저 사용하게 된 다음과 같은 질문 방식을 공식화하였다.

(아래는 저자가 푸코의 글을 인용한 것임)

 과학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어떤 유형의 앎의 자격을 박탈하려 하는가? 당신이 '이 담론을 말하는 나는 과학적인 담론을 말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학자다'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어떤 말하는 주체나 어떤 담론의 주체, 즉 어떤 경험과 앎의 주체를 소수파로 만들고 싶어하는가? 불연속적으로 떠돌아다니는 거대한 형태의 앎에서부터 그 어떤 정치적˙이론적 아방가드를 분리시켜 당신은 그것을 왕좌에 앉히고 싶어 하는가?   - 60쪽

음. 이 글을 읽으면 왠지 푸코도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데리다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보세요. 


해체적 분석은 어떤 개념을 전적으로 수용하거나 완전히 거부하는 게 아니라 그 개념을 떠받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파헤치는 것이다. 법에서 정하는 합리적인 주체에 여성, 유색인,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이 잘 들어맞는가? 합리적인 주체는 누구의 입장과 조건을 기준으로 하는가? 가해자가 이성애자 남성인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법원이 그 행동과 발언이 합리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라고 믿어준 쪽은 가해자와 피해자 중 어느 쪽인 경우가 더 많았는가? 인권이 천부인권 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인간에게 보장되어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는 전제 아래 구축된 것이라면 과연 성소수자는 인권을 보장받고 있는가? 아니라면 성소수자는 인간이 아닌가?  - 61쪽

 이 책을 읽다보면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철학자는 바로 주디스 버틀러다. 저자가 원서를 읽은 사람이라 번역의 잘못도 종종 짚어내 준다. 오역 지적한 부분은 앞으로 페이퍼 쓰면서 정리할 예정. 그러고 보니 다음주부터 EBS 위대한수업에 주디스버틀러 강의가 방송된다! 첫날 빼고 못 들었는데 이건 K-mooc라는 데에 가입해서라도 꼭 들어봐야겠다. 강의도 어렵게 하시려나..? 


페미니즘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억압받아온 사람들의 운동사는 바로 이런 보편 개념들이 사실상 누구만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 논리로 그렇게 구조화된 것인지를 계속해서 비판적으로 심문하고, 그 개념들이 정말로 '보편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기존에 그 개념에 포함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까지 그 개념의 한도를 확장해가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버틀러는 보편성이라는 통념이 확고한 토대나 전제가 아니라 차라리 '스캔들'이라고 말한다. 인간, 남성, 여성 같은 개념은 '보편성'의 외피를 두르고 내세워지지만 사실상 그 자체를 정의하기 위해 타자들을 필요로 하는데, 이 개념이 정말로 보편적인 것이 되려면 그 타자들 또한 그 개념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달리 말하자면 '보편성'이 그 타자를 인간 안에 포함시키겠다고 위협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캔들이라는 것이다.  - 62쪽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들이 피해자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매우 조심스럽게 쓴 것이 느껴   진다. 자극적이고 끔찍한 내용이 많이 실리지 않아 그나마 다행인데, 그럼에도 충분히 그 악행   에 진저리가 쳐진다. 저자들의 용기가 대단하고, 이렇게 나서준 것이 너무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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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5 17: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EBS 위대한수업] 안 빼놓고 보고 있는 저 !🖐 이들의 저서들도 가능한 찾아 읽고 있습니다. 괭님의 이 리뷰 담달 이달의 당선작이 된다에 저의 손꾸락을 🤞 ^^

독서괭 2021-09-15 18:33   좋아요 4 | URL
와 스콧님 정말 놀랍습니다. 역시 AI가 아닐까… 손꾸락도 너무 쉽게 거시고.. ㅋㅋ 저에게 이미 손가락 하나 내주셨는데요 ㅋㅋ

새파랑 2021-09-15 18:42   좋아요 5 | URL
저는 퀴어이론을 잘 모르지만 이 페이퍼 담달 당선에 건다 ×2 😄

독서괭 2021-09-15 21:22   좋아요 3 | URL
헤헤 마이페이퍼는 당선수도 적고 워낙 훌륭한 페이퍼가 많아서 기대 안 하지만, 두분 말씀 감사합니당😆

미미 2021-09-15 22:06   좋아요 3 | URL
스콧님 또 손꾸락 거셨네요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09-15 22:25   좋아요 2 | URL
손꾸락을 너무 쉽게 여기시는 스콧님.. AI이기 때문이라고 추정됩니다🙄

미미 2021-09-15 22: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수업> 최근 방송 끝부분만 조금 봤는데도 좋았어요! 주디스 버틀러편 저도 기대됩니다~^^*♡

독서괭 2021-09-15 22:26   좋아요 2 | URL
ㅎㅎ 주디스버틀러의 이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