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라
토니 모리슨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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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라.... 이 인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소설의 배경은 대체로 1920~1930년대 조그만 흑인 마을이지만, 2020년대 대한민국의 독자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인물 때문이리라. '술라'보다는 '넬'처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넬'의 존재는 '술라'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대척점이자 통로라고 할 수 있겠다. 소녀 시절 둘도 없는 단짝이지만 자라온 환경도 성격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은 결국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이런 설정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넬'의 어머니 헐리 라이트는 창녀인 어머니로부터 멀리 도망쳐 넬을 키우고, 넬에게서 반짝이는 어떤 것이라도 발견될라치면 그걸 깊숙이 묻어버리는 사람이었다. 증조할머니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늘 당당하고 우아했던 어머니가 백인 앞에서 "조금 전에 걷어차여 내쫓겼던 거리의 개가 걷어차인 바로 그 푸줏간 문설주에서 금세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38쪽) 미소짓는 모습을 보고, 유색인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도로변에 쭈그려앉아 소변을 보는 일을 겪으면서, 넬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하기 시작하지만 결국 보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반면, '술라'는 늘 사람이 오가고 구조가 바뀌는, 혼란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라났다. 할머니 에바는 세 아이의 목숨을 자기 한쪽 다리와 맞바꾸었고, 그렇게 살아남은 첫딸 해나는 일찍 남편을 잃은 후 술라와 함께 에바의 집에서 함께 산다. 술라의 어머니 해나는 늘 남의 남자와 정사를 나누는 사람, 술라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술라는 자기 아이를 불태우는 사랑을 보았고, 놀아주던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게 해도 숨길 수 있음을 알았으며, 어머니가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술라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어떤 자아도 확립하지 못한 상태로 보텀을 떠난다. 그리고 10년 만에 돌아온다. 


'술라'가 돌아와 마을에서 보인 행보는 전복적이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고, 한 남자와 한 번씩만 자며, 할머니를 부양하지 않는다. 그 대가로서 술라는 마녀화 되는데, 술라를 신비한 악마적 존재로 대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달리 오히려 그녀는 아이 같고, 물 같다. "그녀는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을 탐색하고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리면서, 남의 쾌락이 자신을 즐겁게 해주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기쁘게 해줄 의무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고통을 주는 것만큼이나 기꺼이 고통을 느끼고, 쾌락을 주는 것과 동등하게 쾌락을 느끼려 한 그녀의 삶은 실험적이었다.(...) 한마디로 자아라는 게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자신을 입증해야 할, 자기 자신으로 죽 남아 있어야 할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171,172쪽) 

술라가 결국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걸 처음 느끼게 되었을 때, 그 대상은 떠나버렸다. 그때야 비로소 술라는 "난 모든 노래를 다 불러봤어. 다 불러봤다고. 존재하는 모든 노래를 다 불러봤어."(197쪽)라며, 자기 자신을 찾은 만족감을 느낀 것이 아닐까? 남들처럼 살면서 술라를 이해하길 거부한 넬에게, 술라는 이렇게 말한다. 내 외로움도 내 것이라고.


"정말? 그 증거로 보여줄 수 있는 게 뭔데?"

"보여줘? 누구한테? 얘, 내 마음은 내가 갖고 있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도. 무슨 말이냐면, 나는 내 거야."

"외롭잖아, 그렇지 않니?"

"그렇지. 하지만 내 외로움도 내 것이야. 지금 네 외로움은 누군가 딴사람 거고. 딴사람이 만들어서 너에게 건네준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니? 중고 외로움이지."  (205쪽) 



-------------------이하 스포일러 주의-------------------


<술라>는 그 전체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보텀bottom'이라는 이름의 흑인 마을이 실은 언덕배기에 자리하였다는 모순 - 백인들이 거주하는 골짜기 메달리온을 바람으로부터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바로 그 언덕배기에 위치한 흑인들의 참담한 삶이 있고, 거기서 모든 이야기는 진행된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기 위해 '전국자살일'을 만든다는 모순, 자기 아이를 태워 죽인 어머니가 또 다른 자기 아이를 불에서 구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렸다는 모순, 한 여자를 마녀로 만듦으로써 다른 모든 마을 사람들이 애정으로 뭉쳤다는 모순. 


한편 이 소설 속 여성들의 특징은 대단히 강인하다는 것인데, 대체로 남성들이 처자식을 두고 떠나버리거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술과 약에 취하는 것과 대비된다. 특히 강렬했던 인물은 술라의 할머니 에바. 그녀는 남편 보이보이가 떠나버린 후 "1달러 65센트와 달걀 다섯 개, 사탕무 세 개"를 가지고 어린 세 아이를 건사하며 살아내야 했다. 한겨울 밤중에 배가 아파 우는 막내 플럼을 안고 변소로 가서 마지막 남은 라드(고기기름)를 이용해 손가락으로 변을 빼내 준 날,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아이들을 이웃에 맡긴 채 떠난다. 그녀는 세 아이의 목숨을 자기 한쪽 다리와 바꾸었고, 그렇게 살린 플럼을 제 손으로 떠나보냈다. 하,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이 조여들고 목메여서 잠시 읽기를 중단해야 했다..ㅠㅠ 



메달리언 주민 누구라도 가장 더운 날로 기억할 오늘, 너무 더워서 파리도 잠을 자고 고양이도 털을 깃처럼 펼치고 있는 날, 너무 더워서 임신한 부인네들이 나무에 기대 울고 있는 날, 여자들은 석 달 묵은 상처를 떠올리며 애인의 음식에 유리 가루를 넣고 남자들은 음식을 보고 그속에 유리가 들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면서도 너무 더워서 먹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 그것을 먹었을 만큼 더운 날, 이렇게 더운 때 중에서도 가장 더운 날에도 에바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변소의 악취에 덜덜 떨었다.  (106쪽)


어쩌면 토니 모리슨은 이렇게 처참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문장들에 담을 수 있을까? 짧은 분량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소설. 마법적이고 우화적인 요소가 있으면서도 리얼리티를 잃지 않는 소설. 몰아서는 결코 읽을 수 없겠으나, 계속하여 읽으리라 다짐하게 만드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


* ㅈㅈㄴ님 리뷰를 찾아보니 내가 거기에다 "어서 책 읽고 리뷰 마저 읽으러 올게요"라고 썼던 게 2년 전이다 ㅋㅋ  


11월에 그가 떠났을 때 에바에게 남은 것은 1달러 65센트와 달걀 다섯개, 사탕무 세걔였다. 무슨 감정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그녀가 필요했고 그녀에게는 돈이 필요했고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장 세 아이들을 먹여 살릴 일이 너무나 절박해서, 분노할 시간과 에너지가 둘다 생길 때까지 이 년 동안은 자신의 분노를 미뤄야 했다. - P53

그를 오랫동안 깊이 증오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그녀의 마음은 즐거운 기대감으로 가득찼다. 누군가와 곧 사랑에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행복한 조짐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때처럼. 보이보이를 증오하면서 에바는 그 증오로 살아나갈 수 있었다. 증오로 자신을 정의하고 강하게 만들로 일상에서 상처입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은 한, 혹은 그럴 필요가 있는 한, 그 증오는 안전했고 흥분을 주었고 지속적이었다. - P59

악의 목적은 그것을 견디는 것이며,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홍수, 백인들, 홍역, 기근과 무지를 견디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분노는 잘 알았지만 절망은 몰랐다. 자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죄인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그들이 할 법한 일이 아니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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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9-18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년 전 약속을 지키신 건가요?ㅎㅎ 술라 저도 읽어야 하는데...ㅠㅠ 스포될까봐 저도 리뷰는 나중에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독서괭 2023-09-19 07:17   좋아요 0 | URL
2년이 그냥 후딱 지나가버렸네요^^;; 화가님 술라 갖고 계신가요? 금방 읽으니 주말에 한번 펼쳐보셔요^^

책읽는나무 2023-09-18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지킨다면 지킨다!!ㅋㅋ
전 이 책을 읽었다고 여겼는데 음...안 읽었나 봅니다. 전혀 색다른 내용!!

독서괭 2023-09-19 07:17   좋아요 1 | URL
몇년이 지나든 지킨다면 지킨다 ㅋㅋㅋ 저도 리뷰 안 써두면 좀 지나면 새롭더라고요?ㅋㅋ 리뷰를 써야 합니다!

은하수 2023-09-18 2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년만에 드뎌 해내셨네요~~~
저도 이 책 읽은 듯한데 안 읽었고 이렇게 다른 이웃님들 리뷰를 읽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독서괭 2023-09-19 07:2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여러 리뷰를 읽다보면 읽은 듯한 느낌이 들죠. 하지만 토니 모리슨은 직접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잠자냥 2023-09-18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했어요. 괭 2년! ㅋㅋㅋ

독서괭 2023-09-19 07:22   좋아요 1 | URL
큭큭큭 장기 프로젝트…. 😂😂😂

다락방 2023-09-18 22: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모두 ㅈㅈㄴ 님 리뷰에서 만나는건가요..

아 그런데 이 책 읽기 너무 힘들겠네요. 너무 힘들겠어요. ㅠㅠ

잠자냥 2023-09-18 23:08   좋아요 2 | URL
토니 모리슨은 재미(?)있습니다.

독서괭 2023-09-19 07:23   좋아요 2 | URL
<빌러비드>만큼 힘들진 않아요 다락방님. 저는 좋기도 빌러비드가 더 좋았지만. 재밌는데, 무심하게 툭툭 던져놓는 처참함이… 쩝… ㅜㅜ

페넬로페 2023-09-19 0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댓글로 ˝읽겠습니다, 읽어야 겠어요˝, 라고 말한 거 세어보면 엄청날 것 같아요.
ㅎㅎ
술라는 읽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 다시 읽어야겠어요~^

독서괭 2023-09-19 13:06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저도 읽고싶다, 읽겠다고 해놓고 못 지킨 일이 너무 많아서.. 요즘은 그 말은 잘 안 합니다 ㅋㅋ
술라 기억 안나시면, 짧으니 재독 고고!!

새파랑 2023-09-19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토니 모르슨 작품이 좀 비참한 이야기가 많군요. 강인해보이기도 하지만 ㅜㅜ 술라가 사람 이름이었군요~!! ㅋ

독서괭님 리얼 토니 모리슨 찐팬이십니다~!!

독서괭 2023-09-19 13:07   좋아요 1 | URL
네 새파랑님. 술라 등장까지 시간이 좀 걸려서 뭘까, 했네요^^
토니 모리슨 찐팬 되려면 멀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즈>랑 <보이지 않는 잉크>도 언젠가 읽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