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는 아시아에서 현대적인 강국으로 살아남으려고 싸우는 호전적인 민족과의 전쟁이자 아시아 전체에서의 이데올로기 경쟁이었다. 동양인 중에는 일본의 전쟁을 인종과 피부색의 대립으로 여기면서 마치 자신들의 싸움인 양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 일본의 승리를 서구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기회로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 후로 중국은 B-29로 일본 본토에 폭탄을 투하할 항공기지가 되었다. 전략 폭격기의 아이디어는 1939년 당시 영국이 패하게 되면 유럽에서 독일을 공격할 항공기지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로 탄생했다. B-29는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는 폭격기로서 B-17을 능가했다. 길이 30미터, 높이 8.5미터에 날개폭이 43미터가 넘는 규모였다. 그렇지만 날렵한 외관에 동체 외피는 리벳접합으로 제작되었다. 고도 11.6킬로미터에서 시속 563킬로미터가 넘는 순항 속도를 자랑했으며 5632킬로미터에 걸쳐 4톤의 폭탄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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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한(漢)의 궁중에 있던 보기(寶器) 수십 개를 모두 내어 뜰에서 부수고 말하였다. "무릇 제왕이 되어서 어디에 이런 물건을 쓰겠는가? 듣건대 한의 은제는 매일 비첩(婢妾)이나 총애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금중(禁中)에서 오락하고 놀았으며 진기한 장난감을 옆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데, 이 일은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니 의당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어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지금부터 진기하고 화려하며 눈을 기쁘게 하는 물건을 궁궐로 들여오지 못하게 하였다.

늘이 한(漢)의 운명을 망하게 하기에 이르러 군사들은 양(梁, 도읍인 개봉)의 교외에서 흩어지고, 항복한 장군과 패배한 군사들이 뒤를 이어서 도착하니 경은 즉시 말머리를 돌려서 지름길로 구음(龜陰)으로 돌아갔던 것인데, 주군을 위하여서나 시절을 위하여서도 처음도 있고 끝도 있는 것이오. 이른바 위험한 혼란 속에서 충신의 절개를 보이는 것이며, 빠른 바람이 부는 데서 단단한 풀 같은 마음을 알게 되니, 만약에 신하된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와 같을 수가 있다면 국가를 소유한 사람 가운데 누가 채용하지 않겠소?

왕준은 사람을 통하여 황제에게 말하였다. "진주성(晉州城)은 견고하여 쉽게 뽑혀지지 않을 것이고, 유숭(劉崇, 북한주)의 군사는 바야흐로 날카로워서 힘써 다툴 수는 없습니다. 군사를 머물게 하는 까닭은 그 기세가 쇠퇴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고 신이 겁을 먹은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새로이 즉위하셨으니, 의당 가볍게 움직이셔서는 아니 됩니다. 만약에 거가(車駕)가 사수(?水, 사수관, 하남성 형양현의 서북쪽 사수진)를 건너게 된다면 모용언초(慕容彦超, 태녕절도사, 치소는 연주)가 군사를 이끌고 변주(?州, 하남성 개봉시)로 들어가게 되어 큰일 납니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손으로 귀를 잡아당기며 말하였다. "거의 나의 대업을 그르칠 뻔하였다!"

북한의 토지는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한데 안으로는 군대와 나라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밖으로는 거란을 받들게 되니 세부는 번거롭고 부역은 무거워서 백성들이 즐겨 살지 아니하고 도망하여 주(周)의 경계로 들어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당은 열조(烈祖, 1대 徐知誥, 즉 李?) 이래로 항상 사자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서 거란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와 더불어 같이 중국을 통제하려고 하여, 다시 서로 선물을 보내며 맹약하여 형제로 하였다. 그러나 거란에서는 그 물건을 이로움으로 생각하고 다만 헛소리를 하면서 왕래하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당을 위하여 쓰이지 않았다.

북한주(北漢主)가 이존괴와 장원휘에게 말하였다.
"짐은 고조(高祖, 오대 후한의 유지원)의 대업이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져서 오늘 지위와 칭호는 부득이하여 이것을 칭(稱)하게 된 것이며, 나를 돌아보건대 무슨 천자이며, 너희들이 무슨 절도사(節度使)이겠는가?" 이로부터 종묘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보통 사람의 집에서 하는 것처럼 하였으며, 재상의 월봉(月俸)도 100민(緡)에 그쳤고, 절도사는 30민에 그쳤으며, 그 나머지에게는 야박하게 제공하였을 뿐이었으니, 그러므로 그 나라 안에서는 청렴한 관리는 적게 되었다.

왕준에게 명령하여 사방에서 공헌(貢獻)하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먹을 물건들을 멀리하라고 하고, 경진일(18일)에 조서를 내려서 이것들을 모두 없애게 하였다. 그 조서의 대략이다.
"받드는 것은 짐의 몸에 그치지만 손해를 보는 것은 농부와 서민을 덮고 있다." 또 말하였다.
"유사(有司)들 속에 쌓여 있는 것은 아주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또 조서를 내려서 말하였다.
"짐은 군려(軍旅) 가운데서 자라 학문을 가까이하지 않아서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를 아직은 알지 못하니 문무관원 가운데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술법을 가진 사람은 각기 봉사(封事)27를 갖추어서 보고하고, 모두 의당 그 일을 직서(直書)하고 말씨를 관계하지 말라." 황제가 소봉길의 집을 왕준에게 하사하니, 왕준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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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예가 돌아가자 황제는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물었다. "어떻게 하여야 덕을 닦는 것이오?"
조연예가 대답하였다. "청컨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고 이를 본받으십시오."

황제가 총애하는 경(耿)부인을 후(后)로 삼으려고 하자 양빈은 너무 빠른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부인이 죽자 황제는 후(后)의 예(禮)로써 그를 장사 지내려고 하였지만 양빈은 다시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황제의 나이가 더욱 장성해가자 대신들에게 통제되는 것을 싫어하였다. 양빈과 사홍조가 일찍이 황제 앞에서 일을 논의하였는데, 황제가 말하였다.
"그것을 살펴 도모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말이 있게 하지 마시오." 양빈이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다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신(臣)들이 있습니다."
황제는 평정한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 쌓였는데,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틈을 이용하여 황제에게 그를 참소하여 말하였다. "양빈 등이 오로지 방자하니 끝내는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황제는 이 말을 믿었다.

유수(劉銖)와 이홍건(李洪建) 그리고 그 무리들을 모두 저자에서 효수(梟首)하였으나 그 집안사람들을 사면하였다. 곽위가 공경들에게 말하였다. "유수가 우리 집안사람을 도륙하였다 하여 내가 그 집안사람들을 도륙한다면 원수 짓는 일이 반복되니 어떻게 끝이 있겠는가?" 이로부터 몇몇 집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양빈(楊?)이 추밀사를 풀어 달라고 요구하니 황제는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그것을 중지하도록 유시(諭示)하였다.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 오건유(吳虔裕)가 옆에 있다가 말하였다. "추밀(樞密)이란 중요한 자리이어서 오래 머물게 하기는 곤란하며 마땅히 뒤에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꾸어 이 일을 하도록 해야 하니, 상공(相公)이 이를 사직하는 것은 옳습니다."

사홍조가 또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은 긴 창과 큰 칼에 있는 것인데, 어찌 털로 만든 송곳을 쓰겠소?" 왕장(王章, 삼사사)이 말하였다.
"털로 만든 송곳이 없다면 재부(財富)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소?" 이로부터 장군과 재상은 비로소 틈이 생겼다.

경자일(3일)에 곽위(郭威)가 출행하겠다고 말하면서 황제에게 말하였다. "태후는 먼저 돌아가신 황제를 좇으신 것이 오래 되어서 천하의 일을 많이 경험하셨고, 폐하께서는 춘추로 보면 건장하신 나이시니 어떤 일이 있으면 의당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이를 시행하십시오.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을 친하고 가까이 하고,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을 내쫓고 멀리하며 선한 것과 악한 것 사이에서 마땅히 밝게 살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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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歐陽修)가 논평하였습니다. "옛날부터 어지럽고 망하는 나라에는 반드시 먼저 그 법제(法制)가 무너지며, 그런 다음에 혼란이 그를 좇았는데, 이는 형세가 그러한 것이니 오대 시절이 이러하였다. 백문가와 왕수은은 모두 한(漢, 오대 후한)의 대신이고, 주(周, 오대 후주) 태조는 한낱 추밀사의 두자(頭子)를 가지고 이를 바꾸어 놓는 것이 마치 수졸(戍卒)을 바꾸는 것과 같았다.
이때에 태조(太祖)는 아직은 임금이 되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한 일이 이와 같다는 것은 대개 습관이 되어 보통 일이 되었던 것이니 그러므로 백문가는 감히 어길 수가 없었고, 왕수은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이미 이렇게 처리하고 의심하지 않았으며, 한의 조정에서도 역시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으니, 어찌 기강(紀綱)이 파괴되어 혼란이 극도에 달하지 아니하였다면 여기에 이르렀겠는가? 이것으로 선(善)을 가지고 천하를 염려하는 자는 감히 작은 것에서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 항상 그러한 것이 조금씩 밀려드는 것을 막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곽위는 사졸들을 어루만지고 길러주면서 더불어 고락을 같이하며 조금이라고 공로를 세우면 번번이 그에게 상을 주고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으면 항상 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사병들은 똑똑하거나 못나거나 상관없이 진술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따뜻한 말씨로 이를 받아들였으며, 어기는 사람에게도 화를 내지 않고, 적은 허물은 책망하지 아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장졸(將卒)들은 모두 곽위에게 마음으로 귀부하였다.

무릇 용기에도 성쇠(盛衰)가 있고, 공격하는 데도 완급(緩急)이 있으며, 시기에도 될 때와 아닐 때가 있고, 일에서도 뒤에 할 것과 앞에 할 것이 있는데, 길게 포위망을 만들어서 그를 지키며, 나는 것과 기어 다니는 것들의 길을 끊어 놓는 것만 같지 못하다.

아끼는 장수인 이심(李審)은 새벽에 조금 술을 마셨는데, 곽위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너는 나의 장하(帳下)인데 제일 먼저 군율을 어겼으니 어떻게 여러 사람들을 가지런히 하겠는가?"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돌려 보였다.

무술일(27일)에 곽위가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에 도착하여 들어가서 알현하니, 황제는 그를 위로하고 금과 비단·의복과 옥대(玉帶)·안마(鞍馬)를 하사하니, 사양하며 말하였다.
"신이 명령을 받고서 1년이 되어서 겨우 한 개의 성에서 이겼을 뿐이니 무슨 공로가 있습니까! 또 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었지만, 무릇 경사(京師)를 진정시켜 편안하게 하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었으며 병사들로 하여금 먹는 것이 부족하지 않게 하셨는데, 모두 여러 대신들로 중앙에 있는 사람들의 힘이지 신이 어찌 감히 홀로 이러한 하사품을 받겠습니까? 청컨대 이것을 두루 상으로 주십시오."

논의하는 사람들은 생각하였다.
"곽위는 그가 세운 공로를 오로지하지 않고 미루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신의가 아름다우며, 국가의 작위는 한 사람이 공로를 세우자 천하에 널리 퍼졌으니 역시 남용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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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홍조의 사람됨은 침착하고 강하며 말수가 적었지만 무리를 어거하는 데는 엄하고 가지런하였고, 장교(將校)가 조금이라도 명령을 좇지 않으면 바로 때려 죽였으며, 사졸들이 지나가는 곳에서 민전(民田)을 범하거나 말을 나무에 매어 놓는 사람은 모두 목을 베었고, 군대 안에서는 숨을 죽였고 감히 명령을 범하지 못하였으니, 그런고로 가는 곳에서는 반드시 승리하였다.

애초에, 거란주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勃海, 수도는 용천부)에서 죽자, 술률태후가 추장과 제장을 죽였는데 무릇 수백 명이었다. 거란주 야율덕광이 다시 국경 밖에서 죽자 추장과 제장들은 곧 죽을 것이 두려워서 마침내 거란주 야율올욕을 받들어서 군사를 챙겨서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거란주는 중화의 풍속을 사모하여 진(晉)의 신하를 많이 채용하였지만 술과 여색 속에서 거칠어졌고 여러 추장들을 가볍게 보고 거만하게 대하니 이로부터 그 나라 사람들이 붙지 않고 여러 부(部)들은 자주 배반하자 군사를 일으켜서 죽이고 토벌하였는데, 그러므로 몇 년 동안은 남쪽으로 침구할 겨를이 없었다.

고종회가 뒤를 잇게 되자 당(唐)·진(晉)·거란·한(漢)이 다시 중원을 점거하였고, 남한(南漢)·민(?)·오(吳)·촉(蜀)은 모두 칭제(稱帝)하였는데, 고종회는 그들이 사여(賜與)하는 것을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향하여 칭신(稱臣)하였다. 여러 나라들이 이를 천(賤)하게 생각하여 ‘고무뢰(高無賴)’
라고 불렀다.

무술일(17일)에 황제는 업도의 성 아래에 도착하여 고행주의 영채(營寨)에 묵었다. 고행주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성 안에는 식량이 아직은 다하지 않았으니 급히 공격한다면 다만 사졸들만을 죽이고 아직은 쉽게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늦추어서 저들의 식량이 다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황제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한의 고조는 유주(幽州)의 죄 없는 백성 1천500명을 죽였으니 어진 것이 아니었는데, 장련을 유인하여 이를 죽였으니 신의가 아니고, 두중위의 죄는 큰데 그를 사면하였으니 형벌이 아닙니다. 어짊으로써 무리들에게 합쳐지고, 믿음으로써 명령이 시행되며 형벌로써 간사한 사람을 징치(懲治)하는 것인데, 이 세 가지를 잃고서 어찌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그 복을 주는 운이 길어지지 않는 것은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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