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죽고 나서야 깨닫고 되돌아보게 되는 일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귀를 꿈꿀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설령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법칙에서 나만이 자유롭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설정이므로, 회귀는 그저 반복일 따름이다. 반복되는 잘못, 반복되는 결과.
'당신도 내가 이상한가요? ...설리의 마지막 편지 '페르소나: 설리' (2023. 11. 25. 경항신문 기사)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11250800011?utm_source=urlCopy&utm_medium=social&utm_campaign=sharing
나는 설리를 잘 모르고, 설리가 악플에 시달릴 때에도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으며, 부고를 듣고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기사 속에서 설리가 아이돌 활동을 할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너는 상품"이었다고, 처음으로 제 의견을 말하고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때 모든 게 무너졌다고 말하는 대목이 참 마음 아프다.
아이돌을 비롯한 '공인'들에 대해 악플을 뱉어내는 이들은 항상 있다. 그리고 대중은 이에 동조하거나 방관한다. 끝내 그가 죽음에 이르고 나서야 모두가 깜짝 놀란다. 나는 돌 하나를 던졌을 뿐인데 죽을 줄은 몰랐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돌을 던진 사람이 자신 하나만이 아님을 알 수 있었으므로, 그건 그냥 변명일 뿐이다. 죽을 만치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왜 죽기 전까지 알지 못할까. 우리들은 죽음이라는 강한 자극이 아니면 다른 이의 고통에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해져 있는 게 아닐까?
주변에서 하도 추천하길래 오랜만에 웹툰을 보았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하지만 5화 정도 보고 나니 유료 결제를 해야 하길래 멈추고, 이미 구독료를 내고 있는 넷플에서 드라마를 찾아 보았다. 야금야금 보느라 아직 못 끝냈지만, 이 드라마 참 좋다.
특히 마음 아픈 내용은 '자살 생존자'들 이야기다. 주변 누군가의 자살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 이들을 가장 괴롭히는 건 "나 때문이 아닐까?" "내가 다르게 행동했다면 (그 사람이) 죽지 않았을까?" 하는 끝도 없고 답도 없는 물음표들이다. '설마 자살까지 할 줄은' 모른다. 부모도, 배우자도, 담당의나 간호사도 알 수 없다. 실행 직전까지 자살자 본인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살 시도 직전에 보낸 SOS를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면, 저 물음표의 반복에서 헤어나오기 어렵다.
뭘 어떻게 해야할 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좀 더 천천히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5화는 '인생에서 노란색 경고등이 깜박거릴 때'라는 소제목을 달고, 가성치매 증상을 겪는 워킹맘을 다룬다. 아이에게 뭔가를 더 해주고 싶어서 맞벌이를 하면서, 엄마들의 단톡방에 들어가 정보를 얻으려 동동거리면서, 늘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듯한 죄책감을 느끼는 워킹맘. 아이가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어느 순간 그 사실을 깜박 잊고 가해자의 엄마에게 달려가 과외 그룹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본말이 전도된 상황을 소름 돋게 보여준다. 아이가 받은 상처가 마치 나에 의해 가해진 것처럼 느꼈을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어슐러 르귄의 첫 소설 '샘레이의 목걸이'도 본말 전도가 가져온 파국을 그린다. 샘레이는 고귀한 혈족이지만 매우 가난한데. 그녀는 선대가 소유했다가 잃어버렸다고 전해지는 대단한 목걸이를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난다. 결국 목걸이를 찾아 돌아오지만, 그 사이 고향별의 시간은 훌쩍 흘러버려,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 두르할은 죽었고 딸은 다 자라 있었다.
"샘레이는 바보란다. (...) 유성처럼 빛나는 샘레이, 남편이 사랑하는 건 세상의 황금이 아니라 아내의 금빛 머리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샘레이......" (25쪽)
우리는 이야기 속 샘레이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샘레이의 목걸이'는 '명문대 합격증' 기타 비슷한 무언가로 대체되었을 뿐이 아닐까? 자신의 가치가 목걸이에 있다고 착각한 샘레이처럼, 많은 부모들- 특히 엄마들이 자신의 가치가 자식의 성공에 의해 결정된다고 착각한다. 또한 자식의 성공이 곧 자식의 행복이며, 자식의 행복은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착각한다. 이 또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1화에 나오는 오리나의 어머니가 그렇다.
어슐러 르귄에 관해 흥미로운 사실은, 그녀가 남성 주인공을 내세운 이야기를 즐겨 써냈다는 점이다. 부모의 지지와 배우자의 신뢰를 듬뿍 받으면서도, 어슐러 르귄은 여성성/모성으로부터 작가인 자신을 분리해야 했다는 것.
자신만의 야망에 휘둘리지 않는 어슐러 세대의 여성들이 빠지기 쉬운 한 가지 덫은, 아주 성공했지만 손이 많이 가는 남자와 결혼해서 성공에 대한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슐러는 찰스에게서 자신을 완전하게 해주는 재능과 관심사를 가진 남자를 발견했다.(...) 그들은 역사와 문학에 대한 애정을 고유했고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관습을 조용히 무시했다. (233-234쪽)
찰스는 하루 종일 일하느라 집에 없었지만 나는 그에게 의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찰스가 여기에 있으면 그는 정말로 온전히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육아를 혼자 떠맡는 여성들의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다. 남편이 있는 여성조차도, 그리고 심지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들은 절망하고 있다. (237쪽)
그러나 허구 속에서 남자가 된다는 것은 또한 여성만의 오롯한 자유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어슐러는 자신이 꿈꿔왔던 강력한 운명을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에게 어떻게 부여해줘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231쪽)
페미니즘의 영향에 의해 어슐러도 여성을 화자로 내세우는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건 상당히 힘겨운 도전이었던 것 같다. 본인 하나가 상당한 평등함을 누리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아이를 낳고 키우며 느끼는 모성과 주변의 모두가 겪는 불평등 속에서 모험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상상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다.
우리가 아무리 느리게 가고 싶어해도, 우리가 아무리 자식의 성공과 행복과 나를 분리하고 싶어해도,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함께 노력하는 이들이 없다면 이리저리 흔들리며 괴로움만 온전히 겪을 뿐.
10월, 11월 너무 바빴고, 집에서는 틈틈이 책을 읽고 틈틈이 드라마도 보았지만 회사에서는 글 쓸 짬을 낼 수가 없었다. 이제 좀 한숨 돌리나 싶었더니 기가 막히게 몸이 아파서, 주말 내내 '인간이 이만큼 잘 수가 있는가' 싶게 잤다.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서 미안했고... 그래, 항상 애써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젠 아이들이 나를 걱정해줄 만큼 컸다는 데 감사할 따름이다.
한 해의 마무리는, 좀 천천히 여유롭게 하실 수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