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회복제를 먹고 허리에 파스를 붙인 다음에야 기력을 좀 차리고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기사들을 둘러보는데(정작 해야 할일은 이런 게 아니지만), 딱 내 얘기다 싶은 기사가 눈에 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의 '문화비평'이 그것인데, 제목이 얄궂게도 '책을 처분하면서'이다. 제목에 잠시 '놀라실' 분들도 있을까봐('반가워할' 분들일까?) '인문학자의 딸들을 위하여'로 바꾸었다(인용문의 문단들도 다시 조정했다).
실상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겪고 있는 '고초' 또한 '책을 처분하면서'의 소회와 진배없다. 때문에 아래의 '비평'은 '딸아이를 위해서' 지난 겨울 한 차례 책을 처분하고(정확하게는 '위탁하고') 이번에 또 한번 책정리를 하느라 허리에 파스 한 통을 다 붙여가고 있는 처지에서 십분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해서 옮겨온 글이지만 '방주'가 아닌 '창고'에 넣어둔다.
교수신문(06. 09. 30) 책을 처분하면서
대개의 인문학자들에게 이사는 그 동안 엄청나게 늘어난 책을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고민을 동반할 것이다. 늘 그렇듯이 공간은 협소한데, 책은 많다. 8년 여만에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나도 내년이면 8년을 채우게 되지만 이사를 꿈꾸기는 어렵다!) 고민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역시 책 보관문제였다. 지금 집에 있는 세 개의 방 중에서 두 개의 방은 그야말로 책 보관소였다(*내 말이 그말이다). 이 방들의 거의 모든 책꽂이는 이미 책이 가득 꽂혀진 공간에 다시 세로로 포개서 보관하는 방식으로 책이 이중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마디로 책 수용의 임계에 도달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할 집의 크기는 같은데 그 중의 방 하나를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사정에 있다(*아으, 인문학자의 딸들이여!). 연구실 역시 책으로 완전히 포화상태이니, 결론은 현재 집에 있는 책의 약 30% 정도를 그게 기부가 되었건 양도가 되었건 어떤 방식으로든지 처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날 수밖에 없었다(*아래는 나이가 턱에 차서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우리집 딸내미이다).
요 며칠 동안 바로 그 30%에 해당하는 책을 따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책들을 판별하는 기준은 앞으로 내가 평생 동안 볼 가능성의 여부와 그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기준은 대개 비슷한 듯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가'란 기준은 나의 경우에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다 보니, 우선적으로 철지난 잡지와 문예지가 그 30%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소설책과 시집도 이러한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다(그 책의 저자들에게 마음 깊이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인문사회과학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에 출판된 무수한 인문사회과학도서였다. 여러 가지 형태의 철학서, 사회과학이론 책들, 사회구성체 논쟁을 다룬 책들, 리얼리즘 관계 이론서들 등등.
아마도 이 책들의 상당수는 내 평생에 다시 볼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어떤 방식이로든지 이 책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이런 책들을 나는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는 않지만, 갖고 있더라고 권교수와는 다르게 바로 '처분'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들에서 쉽게 대출할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을 가능케 한 것이 그 책들에 내 젊음의 방황과 모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는 실존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으로 이제 그 책들을 커다란 도서관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정황이 이러한 선택을 유도한 결정적인 계기였다가령 당시 비평가로서의 삶을 모색하고 있던 내 문학 공부에 많은 지침과 암시를 주기도 했던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현준만 역, 이삭, 1984) 같은 책은 이제 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내 주변의 도서관은 '커다란 도서관'에 속하는 듯하다.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등도 원서와 함께 소장돼 있다).
물론 80년대에 출간된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과학 도서들이 지금 현재도 유효한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겠다. 철지난 급진이론이라는 생각도 가능하겠고, 여전히 우리 현실을 읽는데 소중한 참조가 된다는 관점도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 여하를 떠나 내가 이 에세이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책들을 불과 20여년 후에 구하기 힘든 우리의 경박한 인문적 풍토에 있다.
두루 알다시피 80년대는 혁명과 정치의 시대였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무수한 영세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출간된 다양한 인문사회과학도서들을 생각해 본다. 그 책들은 각각이 지닌 세계관의 한계까지도 포함해서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었다. 가끔은 그 시절이 한국현대사에서 인문학의 진정한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 책들을 모두 양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그 책들을 구하기가 너무나도 힘든 이 시대의 현실이 반인문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인문학을 살리는 길은 거창한 선언이나 ‘인문학 주간’ 같은 일회성 행사로 결코 가능할 수 없다. 한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기억하는가의 문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소중한 책들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의 확보가 인문학을 위해서 더욱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러니까 굳이 '개인 도서관'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공공도서관이 장서수나 편의성에서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기 위해 책들을 처분해야 하는 '서민' 인문학자들의 비애는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딸에게 방을 따로 내주고도 책 보관을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권성우/ 숙명여대·국문학)
06. 10. 15.
P.S. 대학교수의 처지에서도 그런 고민을 한다면 무슨 '통뼈'가 아닌 강사들의 처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아래는 지난봄 엄마 생일때 딸아이가 내게 전달해달라고 했던(그러니까 아빠는 '우체국아저씨'였다) 축하편지인데, 지난 여름 내 생일 때 아이는 달랑 '아빠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라고만 쓴 쪽지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언어학의 기본 상식을 갖고 있다면 이 두 메시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형식(여기서는 '분량')이다. 딸아이의 '아빠사랑'은 '엄마사랑'의 발치 정도인 것.
다음주면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고가로 구입한 가구들이 딸아이방에 들어오고 우리는 작은 파티를 해줄 예정이다. 그럼 지난 두달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것. 여하튼 책들을 '고아원'에 '처분'하고 또 정리하면서 내가 갖는 바람은 다른 게 아니다. 고작해야 내년엔 좀더 긴 편지를 딸아이에게 받는 것 정도. "아빠가 없으면 저도 없겠죠." 정도의 구절은 포함된 편지로 말이다(요즘 세상에 누가 '인문학자'를 따로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