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은 출판사였다. 지금도 출판사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편집자로 일하는 지금과 그때는 업무가 크게 달랐다. 그 시절에는 회사의 마케팅/홍보부에서 책을 광고하는 일, 그러니까 책에 관한 카피를 쓰거나, 홍보자료 작성 등을 주로 했다. 그렇기에 그때의 나는 편집의 ‘편’자도 알지 못했다. 신간이 나오면 그 책을 홍보하기 위해서 그 책을 가장 잘 아는 사람, 그러니까 편집자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나는 이 부서, 저 부서를 다니면서 편집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종종 있었다. 출판사 자체도 워낙 조용했지만, 편집실은 이 부서든, 저 부서든 일하는 사람들의 숨소리만 들릴 뿐, 거의 정적만이 감도는 그런 환경이었다. 상대적으로 내가 속한 마케팅팀이나, 디자인팀은 ‘편집’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기에 그랬겠지만, 회사 내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시끄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갓 입사한 신입 사원. 이십 대 중반의 내가 편집실을 드나들 때면 그 무거운 공기가 암울하게 다가올 때가 많았다. 편집자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서 30대 이상이었고,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물처럼 담백하고 조용했다. 다들 공부만 열심히 한 모범생들 같았달까. 세월이 흘러 내가 이제 편집자로 근무하고 있으니, 현재 우리 회사의 마케팅 부서 사람이 나를 보면 그런 느낌이 들까? 아무튼, 나는 그때 그 편집실이, 무겁고 조용하고, 변화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은 책과 원고로 둘러싸인 그 성벽, 요새 같은 공간이 그저 답답하고 벗어나고만 싶었다. 다들 여기서 어떻게 몇십 년, 몇 년씩 일하는 걸까? 심지어 대학원을 가거나 유학을 떠나느라 퇴사를 했다가도 왜 다시, 하필이면 이곳으로 돌아오는 걸까? 서른, 마흔이 넘은 사람들에게는 이 변화 없이 정체된 공간이 안락한 것일까? 의아하기만 했다. 딱 3년, 경력 3년만 채우고 떠나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그때 나와 같은 시기에 입사했던 동기도 꼭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답답해서 이런 곳에 어떻게 저렇게 오래 있을까요?” “그러니까요, 여길 나갔다가 다시 오는 사람들이 더 이상해요.” “우리 3년만 버텨요!”
그리고 나와 그 동기는 딱 3년을 채우고 둘 다 신이 나서 이직했다. 책으로 둘러싸인 그 요새 같은 공간을 다시 그리워할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그곳을 떠났다. 친하게 지낸 동기였기에 각자 다른 회사를 가서도 오랜 시간 연락을 하고 지냈다. 때로는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우리는 둘 다 원하던 곳으로, 더 역동적이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른바 더 ‘비전’ 있어 보이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는데도 마음속에서는 그때 그 요새 같던 공간이, 모든 게 느릿느릿 흐르고, 오늘도 내일도 아무런 변화도 없어 보이는 그 공간이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거였다. 그즈음 나는 몇몇 광고 회사를 전전했는데, 광고업은 철저히 ‘을’의 자리에 위치하는 서비스업이었기에 광고주의 요구가 있으면 야근도 휴일도 모두 반납해야 하는 시스템에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어 심신이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출판사와 광고 회사라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는 내가 좀 더 나은 상황에서 일하고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출판사는 언제나(!) ‘사양길’에 접어든 직종이었기 때문이다.
몇 년 후에 그 첫 직장에서 나에게 재입사를 제안해왔고, 내 동기는 그때쯤 이미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계약직 형태로 그 회사와 일하고 있었다. 나는 몹시 갈등했다. 야근도 없고, 을의 위치에서 항상 대기 중인 삶도 없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까? 거기가 참 편하긴 하지…. 그러다 보니 문득 서른, 마흔 넘어서도 그곳에서 계속 머물고 있던 사람들, 그곳을 떠나서 좀 더 나은 경력을 쌓고서도 다시 그 회사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너무나 안정적이고 조용하고 변화가 없어서 지리멸렬해 보이는 그곳, 그러나 거기에서도 사람들은 무언가 자기만의 루틴을 만들고, 루틴이 만들어낸 조그만 변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좀 더 나아질 무언가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세월을, 인생을 보내고 있던 것이다. 나는 다시 그 회사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 이후로 몇몇 광고 회사에서 힘겨운 일을 할 때면 돌아가지 않은 내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다시 출판사에서, 이제는 책과 원고에 둘러싸여 편집자로 근무하고 있으니 어쩌면 나는 그 요새로 돌아간 것인지도 모르겠다.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을 읽노라니 문득 그때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첫 직장에 입사했듯이 ‘조반니 드로고’는 군사학교를 막 졸업하고는 넓은 평원을 마주한 북부 국경지대의 바스티아니 요새로 파견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드로고는 자신이 직접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요새에 배속된 것이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이 요새는 죽은 국경선에 위치하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아, 더 이상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름대로 명성이 있었지만, 이제는 형벌, 또는 유배지와 가깝다. 그 앞에는 큰 사막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타타르인의 사막이라고 부른다. 고대에는 타타르족이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전설에 불과하다. 그곳에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과거에 일어난 전쟁 중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타타르인의 사막이라 부르는 것일까?
드로고는 궁금하다. 과연 저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거주하기 힘들어 보이는 저 건물과 흉벽, 포대와 탄약고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아무도 지나쳐간 흔적이 없다는 돌투성이 사막의 북쪽 왕국은 어떠할까? 요새의 높이 정도라면 몇몇 마을이나 초원, 하다못해 집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아니면 오직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의 황량함뿐일까? 성벽의 음울함, 형벌과 유배가 뒤섞인 모호한 분위기, 낯설고 부조리한 사람들, 철저히 혼자라는 고립감 속에 드로고는 암담해진다. 안정된 주둔지와 편안한 집, 늘 곁에 있던 밝고 유쾌한 친구들, 사관학교 야간 정원에서 감행했던 소소한 모험들로 이뤄진 평온한 체험들 속에서 의기양양했던 그의 자신감은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의무만이 강요되는 세계, 엄격한 규율만이 남아 어떤 영광도 찾아볼 수 없는 세계에서 벗어날 기회만을 노린다. “나는 여기 임시로 있는 거다. 언제고 떠날 날을 기다린다.” 다짐한다. 게다가 누군가는 그에게 경고한다. “조심하십시오. 갓 부임하셨으니 시간이 있을 때 가능하면 빨리 떠나십시오. 그들의 광기에 물들면 안 됩니다.” 이런 말까지 들었으니 그가 이 요새에 머물 턱이 없다. 그는 다짐한다. 딱 4개월, 4개월만 채우고 이곳을 벗어나자. 드로고는 과연 그 요새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인생은 참으로 오묘하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그 요새에 애정이 생긴다. 드로고 그의 내면에 이미 무감각하게 길든 습관들, 군인으로서의 다소 과한 자부심과 이제 일상이 된 성벽을 향한 가족 같은 애정이 자리 잡는다. 게다가 단조로운 리듬으로 이어진 군 복무는 넉 달 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유혹하고도 남는다. 처음에는 견디기 힘든 고역 같았던 수비교대 근무도 어느새 그에게는 습관이 된다. 더욱이 그에게는 희망이, ‘고귀하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예감’이 싹튼다. 저 너머, 타타르인의 사막으로부터 무언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적이 쳐들어와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그러면 그때 이 요새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할 것이고, 이곳을 지키는 자신과 다른 병사들은 틀림없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리라……. 이런 희망과 기대감이 그를 이곳에 머무르게 한다. 분명, 도시의 문명사회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그는 선뜻 떠나지 못한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요새에서 오지 않을 적을 기다리며,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드로고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마의 산’의 요양원 베르크호프를 결코 내려가지 못하는 ‘한스 토카르프’처럼 요새를 떠나지 못한다. 조반니 드로고, 그의 삶은 과연 어떻게 흘러갈까?
<타타르인의 사막>은 평생에 걸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적군을 기다리며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군대의 일상과 황량한 사막, 그 경계지대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은 지평선 너머에서 언젠가 진군해 올 적을 기다리며 생을 버텨나간다. 이 불확실한 기다림과 습관처럼 반복되는 군 생활 사이에서 드로고는 조금씩 늙고 병들어간다. 늙고 병들어서는 ‘삶에 치유에 대한 희망’이라는 추가 기대사항이 생겨 기쁘게 받아들인다. 한때 간직했던 희망과 전쟁에 관한 환상, 북쪽에서 내려올 적에 대한 기대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또렷이 드러난 지금에도 그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그의 오랜 기다림이, 희망이 이루어지려는 찰나, 그의 생은 뜻하지 않은 흐름으로 드로고를 이끌어간다. 요새에 온 것도, 떠나고 싶지 않은 순간 요새를 떠나야 하는 것도 모두 드로고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 오랜 세월을 기다리며 살아간 나날들은 분명 드로고 자신의 선택이며 그의 삶이었다. 그의 희망이, 꿈이, 기대가, 소망이,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생 전체가 헛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지 않을 적, 결코 손에 잡히지 않을 그 무언가를 기다리며 오늘도 묵묵히 시간을, 생의 흐름을 보내고 있을 우리, 인간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