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들어 너무 바빴다. 시간에 쫓겨 일을 하다가 허둥지둥 퇴근해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다 재워놓고 다시 일을 했다. 어떤 이들은 매일 하루 대여섯시간만 자고도 멀쩡하다는데,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한가... 내 체력은 왜 이모냥인가에 대해 늘 그랬던대로 또 한번씩 슬퍼하곤 했다. 주말에는 내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데도, 힘들어 잠시 누워 있던 내게 둘째는 "엄마가 안 놀아준다"며 울부짖었다(두 시간 동안 역할놀이를 한 후였다). 아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양치, 목욕 등)을 시키다가 "엄마 미워!" 소리를 듣고 힘이 쭉 빠졌다. 또 그러고서는 둘째는 목욕한다고 발가벗고 와서 배를 두드리며 "엄마가 제일 좋아" 노래를 불렀다.
일하는 엄마가 아이를 맡겨야 할 때, 아이를 돌봐줄 기관이나 사람을 알아보고 연락하고 면접하고 찾아가 살펴보는 일은 모두 엄마의 몫이다. 남편이 일을 하고 돈을 번다는 이유로 면제 받는 모든 가정의 일에서 여자는 늘 예외다. 여자가 일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육아도 살림도, 세상이 여성에게 일차 책임을 묻는 일들은 절박한 순간마다 언제나 친정 엄마를 비롯한 다른 여성들이 돕는다.
교수 같은 괜찮은 직업을 가진 중산층 여성들이 가사노동에 곤란을 토로하면, 여건이 나은 탁아시설을 이용한다는 이유로 혹은 시집살이라는 권력 관계에서 조금 유리하다는 이유로 상황이 더 나쁜 여성들을 거론하며 배부른 소리 한다는 식으로 힐난하는 지식인 남성을 숱하게 보았다. 어떤 경우에도 조금도 그 책임을 나눠 지지 않으면서 세상 중립적인 판관이라는 듯 그런 말을 한다(새삼 분노가 솟구친다!) - 190, 191쪽 / 281쪽 (전자책 기준)
<나의 가련한 지배자>를 읽다보면, 저자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많은 차이들이 일순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일을 놓고 싶지 않고 경제적 자립을 원하는 여성이 양육의 책임을 지게 되면 얼마나 큰 어려움에 부딪히는지 절절하게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어떻게든 일을 계속하고 싶었기에 엄마에게 아이들을 맡긴다. 그러나 애들은 저절로 크는 것이라는 옛날식 육아관을 가지고 있는 엄마는 아이들이 하교할 시간에도 집을 종종 비운다. 어느날 "할머니가 맨날 집에 없는데 똥이 마려워서 집 앞에다 똥을 쌌다"는 아이의 말을 듣는다면, 그 마음이 어떨까?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니 살림은 엉망이고 애들은 꼬질꼬질하다 -> 일을 해서 버는 수입과 아이들 돌보는 도우미 고용비용을, 일을 해서 내가 얻는 것과 일을 포기해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저울질한다 ->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 이런 일은 대체로 수입이 적고 경력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다시 저울질한다 -> 일을 포기한다
이런 과정에서 공동양육자인 아빠는 어디 있는가? 아내가 일과 가정 사이에서 분열되는 자아를 안고 찢어지는 마음으로 일과 아이를 저울질하고 있을 때, 남편은 왜 똑같이 저울질하지 않는가? 왜 저울질 해야 하는 사람은 거의 늘 여성인가? 간혹 생계의 주책임자가 여성이 되었을 때, 왜 그 끝은 비극으로 묘사되는가?
<엄마에 대하여> 중 차현지 작가의 '핑거 세이프티'는, 작가의 말을 보면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 소설인 듯하다. 소설 속 아빠는 이것저것 사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사업수완이 좋은 엄마가 생계를 책임진다. 늘 바쁘고 피곤한 엄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먹을 음식을 해놓지만 정서적 돌봄은 미약하다. 아빠는 술을 마시고 잠적하기 일쑤다. '나'는 늘 엄마 편이었지만 엄마에게 그 마음은 잘 전달되지 않았고, 어느날 아빠가 할머니에게 "아들 낳아줄 여자 찾죠 뭐. 어차피 딸년들 뿐인데"라는 말을 하는 걸 들은 '나'는 그 말을 듣게한 엄마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 집에서 욕 들을 만한" 유일한 사람이었던 아빠를 집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그 후에는 "이 집에서 잘못한" 유일한 사람인 엄마에게 화살이 돌아간다. 성인이 되고서도 '나'의 안에는 "죽여도 죽여도 영원히 죽지 않는" 12살의 내가 있어 엄마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폭력을, 방치를, 억압을 행사한 아빠보다 그 상황에서 그 나름대로 아이를 키운 엄마는 오히려 더 큰 원망의 대상이 되기 쉽다. <나의 가련한 지배자>의 저자도 그런 아빠를 두었다.
아빠는 어떤 감정의 이입이나 교류 같은 게 불가능한 관념화된 악으로만 존재했기 때문에 내게 '아버지'는 이상적이든 그 반대로든 책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나 있었다. 아버지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역시 기본 모델이 있고 거기에서 좀 모자라다 싶은 것과 강렬한 바람 같은 것을이 엮여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나처럼 거의 투명한, 존재감 없는 아빠를 가진 사람에게는 매체 속 아버지 역시 막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 <나의 가련한 지배자> 135쪽/281쪽
저자는 <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라는 책에서 아래 구절을 인용한다(143쪽, 144쪽/281쪽).
어떤 경우든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를 범인으로 몰기가 훨씬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전문가에게 단죄받기도 전에 이미 스스로 머리를 떨구고 목을 내밀고 있거든요. 그녀는 우리의 비난에 반박 한마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진해서 스스로의 죄를 열거하겠지요. 이 정도로 안성맞춤인 범인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182쪽 인용
저자가 이 부분에서 언급하는 <케빈에 대하여>와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둘다 '괴물' 아이를 둔 엄마의 고백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내가 함께 읽은 책, 도리스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추가하고 싶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실제 총기난사사건 가해자의 엄마가 쓴 논픽션이다. 이 논픽션을 소설화 한 것처럼 보이는 <케빈에 대하여>를 재미있게 읽은 나지만, <나는 가해자의~>는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가지고만 있다. <케빈>과 <다섯째아이>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좋지 않은 의미로 남달랐던 반면, <나는 가해자의~> 속 현실의 아이는 저자 수 클리볼드에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클리볼드의 "내가 내 아이를 이렇게 몰랐다니"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의문과 회한은 끝없이 괴롭고 정답을 알 수 없는, 시지프스의 돌이 된다.
이때 아빠들은 순진하고 무책임한 '가장'으로서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있다. 직접적으로 아이를 학대한 증거가 없는 이상 아이에게 생긴 문제는 엄마의 책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빠들은 더 순수하게 슬퍼하고 괴로워할 수 있다. 아이에게 그만큼 영향을 미칠만한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어제 읽은 <긴긴밤>은 양육과 성장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가족을 잃고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은 전쟁을 기화로 동물원에서 탈출한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펭귄 '치쿠'는 같은 수컷인 '윔보'와 파트너가 되어 누구 알인지 모를 펭귄알을 소중히 지켜 왔었는데, 윔보가 죽어 혼자 알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가족을 죽인 인간들에게 복수하려던 노든은 차마 치쿠와 알을 내버려둘 수 없어 함께 바다를 찾아 떠돈다. 치쿠가 죽고 알에서 태어난 '나'에게, 노든은 아빠이고, 가족이고, 모든 것이 된다. 하지만 코뿔소와 펭귄에게는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국 '나'는 노든과 헤어져 자기의 삶을 찾아간다.
이 아빠들은 양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먹을 것, 따뜻한 잠자리, 정서적 보살핌까지.
나는 이 이야기를 아이를 대하는 양육자의 자세에 대한 우화로 읽었다.
우리의 아이를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나의 알로 여긴다면, 우리는 아이와 좀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나의 자유가 초원에 있듯이, 너의 자유는 바다에 있음을 인정한다면. 나는 코뿔소로서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었지만 그게 펭귄인 너에게는 전부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엄마는 나에게 "자식 겉 낳지, 속 낳는 것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 말처럼 모든 엄마는 자신이 낳아 자기 방식으로 키운 자식을 완전히 낯선 타인으로 만나는 순간을 맞닥뜨린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 <나의 가련한 지배자> 144쪽/ 2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