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張俊河, 1918 ~ 1975)의 항일(抗日) 투쟁 자서전 <돌베개>를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만주군인(滿州軍人)이었던 박정희(朴正熙, 1917 ~ 1979)에 대해 궁금증이 일어나게 된다. 군인 박정희는 어떻게 탄생했고, 그의 만주군 복무시절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번 페이퍼는 이에 대해 살펴보되, 군인으로서 광복군과 만주군이라는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서로 대비되는 두 인물을 직접 비교하는 방법의 효과에 대해는 이미 <영웅전>을 통해 입증된 바 있어 부족하나마 플루타르코스의 방식을 따라가 본다. 


'우리에게는 <영웅전>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비교 열전>은 23쌍의 그리스 영웅과 로마 영웅의 일생을 기술한다. 그중 19쌍은 두 사람의 성격과 업적을 비판적으로 비교하고 있다.(p6)... 플루타르코스(Ploutarchos, AD 50(?) ~ 120)는 <비교 열전>에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위대한 업적들을 그리되 역사가의 시각에서 정치적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 영웅들의 내면세계와 성격(ethos)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인물의 특징을 밝혀내고 있다.(p7)'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中 


1. 군(軍)입대 동기


가. <돌베개> : 집안의 불행을 대신한 지원


<돌베개>에서 저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일본의 요시찰인물이 된 부친을 대신하여 일본군에 자원했음을 밝히고 있다. 원치않은 일본군으로의 입대 후 저자는 광복군을 찾아 탈주하게 되며 <돌베개>를 통해 고난의 여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일인들이 가장 주목하고 또 미워하던 목사 가운데 한 분이 나의 아버님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죄목으로 선천 宣川 신성 神聖 중학교 교직에서 축출당한 뒤에 더 계속 요시찰 인물로 늘 형사들이 뒤를 따르던 형편의 집안이었다. 나는 장남이다. 거기다 일본에서 피해 와 있다. 다른 신학교와 달리 정규대학 과정의 일본신학교 재학생이다. 학도병 지원의 자격이 부여되어 있는 처지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집안의 불행을 내 한 몸으로 대신하고자 이른바 그 지원에 나를 맡겨버린 것이었다.(p13)' <돌베개> 中

나. <군인 박정희> : 긴 칼 차고 싶어 갔지


 반면, <군인 박정희>에서 그려내고 있는 박정희의 입대(入隊) 동기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안정된 교편생활을 하던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만주군(滿州軍)에 자원하게 된다.


 '박정희는 당시 군국주의 하에서 최고의 권력집단이었던 군인을 어릴 때부터 동경했고, 그래서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는 얘기다. 그와 '긴 칼'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박 선생님이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누런색 군복에 빨간 견장, 붉은 군모, 그리고 에리(목 칼라)에는 별이 하나 그려져 있더군요. 그리고 칼을 하나 차고 있었는데 칼끌이 땅에 닿을 정도로 길었습니다.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후 박 선생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지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머리 숙여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박 선생님을 교사시절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제자 이순희 증언)(p78)' <군인 박정희> 中


  '한편 박정희의 만주행 배경에 대해 이견을 펴는 사람도 있다. 만주 봉천군관학교 5기 출신이자 해방 후 육사에서는 2기생으로 같이 졸업한 송석하는 97년 필자에게 "박정희가 만주로 간 것은, 교사를 하다가 일본 육사를 가려고 했는데 그때 이미 나이가 많아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로 갈 계획을 하고 만주로 왔다"고 주장했다. 즉 박정희는 일본 육사 입학을 위해 만주 군관학교를 징검다리로 삼았다는 얘기다.(p81)'<군인 박정희> 中


 이러한 증언을 보면 결국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지원은 개인의 출세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는 듯하다. 물론, 다음과 같이 만주(滿州)라는 곳이 당시 조선 청년에게 주었던 황금이 넘쳐나는 엘도라도(El Dorado)의 이미지 역시 청년 박정희의 만주행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역시 개인의 영달을 넘는 수준은 아닐 듯 하다.


 '박정희의 만주행에는 시대상황도 한 몫을 했다. 당시 일제는 만주 침략을 계기로 대륙 병참기지화 정책을 전개했다. 반면 조선에 대해서는 영구통치를 위해 조선인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드려는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폈다... 이런 사정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그 탈출구로 만주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일컬어질 만큼 희망과 기회의 땅이었다.(p80)' <군인 박정희> 中


2. 군인으로서의 활동


가. <돌베개> : OSS 훈련과 국내 진입 작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합류한 장준하는 시안 西安에서 OSS 훈련을 받으며 서울지역 침투 공작을 준비한다. 비록 이 작전은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돌베개> 속에서 죽음을 앞 둔 결연한 저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5월의 태양 아래 우리는 "OSS"대원이 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약자인 "OSS"는 미국의 전략첩보대를 의미한다. 중국에서의 OSS 활동은 앞으로 있을 미군의 일본 상륙작전을 위해 눈부신 예비공작 단계에 있었다.(p281)... 한반도에 대한 연합군의 공략은 일본의 본토 사수의 결의를 꺾자는 데 있는 것이다. 이 공략을 돕기 위해 경무기로 무장된 우리가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투입되어 우선은 첩보활동, 다음 단계로 정보 송신, 그리고 최종으로 유격대 조직 및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수행하도록 미리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3단계 활동이 성공할 경우, 국민군을 조직하여 미군 상륙과 때를 맞추어 후방 교란을 지휘하는 책임까지 졌으며, 국내 교란에 필요한 무기와 탄약의 공중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면밀한 작전의 초안자가 바로 이 장군이었으므로 그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지대장으로서는 나를 죽음의 골짜기에 집어 넣기에 고민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1944년 겨울에 이미 연합군 중국 전구 사령부를 거쳐 미 국방성 펜타곤의 찬성을 얻었으며, 전황의 추이와 병행시켜 1945년 초기에 연합군 사령부에서 검토되고 있었던 것이다.(p289)' <돌베개> 中


나. <군인 박정희> : 독립군 토벌설과 비밀광복군 설


 일본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1944년 7월 만주에서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당시 만주군으로 복무한 그에 대해 크게 2가지 설을 <군인 박정희>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따르면 박정희는 독립군을 토벌할 정도로 용맹한 만주군이나, 비밀광복군으로 활약할 정도의 인물이 되지 못한다. <군인 박정희>에 따르면 그는 그저 평범한 행정장교로서 1년 1개월을 복무한 후 쓸쓸히 귀국한 패잔병이었으며, 자신이 광복군임을 부인한 평생을 '일본군인'으로 살아간 인물이었다. 


 1)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


 '8단 본부에서 그와 가장 가까이서 근무했던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 씨의 증언을 다시 들어보자. "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걸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대토벌 작전이 있었는데, 8단에서는 2개 대대가 참가했습니다. 박정희는 부관이 되기 전 2~3개월간 제2중대(?) 소속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지요. 그러나 박정희가 토벌작전에 참가한 적은 있으나 그의 부대가 팔로군과 교전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p100)... "나는 소규모 전투를 포함, 10여 차례 (팔로군 토벌) 전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연대 을종부관으로 있어서 전투 경험이 전연 없다.... 박정희는 (내근을 하다보니) 그럴 기회가 없어서 중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8단 시절 박정희는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 그는 비교적 편히 지냈다.(방원철 증언)(p101)' <군인 박정희> 中


 2) '비밀광복군 박정희'의 진상


 '1967년 박영만은 <광복군> 상/하권 두 권짜리로 된 논픽션 소설을 출간했다. 하권의 골자는 박정희가 이미 해방 전부터 광복군과 비밀리에 내통하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하권에는 당시 박정희와 같이 만주군 8단에 근무했던 신현준(봉천 5기)까지 가담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신씨는 "해방 전엔 광복군이 있는 줄도 몰랐다"고 증언하고 있다.(p119)... 이 책이 나온 후 청와대로 가져가 박 대통령에게 선물했더니 박 대통령이 내용을 훑어보고는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느냐"며 노발대발했다. (p120)' <군인 박정희> 中


3. 광복 후 귀국


 <돌베개>의 주인공 장준하와 <군인 박정희>의 주인공 박정희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시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역사의 흐름에 실려 귀국한다. 다만, 장준하는 백범 김 구(金九, 1876 ~ 1949)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반면, 박정희는 패잔병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된다.


가. <돌베개>


 '"아, 조국의 땅이 우리를 맞으러 온다. 우리를 마중하러!" 나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던 솜구름이 버섯처럼 돋아나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는 서해안의 섬들이 바다에서 솟아나는 듯이 옹기종기 떠올랐다... 겨울 날씨 같지 않게 기창 밖으로 보이는 조국은 아름다웠다. 옥색 하늘이 엷게 풀어지고 남색 바다가 치마처럼 퍼졌으며 섬들이 크고 작게 벌어졌다... 그렇다. 우리의 갈망이 버섯처럼 조국을 환상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눈을 비비고 또 비비었으나 섬들은 돌덩이로 솟아올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 속에 제자리에 주저않고 있었다. 저 위에 나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처자가 있을 것이다. 저 위헤 하늘을 우러러 울고 땅을 치며 발을 굴러 울던 나의 조국이 있고 나의 동포가 목이 아프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p343)'<돌베개> 中


나. <군인 박정희>

 '1946년 5월 초순. 중국 천진항에서 미군 상륙용 함정인 LST 한 척이 뱃고동을 울리며 동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이 날 "귀국선" 갑판 위에서 한 젊은이가 무거운 시선으로 중국 땅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제의 패망으로 패잔병 신세가 되어 귀국하는 "박정희 중위"였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꿈에도 그리던 군인이 되어 당당하기만 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몰골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p96)' <군인 박정희> 中


 <돌베개>에서 장준하는 집안의 불행을 막고자 일본군에 자원했으나, 자신의 뜻이 있었기에 일본군에서 벗어나 광복군으로 합류한 후 국내진입작전을 통해 자신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군인 박정희>에서는 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만주로 건너가 원하는 큰 칼을 찼으나, 이 시기에 그가 무엇을 추구했는가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이러한 기록을 통해 바라볼 때, '군인(軍人)'으로서 장준하는 '제가'의 수준에서 입대하여 '치국'을 생각하며 그의 광복군 생활을 마친 반면, 박정희는 '수신'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만주군 생활을 마친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후 삶은 그들의 뜻과는 다르게 풀려갔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다소 거친 논리의 비약일 수 이겠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悲劇)은 '수신'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한 '치국'의 수준에 이른 이들에 대한 탄압으로 요약될 수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서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PS.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 모습에서 살짝 장준하 선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두 인물에 공통되는 OSS 대원으로서의 경력 때문이겠지만, 두 인물이 over lap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1930년대와 40년대 만주가 우리 할아버지들에게 미국 서부와 같은 이미지였다면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배경이 만주로 설정된 것도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배우게 된다. 박정희는 어디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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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14: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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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1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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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15: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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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15: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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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8-01-08 15: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장준하 선생의 비극적인 죽음은 아직도 마음이 아픕니다. 돌베개보다 김준엽 선생의 <장정>을 먼저 읽었는데 <장정>이 역사학도로서 사실기록에 충실했다면 <돌베개>는 문학적 감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기록이었던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1-08 15:05   좋아요 2 | URL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비극이라 생각됩니다. 청산되지 못한 이들에 의한 비극적인 죽음과 감춰진 진실...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현대사의 문제점이 응축된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고 여겨집니다. 조그만메모수첩님 감사합니다.^^

2018-01-18 0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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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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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속에 그려진 세계의 형태가 잘못되었으니 가치가 없는 지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고지도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형태를 잘 알 수 없었을 때 세계의 존재를 정신 속에 의식했었다는 사실이며, 세계의 표상을 바탕으로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p18)‘

고지도의 의미가 당대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고지도를 통해 우리는 이전 시대의 세계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쿠쉬라메」가 작성된 9세기 이슬람인들의 세계관을 들여다 보자.

‘하멜의 「표류기」 같은 외국인의 직접적인 기록은 드문 편이지만 8세기경부터 신라를 찾아온 아랍인들은 우리나라의 남해안의 섬들을 자신들의 해도에 ˝Sila˝라고 표시하였다.(p27)‘

‘알 이드리시의 지도(1154년) ; 시칠리아의 노르망왕 로제 2세의 명을 받아 알 이드리시는 프톨레미의 지도를 바탕으로 아랍세계의 지리 지식을 첨가하였다. 중국의 남쪽에 여러 개의 섬을 그리고, 신라(Sila)와 와꾸와꾸(Wakuwaku)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는 신라를 섬으로 표시하고 있다.(p38)‘

당대 사람들이 ‘신라‘를 중국 주변의 섬으로 인식했다면, ‘바실라 Basilia‘가 신라일 가능성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고전에 대한 인식 기준은 현대가 아닌 고전이 쓰여진 당시의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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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3 16: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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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3 1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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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0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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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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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0: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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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3 17: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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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1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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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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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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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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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2: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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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14: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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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사박물관> 2권은 청동기 시대를 배경으로한 '고조선 古朝鮮'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청동기(靑銅器)와 고인돌(支石墓)로 대표되는 이 시대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잘 알지 못한다. 이 시대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그  관심은 고조선의 강역(疆域)이 어디까지인지, 중국 왕조와 고조선의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에 그친다. 물론 이러한 주제가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일반인들의 삶이 진정한 우리의 역사가 아닐런지. 그런 점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한국생활사박물관> 2권이 주는 의미는 크다고 여겨진다. 2권의 내용을 통해서 고조선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모습을 우리는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생생하게 확인'한다는 표현이 다소 진부하지만, 이번 페이퍼에서는 고조선 생활사와 더불어 시각적으로 전달된 정보와 문자적으로 전달되는 정보가 어떻게 다르게 다가오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려 한다. 고조선의 의(衣), 식(食), 주(住)에 대해<한국생활사박물관> 2권에 그려진 그림과 함께 우리나라 고조선 연구가인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서 생활사 내용을 살펴보자.


1. 고조선의 의(衣)


[그림] 한국생활사 박물관 : 부여와 고조선 관리의 정장(p45)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에는, "(부여 사람들은)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며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고 했는데, 부여는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부여인들이 입었던 큰 소매 달린 도포는 고조선 때부터 입었던 두루마기 같은 겉옷이었을 것이다...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예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곡령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치 되는 은화(銀花)를 옷에 꿰매어 장식한다"... 이로 보아 고조선 사람들은 목둘레의 깃을 둥글게 만든 옷에 은화를 장식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p298)...고조선 사람들은 모자를 즐겨 썼던 것으로 보인다. 서포항 유적의 흙인형 머리 위는 수평을 이루어 양쪽 옆으로 넓게 퍼지고 양쪽의 모서리는 각을 이루고 있어 고깔을 쓴 것처럼 보인다.(p299)' <고조선 연구(하)>


2. 고조선의 식(食)


[그림] 한국생활사 박물관 : 고조선의 식생활(p40)


 '기자가 망명했던 서기전 12세기에 고조선의 전민은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전민(田民)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므로 음식을 그릇에 담아 먹는 생활 풍습이 고조선의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p309)... 고조선에서는 청동이나 뼈보다는 대나무 또는 나무를 이용한 나무를 이용한 숟가락이 더 많이 보급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썩어 없어져 유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p311)... 고조선에서는 벼, 보리, 조, 기장, 콩, 팥, 수수, 피 등의 오곡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곡물이 재배되었다... 고조선 사람들의 음식은 익히거나 끓인 것이 주류를 이루었겠지만 쪄서 먹기도 했다... 고조선 사람들은 이미 소금을 조미료로 사용했을 것이다.(p312)<고조선 연구(하)>


3. 고조선의 주(住)


[그림] 한국생활사 박물관 : 언덕마을의 삶(p39)


 '고조선의 농촌 주택은 지상식 건물도 일부 있었으나 대개 지하 50 ~ 60센티미터 정도로 깊지 않은 반지하 움집이었으며 대부분 직사각형이었다. 집자리 바닥의 면적은 80제곱미터의 큰 것과 10제급미터 이하의 아주 작은 것도 있었으나 20제곱미터 정도의 것이 가장 많았다. 고조선의 주택은 지붕을 짚이나 풀 따위로 이었고 그 위에 두텁게 진흙을 바르기도 했다. 고조선 사람들은 집자리를 단단하게 다진 후 그 위에 집을 지었다.(p343)<고조선 연구(하)>


 고조선사를 비롯한 고대사(古代史)는 기록된 문헌의 수도, 남아있는 유물의 수도 적기에 많은 연구과제가 남아있는 분야다. 또한, 많은 연구가 세력권과 이웃 나라와의 관계 등 정치, 외교, 군사 부문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어렵게 이루어진 연구 성과는 문자(Text)로 기록되어 일반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현실 속에서 <한국생활사 박물관> 2권은 충실하게 시각적으로 당대의 모습을 복원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생활사 박물관> 시리즈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역사자료로서도 유용하지만, 역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도 여러모로 유용한 책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한국생활사박물관>의 그림을 보면서 '애니메이션(animation)'과 '만화'가 문자로 구성된 책을 밀어내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가 복잡해지면, 생각하기 싫어하고 끈기가 부족한 세태의 변화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어(言語)가 가진 이중성과 모호성이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분명한 사실 전달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모호하다는 언어(문자)의 한계 대신 분명한 시각을 우리는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시각 선호' 성향은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임을 우리는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 ~ 1753)의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 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120. 참된 시각 이론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들을 다루는데 언어는 불명료함과 혼란을 일으키며, 우리에게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기 쉽다. 언어는 사람들의 공통 개념과 선입관에 순응하기 때문에 대단히 완곡한 표현, 부정확한 용법, 그리고 (조심성 없는 독작에게는) 외관상의 모순 없이 있는 그대로의 정확한 진리를 거의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시각에 관해 써왔던 것을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누구나 이러저러한 구절이나 표현 방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내 이야기의 전체 요점과 취지로부터 내 의미를 숨김없이 추측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낱말에 얽매이지 않고 개념 자체를 있는 그대로 고려하며, 그 개념이 진리와 자신의 경험에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것을 단호하게 원한다.(p158)'


 인간이 느끼는 감각의 70~80%가 시각이라고 하니, 아마 '책의 시각화'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인 것 같다. 하긴, 이미 1979년에 이미 음악 역시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바뀌었으니, 책에서의 이러한 변화는 오히려 늦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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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1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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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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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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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2 14: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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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2-02 16: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눈이 와서 오늘은 날씨가 추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덜 추워서 다행이예요.
아마 고조선 시대에 살았다면, 추워서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겨울호랑이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7-12-02 21:03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이 계신 곳에서는 어제 눈이 왔었군요. 제가 있는 곳은 비록 눈은 안왔지만 춥네요.ㅋ 고조선 시대에 있었다면 말씀하신 것처럼 추웠겠지만, 미세먼지는 없었을 것 같아요. 만약 선조들이 지금 우리 사는 곳으로 올 수 있다라면 ‘그 곳은 따뜻하긴한데, 눈과 목이 따끔거려 못 살겠어!‘라고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ㅋㅋ 서니데이님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with 다육이들)

2017-12-02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2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2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2 2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은 선사시대(prehistoric age)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과 문화사적인 고찰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책이다. 선사시대부터 최근의 남북한 생활상까지 총 12권에 걸친 시리즈물의 한 편인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보다 생생하게 선사(先史)시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좋은 리뷰들이 많기에 책의 구성이나, 내용에 대한 우수성은 별도의 언급없이 넘어가도록 하자. 대신, 이번 페이퍼 속에서는 선사 시대의 '여가 leisure' 또는 '놀이 play'와 이의 현대적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루 일과의 끝, 긴 노동과 노동 사이의 여가에 벌이는 이 같은 유희와 축제를 통틀어 "놀이"라고 부르자. "일" 다음에 찾아오는 "놀이"는 인간 생활에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놀이는 단지 "일이 아닌 것"이 아니라 다음에 해야 할 "일"을 더욱 멋지게 해내기 위한 숨고르기이다.(p16)... 인간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여가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적이고 풍부한 인간으로 거듭날 기회를 더 갖는다는 뜻이다. 인류의 역사는 어찌보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자유로운 여가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p17)'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


 <선사생활관>에서는 선사시대 생활을 크게 '노동'과 '놀이'로 구분한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고기잡이, 농경과 목축 등 식량획득 방법이 다양해짐에 따라 인간은 점차 삶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여유를 가지게 된 인간은 '놀이'를 통해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꾸게 된다. '여가'가 주는 정신적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전쟁의 목표는 평화이고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므로, 개인이나 국가나 여가 선용에 필요한 탁월함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여가 선용과 마음의 계발에 필요한 탁월함 중 어떤 것은 여가를 선용할 때 작동하고, 다른 것은 노동할 때 작동한다... 속담에 따르면, 노예에게는 여가가 없고, 용감하게 위험을 극복하지 못하는 자는 공격자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용기와 끈기는 노동에, 철학(philosophia)은 여가에, 절제와 정의감은 노동과 여가 모두에 필요한데, 여가를 즐기며 평화롭게 사는 자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1334a11~23)'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 <정치학 Politika>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노동의 목표는 여가이기 때문에, 결국 '노동'과 '놀이'로 크게 구분된 선사시대 인류의 삶은 '놀이'를 추구한 삶이라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씨족공동체 생활을 했던 선사시대 인류에게 여가의 상당부분은 '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선사시대 인류의 모습을 미진한 단계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요한 하위징아는 말한다. 놀이가 단순한 유희(play)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지한 기반이었음을 우리는 <호모 루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류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원시 부족의 사회 생활이 아곤적/대립적 공동체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고 또 원시 부족의 정신세계가 이런 심오한 2원론과 일치한다. 우리는 그것의 흔적을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원시 부족은 프라트리아(phratriai)라고 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절반으로 나뉘어졌다.(p119)... 계절의 대(大) 축제 때 만나서 노래와 춤을 교대로 수행하는 의례적 형태로 구애를 하는 축제에서 서로 절반씩 나누어진 두 부족이나 남성과 여성의 그룹은 경쟁의 정신을 발휘하며 놀이를 하게 된다.(p120)... "겨울 축제 동안에 춤과 노래의 토너먼트에서 남자들의 모임 혹은 형제회(兄弟會)에 스며든 경쟁의 정신이 국가와 제도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었다.(p122)'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 ~ 1945)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놀이'가 인간 사회의 모습이 제도적으로 바뀌는 첫 걸음이었음을 우리는 <호모 루덴스>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전 시대보다 체계화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놀이'에서 즐거움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지만, 현대의 '주5일'근무 체계에서 '2일'의 주말 휴식을 기다리는 우리 모습 속에서 '놀이'와 '여유'를 추구하는 선조들의 DNA를 발견하게 된다. 석기 시대를 우리는 주로 '야만'의 시대로 인식하고 있다. 자연의 산물 이상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던 이 시대가 문명(文明)이전의 미개한 사회라는 우리의 선입견의 기원은 19세기로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모건의 구분을 다음과 같이 일반화할 수 있다. 야만은 주로 자연이 만들어 놓은 산물 Naturprodukte을 획득하던 시기이며, 인간이 만든 생산물 Kunsprodukte은 자연의 산물을 획득하기 위한 보조 도구였다. 미개는 목축과 농경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시기인데, 인간이 활동을 통해서 자연의 산물 생산을 증대하는 방법을 습득하던 시기다. 문명은 자연의 산물을 그 이상으로 가공하기를 습득하던 시기로서 본질적인 의미에서 공업과 기술의 시기다(p47)'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 ~ 1895)<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Der Ursprung der Familie, des Privateigentums und des Staats> 


 19세기 진화론의 영향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사상의 흐름 속에서 신석기 시대는 어두운 과거에 불과했다. 과거가 어두울수록 현재의 진보는 더욱 빛이 나기에 과거는 부정당했고, 어두운 시대로 규정당했다.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듯이, 선사시대 역시 그렇게 인식되어왔다. 그렇지만, <한국생활사박물관 : 선사생활관>을 통해서 우리는 야만의 모습 대신 여유 속에서 삶을 발전시켜나간 선조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과거의 생활 모습이,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의 생활 양식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한국생활사 박물관> 시리즈는 의미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PS. 에스키모의 분쟁 해결 방식을 서술한 다음의 문장에서 랩 배틀(rap battle)을 연상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어떤 에스키모가 누군가에게 불평할 것이 있으면 그는 그 상대방에게 드럼 시합을 하자고 도전한다.(덴마크 어 Trommesang). 그러면 씨족이나 부족은 화려한 옷을 떨쳐입고 즐거운 기분으로 축제의 대회에 모여든다. 두 명의 소송 당사자는 번갈아 가며 드럼(북)을 치면서 상대방을 향해 야비하고 상스러운 노래를 불러댄다. 그 내용은 주로 상대방의 비행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근거 있는 비난인지, 풍자적인 말인지, 관중을 웃기기 위한 말인지, 순전한 중상 비방인지는 따지지 않는다.(p173)'<호모 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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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2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25 2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추석 연휴 동안 두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남한산성>과 <아이 캔 스피크>. 흥행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이들 영화를 보고 난 후 두 영화를 관통하는 내용을 이번 페이퍼에서 정리해봅니다. 다만, 제가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촬영기법, 영화의 내적 의미 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기에, 영화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연관된 주제를 다룬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페이퍼를 적어봤습니다.


1. <남한산성 南漢山城> : 삶과 죽음의 길


[사진] 영화 남한산성(출처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남한산성>은 김 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CG의 발달로 영화 상에서 대규모 전투신이 어렵지 않게 구현되고 있는 많은 영화를 우리는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치열한 논쟁(論爭)이 주로 이루어지는 영화 <남한산성>은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원작에 충실하려는 노력으로도 여겨지기도 합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설 <남한산성>에서도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의 대립이 작품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청(淸)의 무력은 대륙을 비워 놓고 반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요동을 내주기는 했으나 북경 언저리로 밀려난 청의 빈자리를 압박하면, 청은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청이 돌아가면 조정은 청의 퇴로를 따라서 싸우지 않고 도성으로 복귀할 것이고, 그런 식으로 환도가 이루어진다면 성 안에서 투항이나 화친을 발설하던 자들은 사직의 이름으로 휘두르는 임금의 칼에 죽어야할 것이었다. 그리고 성 안이 스스로 기진하여 문을 열고 나가는 날, 끝까지 싸우기를 발설했던 자들은 용골대의 칼 아래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p95)'


   우리는 소설 <남한산성>을 통해서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의 논쟁은 국가적 차원만의 논의가 아니라, 각각 자신의 생명과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이들의 전쟁에서 '총'과 '칼'의 자리를 '말'과 '글'이 대신하고 있음은 주인공 김상헌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사물은 몸에 깃들고 마음은 일에 깃든다. 마음은 몸의 터전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니, 일과 몸과 마음은 더불어 사귀며 다투지 않는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 몸이 성 안에 갇혀 있으니 글로써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진대, 창검이 어찌 글과 다르며, 몸이 어찌 창검과 다르겠느냐.(p122)'


 그리고, 남한산성 47일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김상헌과 최명길의 논쟁의 끝은 삶과 죽음의 길의 선택으로 치닫게 됩니다. 각자 자신의 길이 '생명(生命)의 길'임을 주장하면서, 이들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습니다.  그렇지만, 소설<남한산성>의 결말은 이들의 대립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아는 대로 삼전도의 치욕으로 이어지고, 조선은 결국 청에게 굴복하게 됩니다.


  '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p143)'


  '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며, 마음의 길을 마음 밖으로 밀어내어 세상의 길과 맞닿게 해서 마음과 세상이 한 줄로 이어지는 자기에서 삶의 길은 열릴 것이므로, 군사를 앞세워 치고 나가는 출성과 마음을 앞세워 나가는 출성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먼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김상헌은 생각했다.(p199)'


[사진] 삼전도비(三田渡碑) ( 출처 : 두피디아)


 어느 누구의 길이 바른 길이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최대 피해자는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약 50여만명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포로들의 귀환 문제는 이후 조선에서 중요한 사회 문제로 부각됩니다. 국가적으로는 소현세자의 비극으로부터, 가정으로는 귀향한 부인과의 이혼 문제에 이르기까지. 병자호란의 비극 속에서 우리는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수뇌부/ 권력층이지만, 그 비극을 직접 당하는 것은 일반 백성, 국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 캔 스피크>는 전쟁의 피해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한 명의 모습을 주제로 합니다. 위안부 할머니의 문제를 다룬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면서 우리는 영화가 "I can speak English"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I can speak Truth... I have experienced "Truth''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 <한 명>을 통해서 그 truth에 대해 보다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출처 : 위키트리)


2. <한 명> : I can speak Truth... I have experienced... "Truth"

 

'"희들이 뒷바라지를 안 하면 군인들이 전쟁을 어떻게 하겠느냐?" 하하가 정색을 했다. "군인들 뒷바라지하는 데인 줄 알았으면 내가 절대로 안 따라왔을 것이오."(p37)'


  '신(神)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서, 그녀는 신을 느낄 때가 있다. 간유리에 새벽빛이 번질 때, 풀숲에서 참새들이  떼 지어 날아오를 때, 다디단 복숭아를 베어 물 때... 신을 느낄 때를 헤아려보던 그녀는 자신이 신을 느낄 때가 많다는 걸 깨닫고 놀란다. 생전 처음 도라지꽃을 보았을 때도 그녀는 신을 느꼈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보다 자신이 어쩌면 더 신을 두려워하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p56)


  '그녀는 울고 싶은데 울음이 안 나온다. 아귀처럼 입을 한껏 벌리고 목을 늘어뜨려도 눈물 한 방울 안 난다. 자매들이 죽었을 때도, 오빠가 죽었을 때도 그녀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니까, 친인척들은 흉을 보았다. 독해서 시집도 안 가고 평생 혼자 살더니만 울지도 않는다고. 그녀는 너무 지독하게 살아서 눈꺼풀을 쥐어뜯어도 눈물이 안 나는가 보다 했다. 평생에 걸쳐서 두고두고 울 걸 소싯적에 다 울어버려서 그런가 보다고.(p36)


  소설 <한 숨> 속에서을 통해서 극한 삶의 끝에 놓여진 개인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적나라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무덤덤하게 진술된 내용 속에서 그 참담함이 오히려 더 가슴깊이 다가옴을 느낍다.  


  '2만 명이었다고 들었다. 20만 명이 갔다가 해방 후 돌아온 숫자가 고작 2만 명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자신이 20만 명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2만 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 놀랐다. 20만 명 중 2만 명이면 10분의 1이었다. 말하자면 열 명 중 한 명...(p125)'


  '아버지, 어머니 저는 만주에 와 있어요. 이곳에서는 아침부터 군인들이 줄을 서서 들어와요. 저는 곧 죽을 거예요.(p148)'


  '백지에 쓴 문장을 소리 내 읽던 그녀는, 모든 걸 다 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말을 하고, 그리고 죽고 싶다."... "엄마가, 엄마가 가장 갖고 싶어.(p153)'


 10명 중 1명만 생존해 온 현실 속에서 이들이 원한 것은 삶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남한산성>에서 말하는 언어로서의 '삶'과는 또 다르게 다가옵니다. 뜨거운 검은 피가 쏟아질듯한 느낌의 '삶'을 <한 명>에서 받다보면, 과연 어떤 명분이 이분들의 고통을 막는 것보다 중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분들의 경험을 우리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대한 '공감(共感)'이라 생각합니다. 공감을 느끼게하는 계기는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겠지만,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3. <금요일에 돌아오렴> : 공감(共感)


 자신의 가족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참상을 겪은 부모의 심정과 세월호 사건을 통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의 참담함은 동일할 것이라 미루어 생각해 봅니다.


'승희 보내고 삶의 완전히 바뀌었어요. 인생에 즐거운 것도 없고, 삶에 의욕도 없고, 사람들도 싫고. 사람들은 위로라고 하는데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안 들려요. 억울하고 분한 마음밖에 없는데 뭐가 들리겠어요.(p147)'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일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창 슬픔에 젖어 있던 무렵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딸과 아들을 잃은 부모를 만났어요. 그분이 고맙게도 위로를 해주고 가시더라구요. "아, 그 당시에 나는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남의 얘기였고 나와 먼 얘기였는데 이렇게 내가 위로를 받는구나... 다른 사람의 아픔을 껴안는다는 거 그전에는 전혀 생각 못했어요.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모른 체하고 살았던 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p623)'


 의도하지 않게 추석 연휴 기간 본 두 편의 영화를 통해서 1636년 병자호란에서 1940년대 태평양 전쟁, 그리고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을 생각해봅니다. 가슴아픈 일을 우리가 잊지 않고 다시 생각하는 것은 반복되지 않기 위함일 것입니다. 연휴 기간에 본 두 편의 영화와 세 권의 책 속에서 전쟁 위기론이 부각되고 있는 오늘을 바라보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생각해 봅니다. 그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도 어린 아이의 웃음이나, 들판의 들꽃보다 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글을 마치면서 떠오르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이 번 페이퍼를 마칩니다.


[사진] 집에 있는 소녀 상 뒷자리에 놓여진 세월호 리본


  '하나의 시간은 균질한 시간이 아니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시간들에 하나의 수식어를 붙인다면, 슬픔이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이 더 맞다. 집 밖을 나갈 수도,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는 시간, 아이의 물건을 태울 수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시간, 밥을 먹을 수도 안 먹을 수도 없는 시간.(p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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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10-15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랑의 송가 좋아하는데, 오늘은 조금은 쓸쓸한 기분이 들어요.
겨울호랑이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7-10-15 19:28   좋아요 1 | URL
^^: 일요일 저녁이라 그럴까요? 서니데이님 하루 마무리 잘 하시고 기운차게 월요일 맞이하자구요ㅜㅜ.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 2017-10-15 2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감과 연대함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생각하던 시간을 기억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10-15 22:16   좋아요 2 | URL
^^: 그렇군요... 얼마후면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가 시작된지 1년이 되어가네요. 역사 속에서 이 일은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해집니다...

2017-10-18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8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9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9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