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이매지 > foodbox의 통가죽 공예 - 손목시계

누구나 한번쯤 나만의 손목시계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셨을겁니다.
이제 직접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시계로 개성을 표현해 보세요~
본인이 사용하시기에 또는 선물하시기에도 더없이 좋은 소품입니다.

10X10 온라인 아트경매 참여
현대백화점 주최 그린아트마켓 이벤트행사 가죽 체험회 진행
김학순 가죽공방 주최 가죽공예 체험회 보조강사
홍대 프리마켓,희망시장, 참여
2003년10월 디자이너스 플레닛 주최 'MY SHADE'전 참여
2003년11월 (사)여성문화예술기획 주최 여성공간축제 부엌프로젝트 '세 개의 고무장갑'전 참여
2003년11월 프리마켓 주최 "보물찾기"전 참여
2004년 8월 2004 서울프린지페스티벌 미술 전시부문 "충돌하기"전 참여
2004년 9월 희망갤러리 주최 "그리고 책展" 참여
2004년11월 홍익대 대학원 주최 "프레파라트_어머니 지구"전 참여
현재 www.foodbox.net 운영 중

손목시계 만들기





간단한 툴링 작업으로 무늬를 넣으실 수 있으며 본인의 그림을 넣으실수도 있습니다.


이니셜 작업으로 본인만의 특별한 시계를 소유하세요.


시계의 시계줄만 바꾸고 싶으시다면 본인의 시계를 가지고 오시기 바랍니다.


10년을 함께 하실 수 있는 통가죽 공예 입니다.


*** 본인이 착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께 선물을 하실 용도라면
직접 착용하실 분의 팔목 사이즈를 측정해오셔야 합니다.
선물을 하실 거라면 꼭! 미리 팔목을 잡아보는 센스!!!

준비물 :
앞치마와 면장갑 (염료로 더러워지니 좋은 건 필요없습니다.)
중간 크기의 붓 (집에 있는 거 아무거나 가져오세요.)
<현장 구매시 붓(10호) : 1,150원, 면장갑(한 짝) : 150원>
나머지 도구는 강사 선생님에게 있는 것을 함께 쓰시면 됩니다.

오시는 순서대로 시계모양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늦게 오시면 원하는 모양으로 하실 수 없으니 늦지 마세요~
(시계모양은 사정에 따라 약간씩 바뀔 수 있습니다.)

(재료비는 강좌 당일, 담당 선생님께 직접 드리시면 됩니다)
통가죽 6,000원 (부자재포함), 염료 1,000원, 시계 12,000원 (total : 19,000원) (시계를 가져오셨을 때 total : 7,000원)

 

출처: 텐바이텐 아카데미(http://www.10x10.co.kr/academy/academy_prd.asp?idx=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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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돌이 > [퍼온글]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국립박물관(1)



여기는 청량리역입니다. 용산 국립 중앙 박물관을 가기 위해서 국철을 타고 이촌역을 향하기로 했습니다. 일요일 침부터 박물관을 향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많이 설레였어요.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어 조금 피곤한 길이 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예상대로 인파가 굉장히 몰렸더래요.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만큼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박물관을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예뻐보이던지, 저도 어릴적에 한번쯤은 저런 기회를 가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부러워 마음까지 들었답니다. 그래서 광고를 하려고 합니다!! 필요하신 분들께 유익한 정보가 되길 바라면서 긴 글을 작정하고 써보렵니다. ^-^단, 올리는 사진은 제 핸드폰으로 찍은 것으로 상태가 많이 안좋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고, 제가 역사적인 지식이 짧은 관계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글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개관시간
평일: 오전 9시- 오후 6시
주말: 휴일: 오전 9시- 오후 7시
휴관일: 매년 1월 1일,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 관람요금
2005년 12월 말까지 무료입장
* 오시는 길
버스: 9502(빨강),0014(초록),0211(초록)
지하철: 4호선,1호선- 이촌역 2번 출구

 

 



이것은 입구에서 나눠주는 안내자료를 사진으로 찍은 것입니다. 잘 안보이죠? 죄송해요.. ㅠ_ㅠ 전시관은 총 6개의 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그림은 고고관의 위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총6개 중 제가 오늘 다녀온 곳은 고고관 이었습니다.

고고관은 민족문화의 기원관 시대별 전개과정에 따른 특징적인 유물을 토대로 독창적인 우리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간입니다. 구석기시대부터 발해까지의 선사 및 고대 유물이 망라되어 있으며, 총 10개의 전시실에 4,5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원삼국,고구려,백제,가야,신라,통일신라,발해) - 철처: 안내자료

총 10개의 전시실을 관람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학창시절에 무조건 역사적인 사실을 암기해야 하는 교육을 받아왔던터라 '역사'라는 단어만 들으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뭔가를 외워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올 초에 경상도 일주를 하면서 경주를 여행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박물관을 다녀오면서 예전에 느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꼈고, 그것이 앞으로 제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시간을 내서 역사공부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부모님과 함께 박물관에 다녀오는 사소한 일상이 아이들에게도 큰 동기부여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 인상 깊었던 유물과 그것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정리 해보았습니다.


참, 고고관 입구의 벽면에 그려져 있었던 지도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색감이 너무 좋죠? ^-^



 

-신석기: 빗살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는 그릇 생김새와 무늬에 따라 크게 중서부 지역, 남부 지역, 동부 지역, 서북 지역 등 네개의 지역군으로 나눌 수 있다. 각 지역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늬의 종류와 장식 방법에 차이를 보인다. 빗살무늬 토기는 기본적으로 지역성이 두드러지지만 공통적으로 무늬가 점차 간략해지고, 무늬의 면적이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빗살무늬 토기는 기원전 1000년 무렵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새로운 형식의 민무늬 토기로 대체되었다. ( 적어오느라 고생한 벽면의 글입니다. -_-;)

 



아니,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빗살무늬 토기의 모양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왜 알려주지 않았던가?
더 많은 자료와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나의 잘못이지만, 저는 지금까지 아래의 빗살무늬 토기만 생각했습니다. =_=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 고아시아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토기의 연대가 더 빠르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정보를 찾아본 결과 우리나라에서 시베리아 지역으로 역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이렇게 기쁠수가! ^-^

 



 

-청동기: 민무늬 토기

청동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시대에 유행하던 빗살무늬토기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점차 소멸하고 대신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의 무늬없는 토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민무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에 비해 대체로 태토가 정선되지 못하고 기벽이 두터우며, 노천에서 낮은 온도로 구워졌기 때문에 흔히 적갈색을 띠고 있다. 기형의 측면에서 볼 때, 빗살무늬토기는 뾰쪽바닥과 둥근바닥이 많았지만 민무늬토기는 대부분이 납작바닥이라는 점이 큰 특색이고, 아울러 그릇에 목이 달린 토기가 많아진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네이버에서 검색)

 



민무늬 토기의 모양이 이렇게 다양하다는 것에 세삼 놀랐습니다. 저 나름대로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공부 열심히 할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민무늬 토기의 모양이 이렇게 여러가지 인줄은 몰랐습니다. -_-; 
위의 그림을 보았을 때, 아래 사진의 모양이 전부 인줄 알았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청동기: 거푸집

 



한국에서 발견된 거푸집으로서 가장 알려진 것은 기원전 2~3세기에 칼·방울·도끼·거울·낚시바늘 등의 청동기 제작에 사용된 것들로서, 그 중 전남 영암에서 발견된 것은 이 시기에 고도로 정교한 청동기가 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청동기를 제작한 거푸집 중에는 한 번에 여러 개의 도구를 제작할 수 있도록 여러 도구의 형태를 하나의 거푸집에 새긴 것들도 있다.

거푸집의 제작은 금속기를 대량으로 주조하였음을 뜻하며, 그러한 금속기의 대량생산은 사회경제적으로 생산력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오기 때문에 사회경제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발전이 있었음을 뜻한다. 또한 거푸집 하나에서 동일한 금속제품이 여러 개 제작되기 때문에, 금속기 제작의 중심지와 금속기의 분포양상을 통해 사회경제적 조직구조를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거푸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항상 궁금해하던 유리의 기원이 거푸집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리를 제작하기 시작한 시점은 기원전 2세기 초로 처음에는 봉에 찍거나 감아서 유리를 제작했으나 원삼국 시대 이후에는 주로 거푸집을 이용하여 유리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전남 해남에서 발견된 유리 유물을 눈으로 확인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유리를 이용하여 제작한 목걸이 입니다.  너무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_+ 와우!

 



 

잠시!!!!



이 사진은 박물관을 관람하다가 잠시 지쳐서 앉아 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머리가 왕따시 크게 나와서 마음에 안드는 사진이지만. 으흐흐흐 (에어리언 같지 않나요? ㅠ_ㅠ)

지금 제 표정이 이 사진의 표정과 사뭇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벌써 새벽 1시를 향해가네요. 저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교재모임에 참석해야 합니다.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
다음에는 삼국시대와 그 후 시대의 유물을 공부하려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내일이 벌써 또 월요일이네요. 행복하게 한주를 시작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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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세계 각국 전통의상들

과테말라
보색이 대비돼 더 화려하게 느껴지는 과테말라 전통의상. 중남미 전통의상 특유의 화사한 분위기와 소품으로 머리에 얹은 꽃바구니가 돋보인다. 모델은 주한과테말라대사 부인인 아이리스 드 살자 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강렬한 원색과 현대적인 문양이 특징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전통의상. 남아공에는 지역별로 각기 다른 분위기의 민속의상이 있다고 한다. 이 의상은 검정색과 흰색, 빨강색이 대비돼 있고, 기하학적 문양으로 꾸며져 있다. 모델은 주한남아공대사 부인인 위드자자 쿠브헤카 여사.
레바논
결혼식 피로연 등 특별한 의식이 있는 날에 입는 레바논 전통의상. 파란 고깔모자가 동화 속 등장인물의 의상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낸다. 일반적으로 봄, 여름에만 입는다.
루마니아
루마니아 전통의상. 일반적으로 루마니아의 의상들은 동일한 기본형식을 바탕으로 하고, 지역에 따라 색상, 자수 등 디테일에 변화를 줘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의복의 많은 부분을 자수로 장식하며 기하학적인 무늬가 특징이다. 소재는 마, 삼(대마), 울, 모피 등이 주로 이용되며 베일과 자수에는 실크가 사용된다. 주로 밝고 경쾌한 색상으로 대비가 강한 배색을 즐기며 기본색상은 빨강, 검정, 파랑, 노랑, 진한 밤색, 녹색계통, 자색계통. 지역에 따라 농업지역에서는 더 밝은 색, 산악지대에서는 더 어두운 색상과 흑백의 대비가 많다. 모델은 주한루마니아대사 부인인 마리아 알터니 여사.
멕시코
멕시코 전통의상은 스페인 지배 뒤 유럽 의복의 영향을 받았다. 멕시코 의상은 스커트 안에 여러 겹의 페티코트를 착용해 풍성해 보이도록 한 것이 특징. 색상과 길이도 매우 다양하다. 검정색 플레어스커트는 수평으로 펼쳐지면 매우 화려하다. 밝은 색상의 실크실로 꽃무늬 수가 놓여 있어 검정색이지만 화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스페인1
스페인 전통의상. 안달루시아의 플라멩코 드레스다. 안달루시아는 스페인의 남쪽 지역으로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았던 곳. 플라멩코 드레스는 다양한 무늬와 화려한 색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댄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입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의상이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안나 조다르가 딸과 함께 플라멩코를 추고 있다.
스페인2
스페인 전통의상. 안달루시아의 플라멩코 드레스다. 안달루시아는 스페인의 남쪽 지역으로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았던 곳. 플라멩코 드레스는 다양한 무늬와 화려한 색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댄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즐겨 입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의상이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안나 조다르가 딸과 함께 플라멩코를 추고 있다.
온두라스
짙은 주황색 상의와 푸른색 하의가 대비를 이루는 온두라스 전통의상. 주황색 꽃 머리 장식까지 있어 의상의 경쾌한 분위기가 한껏 살아난다. 모델은 주한온두라스대사 부인인 글라디스 온디나 여사
이스라엘
이스라엘에는 별도의 전통의상이 없다. 모델인 주한이스라엘대사 부인 나오미 마노르 여사는 이스라엘 국기 색과 같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섰다.
이탈리아
패션의 나라 이탈리아의 전통의상. 모델인 주한이탈리아대사 부인 미리암 데 리유 여사가 입고 무대에 오른 이 옷은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 말렐라 페레라가 시칠리아 지방의 전통의상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만든 것이다.
카타르
초록색과 금빛이 화려하게 어우러진 카타르 전통의상. 모델은 주한카타르대사 부인인 미드하디 여사
코스타리카
화려한 색상이 돋보이는 코스타리카 전통의상. 파티를 할 때 즐겨 입는 이 옷은 긴 치마를 양손으로 잡고 춤을 출 때 적당하다. 모델은 주한코스타리카대사 부인인 마리아 고예나가 여사.
파라과이
공작새의 화려한 날개처럼 보이는 무늬와 색상으로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파라과이 전통의상. 모델은 주한파라과이대사 부인인 실비아 리구엘메 데 곤살레스 여사.
필리핀1
필리핀의 전통의상.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꽃무늬가 화사한 분위기를 낸다. 또 봉긋 솟아오른 소매가 인상적이다. 필리핀에는 지역별로 각기 다른 전통의상이 있다.
필리핀2
필리핀의 전통의상.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꽃무늬가 화사한 분위기를 낸다. 또 봉긋 솟아오른 소매가 인상적이다. 필리핀에는 지역별로 각기 다른 전통의상이 있다.
한국
우리 전통의상인 한복. 모델은 김화중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송지호 국립의료원 학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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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퍼플라인 1 중에서...

가브리엘 데스트레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앙리 4세의 수많은 애인들 가운데 그가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던 유일한 여자였다. 피카르디 출신으로 보포르 공작부인을 제수 받은 가브리엘은 매우 아름다웠지만 성품은 약간 잔인한 데가 있었다고 하며 앙리 4세와의 결혼을 앞두고 자간으로 사망했다. 항간에는 왕비였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독살이라는 설이 유포되었으나 진위는 알 수 없다.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다. (방돔 공작 세자르, 몰타 대 수도원장 알렉상드르, 엘뵈프 공작부인)
1598년 앙리 4세는 장자 방돔 공작 세자르를 로렌 가문의 일족인 메르쾨르 공작의 딸 프랑수아즈 드 로렌 메르쾨르와 결혼시키기로 결심했다. 당시 세자르는 4살, 프랑수아즈는 6살이었다. 메르쾨르 공작은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브르타뉴를 세자르에게 넘겨주라는 요구는 불만족스러웠지만 당시 왕이 가브리엘과 결혼하려 했었기 때문에 딸을 왕비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유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결혼식 며칠 전에 죽고 말았고, 세자르 드 방돔은 서자로 전락했다. 따라서 메르쾨르 가에서는 프랑수아즈를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얼마 후 메르쾨르 공작은 전사했으나 그의 부인인 마리 드 뤽상부르는 딸을 방돔 부인으로 만드느니 카푸친 수도회에 보내겠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토록 강경했던 그녀도 결국 가주 로렌 공작의 뜻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로렌 공작은 앙리 4세의 누이인 카트린 드 부르봉과 결혼했으나 상처했다. 따라서 로렌 가는 다시 앙리 4세와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었다.)
프랑수아즈 드 로렌 메르쾨르와 세자르 드 방돔은 1607년 7월 5일 결혼했으며 그들 사이에 메르쾨르 공작이자 후에 아버지 사후 방돔 공작을 물려받은 루이 드 방돔, 보포르 공작 프랑수아 드 방돔, 느무르 공작부인 엘리자베스가 태어났다. 루이는 마자랭의 질녀인 로라 만치니와 결혼해 아들 루이 조제프와 필립을 두었다.

낭트칙령

신교파인 위그노에게 조건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98)을 종식시킨 점에서 의의가 크다. 앙리 4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신 ·구 양파의 종교적 대립으로 국내는 2분되었고,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왕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직접 신교에서 구교로 개종하면서 신교도(위그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고자 이 칙령을 공포한 것이다.
따라서 이 칙령은 일찍이 프랑수아 1세와 앙리 3세에 의하여 규정된 ‘구교 이외의 이단(異端)은 엄벌에 처하며, 이의 밀고자는 벌금 또는 몰수재산의 1/4을 양여한다’ 등의 조항을 삭제시켰다. 결국 국민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다는 취지에서 공포되었으나, 국가의 입장에서는 구교를 국교로 규정한 실정이어서 이 칙령 이후에도 구교도는 신교도에 비해서 훨씬 유리한 조건이 부여되었다. 주요한 조항을 보면, ① 기정사실로 인정한 곳에서의 위그노의 예배의식 집행은 용인되나 파리 시내에서는 금한다. ② 위그노에 대하여도 재산상속 ·대학입학 ·관리취임의 권리를 인정한다. ③ 이미 8년 전부터 위그노가 장악한 요새는 이후에도 신앙상의 안전지대로서 장악함을 허가한다. ④ 구 ·신 양교도 간의 분쟁을 심리하기 위하여 가톨릭교도 10명, 위그노(신교도) 6명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파리 고등법원 내에 두며, 신 ·구교 같은 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세 곳의 지방고등법원 내에 설치함을 인정한다 등으로 되어 있다. 결국 신앙의 자유를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그노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측의 불만은 더욱 심하여 고등법원이 칙령의 등록수속을 거부하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듬해 2월 앙리 4세가 고등법원에 대하여 강경조치를 발동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루앙의 지방고등법원의 경우는 1609년까지 등록을 지연시키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다음의 루이 13세 때에는 재상 리슐리외가 무력으로써 위그노의 정치력을 분쇄하고 칙령 중의 안정지대 인정조항을 삭제하기에 이르렀고(알레 칙령), 또 절대군주인 루이 14세는 85년 10월 18일 전 조항을 폐지하고, 위그노의 종교적 ·시민적 자유를 전면적으로 박탈하였다. 이로써 남 ·서 프랑스에 많이 살던 신교도 약 100만이 크게 동요를 일으켜 그 중의 약 40만 명이 영국 ·네덜란드 ·프로이센 등으로 망명하였다. 신교도는 거의가 근면한 상인 ·기사 ·공예인 ·군인 등이었으므로, 이로 인한 프랑스의 손실은 많았다.

 브르타뉴대공성

프랑스 낭트. 앙리 4세가 1598년에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에게 종교적인 자유를 주는 낭트 칙령을 내린 곳이다.

 

 

 

 

 

 

 브루노 [Bruno, Giordano, 1548~1600.2.17]

르네상스 사상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이탈리아 놀라
주요저서 《원인 ·원리 및 일자()에 관하여》(1584) 《무한, 우주와 제세계에 관하여》(1584) 《최소자론()》(1591)

나폴리 근처 놀라 출생. 어려서부터 나폴리에서 공부하고, 18세에 도미니코 교단(敎團)에 들어가 사제(司祭)가 되었다. 그 동안에 고대와 당시의 자연학(自然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점차 가톨릭 교리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1576년 이단(異端)과 살인 혐의로 사제복을 벗게 되자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 각국을 돌아다녔으며,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에서 강의도 하였다. 1592년 베네치아에서 이단신문(異端訊問)에 회부되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찬 그의 철학은 범신론적인 특징이 강하다. 우주는 무한하고, 신성(神性)은 전우주를 꿰뚫는 생명, 즉 ‘우주령(宇宙靈)’이라고 해석하고, 인간은 ‘영웅적 정열’로 이 우주령의 영원한 활동과 결부된 본성을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노는 그것을 참다운 종교로 생각하였다. 저서는 《원인 ·원리 및 일자(一者)에 관하여 Della causa, principio ed uno》(1584) 《무한, 우주와 제세계에 관하여 Dell’ infinito universo e mondi》(1584) 《최소자론(最小者論) De triplici minimo》(1591) 등이 있다.

조르조네 [Giorgione]

 Giorgio da Castelfranco라고도 함. 본명은 Giorgio Barbarelli.
1477경 베네치아 베네토 카스텔프랑코~1510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화가. 

베네치아 미술에서 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처음 시작했다(→ 베네치아 화파). 베네치아 회화의 주요장르인 연상적이고 목가적인 풍경화 가운데 최초의 작품으로 꼽히는 〈폭풍 The Tempest〉(1505경)는 그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전기작가이자 마니에리스모미술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이탈리아의 뛰어난 건축가·화가·조각가들의 생애 Vite de'piú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ori italiani……〉(1550, 1568)에서 기록한 전설들을 제외하고 실제로 알려진 것은 전혀 없다. 조르조네의 이름은 현재 남아 있는 1507, 1508년의 두 자료에 초르치 다 카스텔프랑코(베네치아의 방언), 즉 카스텔프랑코의 조르조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조르조네(또는 초르촌)라는 이름은 1528년 그리마니 컬렉션의 작품 목록에 처음 나온다. 이 이름은 '키가 큰 조르조' 또는 '몸집이 큰 조르조'라는 뜻으로 그가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미남이고 호색적이었다. 르네상스기의 유명한 미술 후원자인 만토바의 이사벨라 데스테와 그녀의 대리인인 베네치아의 타데오 알바노 사이에 오고 간 1510년 10월 25일 편지에는 조르조네가 그무렵 베네치아에 널리 퍼져 있던 흑사병에 걸려 바로 얼마 전에 죽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를 다룬 기록 중 가장 최초의 것은 바사리가 쓴 전기이다. 그것은 조르조네의 평범한 태생, 고상한 정신,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런 특징은 바사리가 조르조네의 그림들이 가지고 있는 시적인 특성을 기초로 나름대로 상상한 결과임이 확실하다.
청년 조르조네가 1490년경 베네치아에 가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대가인 조반니 벨리니 밑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르조네의 그림에 나타나는 기법과 색채, 분위기는 확실히 벨리니의 후기 양식과 비슷하다. 1507년 베네치아에 있는 두칼레 궁의 접견실에 걸기 위해 주문받은 그림은 그후 더이상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성되지 못한 것 같다. 조르조네의 주요한 공공 작품으로는 폰다코 데이 테데스키(독일 대사관)의 외벽에 그린 프레스코가 있는데, 그는 운하를 향하고 있는 이 건물의 정면에 인물상들을 그렸다. 거리쪽의 프레스코들은 젊은 티치아노가 그렸는데 아마 조르조네의 감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508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이 작품들은 부분적으로 흐릿한 인물 윤곽선만 남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었다.
몇 가지 특별한 자료에 기록된 작품들을 제외하고, 1520~43년 베네치아의 귀족 마르칸토니오 미키엘이 쓴 베네치아의 미술 컬렉션에 대한 기록에 조르조네의 그림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기록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성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믿을 만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12점의 그림과 1점의 소묘 중 5점이 남아 있는데, 〈폭풍〉·〈3명의 철학자 The Three Philosophers〉·〈잠자는 비너스 Sleeping Venus〉·〈화살을 든 소년 Boy with an Arrow〉·〈피리를 가진 양치기 Shepherd with a Flute〉 등이 그것이다. 〈폭풍〉은 르네상스기 풍경화에서 하나의 이정표로서 폭풍우가 막 몰아치기 직전의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르네상스의 저술가 피에트로 벰보와 자코포 산나차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감정은 또한 르네상스기의 중요한 철학자인 피에트로 폼포나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베네치아와 파도바의 동시대 인문주의자들의 '자연주의' 철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폭풍〉의 전경(前景)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나타내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왔지만 정확한 것은 하나도 없다. 미키엘은 그들을 군인과 집시로 해석했다. 르네상스 미술가라면 의미 없이 2명의 모호한 인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이들은 낭만적이고 아르카디아적인 자연을 묘사한 문학 작품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와 똑같은 문학적 주제를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전원의 합주 Pastoral Concert〉(1510경)가 있는데 그 제작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잠자는 비너스〉(1510경)는 조르조네가 죽을 때 미완성으로 남았다. 미키엘은 이 풍경화의 배경을 티치아노가 덧붙였다고 전하고 있다. 오른쪽 원경에 건물들이 있는 풍경은 티치아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으므로 그림 자체가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잠자는 비너스〉를 시작으로 베네치아의 미술에서는 사랑의 여신을 주제로 한 일련의 그림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특히 티치아노의 그림들이 유명하다. 그러나 장엄하고 이상적인 이 그림만큼 한적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전하게 표현한 작품도 없다. 〈유딧 Judith〉(1505경)은 자료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와 똑같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녀는 자기 민족의 복수자라기보다 일종의 여신으로 표현되어 있다.
초기 자료들에는 종교화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모세의 시련 Trial of Moses〉·〈솔로몬의 재판 Judgment of Solomon〉을 묘사하고 있는 패널들은 보통 조르조네의 초기 작품(1495~1500경)으로 추측된다. 여기서 인물들은 약간 고풍스럽게 보이지만 차분하고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원경의 풍경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명백히 〈폭풍〉를 그린 화가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종교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모와 아기예수와 성 프란체스코와 성 리베랄레 Madonna and Child with SS. Francis and Liberale〉(1504경, 카스텔프랑코)이다. 이 그림의 구도는 르네상스기의 특징인 기하학 양식에 따라 이등변3각형을 이루고 있다. 풍경과 종교적인 환상에 빠져 있는 듯한 인물들의 환상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조르조네의 성향을 보여준다. 〈성가족 The Holy Family〉(1508경)·〈양치기들의 경배 Adoration of the Shepherds〉(1508경)도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후자의 작품은 특히 색채의 완벽한 조화로 유명하다. 〈3명의 철학자〉(1510경)는 미키엘이 특별히 조르조네의 것으로 단정한 작품으로서 미키엘은 조르조네가 죽은 뒤 베네치아의 화가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가 그것을 완성했다고 진술했다. 이 그림의 구도와 색채는 완전히 조르조네의 화풍으로서 세바스티아노는 다만 약간의 끝마무리를 했을 뿐인 것 같다. 게다가 청년·장년·노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세 남자의 꿈꾸는 듯한 우울한 분위기는 조르조네의 전형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이 그림이 인간의 세 연령기를 나타내고 있음이 확실하지만, 그 인물들이 실제로 3명의 동방박사나 3명의 철학자, 또는 고대 로마의 전설에 나오는 문학적 인물들을 의미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평가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Christ Carrying the Cross〉(베네치아 스쿠올라 그란데 디 산로코)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나 바사리는 1568년에 이 그림의 화가가 티치아노라고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그가 1550년 판에서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진술한 것을 정정했다. 상당부분이 복구되고 다시 그려졌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가치만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 20세기의 많은 비평가들이 티치아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조르조네의 것이라고 의심하는 그림으로는 〈그리스도 앞에 선 간통한 여자 The Adulteress Brought Before Christ〉(1500경)·〈풍경 속의 성모와 아기예수 Madonna and Child in a Landscape〉(1504경)·〈성모와 아기예수와 파도바의 성 로크와 성 안토니우스 Madonna and Child with SS. Roch and Anthony of Padua〉(1505경) 등이 있다.
초상화 분야에서 조르조네는 매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티치아노, 팔마 베키오, 로렌초 로토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은 16세기초에 조르조네를 흡사하게 모방했기 때문에 때때로 그들의 그림을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청년 Youth〉(1504경)은 대체로 그가 그린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은 뚜렷한 윤곽선과 입체적인 효과와 더불어 평온한 분위기와 정적인 얼굴 표정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르네상스기의 인간상을 매우 인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시인 〈안토니오 브로카르도 Antonio Broccardo〉의 초상화(1506경)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교한 세련미와 섬세함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모든 비평가들이 한결같이 그가 그린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작품은 이른바 〈라우라 Laura〉의 초상화로, 그 뒷면에는 1506년 6월 1일이란 날짜와 이것을 그린 화가가 카스텔프랑코의 초르치라는 글이 적혀 있다. 독일의 유명한 동판화가인 벤첼 홀라르가 1650년에 인그레이빙으로 기록한 조르조네의 〈다윗으로 분장한 자화상 Self-Portrait as David〉(1510경)은 크게 손상되긴 했지만 크기를 아주 축소한 원작으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조르조네는 이 자화상에서 눈살을 찌푸린 채 몸을 난간 안쪽으로 기울게 그림으로써 좀더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티치아노는 푸른 옷을 입은 남자의 초상화(1512경,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이와 똑같은 구도를 택했는데, 여기에 씌어 있는 머리글자 'TV'(Tiziano Vecellio)는 이 그림의 제작자는 조르조네가 아니라 티치아노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의 상당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카스텔프랑코 출신의 이 단명한 대가는 여전히 르네상스 화가들 중 가장 불가사의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이 지니고 있는 특질과 매력으로 인해 그는 당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이상적인 형태와 색채, 밝기를 통해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 베네치아의 대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H.E. Wethey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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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이쁜 순수우리말 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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