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마틴 에덴 1~2 - 전2권 - 추앙으로 시작된 사랑의 붕괴
잭 런던 지음, 오수연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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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틴 에덴, 스무살. 어릴 적부터 남다른 체력과 불굴의 의지를 가졌던 소년. 선원이 되어 배를 타면서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닌, 그 와중에도 시를 좋아하던 비범한 노동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들에게 상냥한 무심한 바람둥이. 

그런 마틴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자신감 넘치게 건들거리던 걸음걸이는 볼썽사납게 휘청대고,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문법에 맞지 않는 말들과 상스런 은어들은 수치로 돌변한다. 노동자의 세계와 부르주아의 세계가 만나는 순간. 이 세계를 딱 잘라 둘로 나눌 수는 없겠지만, 단순화하자면 그렇다. 노동자의 세계에서 주름잡을 만큼 주름잡아 보았던 마틴은 부르주아의 세계에서는 맞지 않는 셔츠에 빨갛게 긁힌 뒷목처럼 생소한 존재다. 이들의 첫 만남에서 승기를 잡는 것은 루스의 가족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들이다. 마틴은 여신같은 루스와 그녀 가정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채 얼떨떨해 한다. 루스라는 존재를 향한 열망으로 그는 불타오른다. 


본래 지적인 욕구와 문학적 감수성을 지녔던 마틴은 루스와 만나고 그녀에게서 공부를 배우면서 무섭게 성장한다. 그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헤매면서 진리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상대에게 빠진 것은 마틴만이 아니다. 첫 만남에 이미 그의 목덜미의 야성성에 빠져버린 루스... 사랑에 빠진 게 처음이라 본인도 알지 못했지만 결국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돈. 더 근본적으로는 이미 마틴은 '부르주아'를 향한 여정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여정에 발을 들였다는 것이었다. 루스는 그녀의 아버지처럼, 혹은 그녀가 존경하는 아버지의 지인들처럼 마틴도 차근차근 성공을 향한 포석을 쌓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마틴은 기다려 달라고. 자신이 진짜 훌륭한 작품을 써서 성공하리라 장담한다. 그렇게 그들의 약혼기간이 시작되는데... 



-----------이하 스포일러 주의 --------------------



붕괴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틴은 루스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계급이 가진 것을 열망했다. 또한 그의 열망은 착각이었으니, 그녀의 계급이 가진 것이 드높은 학식이라 여겼던 것이다. 만일 그가 열망한 것이 돈이나 부르주아 계급 자체였다면 그들의 결합에는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알면 알수록, 공부하면 할수록 마틴은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의식에 환멸을 느낀다. 지식을 쌓아가며 느끼는 환희가 커질수록, 그들에 대한 환멸도 커져만 간다. 그럼에도 마틴은 여전히 루스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 점에서 나는 마틴에 대한 점수를 많이 깎아 버렸다. 마틴이 아무리 자신의 견해를 밝혀도, 자신의 글을 읽어줘도, 루스는 전형적인 부르주아로서의 의견을 대변할 뿐, 그의 견해와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더더욱 동조는 하지 못한다. 그녀는 그가 환멸하는 부르주아 계급 그 자체다.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는 눈을 감고 있다. 아니, 그에게 진리의 주체는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변 여성들에 대한 마틴의 태도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가 따뜻하게 대하는 여성들은 누이들이거나 그에게 방을 내어주고 그가 아플 때 돌봐주는 마리아, 무조건적으로 그를 추앙하는 리지 (1권에서 잠깐 나왔다가 사라졌는데 2권에서 갑자기 그동안 내내 그를 생각했다며, 둘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거 좀 이해 불가였음) 등이다. 이들이 부르주아가 아니어서 일수도 있지만, 그는 애초에 여성에게는 남성에게 갖는 종류의 기대가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가 부르주아 계급을 환멸하면서도 같은 이유로 루스를 환멸하는 데 이르지 않은 것은 사랑에 눈 멀어서라기보다는 루스로부터 받고자 했던 것이 "무릎 위에 누워 머리칼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리라. 루스에게서는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표식만이 발견될 뿐이고, 누이들과 마리아, 리지로부터도 서로를 구별할 만한 특별한 개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마틴이 말을 나누고 혐오하게 된 여러 남성들이나 단 하룻밤 만났을 뿐인 논객들에게서조차 뚜렷한 자아를 느낄 수 있다는 점과 크게 구별된다.


루스가 뒤늦게 후회하며 그를 찾아왔을 때에야 마틴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가 믿어왔던 "사랑"이라는 최고의 이상의 붕괴는 그에게 마지막 타격을 입힌다. 그는 이미 "아름다움"이 대중의 입맛에 따라 재단되고 할퀴어지는 걸 목격하고 마음이 부서진 상태였다. 유명인사가 되어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도 그의 마음은 절규한다. 당신들이 외면하던 배고픈 마틴은 이미 지금 당신들이 환호하는 작품들을 완성시켰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그때의 작품과 지금의 작품은 하나 다르지 않은데, 당신들은 왜 달라졌지? 이 괴로운 질문을 붙들고 그는 무너진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마음 속 가득 이상을 품고 날아오르던 청년, 그 과정이 극히 압축되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던 만큼, 추락 또한 급격히 이루어진다. 마틴은 부르주아를 혐오했지만 사회주의를 지지하지도 않았고, 니체에 동조하는 개인주의자였다. 이와 같은 결말을 통해 잭 런던이 전하고자 한 건 무엇일까? 한 천재를 좌절시키는 우둔한 사회의 부조리인가? 개인주의가 끝내 승리할 수는 없다는 메시지일까? 작가 자신의 모습이 많이 반영된 '마틴 에덴'을 자신과 달리 사회주의자가 아니라(잭 런던은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라는 책을 쓰기도 한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개인주의자로 묘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앞서 말한 이유로 2권부터는 마틴을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가 지식을 쌓고 변화하는 모습을 신나게 따라가는 한편, 굶주리고 하루 너덧시간 밖에 자지 못하면서 작품을 써내는 걸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그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고, 추락에 마음 아파하게 된다. 그 화려한 상승과 추락 사이의 격차는 아름답고도 어지럽다. 


책 제본이 아름답고 편집도 마음에 들어서 별을 한 개 추가할까 하다가 일단 4별로 마무리. 녹색광선 책들은 앞으로 모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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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16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심한 바람둥이….

독서괭 2023-10-16 15:30   좋아요 1 | URL
바로 당신….

잠자냥 2023-10-16 15:38   좋아요 0 | URL
엥? 아닐걸?
난 주은오 생각했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0-16 15:40   좋아요 1 | URL
은오님이 어디가 무심해요 ㅋㅋ

잠자냥 2023-10-16 15:41   좋아요 1 | URL
으음...;;

은오 2023-10-16 20:33   좋아요 1 | URL
저만큼 질척이는 사람이 어딨다고...?!! 바로 당신.... 맞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0-20 09:58   좋아요 1 | URL
은오님이 주씨에요?

잠자냥 2023-10-20 10:0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그건 아니고... 은오가 제 등신대 세워놓고 밥 먹는다 뭐 이런 농담했는데 ㅋㅋㅋ
그게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의 오타쿠 ‘주오남‘이 하는 짓하고 비슷해서 제가 주은오라고 ㅋㅋㅋ

은오 2023-10-20 11:1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만두님이 아시기로는 주씨가 아닌데...

새파랑 2023-10-16 15: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틴 에덴의 잘생김

나는 변한게 없는데 주위의 반응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면 통쾌함도 있지만 배신감도 느껴지더라구요.

마틴에덴이 루스랑 맞지 않아도 계속 사랑한 이유는 부르주아 여서라기 보다는,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루스가 글을 쓰게 된 이유였기 때문이지 않을까란 생각이듭니다 ㅎㅎ

독서괭 2023-10-16 15:47   좋아요 0 | URL
마틴 에덴의 잘생김 ? ㅋㅋㅋㅋㅋㅋ 잭 런던도 잘생겼더라고요?

전 처음부터 마틴이 루스를 사랑한 이유가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요소들(하얗고 깨끗한 피부, 온화하고 조용한 성격, 지적인 화법 등) 때문이었고, 그걸 사랑이라 착각했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녀가 글 쓰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를 못했을 거라는 데는 동감입니다 ㅠㅠ

유부만두 2023-10-20 10:00   좋아요 1 | URL
잭 런던이 호남이었대요? 전 왠지 거칠고 드러운 몬난이라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서 받은 이미지 때문인가봐요. 야생, 짐승 .... 연상으로요. 마틴 에덴 리뷰 볼 때 마다 (실은 표지의 잘난 얼굴 볼 때마다) 이거 언젠가 읽겠다고 결심해요. 백번쯤 해요.

다락방 2023-10-16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너무 좋고 결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그런 결말인게 좀 아쉬워요 ㅠㅠ 육체미 뿜뿜한 남자인데 ㅠㅠ

독서괭 2023-10-16 15:48   좋아요 1 | URL
육체미 ㅋㅋㅋ 아쉽 ㅋㅋㅋ 아니 그렇게 몇시간 못자고 미친듯이 글만 쓰는데 계속 육체미 유지되는 거 좀 반칙 아닌가요? ㅋㅋㅋ
저도 결말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다락방 2023-10-16 16:10   좋아요 1 | URL
육체미 얘기하다보니 아낌 받고 싶네요.. 하아-

잠자냥 2023-10-16 16:22   좋아요 1 | URL
푸하핳하ㅏㅏㅏㅏㅏㅏㅏㅏ 락방이 댓글 어쩔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0-16 18:01   좋아요 1 | URL
살포시 어깨를 감싸주는 아낌.. 그의 전완근과 등근육이 움찔댄다...
두달 남았어요 다락방님. 아님 소설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은오 2023-10-16 2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괭님 이 리뷰 짱이네요 역시 괭님이십니다.. 오늘도 괭님에 대한 마음이 불타오르는군요..
자신감 넘게 건들거리던 걸음걸이가 휘청거리고ㅠ 수치로 돌변하고ㅠ 빨갛게 긁힌 뒷목.. 크
마틴에게 진리의 주체가 남성이었고 그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루스에 대한 감정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는 해석도 좋네요.. 전 생각 못했던 부분입니다. 좋아요 만번 누르고 가요!!!!!

독서괭 2023-10-17 13:22   좋아요 1 | URL
ㅎㅎ 은오님 좋아요 만개 감사합니다.
아무리 봐도 마틴의 지식이 확장되어 가면서 부르주아들 가차 없이 까는데 루스는 뒤로 제껴 놓는 게 거슬리더라고요.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하나? 막판에 사랑이 아니었다고 깨닫긴 하지만..
마지막 부분 쓰면서 찾아보니 잭 런던의 여성관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고 하니, 제 느낌만은 아닌가 보다 했습니다.

책읽는나무 2023-10-17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스의 입장이 조금 아쉬웠던 소설이었어요.
그리고 리지 캐릭터도 충분히 매력적이면서 마틴에게 영향력을 줬을 법한 역할인데 가볍게 처리했던 것도 아쉬웠었구요. 작가가 남자라서 그런가보다 넘겼습니다.
오로지 마틴이 하고자 하는 행동...일 안하고 소설을 쓰는 행위가 진린데 루스는 그걸 이해못하고 옆에서 바가지만 긁는 것 같은 묘사가 좀 싫었지만 또 마틴을 한 인간으로 봤을 때 천재적 재능을 타고 났음에도 계급의 장벽에 부딪쳐 쓰라린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점은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 사람들 많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하루키 작가도 요 마틴 에덴 소설 많이 좋아했다더군요.^^
괭 님의 리뷰는 속 시원한 사이다 맛이 있어요.ㅋㅋㅋ

독서괭 2023-10-17 13:27   좋아요 1 | URL
옆에서 바가지만 긁는 ㅋㅋㅋㅋㅋ 그러게요. 전에 다락방님도 리뷰에 내가 루스였더라도 기다려 주기 힘들었을 것 같다고 쓰셨는데, 저도 공감합니다. 책나무님 지적대로 여성 캐릭터 가볍게 처리해 버리는 거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옛날 남자구나 싶었어요. 마틴에 완전히 이입하면 끝까지 좋았을 테지만,, ㅠㅠ
하루키.. 그렇군요. 하루키는 제가 딱히 좋아하질 않아서 ㅋㅋ
사이다맛 칭찬 감사합니다 ㅋㅋ 앞으로도 시원한 리뷰를 약속드리며... (??)

단발머리 2023-10-31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그때의 작품과 지금의 작품은 하나 다르지 않은데, 당신들은 왜 달라졌지?

저는 이 질문이 가장 무거웠고 좋았으면서도 싫기도 했구요. 마틴이 루스에 대해 가졌던 기대에 대한 부분, 독서괭님의 해석에 수긍이 되어 혼자 끄덕끄덕 하고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눈다는 일이 이렇게나 즐겁네요.
다른 책도 많이 좀 읽으시고 많이 좀 써주세요!!

독서괭 2023-11-01 13:10   좋아요 0 | URL
네, 단발님. 저 질문을 되뇌이는 마틴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짠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고요.. 정작 자기도 루스의 배경이랄까 자라난 환경 때문에 사랑하게 된 거면서 말이예요.
끄덕끄덕 해주시니 신납니다 ㅎㅎ
저도 많이 좀 읽고 싶어용.. 많이 쓰지 못하는 건 게을러서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